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내 절교를 받아라 - 6화
친구가 가슴을 만져요, 라는 문장을 치자마자 촤르륵- 뜨는 검색 결과들. 그런데 온통 있는 것이라곤...
남자친구가 가슴을 만져요, 남자친구가 키스할 때 가슴을 만져요, 남자친구가, 남자친구가... 남자친구가!!!
......아니 남자친구가.... 아니란 말이야.
다시 쳐야지.
나는 문장의 첫 부분에 커서를 놓고 잠시 뜸을 들이다 결국, '여자'라고 쳤다. '여자'친구가 가슴을 만져요. 그러나 온통 뜨는 것이라고는, 여자친구의 가슴을 만져버렸어요, 저는 남자고요, 사귄 지 한 달 됐는데 여자친구의 가슴을 어쩌고저쩌고... 아니야 이 많은 고민들 중에서 내 고민이랑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여자'한 명쯤은 있을 거야.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제발, 제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모니터를 훑었다.
그러나,
그런 건 없었다.
전 여잔데요, 제 친구가 가슴을 만져요, 아 제 친구도 여자예요, 같은 고민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
........
".......아놔."
모니터 앞에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내 절교를 받아라 6화
6. 엄마 아빠의 스킨십이 태아에 미치는 영향 下
의외로 상식 밖의 일이 발생하면 생각보다 담담해진다는걸, 나는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정수현의 손이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내 가슴 위로 올라온 까닭이기도 했다. 마치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나는 정수현의 손이 내 가슴 위로 올라오는 장면을 그저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수현은 내 가슴 위의 제 손을 바라보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극도의 황당함을 맞이할 때, 인간은 할 말을 잃고 얼어붙는다. 나는 그걸 이 사건으로 깨닫게 되었다.
왼쪽 가슴 위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이내 정수현은 자연스럽게 손바닥을 구부려 가슴의 굴곡에 맞게 가슴을 잡았다. 감싸 쥐었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계속 귓바퀴에서 내 심장소리를 들었다. 혹시나 내가 사실은 엄청 당황스러워하고 이렇게 떨고 있다는 걸 정수현이 알아챌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정수현이 감싸 쥔 가슴이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어서 더 신경이 쓰였다.
놀랍게도 한참 동안 정수현은 그냥 감싸 쥐고 있기만 했다.
"......"
"......"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정말 하얘져버려서 나는 그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수현을 바라보았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정수현은 내 놀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정수현이 왜 또라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런 면을 꼽을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상식을 뒤엎는 행동을 할 때마다 더없이 자연스럽고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있는 묘한 눈빛. 오히려 당하는 사람의 가치관을 흔드는 천연덕스러운 뻔뻔함.
옆으로 누운 채 나를 바라보던 정수현의 눈이 밑으로 깔렸다. 달빛에 빛나는 동공이 내리까는 대로 나도 정수현의 시선으로 함께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전히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손바닥의 온기. 마치 열을 재는 사람처럼 가슴팍 위로 손을 대는 정수현의 얼굴은 묘한 걸 넘어서 조금 진지해 보였다.
안
돼
!!
다행히 잠시 얼어붙었던 내 이성이 내게 소리쳤다. 더 길어지다간 정말 분위기가 이상해질 게 확실해서...
아니, 본능적인 반사 신경으로 정수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경보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진지하게 이 이상한 상황을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스스로도 어떻게 될지 자신이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세히 정의 내릴 순 없지만, 되게 기분이 이상했다.
탁, 내가 정수현의 손을 쳐내고 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수현을 등지고 누운 채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리며 눈을 꼭 감았다. 심장이, 진짜, 막, 귓가에 붙어있는 것처럼 쿵쾅쿵쾅 거려서 미칠 것 같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숨을 조용히 몰아쉬었다. 저절로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렇게 힘을 주지 않으면, 내가 동요했다는 사실을 정수현에게 들킬 것 같았으니까. 뭔가, 들키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다거나 민망하다거나, 그런 종류의 말로는 좀 부족한 감정이었다. 머릿속이 하나도 정리되지 않았다.
"... 미쳤어?"
"어땠어?"
