설정 표절도 표절이다

언젠가 꼭 한번 해야지 했던 이야기를 오늘 해볼까 한다. 이 블로그를 팠던 이유기도 하지만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문제고 이를 언급 했다는 것만으로 싫어할 사람도 많은 주제인 만큼 분명 이로 인해 날 싫어할 사람이 늘겠지만... 인생은 자신이 듣기 좋고 보기 좋은 걸로만 채울 수 없으니 알아서 받아들이겠거니 하고 쓴다.

설정 표절을 얘기하려면 먼저 저작권법에 대한 최저선의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 어려운 수준까지는 아니니 안심하자. 애초 저작권법 자체가 생긴지 20년 밖에 안 된 법이고 그 이후 큰 맥락은 바뀌질 않았으며, 실제 판례들은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현행법이라는데 의의를 두고 설명해보겠다.

판타지라고 하면 흔하게 떠올리는 세계관이 있다. 마법과 검, 대충 중세풍의 모습, 드워프와 엘프, 드래곤. 이 세계관을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건 JRR 톨킨이다. 톨킨의 작품인 호빗과 반지의 제왕이 히트를 치면서 이 영향을 받은 후발 주자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 중 대표적인 게 이른 바 우리가 창작물에서 흔하게 접하게 되는 드래곤의 원형인 던전 앤 드래곤스(D&D, DnD, 던드 등으로도 부른다)가 있다. 초기 한국의 장르 소설들이 이 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거다. 

자, 여기서 상식. 저작권은 저작권자의 사망 70년이 지나면 완전히 소멸된다. 톨킨이 1970년대에 죽었으니 저작권이 사라지려면 최소 2040년은 지나야한다. 그럼 이 살아있는 저작권은 어디로 가 있느냐? 톨킨 재단에게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톨킨 재단은 저작권자로써 이 권리를 휘두른 적이 있다. D&D가 톨킨 영향을 찐하게 받다보니 톨킨 세계관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다들 아 그렇군, 할 텐데 이 침해의 양상이라는 걸 잘 들여다보게 되면 어떨까.

톨킨 재단 측이 문제 삼은 건 D&D가 룰 북, 즉 출판물로 이득을 보면서 톨킨 세계관에서 기인한 고유명사들을 썼단 거다. 미스릴, 호빗, 발록 등등 톨킨의 세계관에서 기인한 몇몇 고유명사가 있는데 이를 룰북에 그대로 옮겨다 적었던 것이다.(엘프, 드래곤, 오크, 드워프 등은 문제가 안 된다. 왜냐면 세계 각지에 어느 정도 퍼져있는 신화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오리지널리티를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게 왜 문제인가를 이해 못할 사람이 분명 있을 텐데... 저작권법이 가지는 한계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법은 보수적이다. 이는 저작권법 또한 예외일 수 없고 그 배경에는 나름 어느 정도는 합당한 논거가 있다. 서두를 왜 이렇게 길게 늘어놓느냐면 극단적으로 말해 저작권법은 '아이디어'를 보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세계관 같이 독특한 지적 창작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소송을 건 이런 경우 고유명사를 기준으로 따지게 된다. 진짜다.

소송의 결과 D&D 측이 패소했다. 그래서 D&D가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했을까? 이름을 한 글자만 바꿨다. 농담이면 좋겠는데 진짜다. 발록이 발락, 미스릴이 미스랄이었던가... 다 비슷한 이름이라 들으면 그거 XX가 원형 아님? 하게 말하게 될 단어인데 이렇게 대충 바꾼 상태로 룰 북을 출판했다. 놀랍지 않은가? 현실이 이렇다. 해외에서 있었던 일이니 배상금이야 당연히 물었겠지만 어쨌든 도둑질해간 타인의 아이디어를 아주 약간만 가공해서 파는 거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걸 산다.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이유로. 

지금 세태를 보면 가능성 자체는 낮은 이야기지만 어느 날 톨킨 재단이 미스릴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모든 종류의 창작물에 권리를 주장하게 되면 우리는 미스릴이란 단어의 갖은 바리에이션을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몰라서 그냥 쓰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그로 인해 금전적 이득을 보면 엄연한 저작권 침해다.

결론부터 말해서, 설정 표절도 엄연한 표절이지만 저작권자가 피곤해서 이런 난립한 저작권 침해를 그냥 봐주고 있을 뿐이다. 이건 호의지 권리는 아니다. 원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있으면 모를까 어차피 다 그런 바닥이라며 매도하며 저작권 침해를 기꺼이 자행해선 곤란하다. 요즘엔 이런 인식조차도 드물지만 원론적으로 따지면 그렇다.

이런 발언을 하는데 망설임이 없는 이유는 톨킨과 D&D를 한국의 장르 소설 시장에서는 이 세계관을 '클리셰'가 될 지경까지 저작권을 침해해가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딱히 한국만의 얘기는 아니긴 하다. 외국의 경우 DnD보단 톨킨의 영향이 더 크긴 한데... 여하튼 한국의 경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게임 기반 시스템으로 발전해나가며 D&D의 영향이 옅어지기는 했는데(ex:1~9레벨 마법 시스템과 매직 미사일, 파이어볼 등의 똑같은 스킬 명들, 용의 색에 따른 성격과 브레스 설정 등등) 설정 표절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건 여전히 심각하다. 

