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길

온달시프

by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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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뭐하고 있었나요?"

의문이 아니라 확신이 깔린 잔잔한 투로, 언제나와 같이 무심해 보이나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들에게 지극한 애정을 담고 있는 눈으로 그 다를 바 없는 시선을 보내는 고룡의 후예가 이방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퍽 이상해 보일 법도 하다. 곁에 있는 짐덩이라고 부르는 이를 놀리지도 않고, 망령의 왕에게 시비를 걸지도 않고, 무기를 손질하지도 않으며 꽃을 쥐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것도 손 안에서 쉽사리 뭉개질 것 같이 연약한 것을 말이다.

그 이상한 일을 하는 모습이 나쁘지는 않았는지 홀로 있는 이의 옆자리를 차지해 사붓이 주저앉고는 하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신경쓰인다기보다는 잔잔한 눈빛으로. 그러나 그 시선이 이미 닿았으니 어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나. 착한 아이라며 머리를 쓰다듬고, 그 손길에 온정이 있고, 닿아오는 것에 길들여져 결국 착한 아이를 자처하게 만드는 이의 시선을 놓칠 수는 없었다. 이럴 때마다 스스로 꼬리를 흔드는 개라도 된 기분이었다만 착실하게 본인 입으로는 어리광을 받아주었으니 버릇이 나빠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별거 아니야. 예전 생각이 나서 그런다."

"예전 생각이라면"

"가우리에서의 일이지. 내가 대장군이 되기도 전이었으니 벌써 꽤 지났군. 동네 꼬맹이들이 매번 만들어 달라고 어찌나 성화던지, 그래서 자연스럽게 만드는 실력이 늘었고."

말하면서도 움직이던 손은 이윽고 만들어진 화관을 내보였다. 딱 사람이 쓰기에 알맞고 보기에도 좋은 것이라 말한대로 제법 솜씨가 좋은 모습이었다. 완성된 것을 잠시 바라보던 시프리에드는 기억에 담으려는 듯 눈을 한번 깜빡이곤 온달을 올려다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착한 아이였네요. 이렇게 기특한 것을 만들 줄도 알고."

"..나 원. 이런 때에도 그런 말을 해야 성에 차시나."

부드러운 미소와 어이없는 웃음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 알 수 없는 길을 동행하면서 제법 많이 들어온 말이다. 처음에는 그저 놀리는 것이나 살아온 것에 비례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시프리에드가 말하는 다정임을 안다. 정말 기특하거나, 온달이 과거를 말할 때에나, 기꺼이 앞에 나서고자 할 때. 사람과 사람으로서 있고자 할 때. 본인 또한 멀리 떠나기를 자처해 역사의 개입을 피하고자 했으면서 이 갈 곳 없는 이방인에게는 소속감을 쥐여주려고 하는 모습이 말에 다 담기지 않은 다정이다.

그 애정의 깊이가 들여다보면 한 없이 깊어 자신도 애정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같지 못하고 그보다 더 깊게. 하지만 이것을 저 이가 알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알기에 늦은 감이 있었으니. 그러니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려 해봐도 나오는 것은 이정도였다.

생각을 이으며 온달은 손에 들린 화관을 머리 위에 올려주었다. 먼 곳에 있을 자신의 주군이 생각나는 모양새였다. 비록 올려주는 이는 자신이 아니었으나 지금의 공간에 온전히 있는 것은 둘 뿐이었다. 손이 거두어지고 머리에 안착한 모습은 생각보다 더 어울리고 생각만큼 예뻤다. 작지만 가냘프지 않은 꽃의 모양을 그대로 담은 사람이니 당연히 잘 어울렸다.

"칭찬에 약한 줄은 알기야 했지만 기특하다고 주는 건가요? 이렇게 알기 쉬울 줄은."

"몰랐나? 항상 나를 꿰뚫어보시기에 고룡의 후예께서는 통찰력이 당연히 있으신 줄 알았는데."

"꿰뚫어졌나요?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아무튼 고마워요. 이런 걸 쓰는 건 굉장히 오랜만인데. 어울리나요?"

오랜만이라는 말에 온달은 자신이 체감하지 못할 긴 시간을 잠시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시프리에드는 외관에 비해 누가 보아도 어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으나 지금보다 더 작고, 여리고, 가냘픈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다른 시간도 자신이 짐작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사실을 자각하며 옆의 아름다운 이를 보자니 입 밖으로 나올 말이 입에 잠시 걸렸다. 우리가 걸어온 길이 이토록 다른데, 잠시의 우연으로 만나선 시간이 달라 결국에는 남을 기적을 보아 무엇이든 쉽게 평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무척 어울려. 어쩌다보니 당신을 생각하며 만들게 된 것 같군."

고르고 골라 나온 말은 되려 온달이 한 일을 자각하게 했다. 그랬다. 꽃을 보아서 해온 일이 생각난 이유. 부탁하는 이도 없는데 자연스레 손이 움직인 이유. 크기가 적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적당한 것. 눈과 머리칼의 색을 그대로 빼다 박아 관을 씌워 이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시작부터 온통 시프리에드가 가득 들어있었기 때문에.

침묵이 흘렀다. 말한 이는 가려진 것을 다시금 깨달아 입을 열지 못했고 들은 이는 정제하지 않은 낯을 잠시 들여다 보아 열지 못했다. 바람이 선선하게 스쳐지나가 두 사람만 있는 곳을 메웠다. 어쩌면 길고, 어쩌면 짧은 시간이 흘러 화관을 만지작거리던 시프리에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칭찬은 잘 받을게요. 아마 만들어준 사람의 솜씨가 제법 좋은 것 같지만."

