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과 무협과 몰이해
무협로판으로 시끌시끌했던 거 트위터로 가볍게 떠들긴 했는데 제대로 언급해볼까 한다. 익명함에 들어온 질문 몇 개를 대충 추려서 답하는 측면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일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올 게 왔네' 정도였다. 사실 언제고 이런 일이 벌어질 거란 경고 자체는 이미 <장르엔 본디 근본이 없다>에서도 했다. 그러니까 막 무협과 로판을 섞은 소설들이 나오기 시작한 2021년 7월에 이미 했는데 1년 지나서 대중의 반응이 온 셈이다. 그때도 분명히 적당히 동양풍 이미지만 차용하려 들지 말고 장르적 맥락을 고려해야 된다, 나름 그 안에서 머리끄댕이 잡고 싸워가면서 정립된 세계관이고 설정이니까 그런 맥락을 싸그리 무시하면 그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싸우자고 하는 거나 다름 없다고 상당히 직설적으로 경고했는데도 기어코 일이 터졌으니 뭐 놀랍진 않은데...
이건 확실히 해두자. 무협은 나쁘게 말하면 원래 꼰대가 많은 장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장르 중 하나고 남성 위주의 판을 꾸준하게 유지해온 데다가 장르소설의 포맷이 바뀌면서 저들 안에서도 나름 세대 교체가 꽤 되긴 했지만 그래도 보수적인 걸로 치면 남성향 안에선 으뜸일 거다. 성역화라기 보담야... 로맨스 장르 정도의 보수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애매하게 말하는 건 내가 요즘 무협을 전혀 안 봐서 그렇다. 대여점 시절에는 그래도 인기 있는 몇 작들은 봤는데 아직도 내 맛은 아니다. 여하튼 간에, 무협 안에서도 구무협이니 신무협이니 나름 좀 갈리긴 한다. '치트라'도 특히 액션 묘사에 있어 무협 장르의 특징이 좀 섞여있을 텐데 마찬가지로 무협을 잘 모르니 일단 들어가 있단 정도로만 정리해두겠다. 태선 작가의 소설은 '더스크 하울러' 때부터 알긴 했지만 무협이 섞인 2부부터는 으음! 역시 무협은 내 취향 아니다! 하고 탈주했던 전적이 있어서 더 그렇다.
여하튼 간에. 안 그래도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무협과 섞는데 꼭 굳이 그 장르가 무협일 필요조차 없는 시놉시스라면 무협로판이 나온 초창기부터 주의를 줬던 내 입장에서는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는가 하고 허탈한 측면도 있지만... 언제가 되었든 누군가 한 번은 이런 일에 엮이게 될 것도 자명했다. 그러니까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무협로판 내에서 시놉시스적 진화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한 번은 터질 일이었다.
좀 더 직설적으로 얘기해볼까. 이번에 있었던 실수는 따지고 보면 언제고 있을 법 했다. 1) 딱히 무협이 아니어도 되는데 무협의 이미지만 따와서 넣은, 다른 장르에 대한 존중이 없는 태도로 2) 기존의 낡은 로판 시놉시스에 3)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저승관이 섞여들어가면서 배경이 중국인 무협과 불협화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이면 동북공정으로 예민해있는 시기기도 해서 더 핫해졌다는 얘기다.
서사적 구성에 있어 장르적 맥락을 안 담고 적당히 눈에 예뻐 보이는 이미지만 따오는 모습이 아니꼬운 모든 이유는 사실 퍽 타당하다. 여성 이미지는 말하면 입 아플 정도고 문화적 이미지로도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배경지식을 갖추지 않고 중국 배경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의 저승관을 툭 넣은 게 특히 작가의 실책이긴 하지만... 사실 이번 일에 대한 반응은 작가 개인을 온전히 향한 것만도 아니라고 본다.
그동안 스스로가 질릴 정도로 반복해서 기존의 로판 독자들이 변하지 않는 시놉시스에 진력나있다고 그렇게 지적해왔는데 독자들이 모여서 얘기할 공간이 영 없다보니 프로모션으로 눈에 띈 특정 소설에서 '이젠 정말 지겹다!'하고 비교적 가볍게 폭발한 쪽에 가깝다고 본다.
