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판타지의 로맨스 오염
타이틀이 이렇게 강하게 나오니 분명히 이게 무슨 소리야! 로맨스 혐오냐! 라고 분개할 분이 생길 걸로 예상한다. 일부러 어그로 끈 거 맞다. 일단 진정하시라. 이 문제는 플랫폼의 태도가 더 문제라서 끄는 어그로다. 지난 글에 로맨스판타지가 어떻게 탄생한 신흥 장르인지 짚은 이유 중 하나가 이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 얘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로맨스란 장르의 특성을 정리해두려 한다. 거칠게 말해서 로맨스는 여성들을 위한 포르노적 역할을 수행한다. '아니! 연애사가 왜 포르노죠?!'라고 화낼 사람도 있겠지만 실상을 들여다봐야한다. 섹스씬 없이, 19금 안 달고 쓴 로맨스 소설의 판매량이 19금 로맨스 소설과 비교했을 때 몇 배가 날까?
2019년 11월 28일 기준으로 리디북스의 로맨스란의 베스트를 예시로 들면 성인물 중에서 1위 작품인 '상수리나무 아래'의 독자가 19807명, 성인물 제외를 했을 때 베스트 1위로는 로맨스판타지 장르의 '그림자 없는 밤'이 1037명, 현대 로맨스 장르의 '홈, 비터 홈'이 997명이다. 대충 잡아도 20배다. 이런 독자층의 비율과 상관 없이 애초에 로맨스라는 장르 자체가 여성을 위한 포르노로 장르가 시작된 것 또한 맞다. 장르의 태생이 그렇다.
물론 이게 나쁠 이유야 없다. 인간이 욕망의 생물이라 야한 거 좋아하는 거 사실 당연한 일이다. 성인이 성인물 보는 게 뭐가 잘못일까. 불법촬영물 보는 인종들도 있는 마당에 합법적으로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다만 로맨스라는 장르상 포르노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을 띄게 된다. 독자층의 연령대가 높고, 따라서 보수적 성향을 띈다. 조금 더 예를 들자면 로맨스 장르의 소설들은 시대물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여성이 직업이 있다 한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당연하다는 듯이 여성이 육아를 하며 시가와 잘 지내느냐는 기혼 여성들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지점들을 서술하는데 있어 지극히 사회통념적인 방식을 따른다.
여기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1. 카카오페이지의 15금 정책
카카오페이지의 유저 풀에는 10대가 많다. 그 다음이 4~50대인 모양이니 왜 카카오페이지(이하 카카페)가 15금이라는 애매하고 속 보이는 정책을 선택하고 있는지 예상이 갈 것이다.
작가들은 카카페의 15금 정책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작품의 기준을 15금으로 맞춘다.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흔히들 말하는 '아침짹'이 심의를 생각하면 제일 편하다. 그렇고 그런 걸 했는데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고 다음날 같은 침대에서 일어난다는 아침짹이 작가의 입장에서도 편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쉽게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연령대가 높은 독자층은 이를 당연히 싫어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성인이 성인물 보고 싶지만 플랫폼이 서비스를 하지 않는다면 그 욕망은 당연한 것처럼 작가가 해소해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른 바 15금이지만 15금일 수 없는 장면을 원하는 욕망을 작가가 어떻게 적당히 무마해주길 원하는 것이다.
이런 욕망을 들어주기 위한 작가의 노력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 양상이 실로 우려되는 바이다. 직접적인 묘사는 아니지만 할 걸 다 한다는 문장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로맨스가 아니라 로맨스판타지 장르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럴 경우의 문제는 뻔하다. 연령대가 낮은 10대 독자층이 노출된다. 이 부분을 지적하면 꼭 10대는 성욕이 없느냐, 청소년 혐오라는 말을 듣는데 정신 차리자 좀. 연령대가 낮은 독자층이 성욕이 있는 건 당연하지만 이런 방식의 노출은 최악이다. 성인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망칠 권리가 있어서 뭘 보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든 자기 책임이라지만 성관념이 확립되지 않은 미성년자들에게 성인의 욕망을 대변하는 작품이 노출되는 건 우려스러운 일이지 않은가?