뭐가, 하고 물으려다가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어땠냐니? 뭐가 어땠냔 말이야, 바보 같은 정수현아. 친구에게 성추행을 당한 느낌이 어떠신가요? 하고 묻는 거니.
그리고, 제가 어떤 대답을 하든 정수현은 집요하게 이상한 질문을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해댈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들었으므로, 나는 최대한 무시하고 잠을 자는 게 이 상황의 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찹쌀떠어억."
그러나 이내 등을 콕콕 찌르는 손가락에 움찔거리며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움찔거리자 정수현은 기다렸다는 듯 등이며 허리며 옆구리를 사정없이 콕콕 찔러왔다. 정말 줘패고 싶은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정수현은 내가 간지럼에 민감한 걸 어찌 그리도 잘 아는지 아주 정곡만 찔러댄다.
"찹쌀떠어어억."
"찹쌀떠억."
"아이참, 우리 찹쌀떠어억."
아!!! 진짜!!!
결국 질끈 감았던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정수현의 또라이짓이 이어졌다. 내 티셔츠를 쭈욱 늘리며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잘 거라고!"
나는 여전히 정수현을 등진 채 외치듯 소릴 질렀다.
"어땠냐니깐?"
"뭐가?!"
"내가 만진 거..."
"....."
그때, 나는 잠시 정수현의 또라이적인 성격을 오랫동안 접할 기회가 없던 스스로를 원망했다. 잊고 있었다. 내 인생 최대의 또라이. 내가 왜 정수현이랑 여행을 왔으며, 지금 이 모텔에!! 한 침대에!! 누워있는가. 아니, 왜 저 또라이는 왜 내 가슴을 만지고 그 감상을 묻는 것인가. 그것은 다 이 또라이를 친구로 둔 내 잘못이라는 걸 김아연, 너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
나는 자포자기하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냥 무미건조하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다. 더 이상 상대해 주기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피곤하고 당황스럽고 긴장이 풀려서 빨리 잠에 들고 싶기도 했다. 진심으로 피곤했다. 정말 진심으로...
"아무렇지도 않았어."
"어? 정말?"
"그래. 그러니까 어서 자."
"진짜 아무렇지도?"
"아, 그렇다니깐?"
아무렇지도 않지 않으면 어쩔 건데? 그게 더 문제잖아 이 바보 같은 정수현아.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참고 나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빌었다. 부처님 하느님 별님 달님.... 제발 내일이 되면 방금까지 있었던 제 첫 외박 여행의 기억이 말끔히 사라지게 해주세요. 아니, 적어도 이 모텔에서 있었던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해주세요. 아니, 아니, 정수현이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아니, 아니, 아니, 그냥 ATM기만 있게 해주세요. 돌아갈 땐 혼자 돌아가고 싶어요. 그냥 돈 뽑아서 혼자 조용히 기차 타고 돌아가고 싶어요. 그것도 안되면 그냥 정수현이 내일 아침 제시간에 일어나게만 해주...
.....어?
.......
.......
.......
......어.... 어..... 어......?
침대가 출렁이는 느낌 1초,
부드럽게 뒤에서 허리를 껴안아오는 손길 1초,
그리고 품에 나를 꼭 고정시키는 느낌 1초,
티셔츠 안으로 배를 쓸어오는 느낌 1초,
그리고....
.....한 손에 하나씩. 두 손을 교차해 내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 쥐는 느낌.... 1..... 초.....
"......"
"......"
"......"
"......"
내가, 그 순간, 거부하지도 말을 하지도 놀라지도 않은 까닭은,
방금 전과 달리 너무 자연스럽게 나를 껴안아 오는 정수현의 기척 때문인지 아니면,
말이 없이 한참 동안 그렇게 있어도, 왜인지 좀 전의 민망했던 느낌이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아서.... 잘못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도 나지 않고 그냥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래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응?"
"......"
"오늘은 이렇게 자자, 찹쌀떡."
"......"
"... 잘 자."
"......."
정수현이 속삭이듯 말할 때마다 목덜미에 숨결이 닿았다. 잘 자,라는 말을 끝으로 정수현의 이마가 톡, 내 어깨에 닿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도 잤다. 정말 정신없이. 등 뒤가 따뜻해서, 마치 사방에서 나를 감싸 안아주는 매트에 안긴 것처럼 안정감이 들었다. 그리고...