아니, 오히려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를 표절하는 양상'이 더 악질적으로 발달한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다. 이를 테면 모 드라마 작가가 스타 출연진을 데리고 찍은 드라마가 BL 팬픽의 표절작으로 의심되는 '장르 세탁'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공모전의 심사위원이 무명 작가의 작품을 훔치는 건 이제와 특별할 것 없으며 그 말고도 이 소설과 저 소설의 스토리 라인이 똑같고 작품 내의 독특한 세부 설정마저도 일치하는데 클리셰란 명목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양 구는 경우도 그렇다.

솔직히 말해보자. 이런 일들을 대부분은 권리를 일부 사는 걸로 깔끔하게 해결된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나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등은 원전 만화의 판권을 샀지만 실제 창작물을 비교하면 아이디어만을 채택했을 뿐이지 놀라울 정도로 세련된 재해석이나 다름 없다. 안 사도 됐을 걸 부러 산 셈이다. 물론 영화판처럼 거액의 투자가 뒤따르는 시장과 장르 소설 시장을 비교하는 건 안 된다고 누군가는 주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묻고 싶다. 그런 변명을 하기에는 소설 같은 어문저작물의 표절 판단의 법리 자체가 지나치게 편향되어있지 않은가. 한국의 저작권법 상 어문 저작물의 표절 판단은 문장의 유사성이다. 소설 내에 독창성을 가지고 있으나 같은 문장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단 소리다. 

이 말을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겨울이 지나 봄이 왔다.' 같이 창작성이 떨어지는 문장이 아니라, 작가의 독창성이 드러나야 하는 문장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형도의 시로 예를 들면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나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같은 문장 말이다. 이렇듯 제법 빡빡하다. 만약 표절 작가의 문장력이 좋은 편이라면 더 뛰어난 방식으로 표현해 피해가는 것도 가능하다. 애초에 아이디어는 거의 보호가 안 되기 때문에 특정 캐릭터 구도 안의 상호작용에서 기인한 스토리 라인을 표절하는 건 이런 방식으로는 정말 잡기 힘들다. 물론 해외에서야 아이디어로 인한 저작권을 일부 인정한 루부탱의 소송 같은 예도 있는데... 어쨌든 국내는 그렇다.

이런 예를 들어볼까 한다. 신데렐라 스토리에 기인한 소설 A가 있다고 해보자. 주인공이 별 것 아닌 존재로 구박 받으며 살다가 어느 날 왕자님을 만나 대충 잘 살며 연애하다 결혼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 소설과 매우 유사한 소설 B가 나왔다. A의 작가는 쉽게 표절 소송을 낼 수 있을까? 답은 당연히 '아니오.'다. 애초 이런 신데렐라 스토리는 그 역사가 너덜너덜할 정도로 길고 아이디어 자체도 지나치게 낡았다. 

그런데 여기서 소설 A가 독창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다면 조금 다르게 생각될 수도 있다. A의 작가가 SF를 접목해 소설의 기본 골자는 신데렐라 스토리지만 구조적으로 강조하는 게 '태어난 인간의 유전자 풀을 감식해 잠재성으로 등급을 나누고 차별하는 세상에서 계기화 되지 않는 인간으로써의 감정적 교류의 가치'라서 이야기에 특이한 구도가 형성되고 이를 성립시키기 위한 세세한 설정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소설 B는 이 SF스러운 설정 부분을 마법으로만 바꾼 구조고 소설의 주제로 강조하는 지점과 연출이 같다면 표절이 의심될 거다.

그래도 A의 작가는 쉽게 표절 소송을 걸지 못할 거다. 한국의 경우 저작권 침해죄는 기본적으로 친고죄다. 당사자가 고발하지 않으면 표절 소송이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게다가 공소시효는 '범인을 인지하게 된 날로부터 6개월'이라 시일이 지나면 소송조차 불가능하고 한번 고소를 취하하면 다신 못 한다. 법원에서 이 둘의 유사성을 판단하기 위해 문장 단위로 작품을 분석해야하는데 법무법인을 낀다 해도 그로 인해 소모되는 심력은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저작권법은 보통 민사소송인데 최악의 경우 패소한다면 상대의 변호사 비용까지 내야하는데서 오는 위험부담도 크며 기본적으로 소송에 소모되는 시일은 최소 몇 개월, 기본 년 단위로 소모되니 길다. 작가에 따라 다르지만 거진 매일 연재하는 작가도 있는 마당에 시간은 시간대로 들이지만 배상을 받아내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누가 그렇게 쉽게 소송을 걸겠는가. 