애초에 19금만 달았어도 이 부분을 지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플랫폼 측이 발을 빼고 있기에 발생하는 문제점이고 작가들에게 있어 판매량에 대한 욕심 또한 당연한 일이다.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에게 벌금을 물리지 않는다면 누구나 무단횡단을 할 것이다. 그러다 차에 치여 죽는 사람이 나오듯, 만약 이 문제가 가시화가 된다면 가장 먼저 비난을 받고 패널티를 먹을 이는 작가다.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한국이 글에 있어 비교적 널널한 심의기준을 가진 건 그간 일제 치하, 독재 치하를 거치며 싸우던 방식이기 때문이라 이러한 방식의 악용은 검열의 정당성을 불러온다. 창작자에게 있어 가장 짜증나고 미운 적이 검열임은 당연하지 않은가. 만약 검열이 생긴다면 그 방식이 이 나라에서 어떤 식일지는 굉장히 뻔하다. 정권의 입맛에 맞춰 이리저리 휘둘릴 게 뻔하지 않은가.
그리고 미성년자인 독자층도 제발 몇 년만 참아주길 원한다. 아무리 성욕이 있고 보고 싶다한들 무방비한 노출은 안 된다. '어른들의 판타지'는 현실에서 그러면 안 되니까 돈을 써가면서 충족시키려드는 것이고 그게 글이라 해서 특별히 논외의 대상은 아니다. 이러한 판타지를 충족하기 위해 만든 컨텐츠에는 어떻게든 글러먹은 게 어쩔 수 없이 섞여있다는 걸 유념하고 봐야지 '사랑하니까 괜찮다'는 건 다 가해자를 위한 피해자의 변명이며 하나도 괜찮지 않다는 걸 머릿속에 콱 박아두고 봐야한다.
현실에서 성적갈취당하는 건 언제나 미성년자다. 뉴스에 나오는 미성년자 성매매를 보라. 가정환경이 안 좋아 흔히들 말하는 가출, 즉 생존을 위해 집에서 도망쳤는데 머물 곳을 제공해주겠다는 미끼로 유인 후 감금해서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 가해자가 또래든 성인이든 현실의 범죄 양상은 이 모양이다. 성범죄는 80% 이상이 아는 사람과 벌어진다. 이가 의미하는 바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이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거처를 제공해주며 대가를 섹스로 제공받으려고 사랑한다는 말로 치장하는 경우가 많단 거다. 이런 범죄 말고도 강압적인 태도로 사랑을 증명하라는 둥의 말로 강간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피해자는 이게 사랑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기 때문에 피해사실을 알아차리는 게 늦게 된다. 뒤늦게 알면 죄를 묻기도 더럽게 힘든 나라인 만큼 상대적 약자인 미성년자측을 우려할 의무가 성인에게 있는 거다.
2. 왜 가부장적 판타지를 로맨스판타지가 수용해야만 하는가?
로맨스판타지가 대충 빅토리안 판타지스러운 무언가로 변질되면서 더 이런 경향이 심해지는데... 잘라 말해 여성의 인생에 있어서 연애는 덤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연애는 하면 좋지만 안 한다고 죽지도 않고 가끔 사랑은 짜증나는 변명일 뿐이다.
사랑의 낭만화의 유해성에 대해 말할 필요가 더 있을까. 세상 모든 사랑은 이유를 붙일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유를 언어화하는 순간 별 게 아닌 걸로 보이니까 '그냥 좋아'라는 말로 뭉뚱그려 낭만화 할 뿐이지 현실의 사랑이 얼마나 유해할 수 있는지는 이미 사회문제화 되지 않았는가. 불법촬영, 데이트폭력, 부부강간, 안전이별, 매매혼, 데이트강간약은 다 익숙한 말들이 되었고 이제야 비로소 가시화가 시작된 거다.
