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의 보수성이 지루하다

요즘 로판 권태기가 와버려서 한참 밀린 리뷰 쪽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왜 질렸는지에 대해서 얘기나 해둘까 싶어서 한다. 뭐 이미 여러번 지적했지만 그게 그렇게 곰방샤라락 고쳐질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우경화까진 그렇다 쳐도 2찍 어쩌고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게 기분 나쁘기도 해서 덤으로 쓴다.

로판이 유독 우경화 어쩌고~ 하면 싸늘한 비웃음이 솟을 수밖에 없는데, 장르소설은 이미 대여점 시절부터 우경화 경향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우경화라 함은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보수주의 / 민족주의 쪽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다. 한국 우파들이 유난스러울정도로 명목상의 신자유주의 맹신자다보니 그런 의미로 우경화라 부른다면 나도 동의하겠는데... 대충 말하는 걸 보다 보면 어떤 이들은 '로판만' '유난히' 우경화되어있는 것처럼 떠들어대서 얜 지금 뭐라는 겐고 싶어진다.

솔직하게 얘기해보자. 정말로 우경화가 신경 쓰이는가? 신자유주의와 위악을 위시한 도덕적 붕괴, 약자와 가난에 대한 혐오 정서, 갖은 종류의 차별이 다 문제고, 웹소설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주류 이데올로기- 즉 강자의 입장에 이입해 폭력적인 시선으로 사안을 보는 작가가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체적으로 그런 성향이 강하다는 거지, 로판만 유난히 우경화 된 건 절대 아니다. 그런 의미로는 비슷비슷하게 우경화되어있다까지는 동의해줄 수 있다.

요즘 판타지는 조금 덜해졌지만 그건 몇몇 천재 작가들이 메이저 히트를 치면서 미소지니하지 않은, 그래도 나름 선량한 주인공 쪽이 더 팔린다는 걸 보여줘서 그런 흐름을 다른 작가들도 쫓아가게 된 거지 톡식했던 걸로 치면 비교할 수 있던가? 뭐... 잘 모르겠다면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제시해주고 싶다. 영업하는 사람들이 쓰레기지만 재밌어요 라고 하길래 한 입 먹어보는 셈 치고 읽다가 1화만에 욕하면서 드랍할 정도였는데 로판만이? 유독? 우경화아?? 로판에서 회귀자 사용설명서의 주인공만큼 쓰레기 같은 캐릭터가 히트친 전적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뭘 보고 유난들인지를 모르것다.

기실 웹소설만큼 신자유주의 찬동이 이 정도로 맹렬한 장르가 드물긴 하다. 영화판에서도 가끔씩 보이긴 한데 보통은 폭삭 말아먹어서 안 보이는 거지... 하지만 웹소설판에서는 '나만 잘 나가면 그만이야'라는 주인공의 태도로 모든 구조적 문제들마저 정당화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자꾸 그렇게 로판만 유난히 싸잡아서 비난하면 그냥 여성들 위주인 판이라 아니꼬운 티 나니까 적당히 해라.

자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기어코 로판 권태기가 와버린 얘기를 해보자.

여전히 작게나마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분들이 있으나 과감하게 내지르는 작가들은 다른 장르로 빠지고 로판 내에서는 로맨스를 상대적으로 더 강조하고 싶은 작가만 로판에 남는 것 같아서 로맨스 판타지가 실질적으로 로맨스의 하위 장르화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굳이 따지면 하이틴 로맨스에 가까운 기능을 하는데, 그 타게팅이 10대가 아니라 성인층을 포함했다는 느낌이다. 생계가 걸려있으니 아주 약간의 모험도 하기 싫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하니 다 이해해줄 수 있는데 타게팅 하는 독자층이 너무 좁아서 썩 좋은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얼추 한 거 같지만 한 번 더 강조하면... 여전히 대다수의 로판 소설에선 주인공에서 어떤 종류든 성취감을 느낄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두에게서 사랑 받고 싶음'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건 그렇다 쳐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인공을 사랑할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당연히 독자층 사이에 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사랑 받고 싶다는 정서가 퍼져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 아닌가? 그런 발상을 찾아보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적당히 대중이 원하는 것 같은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걸 반복해서 비평하기조차 싫어진다.

일단 그 위로 받고 싶다는 정서에 대해 얘기하려면 영국의 페미니즘 학자 안젤라 맥로비(Angela McRobbie)가 지적했던 현재 여성들이 여권신장을 실현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강요된 여성성의 이면에 붙어있는 '읽어내기 힘든 분노'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한다. 뿐만 아니라 걸스 Inc.의 2006년 보고서 슈퍼걸 딜레마(The Supergirl Dilemma)만 참고해보더라도 한국에서도 통용되는 그놈의 여성에게 강요되는 완벽에 대한 반감을 이해하기 쉽다.

