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연성 없는 해피엔딩이 싫다

주말 내 탐독하다 욱 하고 치받혀서 쓰게 됐다. 급발진 하는 모습은 그 때문인 셈 쳐달라.

개연성 없는 해피엔딩이 싫다. 출판 업계에서 일하는 분들은 하나 같이 무조건 해피 엔딩이어야한다고 아마추어 작가들이든 프로 작가들이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하는데 왜 개연성 얘기는 안 하는지... 는 대충 알고 있다. 웹소설에서 대리만족을 원하는 독자층이 확고하게 있다보니 그리 말 하는 것도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여기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를 내도 이미 소설이 완결이라 더이상 독자가 안 살 리스크가 없으니 더 질에 신경 안 쓰는 것 같아서 더 싫다. 하지만 대여점 시절에 시놉시스의 엔딩이 정해지고 나면서부터 다른 걸 바라던 독자층이 우수수 떨어져나간 걸 잊지 말아줬으면 싶다.

해피엔딩이랍시고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에서 결혼 임신 출산 육아 세트가 외전으로 나오면 더 싫다. 작 중의 주인공이 얼마나 진취적인 여성이었든 간에 여성의 행복은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통해 일종의 '정상성'을 확보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것처럼 다뤄지는 게 싫다. 

이미 IMF 이후부터 서서히 비율이 증가해 맞벌이 부부가 요즘엔 흔해졌는데도 달라진 육아의 방식이 잘 안 보이는 것도 피곤하게 느껴진다. 아이의 정서 발달에 양육자의 존재가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정서 발달을 하기 위해 꼭 일을 포기하고 24시간 붙어있어줘야할 필요는 없다. 보호자가 일 때문에 장시간 부재하더라도 같이 있는 몇 시간 동안이라도 제대로 대화를 하고 교감을 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더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이해하는 문제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해피엔딩이라고 해도 개연성이 없으면 싫다. 해피엔딩이 아닌 엔딩을 개연성 있게 쓰는 건 상당한 스킬을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편집자 입장에서야 일단 해피엔딩을 목표로 두라고 권하는 게 여러 의미에서 편한 걸 누가 모르는가. 대중은 소설에서 상당한 개연성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결말에 있어서는 해피엔딩이기만 하면 된다고 개연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요즘엔 그런 경향 수준을 넘어서 이른바 '현실도피를 원해서 웹소설을 읽는 거지 뭘 그렇게 따지냐', '머리 비우려고 읽는 거다'라고 하는 독자층이 있는 것도 안다. 이들의 존재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장르소설은 이미 2세대부터 대리만족을 팔아먹었으니 확고한 층으로 생길 만도 하다. 하지만 과대표 된 그들의 요구를 전부 다 들어줘야 하나? 컨텐츠 업계는 기본적으로 바리에이션이 다양하게 있어야지 안 망한다.

주인공이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겪어야했던 역경과 고난이 모두 끝나고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대충 정리되는 결말이 해피엔딩의 정의라고 치자. 하지만 이 정의 자체가 궁극적인 철학에서부터 도망칠 수 없다. 행복의 정의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안나 카레리나를 인용해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고들 하지만(민음사, 연진희 번) 행복의 정의는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속한 계급과 겪어온 세상이 다르니 자연스럽게 행복의 정의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집이 없어 이사를 반복하며 살던 사람에게 온전한 자신의 집을 장만하게 되어 마지막 이사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은 그간 느꼈던 불편만큼이나 큰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집이 있어 이사를 기본적으로 많이 하지 않고 살던 사람에게 이런 게 와닿을 리 있을까.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겐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겨 집단괴롭힘을 당하게 된다거나 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새로운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기존 인간관계가 종료되는데서 큰 행복을 느낄 테다.

고로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해피엔딩이 정말로 '행복해진 주인공의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인생의 굴곡과 사상이 반영되어있는, 주인공 나름의 행복의 정의가 드러나는 결말이어야만 작품의 완성도가 올라가게 된다. 모험물은 기본적으로 그렇다.

때문에 소위 '꽉 닫힌 해피엔딩'이랍시고 여성 주인공 소설의 완결 후 외전이 결혼 임신 출산 육아가 되어버리면 나쁜 의미로 환장해버리는 게, 이건 명백한 로맨스의 영향이기 때문이다.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남성이 주인공인 모험물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고 행복해졌답시고 가정을 꾸리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세한 과정을 다루지 않는다. 물론 이게 기본적으로 붙는 성공의 스테이터스라 그런 것도 있지만, 남성은 기본적으로 돌봄노동을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지 않기도 해서 그렇게 된 거지만! 그렇다고 여성에게 주어진 돌봄노동이 당연하단 말인가? 정말로 가정을 꾸림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필수적으로 묘사되는 거라면 돌봄노동의 역할을 나누거나 아예 넘겨버리지 못할 건 뭐란 말인가. 돌봄노동이 얼마나 힘든지는 이젠 모두가 다 아는데.

무엇보다 이런 개연성도 없고 진부하기까지 한 해피엔딩을 출판사 측에서 작가에게 그렇게까지 권장해야하는지 자체가 의문이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스트레스가 심할 때면 BL로 넘어가서 주인공이 자신의 인생을 제손으로 뒤지게 말아먹다가 뒤늦게 정신차리는, 로맨스 서사가 강한 소설들을 읽어댄다. 이럴 때 소설의 엔딩이 해피엔딩이 아닌 쪽을 절대적으로 선호하는데 내 경우 이런 다른 엔딩의 소설을 읽는 건 북유럽에서 범죄소설이 잘 팔리는 이유와 비슷하다. 현실의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을 가상의 인물이 겪으며 고통스러워 하는 걸 보며 내가 저보다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 받는데서 오는 길티플래져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 때문에(전부는 아니다. 전부는) 지겨울 정도로 많은 신파와 막장들이 먹힌다지만 이게 또 나쁘기만 한 건 절대 아니다. 

