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문화사 속 여성 - 여공 (3)

근대에서 현대까지 변한 게 없다.

좀 쉬었으니 이번 편에선 본격적으로 여공에 대한 얘길 해보려 한다. 이 시리즈는 유료로 연재하고 있었지만 노동운동 얘기만큼은 노동자로 살아가는 이상 알아둬야 하니까 이번 편만큼은 무료로 풀겠다. 2편에선 여공의 이미지를 중점적으로 다뤘으니 이번 3편에선 실제 여공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고 어떻게 싸워나갔는지 다뤄보겠다. 다시 강조하건데데, <근대 배경 로판에 고증은 꼭 필요할까?>에서도 얘기해줬지만 한국의 경우엔 광복 이후를 현대로 본다는 걸 기억하고 읽어달라.

아마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여성의 노동 자체는 당연히 태곳적부터 있었다. 뭐 당연하지만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넘어갔다한들 여성이 노동을 아예 안 한 것도 아니다. 조선시대 민속도를 살펴보면 논농사는 남성들이 일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여성의 경우 밭농사를 하는 걸로 추정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물 캐는 여인>이라던가. 외에도 가사, 돌봄, 방직 등은 언제나 여성의 일이었다. 

근대화를 하게 되면 농업에 종사하던 시골 사람들이 죄 도시로 넘어오며 공장 노동자가 되는데, 이 때문에 노동자 라고 하면 우리는 공장 노동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이제는 공장 노동자보단 사무직 노동자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긴 하는데, 이것도 사실 몇 십년 안 된 얘기니까 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번 글에선 공장 노동자에 집중해보겠다. 그리고 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공장이 세워진 건 일제강점기다. 

다들 알만한 소리지만 구태여 다시 강조하겠다.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건 무슨 소리냐, 제국의 경제에 식민지국의 경제를 복속시킨다는 소리다. 물적, 인적자원을 싹 긁어간다는 건 바꿔 말하자면 식민지국민의 임금을 후려친다는 소리고 뭐가 됐든 있는 자원을 다 긁어가니 물건이든 세금이든 식민지 국민에게만 비싸진단 소리다. 뭐 멀리 갈 것 없이 강제징용 피해자 분들이나 위안부 생존자 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곱씹어봐도 조선인이 사람 취급 받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을 게다. 

알다시피 일제는 조선토지조사사업으로 지세를 어마어마하게 걷어서 조선의 농촌에서의 삶을 연명 불가 수준으로 처참하게 만들었다. 일제의 조세 수입 가운데 이 지세가 25%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 걸로 모자라 연평균 15.9%라는 어마어마한 증가율을 보일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이 농민들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다.

먹고 살기 위해, 더 정확히는 생존하기 위해 조선의 농민들은 가난한 농촌에서 벗어나 도시로 이동해야 했다. 이렇게 되면 도시엔 일자리를 찾으러 이동한 농민들이 바로 도시 빈민이자 공장 노동자가 되는 게다. 특별한 기술도 없었고 어쨌든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은 월급에서 기숙사비라며 몽창 떼여가기는 해도 잘 곳이 생기는 데다 밥은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당시 조선인들은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했고 일당은 평균 58전을 받았다. 일본인의 평균임금이 1원 16전이었으니 반도 못 받았단 소리다. 이런 구체적이고도 계획적인 차별 안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이 조선인들에게 퍼져나간 건 지극히 합리적인 흐름이었다.

경제에서는 세계사적 흐름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20년대에는 대공황으로 인한 불황이 왔고, 30년대 초엔 반짝 성장 하다가 3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 2차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면서 전시 경제가 형성되고 또 붕괴된다. 이걸 말해두는 이유는 일제강점기 여성들이 투입된 공장들은 보통 방직공장, 고무공장처럼 극도로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집중되어있기 때문이다. 기술을 그나마 배울 수 있는 부류의 공장들은 대부분 일본 본토에나 있고 조선 땅에 세우는 공장들은 제일 노동력은 많이 필요하지만 기술을 배울 건 얼마 없는 1차 가공을 하는 공장들만 세우는 편이었다. 방직 산업이 특히 이 부분이 잘 도드라지는 좋은 예다. 

방직 산업은 세부적으로는 수확한 목화를 조면으로 가공하는 조면업, 조면을 가공하여 면사(綿絲 : 솜으로 만든 실)를 생산하는 방적업, 면사를 짜서 면직물을 생산하는 면직물업, 누에고치로부터 실을 잣는 제사업으로 구성되는데, 방직원료 생산부문인 조면업과 제사업에 일본 독점자본의 홀랑 먹어치웠으니 어찌 되겠는가. 조선 땅의 공장에서 나온 실이 일본으로 넘어가더니 게서 몇 배로 비싼 천이 되어서야 한반도로 다시 왔다. 이게 어디 면만의 일이겠는가. 고무, 설탕, 종이처럼 사람이 살아있는 이상 필수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대중소비재는 죄 일제가 틀어잡고 있었으니 세금은 높고 물가는 오르며 임금은 툭하면 삭감되니 말 그대로 형편 없었다.