실수 자체는 누군들 언제고 했을 거다. 단지 독자들의 인내심이 끊기는 게 지금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솔직히 작가가 필요 이상으로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다고 보고 있다. 이제 와서 시놉시스를 뜯어고치기엔 수정해야할 분량이 만만찮을 테고, 갑자기 쏟아져오는 반응에 '내가 그 정도로 잘못한 건가?'하고 움츠러들었겠지만 그냥 실수한 건 실수했다고 인정하는 정도로 된다고 생각한다. 대중의 반응이라는 게 당연히 개인이 오롯이 감당하기엔 그 양 때문에 작가에겐 폭력적으로 다가올 텐데,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내겐 어디까지나 자료 조사가 미진했던 탓에 발생한 실수로 보이고, 그런 실수로 나온 게 맞다면 이번 건 덜 망치고 다음 거 잘하면 된다. 태만했던 건 사실이지만 뉜들 살면서 실수나 실패 한 번 안 하겠는가. 타당한 비판은 수용하고 나머지는 대충 흘려버리길 권한다. 어차피 댓글 남기는 이들 중 최소한의 명확한 언어를 갖추지 않는 사람들의 발언은 대체로 애정에서 나온다기보단 어그로에서 나오는 거니까.
이번 일로 1년 사이에 로판 독자층 안에서 변화에 대한 욕구가 커진 걸 확인한 건 또 사실이다. 자꾸 새로운 시도를 권하는 게 괜한 말이 아니란 걸 이제는 인지 했을 테니 자신감 좀 가졌으면 싶다.
콘텐츠 산업의 절대 소비자는 여성이다. 이들의 지갑이 얇은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절대로 구매를 아예 끊어버리지 않는 가장 충실한 소비자층이다. 지금 젊은 여성들이 웹소설에 지갑을 닫는 이유를 거칠게 줄여서 설명하면, 시놉시스가 고정되어 있어서 그렇다.
죄 비슷비슷한 내용이면 이미 읽었던 것 중 제일 취향에 맞는 소설을 다시 읽는 걸로도 충족된다. 페미니즘으로 독자 수요를 모으려는 시도는 성공했는데, 그 이후 백래시 때문에 다시 줄어든 거다. 근본적인 고찰 없이는 어떤 이야기도 불가능하다. 안전한 현실도피로 어설픈 위안만 주려고 하면 여성들이 매일 같이 느끼는 위협이 없는 척하는 것에 불과하다. 성차별이 없어진 세계를 가장해보는 것도 가끔 나쁘지는 않지만 그건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지 당장의 현실과 현재에 대한 분노에 의거한 합당한 공격이 아니다. 그리고 로판은 보통 전자인 안전한 현실도피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지 않던가.
로판 독자가 로판만 읽는 층도 있지만 아닌 층도 많다. 그런 고로 지금처럼 경기가 불황으로 들어설 게 확실해보이면 주요 소비자인 여성들은 읽던 소설의 가짓수부터 줄인다. '이 작가 거라면 괜찮지' 라고 기성작가 위주로 신작을 읽어볼 게 뻔하고 고만고만하게 읽던 것도 돈 쓸 정도로 재밌다 싶지 않으면 한 구석으로 밀어버리고 잊어버린다. 재밌는 소설은 다시 읽어도 재밌는데, 과거 히트작들과 비견될만한 면모가 하나라도 있는 작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던가? 아니잖은가. 계속 이러면 로판 자체가 수요가 줄어들고, 내용이 더 보수적이 되고, 수요가 거기서 더 줄어들길 반복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애초에 정말로 젊은 여성들이 돈이 없어서 문화 콘텐츠 산업에 돈을 안 쓰는 성향이었으면 웹소설 시장이 이 수준으로 팽창하지도 못 했다. 웹소설은 상당히 저렴한 가격대를 구축하고 있고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창구로 여성주인공이 필요하다. 새로운 시도를 아예 안 하는 것보담야 조금이라도 하는 게 낫기 때문에 과도기인 셈 치고 계속 지켜봐왔지만 느려도 너무 느리니 단순히 하나의 계기로 독자들의 인내심이 끊긴 것에 불과해 보인다. 지금 화내는 독자들을 하나 하나 붙잡고 특정 작가에게 화난 것이냐, 아니면 경향성에 대해 화난 것이냐를 묻기 시작한다면 무협로판이 가지고 있는 경향성 때문에 화난 쪽이라는데에 오늘치 커피를 걸겠다. 그러니 지나치게 상처 받거나 화내지 말자. 늘 해온 말이지만, 분노의 대상은 명확해야 한다.
사족 1. 시간 없는 와중에 후다닥 써서 짧고 거칠다. 적당히 양해 부탁한다.
사족 2. 대여점 시절에도 무협에서 여주가 나왔는데 어쩌면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다른 장르들에서 여성주인공이 안착될 지도 모르겠다 싶다. 이건 순전히 작가들의 실력과 실적에 따라 좌우될 문제긴 하고, 지금 전체적으로 장르소설 안에서 로판이 유난히 변화가 적은 건 사실이다. 다른 장르를 같이 읽는 독자들이라면 상당히 동의할 거다.
사족 3. 태선님의 더스크 하울러가 더스크 워치로 오류나 있는 걸 지적해준 분이 있어 수정했다. 다시 한 번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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