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18화

돌아온 성녀 04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돌아온 성녀 04


루블, 보쓰, 히즈

***

방에 들어오자마자 보인 건 옷을 막 갈아입은 직후의 그녀였다. 편히 입을 수 있을 만한 원피스였기에 다른 이의 시중 없이 변복한 모양이었다.

“헬레니온······. 너로구나.”

힘 없이 살풋 웃는 그녀는 안쓰러워 보였다. 짐마차의 일꾼 사이에 숨기는 계획을 세운 건 그였으나 그녀가 힘들 것 까지 고려하지 못했던 걸까. 신성력이 없는 몸으로는 힘든 일정이었을 수 있겠다.

헬레니온은 그녀를 살피며 무언가 그녀를 불편하게 한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다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그 멍은 뭡니까?”

“아, 이것. 별거 아니야. 그저 검문 과정에서 일어난 약간의-”

“그레이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레이스는 그대로 굳었다. 역시나 어둠의 힘을 쓰지 못하지 탐지반경이 줄어들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헬레니온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단 심판관의 짓입니다. 중간에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 사고라.”

나지막이 내뱉은 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한없이 자상하지만 언짢음이 뚝뚝 묻어나는 어투에 그레이스와 아마데아는 절로 몸이 긴장되었다.

그는 아마데아가 뻣뻣하게 굳은 것을 눈치챘는지, 은은하게 드러났던 위압감을 풀고는 언뜻 보면 권태로워 보이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마데아는 어쩌면 그의 평소 순하다 못해 만만해 보이는 표정은 이런 위압감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단 식사를 가져왔으니 먼저 드시지요. 저흰 앉아서 얘기하죠, 그레이스.”

다시 평소의 온화한 어조로 돌아온 헬레니온과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마데아의 표정이 대조적이었다. 어쨌건 그녀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적어도 아마데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옆에서 제 얘기를 하는 불편한 상황에서 식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무슨 내용이 오가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게 위안이었다.

‘일단 얹힐 것 같긴 하지만.’

불길한 예감이었지만 아마 예감으로 끝나지 않을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레이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레이스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골랐다. 그녀 치고는 드문 표정 변화였다. 근 한 달 가까이 그레이스와 지냈던 아마데아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말씀드렸듯, 이단 심판관의 짓입니다. 직접 국경지대에서 심문을 하더군요. 자세한 내력은 상단주나 정보부에서 알아 오겠지요. 일단 제가 들은 건······.”

자칫 헬레니온이 흥분했을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던 아마데아는 의외로 잠잠히 그레이스의 설명을 듣는 그를 보고 안심했다. 

그와의 만남은 짧았지만 그 시간 만에 파악했던 점이 있었다. 헬레니온은 그녀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지켜주겠다고 했었지.’

단지 뱉은 말에 책임을 진다기에는 의아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를 살린 것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날 살려서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했는데.’

외려 시간이 갈 수록 다른 가정에 힘이 실렸다. 어쩌면, 아니, 높은 확률로 그는 아마데아에게 마음이 있는 게 틀림 없다.

“이단 심판관의 예상치 못한 등장은 알겠습니다. 다만 제가 묻는 건 손목에 든 멍에 대해섭니다.”

조리있게 설명하던 그레이스의 입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열심히 오물거리던 아마데아의 입도 멈췄다. 

결국 회피는 못할 것을 짐작했는지 그레이스는 반쯤 체념한 채 입을 열었다.

“그 심문 과정에서 이단 심판관 하나가 직접 일꾼들을 돌아보다가 디아나 님의 손을 보고는 일꾼이 맞느냐며 다그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잡힌 손목에 멍이······.”

“그레이스. 내가 지시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다시 침묵이었다. 설마하니 저 앞에서 부하를 다그칠 줄은 몰랐던 아마데아는 황망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보단 그 원인이 그녀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 헬레니온. 나는 괜찮다. 이런 것쯤······.”

“지시사항은 ‘아가씨를 안전히 아우레티카로 모셔 올 것’이었지요.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 실책입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오는 그레이스의 태도에 이번엔 아마데아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스스로 제 잘못이라며 사과하는데 더 만류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데아는 처음 아녹스에 갔을 때부터 그레이스와 으르렁거린 것도 잠시,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다. 

처음봤을 때 적대감이라고 생각한 수많은 지적질은 그녀가 현실을 인정하고 아녹스에 대해 배우게 될 계기가 되었다. 귀찮게 가르친다고 생각한 잔소리가 어느새 꼭 귀담아들어야 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그레이스가 변한 건 크게 없을 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아마 아마데아, 그녀 스스로가 많이 변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마 아까의 그레이스의 냉랭한 시선에 그리도 상처받았을지도. 씁쓸한 속내를 감추고 아마데아는 헬레니온과 그레이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레이스가 그녀를 싫어하더라도 괜찮다. 어차피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이미 수두룩한데 한 명 추가한다고 대수일까. 

‘······그게 내 주변인이라면 약간은 상처일지도.’

아마데아는 솟아나는 약한 마음을 다잡고는 똑바로 헬레니온을 응시했다. 또렷한 의지를 담은 눈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헬레니온의 시선은 마치 붙잡힌 듯이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를 나무라지는 말려무나. 나무라려면 나를 나무라거라. 어리숙하게 굴어 쓸데없이 이단 심판관의 시선을 끈 것은 내 탓이다.”

결연한 표정과 의지가 담긴 눈. 헬레니온은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면서 무의식중에 떠오른 생각에 차마 아마데아를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누군가를 두둔한다면 그 대상이 나였으면 한다는, 말로 꺼내기도 유치한 생각이었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아마데아에 의해 기이한 침묵이 찾아왔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난처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레이스였다.

헬레니온은 무슨 생각인지 모를 얼굴로 시선을 피하고 있고, 아마데아는 결연한 뒷모습만 보였다. 누구 편도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껴있는 게 더 불편하다는 걸 알긴 하는지.

‘아마 선의로 끼어들었겠다만. 괜히 더 난처해지는 짓을.’

그레이스로서는 그저 이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제발 아무나 나서서 끝내주길.

그레이스의 간절한 바람이 통한 건지, 그저 우연이었는지는 모르나 정중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트레우스입니다. 들어가시고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지나치게 조용해서······. 안에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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