이래놓으니 일제강점기의 조신인은 결코 돈을 벌 수가 없었다. 아, 나라와 같은 민족을 팔아넘기고 부자 된 놈들도 있긴 하다. 한국에서 올드머니 어쩌고 하면 '오, 너희 조부는 민족반역자였니 아니면 독재부역자였니?' 소리가 나오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데, 이제 전자는 좀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아무튼, 20년대 불황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1923년 7월 서울 소재의 4개 고무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 150여 명이 임금 삭감에 항의하고 요즘 말로 성폭력을 저지르는 감독관의 파면을 요구하며 파업을 한 게다. 이게 일제 강점기 여성들이 벌인 최초의 쟁의로 노동운동사에 기록되어있다. 

이 파업에서 고무공장 여공들은 광화문에서 집단단식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이들은 타협안을 받아내는데 성공해서 승리의 기록을 남기나, 이 과정에서 노동연맹회 간부들은 뇌동죄라며 끌려가서 옥고를 치루고 벌금형을 받았다. 이와 관련되어 자료를 찾아본다면 순전히 여성들의 힘만으로 해냈다는 걸 감탄하는 논조로 적어놓은 기록들을 쉽게 발견할 텐데, 그렇다. 여성노동문제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시대였단 말이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요즘이라고 크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요즘은 강성노조로 명성 있는 현대차 노조도 이 부분에선 한 대 맞아도 할 말 없는 전적을 보유하고 있는 건 잘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요건 뒤에 얘기해줄 테니 기다려라.

1930년대가 되면 일제는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탄압하며 감시한다. 1931년 5월 29일 평원고무공장의 여성노동자 강주룡 열사의 생이 그 증거다. 공장 지붕에 올라 8시간동안 농성을 벌여 임금 삭감을 저지한 그는 노동운동사에 최초의 고공농성을 벌인 이로 남겨졌고 또 당시 언론들이 '여류투사 강 여사', '체공녀', '평양의 히로인' 같은 수식어를 붙였지만 경성고부 여직공 조합의 주요 간부들은 해고되었으며 강주룡 열사 또한 해고 되어 병을 얻고 이듬해 빈민굴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래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조직화는 계속되었다. 이순금 투사, 이원봉 투사, 허균 투사, 이재유 투사 등 다양한 계열의 활동가들이 여성노동자를 의식화, 조직화하고 대중투쟁을 벌이는 데 동참했고... 동시에 근대의 노동운동은 독립운동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들이 벌인 노동운동은 자신들의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만을 요구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회혁명과 민족독립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끊임없이 재조명하려는 민주 진영과 이를 못마땅히 여기며 일본 아녔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 떠드는 뉴라이트 진영이 입장 차가 명확하게 갈리는 것도 알아두면 좋다.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을 품은 사람도 있을 게다. '아니, 현대 얘기 하려던 거 아녔나? 여공 얘기 한다더니 왜 근대부터 얘길 꺼내?' 합당한 의문이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60~80년대 여공의 처지가 일제 강점기랑 비교해서 나은 구석이 거의 없어서 그렇다.

60년대 박정희 정권은 수출을 울부짖으며 외화벌이에 눈이 돌아있었다. 시기적으로도 그렇다. 60년대 미국에서는 소비지상주의로 헤게모니가 넘어가고 있었다.  저렴한 노동자들이 넘쳐나는 나라에서 일단 물건을 저렴하게 찍어내면 팔리는 시대니 일제가 여공들에게 했던 사람 미만 취급은 박정희 정권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입으로야 산업역군이니 수출전사니 생색내듯 칭찬 몇 마디 던져주고 하루 12시간 초과 근무와 공장에서 노동자 임금 후려치기 용으로 쓰던 도급제도 반복되었고, 야근은 당연했으며, 공장과 기숙사의 열악한 환경, 일제강점기서부터 이어져오던 공장 내 성범죄 문제도 여전했다. 노동운동? 배운 것도 없는 년들이 감히 꿈도 꾸면 안 되는 짓이었다. 이 부분을 특히 프로파간다할 정도였고 말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꼭 '박정희 정권은 그래도 여공 챙겨줬거든! 산업체부설학교를 세워서 여공들도 공부하게 해줬잖아!' 같은 소리를 하는 양반들이 있어서 요 산업체부설학교 얘기부터 미리 짚고 넘어가자면, 기업에게 교육기관 설립하라고 한 건 그렇다 치자. 근데 하루 12시간 노동하고 온 10대 여자애들에게(지난 글에서도 강조했지만 60년대 여공의 절대다수는 10대였다.) 니가 배우고 싶댔으니 학교 가서 배우거라 하면 처음엔 그놈의 근성으로 버티더라도 지쳐서 배울 수 있긴 할 것 같은가? 이걸 혜택이라고 부르기도 웃기는 일인데, 1977년 당시 전체 여공의 10%도 안 되게 다녔는데 거 참 대단한 보살핌이다, 그래. 그런 여공들 대상으로 프로파간다까지 주입해댄 것도 교육이라고 하지 그러나. 그럼 짐승이 사람 말을 한다고 감탄이라도 나올 텐데.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자.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 노동운동의 주역은 여공이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로 각계에서 도움의 손길이 커진 건 엄연한 사실이지만 정작 여공들의 모습은 너무 지워진 채로 두는 것 같아 강조하는 게다. 도와준 이들이 많았고 그들 모두가 대단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 노동운동에서의 당사자이자 제일 길고 커다란 싸움을 해야 했던 이들은 여공이잖은가.