사랑하는 연인간의 계획된 섹스라면 이러한 비판이 왜 붙겠는가.(그래도 최근의 로맨스판타지에서는 피임은 필수적으로 챙기더라. 피임약이 주된 쪽이라 콘돔이 아닌 게 조금 아쉽긴 하다. 성병은 대부분 남성에게서 감염되는만큼 경구피임약을 복용하더라도 콘돔은 쓰는 게 좋다는 건 알아두는 게 좋으니 그냥 덧붙인다.) 하지만 폭력적인 상황이나 감정적 흐름으로 무계획적으로 섹스를 하는 경우도 제법 있는 편이고 이로 인해 아이가 생겨 결혼한다는 걸 매력적인 판타지처럼 보이게 하는 건 여전히 괴롭다.
조금 더 덧붙이면, 아이가 생겨 출산하고 육아하는 걸 낭만화하는 걸 보기가 너무도 괴롭다. 이 판타지는 로맨스에서 넘어온 게 맞고 정상가족에 대한 집착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상가족은 비꼰 표현이 맞다.
로맨스판타지 작품들에 나오는 가족상이 점점 일원화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이 결혼해 자신의 피를 이은 아이를 출산하고 이 아이, 혹은 아이들을 양육한다. 로맨스의 보수성이 유입됐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띈다고 보아 무리 없지 않은가.
모험물에서의 주인공들은 연애를 하더라도 보통 결혼에서 끝나거나 연애 진행에서 멈춘다. 평생 홀로 살았다는 식의 묘사가 드물지도 않다. 하지만 여성 주인공인 로맨스판타지에서 '로맨스'가 붙는 순간 여성의 생은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가정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난임, 유산 같은 현실적인 괴로움을 구태여 작품의 해피엔딩에 붙이지 않더라도 흔히들 가족부둥물이라고 하는 장르에서 입양을 잘 써먹는데 그 제도의 혜택을 받은 주인공마저 받은 혜택을 돌려주는 선택지를 고르는 경우는 볼 수 없다. 이는 비판받을만한 보수성이 아닌가? 내가 껄끄러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가족의 형태는 다채로운 쪽이 맞다.
연애를 하는 건 좋다. 본인의 희망으로 가족을 이루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 많은 작품들이 묘사하는 가족의 모습은 단 하나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주인공이 아이인 경우가 제일 극심하다. 남녀로 구성된 부모가 다 있고(가족부둥물의 경우 심지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자아가 형성이 됐는데도 입양으로 가족에 편입된다. 그리고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데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아이를 지나치게 예뻐해서 자식교육은 제대로 시켰는지 의심될 지경이며, 형제가 있다면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도 시스콤이라 불릴 작태를 보이는데 사실 이런 시스콤은 대상을 인간이 아니라 제 소유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작태임에도 불구하고 낭만화의 대상이 되며 조부모마저 덤처럼 붙어 한껏 우쮸쮸거리는데 매몰된다.
이게 정말 사랑이 넘치는 정상적인 가정일까? 평범하게 화목한 가정이 어떤 것인지 생각도 않은 채로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어설픈 자위는 지켜보기가 역할 지경이다.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한부모가정, 이혼, 사별, 입양, 두부모가정, 딩크족 등 현실에 있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가족은 화목한 가정에 대한 판타지의 고찰없는 낭만화에 간단히 매몰된다.
여기에서 좀 벗어난 형태의 행복한 가족을 그리는 작품을 떠올린다면 그나마 꼽히는 게 태선 작가의 '치트라'와 키아르네 작가의 '신데렐라를 곱게 키웠습니다' 정도 뿐이다. (더 있다면 얼마든지 가볍게 추천주시면 감사하겠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다양성이 필요하다. '정상'에 대한 집착이 이런 식으로 낭만화되는 이상 여성의 인생에 자유가 정녕 존재할 수 있을지를 묻고 싶다.
이번에 지적한 문제점들이 간단히 넘어갈 만한 문제일지 한번쯤은 자문해주었으면 싶다는 말로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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