가슴께가 따뜻하니 기분이 좋아서, 그냥,
그냥,
그냥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이래도 되지 않을까, 하고...
눈을 감았다.
-
"껴안고 자도 돼?"
그리고 약 2년 후 지금.
"...... 있잖아. 내가 인터넷에 쳐 봤는데..."
아쉬운 대로 여름이불을 끙끙 들고 와서 바닥에 까는 나를 한참 지켜보던 정수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침대 매트를 팡팡 때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혼자 자." 임산부니까 특별히 침대를 양보해주겠노라고 말을 함으로써 나는 정수현의 저 말을 듣지 않으려고 수를 썼다. 그러나, 역시 귀신같이 뭔가 감지한 듯 샐쭉하니 웃는 정수현.
"이거 네 침대잖아. 어서 올라와, 찹쌀떡."
"......"
"어서어어-"
모텔에서의 밤 이후, 정수현은 가끔씩 우리 집에서 잤다. 술을 마시고 올 때도, 과제를 핑계로, 혹은 잘못을 저지르고 집에서 쫓겨나서, 혹은 같잖게도 내 생일을 챙겨주겠다는 명목으로 아주 자취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문제는 그 이후로 이 또라이같은 년이 자꾸만 등 뒤로 슬쩍 다가와 그때처럼 가슴을 만져대는 거였다. 몇 번 그런 일이 있자, 나는 좀 혼란스러워졌다. 내 평생의 가치관과 우정론에 따르면,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동성의 친구가 가슴을 만지는 건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무인모텔 사건 이후 너무 당연하게 내 가슴을 감싸 쥐며 잠을 쳐자는 정수현 때문에 나는 한동안 정수현을 피해 다니기도 하고, 혹시나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나 싶어서 은근히 인터넷에 검색도 해보고 혼자 끙끙 앓았다.
게다가 문제는, 회를 거듭할수록 너무 당연하게 그 짓을 한다는 거였다. "끌어안고 자도 돼?", "안고 자도 돼?", "옆에서 자도 돼?" 등등의 말은 모두 "네 가슴을 감싸 쥐고 자도 돼?"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이게 무슨 말 못할 고민이란 말인가. 살다 살다 별 희한한 남자들은 못 만나봐도 별 희한한 또라이 친구 한 명을 제대로 만나 나는 스물넷을 먹을 이때까지 정체성의 혼란과 가치관의 흔들림에 기분이 묘했다.
"남자랑 어디까지 가봤어?"
언젠가 과의 여자 동기들끼리 술자리를 벌이던 자리에서, 제법 친해진 선배 하나가 물었다. 그런 거 없어요,라고 말하고 말없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켤 수밖에 없던 이유는...
"전 가슴까지요. 딱 가슴까지. 키스하거나 잠을 잘 때 만지는 정도?"
라는 다른 동기의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진 까닭이었다.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 찔리고 민망해서.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비정상적인 관계야. 정수현과 나는. 말도 안 돼. 애인과 할만한 스킨십을... 사실은 동성의 친구와 나누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알까.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렇게 또 나를 보며,
"끌어안고 자도 돼?"
하고 묻는 뻔뻔한 정수현에게 똑바로 말해주기로.
"친구끼리 가슴을 만지진 않아."
아, 드디어 말했다.
민망함에 우물쭈물하던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차마 정수현을 똑바로 쳐다보진 못하고 선언하듯 내뱉었다. 이제, 좀 정신을 차리란 말이야. 너 때문에 나는 스물넷에 사춘기가 온 거 같단 말이야! 아 진짜.
"응. 맞아."
....어?
응, 맞아, 라는 말에 나는 요를 깔다 말고 정수현이 앉아있는 침대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정수현이 내 팔을 잡고 쭈욱,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방금 내가 들은 정수현의 말을 곱씹으며,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정수현의 옆에 털썩 주저앉게 되고, 정수현은 내가 쥐고 있는 이불깃을 빼앗으며 다시금 침대의 제 옆자리를 팡팡 때린다.
"근데, 넌 아빠잖아."
친구가 아니고 말이야, 하며 정수현이 아주 샤랄라 눈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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