70년대 노동운동이라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에서 사람의 피와 살로 빚어낸 인권의 기반이나 다름 없다. 이때 한국은 북한과 체제경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법 자체는 굉장히 잘 갖춰놓았는데 이를 단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었고, 법률상 노동조합도 있긴 있었는데 지금도 존재하는 한국노총 같은 어용노조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용노조가 노동자를 위해 제대로 하는 게 있겠는가. 게다가 어용노조도 감투라고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가 간부에게 돈 좀 찔러주면 고거 받고 시시덕거리면서 앞장서고 같잖은 직급 달고 있다고 여공 기숙사에 숨어들어 성범죄나 저지르는 뭐...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머저리들도 제법 많았다.

이런 상황에 신물이 난 여공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노조를 원했고, 만들었다. 그렇게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민주노조' 물결이 기숙사 안의 여공들에게서도 시작됐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대학생들과 종교단체 등이 위장취업을 해가며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여공들이 그들과 함께 노동자 권리나 법률지식들을 공부해가면서 새로운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뭉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을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 대했는지는 예상이 갈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게 '동일방직 노동자투쟁'이다. 뭐, 자극적으로 얘기하면 동일방직 똥물 사건이라고 부르는 그 사건 말이다.

1972년, 동일방직의 노동운동은 최초로 여성 위원장 주길자 지부장을 선출했다. 이후 동일방직 노조는 남성독점의 어용노조를 깨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때 산선, 정식 명칭은 도시산업선교회의 도움이 있긴 했는데 아무튼. 사측은 "여자들이 해봐야 얼마나 하겠냐", "남성 간부보다 다루기 쉬울 것"이라며 무시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노조측은 남녀임금차별 철폐, 생리휴가 쟁취, 식사 시간 확보, 환풍기 설치 등을 요구하며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에 명시된 기본 권리를 요구하며 타협하지 않았다. 뭐... 이전 같았으면 간부 매수하고 쓱 뭉갰을 텐데 이게 안 먹히니 당황한 사측은 시간 끌기에 들어가며 노조를 와해시킬 기회를 노렸다. 다른 핑계 대면서 조합원들을 해고하고 남성 조합원들을 매수해서 노조의 지부장 선거 때 대의원으로 나가게 지시해 주길자 지부장이 아니라 남성 대의원이 신임 지부장으로 선출되도록 작당질도 하고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조합원 200여 명이 노조 사무실 앞에서 철야농성에 돌입했는데 회사는 여기에 기숙사에 있는 여공들이 합류할까봐 대문에다가 못질을 해가며 기숙사에 여공들을 감금했다. 그러자 여공들은 창문을 깨고 담을 넘어가며 농성장에 합류했고, 그렇게 800여 명으로 농성자 수가 늘어나니 회사측은 정문을 봉쇄하고 수도와 전기를 끊어버려 물과 음식도 없이, 외부 지원도 못 오도록 감금해버린다.

그렇게 농성 3일차가 되자 곤봉으로 완전무장한 경찰이 진입해왔다. 여공들은 속옷차림으로 팔짱을 끼고 저항했지만 회사 간부가 저 자가 주동자라고 손짓하는 대로 경찰은 여공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곤봉을 휘두르며 72명을 연행해갔다. 다급해진 여공들은 버스가 출발하지 못하게 버스 바퀴 아래 기어들어가고 인천 동부경찰서까지 쫓아갔지만 그 어느 언론도 이를 다뤄주지 않았다. 그래도 조합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손수 유인물을 뽑아 사람들에게 알리며 1977년 1월 21일 동일방직 사건 수습 투쟁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투쟁을 이어나갔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긴 한데, 이 사건 뒤에선 중앙정보부가 회사를 후원하고 있었다. 어이 없지? 현실이다.

