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탐닉 (1)

로판 gl 백합

~ by 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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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렌 드 그라일리스는 백작의 금지옥엽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딸은 자주 만나지는 못했는데 그것은 그라일리스 가문이 명망뿐인, 봉토 없는 귀족인 것과도 연관이 있었다. 백안시 되고 경원시 되는 명망도 명망이랄 수 있다면 말이지만.

황제를 알현하는 신년 축제만이 그라일리스 백작의 수도행이 공식적으로 허락되는 때였다. 원수나 다름없는 팔라티나 공작의 영지를 지나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부 귀족들 속으로 와야 했지만 백작은 수도행을 손꼽아 기다렸다. 결단코, 피부색과 눈동자 색마저 다른 황제에 대한 충성심 때문은 아니었다.

"에이렌, 사용인들의 얼굴은 역시나 네 작품이겠지."

"아이 참. 아버지, 오랜만에 오셔서 처음 하는 말이 타박이면 싫어요!"

두 부녀, 정확히는 자신의 주군인 그라일리스 백작을 보며 부관인 듀스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애타게 애지중지하는 딸, 항상 가슴팍에 숨기고 다니는 펜던트 로켓 속에 그려진 두 여자 중 한 사람을 막상 만나면 무뚝뚝하게 대하는 건 몇년이 지나도 똑같았다. 갈 수록 흉터가 늘고 험상궂어지는 아버지를 띄엄띄엄 볼 뿐이면서도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스스럼 없이 재잘거리는 에이렌 아가씨도 대단하기는 했다.

"아니다. 덕분에 이런 곳에 저택이 있어도 사용인들의 지원이 끊이지 않고 다들 장기 근속한다고 레마에게 들었다."

저택의 집사장 레마가 에이렌의 옆에 있다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윤기나는 거무스름한 피부에,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애써 틀어올리고 목까지 오는 답답한 옷을 입은 게 언제봐도 참 놀리고 싶은 여자였다. 카라 위로 드러난 목의 검은 점이 눈을 잡아 끌었다. 듀스나는 시선이 흩어지는 순간을 틈타 레마에게 눈을 찡긋했다. 레마의 갈색 눈동자가 냉담한 기색을 띄었다. 에이렌 아가씨는 그러고도 한참을 재잘댔고 백작은 가끔 짧은 대답을 하며 레마의 안내를 따라 매년 묵는 손님용 방으로 향했다.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에이렌과 레마를 듀스나가 얼른 따라나왔다.

"아가씨, 잠시 집사장에게 볼 일이 있습니다만."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에이렌에게 듀스나가 착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마가 작게 질겁하는 게 곁눈으로 보였다.

"응, 그럼 먼저 가 있을게. 레마, 천천히 와!"

멀어지는 에이렌을 붙잡지도 못하고 보기만 하던 레마가 천천히 듀스나를 향했다. 애써 차가운 척 하는 눈이었다. 듀스나는 웃음을 참았다. 정열적인 성격은 변함이 없네.

"오랜만입니다 가이시카 경. 그래서, 용건이 뭔가요?"

말에 가시가 있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하기사 마지막으로 봤을 때를 생각하면 화가 나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 별건 아니고."

듀스나는 한걸음, 두 걸음, 레마에게 다가갔다. 레마는 작게 움찔거렸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듀스나는 레마의 귓가로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이따 밤에 봐요, 내 사랑."

레마의 얼굴이 대번에 발게졌다. 레마는 발끈하며 듀스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럴 줄 알고 정강이 보호대를 풀고 왔기에 듀스나는 흐뭇하게 맞아주었다.

"레마도 차암. 좀처럼 얼굴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지."

에이렌은 저택의 현관 계단 참에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부루퉁해 있었다. 옆에서 하녀 루레가 발을 동동거렸다.

"아가씨, 제발 아무데서나 앉지 마세요. 주인님은 몰라도 집사장님이 보시면 저는 경을 친다고요!"

다급해보이는 하녀의 얼굴은 고운 분칠로 원래의 앳되고 동글거리던 것이 한층 세련되고 화사하게 보였다. 시무룩해 있던 에이렌은 자신의 작품을 올려다보며 히 웃었다. 그리고 무릎과 엉덩이를 탁탁 털며 일어났다.

"응! 뭐, 슬슬 저녁이기도 하니까. 얼른 들어가야지. 그건 그렇고 루레, 그 스타일 진짜 잘 어울려. 다음번엔 시내에서 유행한다는 화장법으로 해줄게. 약간 도자기 인형 같은 피부질감이 중요하다던걸? 아아, 아버지, 이번에도 최신 유행 잡지나 색조 화장분을 구해와 주시려나, 마담 바이올렛이 새로운 화장분을 만들었는데, 그게 어느 피부에나 잘 어울린다던데..."

에이렌이 일어나자 안도한 기색이 된 루레가 얼른 에이렌을 문 쪽으로 몰았다.

"네, 네, 얼른 들어가세요. 잊고 계시나본데 여긴 아주 깊은 숲이라고요. 가장 가까이 있는 팔라티나 저택도 자그마치 3 데니 밖에 있어요!"

"알아 알아, 그치만 황가의 숲이니까 아주 안전하잖아. 그나저나 다음번 순번은 누구지? 길디? 그린?"

"길디예요, 주방의!"

자꾸 주의가 산만해지는 아가씨를 집 안으로 밀어넣은 루레는 집으로 들어가기 전 뒤를 돌아보았다. 지는 해 아래로 숲은 깊고 어두웠다. 정말로 안전하다면 정원의 담을 두른 성력의 돌들은 무엇이고, 밖에 보초를 세우지 않는 것은, 밤에는 절대로 건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루레는 순간 소름이 돋아 얼른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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