이런 구조로 인해 성장 가능성이 높은 초보 작가들을 저작권 침해죄로부터 보호하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어느 정도 작가로써의 생활을 오래 영유했지만 더는 자신의 독창적인 창작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작가가 남의 것을 훔쳐 제 것인양 구는 걸 막기 어렵단 거다. 신경숙도 표절이라 말이 한참 나왔지만 피표절작의 저작권자가 사망한지 오래인 외국인이라 소송은 피했고 덕분에 법률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아직도 일부 문단에선 씹히긴 하지만 그게 다다. 신경숙을 옹호하는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니.

장르 소설 시장이 이렇게 설정 표절과 일부 표절이 판치게 된 데에는 엄연한 구조적 요인이 존재한다고 본다. 남들은 다 법 안 지키는데 자신만 지키고 있으면 바보 취급 받는 거랑 비슷한 맥락에서 표절 자체에 거리낌 없이 구는 작가들이 생길 법도 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오마쥬라는 게 존재한다. 특정 작가의 특정 창작물에 감명 받았으면 원작자에게 정중하게 부탁한 뒤 허락을 받고 후기가 됐든 본편이 됐든 원작의 존재를 언급하며 헌사를 바치는 것만으로 이 부분을 문제 삼고 싶은 작가와 아닌 작가를 구별해보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도 않는 게 정말 당연한 걸까? 

너무나도 잘 발달한 오마쥬는 표절이나 다름 없다는 문제도 있지만 어쨌거나 원작에 대한 존중과 권리를 잊지 않으려는 태도가 아예 전무한 상태에서 너도 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표절하는 게 더 문제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표절 소송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닌 나라에서는 더욱. 이를 잘 아니까 베른 협약에도 가입했으면서 배짱 부리듯 타국의 창작물을, 유난히 디자인을 손쉽게 베껴와 써먹는 나라인 만큼 어디에서도 최소한의 존중조차 찾기 힘들다. 

이해는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으니 어쩌면 정말 우연이 겹쳐 유사한 창작물을 내놓게 된 작가도 있을 거다. 설정 표절을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니 소송까지 가지 않고 대충 개인의 양심이 판단할 일이라 정리될 것도 안다. 하지만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두 장르 소설 작가의 대표작인 마시는 새 시리즈와 룬의 아이들 시리즈에서 세계관이나 서사 구조를 베끼는 상업 작가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이게 편집부에서 열심히 일한 탓인지, 일말의 양심이 잘 일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추후에 생긴다면 정말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건 표절이 아니라 오마쥬야, 비록 원작자가 누군지는 어디에도 안 썼지만 다들 알잖아. 알지? 알지?'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저 두 작가의 작품을 읽은 향유자들이 살아있을 때나 가능한 얘기다. 결국 설정 표절은 그런 문제다.

표절은 작가의 독창성의 문제에 불과하다. 표절 작가가 좋은 작가일 수 없다. 새로운 발상을 하고 짜임새가 좋은 세계관을 만드는 게 왜 쉬운 일이겠는가. 어려운 거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뭐 하나 기발한 거 뜨면 그걸 베끼고 베끼고 베껴서 열화카피 버전으로 하나의 시류를 만들어내는 장르 소설 시장에 어쩌면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표절작도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말에 내재된 장르 소설에 대한 폄하를 무시하기에는 장르 소설이 가진 가능성과 애정이 크다. 좀 적당히 해먹자. 표절은 그저 표절이다.

사족 1. 이영도 작가의 초기작 드래곤 라자의 경우 DnD의 저작권을 확실히 침해했고 이 부분을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해온 사람들이 있어 이후 개정판을 낼 때는 관련 부분을 수정했다. 설정 표절이 문제가 안 된다면 개정할 필요가 있었을까? 해외 사례도 모자라 국내 사례까지 있으니 설정 표절이 아무 문제 없다고 우기지는 말자. 누군가의 문제 제기에 작가의 팬들은 아니야! 아니라고! 내 작가님은 일단 아니라고!! 를 외치며 지나치게 옹호해서 더 눈살 찌푸려지게 되는 경우도 흔하다. 이영도의 DnD 저작권 침해 때라고 팬들의 문제 없다는 아우성이 왜 없었겠는가. 이런 형태로나마 정리된 게 다행일 지경이다.

사족 2. 개인적으로는 설정 표절보다는 일부 표절이 더 악질적이라고 본다. 요리 경연 대회에서 같은 재료로 요리한 요리사 둘에게서 비슷한 음식이 나온다면 느껴질 실망감과 유사하다. 특히나 후발주자로 요리한 사람에게 시간적 이득이 있었다면 고운 눈으로 보기 힘들어지는 법 아니겠는가.

사족 3. 가끔 패러디 작품을 표절이라 모는 사람을 보는데... 분명 고등학교 언어시간에도 배웠을 터인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패러디는 특색을 살린 채 모방을 하여, 풍자한다는 특성이 있다. '풍자'가 표절이면 정치 풍자 코메디는 뭐란 말인가? 정치인에 대한 명예훼손 쑈? 이 주장 자체가 블랙 코미디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