이 절대로 누릴 수 없는 완벽을 왜 자꾸 작가들은 들어주려고 하는가? 그래, 로맨스 코드가 좋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완벽한 공주님들의 이야기를 중학생이나 초등학생이 보고 영향을 받아도 정말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나? 아이들이 가끔씩 주인공이 마냥 참다가 쨘하고 등장한 타인으로 인해 손쉽게 구원 받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학대 당하면/버티면 주인공처럼 행복해질 수 있을 거 같다'며 환장할 코멘트를 하는 걸 본 적 있는데 진심으로 아무런 영향을 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나? 진정으로 개인적인 구원을 낭만화하며 아무런 주의를 주지 않아도 괜찮은가?

한껏 허황된 로맨스 코드로만 우리는 소설에서 위로를 얻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모습에 우리가 이입하고 평가하고 공감하고 관조하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면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좀 딱딱하게 말하면 웹소설에도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모든 창작물이 그러하듯 사이코드라마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사이코드라마라 함은 연극의 틀과 기법을 이용한 심리 요법을 두고 하는 말인데... 그러니까 자신이 겪었던 불합리나 감정적으로 폭발했던 상황을 연극을 통해 그 상황에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떻게 하고 싶었는지 반영해서 의뢰인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이해와 해결을 목표로 하는 심리치료다. 

설명만 봐도 알겠지만 대부분의 문학이 이와 같은 행위를 이미 하고 있다. 문학 뿐인가? 스토리를 창작해내는 모든 종류의 예술이 이미 이런 방식이 체화되어있다. 싫든 좋든 창작자의 시각이 창작물에 반영되어있기 때문에 사회상이 반영되고 사회상을 비판하기도 하며 사회상에 순응하기도 한다. 특히나 여성문학 쪽에서 작가의 경험이 강렬하게 반영되는 경향성이 강한데, '이 소설 너무 구리다...' 싶어서 페이지를 넘어가기 힘든데도 여성의 억압과 관련된 부분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소설이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단, 여기서 안타까운 점은 창작자는 당연히 심리치료사가 아니니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시도까지는 혼자서도 가능한데 제대로 이해하거나 해결하는 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기 아주 쉽다는 점이다. 거의 99.999999999% 정도? 그리고 독자들은 이를 보고 아무 의심 없이 따른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불필요한 낙관적 태도를 때로는 취하게 된다. 미디어가 사람 버려놨다고 괜히 그러는 줄 아는가.

여기서 신자유주의가 그렇게 자랑하는 사적 노력이나 사적 관계를 통한 개인적 구원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둥 신자유주의가 사기 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100% 자신의 의지대로 운영할 수 없다는 둥의 얘기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로판은 로맨스 코드에서 기인한 보수성에 충실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좀 더 로맨스 코드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 현실에서 억압받아 지친 여성을 위한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직도 많이 고프다.

사족 1. 포스트페미니즘...이라고 나도 부르는 걸 안 좋아하는데 어쨌든 페미니즘의 등장 이후의 대중문화사에 대해 알고 싶다면 안젤라 맥로비의 연구가 많은 도움이 된다. 물론 국내에 번역되어있는 책은 없다. 책 내달라는 소리가 하고 싶었다.

사족 2. 신체의 건강도 건강인데 정신 건강도 안 챙기면 예술 하기 힘들다. 한번 반짝하고 사라지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잖은가. 완벽하게 자신을 잘 다스리라는 소리는 절대 아닌데(당연히 이는 불가능한 요구다) 좀 문제가 있다 싶을 때는 적극적으로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는 게 좋다. 뇌과학에 관심 있다면 잘 알겠지만 인간 암만 대단해봤자 결국 하나의 생물학적 종이고 육신은 절대 완벽할 수 없으니까 신체 기능에 버그 떴을 때는 적절한 약물로 버그 없애고 상담을 통해 버그가 제대로 사라졌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지 비로소 제대로 인간으로 펑션할 수 있게 될 때도 있다. 그래서 자꾸 대충 살라는 거다. 완벽할 필요 없다.

사족 3. 귀찮아서 대충 줄이긴 했는데... 로판 세계관에서 공화국이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신분제를 고집하는 정서가 피곤하다. 공화국 설정 해놓고 영국이나 일본처럼 내각제로 실질적 신분제를 살려놓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세계관 설정에 있어 아무 시도를 안 하는 것도 퍽 지루하긴 하다. 로맨스 코드 말고 좀 집어먹을 것도 같이 넣어달라는 게 그리 대단한 요구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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