카타르시스는 여러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런 식으로 자기확인을 하며 반대로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고 현실에서 직접 경험하기엔 너무 위험한 종류를 대리경험하기도 하며 자신보다 더 심각하거나 비슷한 상황에 이입해 감정을 분출하는 걸로도 느낄 수 있다. 여러가지 이유로 그 상황, 그 자리에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데는 제한이 발생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다 발산되지 못하고 뭉친 감정을 소설이나 미디어를 보며 해소하는 건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해피엔딩으로 이 모든 감정 해소가 절대 이뤄질 수도 없고, 이런 식으로 시놉시스의 결말이 고정되어버리면 굳이 끝까지 읽어야할 필요가 없단 얘기가 된다는 점을 출판사 쪽에선 생각을 왜 안 해보는지 모르겠다.

요즘 개인적으로 이런 개연성이 부족한 해피엔딩과 외전들에 진력이 나있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 독자들이 대리만족을 굉장히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대리만족형 픽션이 많다 보니 이런 개연성이 있는 엔딩은 생각보다 굉장히 적다.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읽고는 있지만 완결을 읽고 나서 동시에 진한 현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다... 이게 정말 주인공에게 최선이었는가 하는 현타를 말이다.

독자는 작가의 생각보다 훨씬 소설 내에서의 개연성을 요구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이유도 논리도 없곤 한 게 현실이다보니 현실도피로 선택하는 소설 내에서라도 명확한 인과관계 같은 걸 바라게 된단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주인공은 행복해져야만 하고, 작가는 캐릭터의 입장에 서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보단 으레 사회에서 피상적으로 요구되는 이미지를 충족시키는 걸로 이 행복과 성공에 대한 관념을 그렇게 확대재생산 한다.

그러니 개연성 없는 해피엔딩이 싫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캐릭터가 소설을 읽으며 쌓아온 서사랑 별 상관 없는, '피상적인 성공상'으로 대충 끝맺는 게 너무도 지겹단 말이기도 하다. 이 피상적인 성공상이 딱히 엔딩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긴 한데,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전면에서 부정하지 않는 것과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어떠한 비판적 시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서 더 지루하다. 이미 어떤 작가들은 훌륭하게 이 함정을 피해가면서도 히트치는 기량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 '피상적인 성공상'이 뭐겠는가. 사회의 법과 제도가 주인공이 무언가를 하든 말든 전혀 변함이 없어 주인공만이 세계관 내에서 모든 종류의 사법적 특권과 토테미즘적 사랑을 누리고 주변인들은 하나 같이 정상성에서 벗어나질 않아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애인, 성소수자, 저임금/외국인 근로자처럼 보기에 아름답지도 않고 향기나지도 않아서 매 순간을 모멸당하는 이들의 존재를 아예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여성은 적당히 사랑만 하면 여전히 세상의 모든 게 대충 해결되는 삶이다.

현실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만큼이나 현실을 타개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돈이 많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별로 안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차라리 이 악물고 넘기겠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판타지의 계보에 있어서 히트작 중에 해피엔딩이 아닌 것들이 꽤 있는데 그건 싹 무시하고 말하진 말자. 대중의 선호도란 조류와 닮아 원래 비극과 희극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법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만드는 이런 대중예술이 현실에 전혀 영향을 안 주는 것도 아니고 어떤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생명공학 쪽에서는 아직도 직업윤리 교재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영향을 받은 영화들을 쓴다. 가타카는 이제 너무 오래 돼서 잘 안 쓰지만 아일랜드는 아직도 쓰이고 있다. 한국의 SF가 해외의 주목을 받은지도 이젠 좀 됐는데, SF를 넘어 장르소설 자체가 안 먹힐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이미 픽코마가 일본 웹툰 시장을 점유한 걸 보면 작품 픽만 잘 한다면 다른 나라라고 안 먹히지는 않을 게 뻔히 예상되는데 굳이... 적당히 정제된 해피엔딩에서 멈춰야할까?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대충 경제 수준이 비슷하면 사회 문제도 비슷하다. 그러니 굳이 피해가지 않아도 좋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확신한다. 어차피 판매량을 생각하고 선택을 하는 당사자는 작가니 말이다.

사족 1. 더노트 작가의 '샤이닝 로드'의 경우가 참 재밌는 일례긴 한데, 판타지 쪽 읽다보면 댓글로 으레 붙는 '형님 이 새끼 웃는데요?'가 유래하게 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그래도 사적 가치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게 1. 안 읽은 사람도 이 소설이 어떤 시놉시스를 채택했는지 알고 있을 정도고 2. 작가는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엔딩에 대한 복선을 치밀하게 깔아놓아서 개연성 있는 결말이었다. 이게 이미 인셀식의 대리만족을 강하게 요구하던 2010년에 나온 소설이라 완결 보고 독자가 출판사에 쳐들어갔다는 말도 있는데... 워낙 예전 일이라 이 소설인지 다른 소설인지 확신이 없다. 하지만 출판사가 해피엔딩을 부르짖게 만든 일례기도 하다... 그 시절엔 이런 일이 은근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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