그러다 1978년 2월 21일, 그 유명한 똥물 사건이 일어났다. 노조간부들과 대의원들이 대의원 선거일에 새벽 투표하러 오는 퇴근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6명의 남성들이 소리를 지르며 사무실에 쳐들어와서 기물들을 죄 때려부수고  똥물을 뿌려댔다. 당시 이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왔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겠다>에 적힌 내용은 이렇다.

[지난 21일 새벽 출근하는 저희들은 희망과 기대를 갖고 선거장으로 갔는데 몇몇 술 먹은 회사 측 남자들이 몽둥이로 노동조합 사무실의 기물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투표함을 모두 때려 부셨고 투표하러 온 저희 조합원들을 패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걸레에 똥을 묻혀 얼굴에 문지르며 입에 먹이고 가슴 속에 집어넣으며 노동조합 사무실과 탈의장에 벗어놓은 옷에도 모두 바께쓰로 똥을 뿌려 놓았으며 회사의 조종을 받는 박복례는 똥을 들고 다니는 깡패 같은 남자들에게 "저년에게 먹여라"고 지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탈의장에서 옷도 못 갈아입은 저희들은 얇은 치마와 반팔 작업복을 입은 채로 영하의 새벽 공기 속에서 이들에게서 똥을 뒤집어쓰고 눈도 못 뜨고 귀와 입으로 온통 들어간 이 울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추운 줄도 모르고 발을 뒹굴며 우리는 "아무리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도 인간이다. 우리는 똥을 먹을 수는 없다"라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치안 유지를 위해 동원된 정복경찰들은 도와달라고 외치는 저희들에게 "야 이 썅년들아 입 닥쳐! 이따가 말릴 꺼야"하며 욕설만 퍼붓고 구경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래도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입니까? 이렇게 매를 맞고 똥을 뒤집어썼어도 우리는 투표하려고 노조사무실을 들어가려 했으나 깡패 남자들이 점령하여 난투극이 벌어져 우리는 70명이 부상을 당하고 내던지는 유리에 손이 찢겨 7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 어떤 언론도 이들을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해결'을 생각해낸 건 또 중앙정보부였다. 이 사건으로 124명이 해고된 데도 중앙정보부의 명령이 있었고 말이다. 동일방직 민주노조운동은 그렇게 해고노동자들의 복직투쟁이 되었다. 생각해보라, 중앙정보부가 한 짓이니 해고자들이 어디 다시 취직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23년이 흐른 후에야 2001년 김대중 정부가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2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고 2004년 대법원은 전원 복직 판결을 내렸다. 여기까지 오는 데 26년이나 걸렸다.

동일방직 노조 파괴 공작 사건 말고도 또 유명한 것이 YH무역 농성 사건이다. 박정희 정부가 열심히 밀어주던 가발업체인 YH무역의 여공들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노조를 결성했더니만 회사가 자산을 미국으로 싹~ 빼돌리고 폐업을 하더라. 내일모레면 회사가 문을 닫아버린다고 하니 다급했던 여공 186명이 당시 서울 마포에 있던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들이 정당 당사 점거농성을 했으니 당연히 언론의 이목이 쏠릴 게 아니가. 모든 언론이 이 일을 다루었고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또한 우호적인 태도였기 때문에 잘 해결되는가 싶었다가, 돌연 경찰이 새벽에 노동자들을 모조리 강제 연행했다. 이때 걸린 시간은 고작 20분이었고, 이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사망했으며 신민당 의원, 당직자, 기자들 모두가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얼마나 이 과정이 폭력적이었는지 감이 좀 오는가? 이 사건은 오늘날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게 되는 도화선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글을 통해 이제는 노동운동도 민주화운동에 포함된다고 하는지 이해했을 것이다. 지면도 모자르고 슬슬 체력적으로 한계니 80년대부터 노동운동이 자동차, 조선, 화학산업 등에서 종사하는 남성으로 포커스가 옮겨지며 노동자와 노조 이미지가 지금처럼 고정된 이야기는 다음에 하는 걸로 하자.

그리고 눈치챘겠지만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존재하는 블루칼라 노동자에 대한 혐오 자체는 사실 어떤 의미에선 일제와 독재의 잔재기도 하다. 외환위기가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낸 깊은 상처 중 하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엘리트 이미지를 좋아하는 거야 뭐 그럴 수 있긴 한데... 정작 그 엘리트도 과거와 비교하면 이렇게 추레해진 얘기도 기회가 되면 해보는 걸로 하고 이만 줄이겠다.

사족 1. 아... 가사노동과 돌봄노동 쪽 얘기도 한 번은 해줘야 하는데 갈 길 멀다... 천천히 기다려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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