"많이 만들었다니까."

"장담할 만 하네요."

침묵에 비해 가벼운 말들이 오갔다. 가볍지 않은 시간이 있었던 것과 달리 누구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딱 평소대로의 그들처럼. 자리를 파하려는 와중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던 시프리에드가 돌아서 온달을 보곤 입을 열었다.

"당신 생일은 달이 둥근 날이라고 하던가요."

"맞아. 이쪽에서도 똑같은 달력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달의 움직임을 따라 시간을 가늠했지. 그 때를 보름이라고 불러."

"당신 같은 날이네요."

기억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시프리에드는 다시 몸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내 생일을 알려준 적이 있던가요?"

"아니, 딱히 알고 있지는 않았지."

"시간이 없었네요. 지나기도 했고, 많이 기념하지도 않았지만. 알려줄게요. 3월 3일이에요. 이쪽 달력으로, 봄이 오는 날."

"당신도 당신 같은 날이야."

"네. 그럼 그때도 기대할게요. 이거면 충분할 것 같으니까."

무어라 묻기도 전에 손끝이 소중하게 닿는 곳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아주 작은 틈으로, 시프리에드의 얼굴에 평소와 다른 미소가 지어진 것을 볼 수도 있었다. 그 작은 흔적을 보고 온달은 더 이상 가릴 자신이 없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에 무엇을 끼우는 것을 기꺼워 할지, 과연 다른 것을 주어도 충분해 할지. 조금 시답잖고 다분한 것을 떠올리며 작은 등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더랬다.

시간의 흐름이, 날의 변화가 조금 더 기꺼워졌다. 어떤 것이 잘 어울릴지, 어떤 모양을 좋아할지 조금의 틈에 스며들어 생각이 났다. 거창한 것도 쥐여주고 싶었지만 재간이 없고 바라는 것을 주고 싶었다.

그러니, 감기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시프리에드의 표정이 아니며 힘 없이 늘어져가는 몸에 닿는 비가 시프리에드의 능력이 아니기를 바랬다. 전달하지 못할 것이 아닌 실체를 가지고 주기를 바랬다. 운명은 여기까지인지 명멸하는 감각에 모든 것이 흩어졌다.

영혼이 끊어지는 감각이, 돌아온 것은 아주 익숙한 얼굴을 마주한 이후였다. 이름도 난 곳도 모두 잊었다 말해 동행한 이가, 어느새 제 앞에서 자신을 불렀다. 일그러진 표정이 선명했다. 돌아왔다는 사실도 선명했다. 운명이 다시 쓰여지는 것을, 기적을 알게 되었다. 황망한 기분에 안부를 건내면서도 어지러웠다. 정리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또 전혀 알 수 없는 곳이어서 자초지종을 들으니, 온달의 이름은 영웅으로 남아있었고 전쟁이 끝난지는 50년이 흘렀으며, 이곳은 아발론 이라는 국가고 여행자는 이곳의 국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범상치 않은 놈인가 싶더라니 한 나라의 국왕이었을 줄은 몰랐다. 하찮기로는 제일이고 작기로는 누구와도 겨룰 수 있는 놈이긴 했지만 가진 것이나 능력이나 평범하지는 않았던 것이 제법 잘 어울리는 정체였다. 몇 가지 주의할 점이나, 알아야 할 것들을 듣다 보니 어느새 한 건물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곳에 남겨두고는 관습 상 먼저 들어온 기사 중 후임을 안내하는 것이 있다며 떠나갔다. 기사, 이곳에서도 또 다른 주군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것이 낯설지는 않았고 싫지도 않았다. 제법 좋은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시답잖은 것을 떠올리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박, 자박. 신발의 소리라기에도 사람의 맨발이라기에도 애매한 것이 바닥과 맞닿는 소리. 언제나 자신이 몸을 낮추어 바라본 얼굴, 곧게 펴진 등, 바닥을 쓰는 꼬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감정.

눈이 떨렸다. 호흡이 잠시 어지러웠다. 공백의 시간이 돌아와 눌렀다. 웃는 듯 웃지 않는 얼굴로, 고아한 낯으로 바라보는 이는 숨이 끊어지는 와중에도 차마 놓지 못한 이였다. 그리고 그 손에는, 어디서 알았는지. 분명 망가진 대지에서 찾기도 어려울 것인데도 생생하게 나 있는 화관과 같은 꽃 한송이다. 적당한 거리에 왔음에도 더 다가오자 몸이 먼저 기억해서 행동했다. 착한 아이에게, 쓰다듬을 받는 것과 같은 자세가 되어 익숙한 쓰다듬이 아니라 귓가에 장식된 꽃 한송이가 남는다.

"약속을 못 지켰다고 혼내주려고 했더니, 잊고 있는게 있더군요. 선물은 주고 받는 거니까 답례를 해야 한다는 거."

조금 가려진 시야가 완전히 드러난 얼굴은 담담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알지 못했던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기나긴 시간동안, 길었던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것이 있었나. 언제나 다정이리라 생각했던 표정이 아니라 분명하게 슬픔, 그리고 재회가 담겨있다. 작은 손이 어떤 곳으로 가야할지 방황하다가 머리에 얹어졌다. 찬찬히 쓰는 손은 떨림이 느껴진다.

"이번만 봐주는 거에요. 다음에는 안 봐줄테니까, 꼭 약속 지키세요. 정말이지, 얼마나 대단한 걸 주려고 이렇게 늦게 온 건지."

"미안해."

익숙한 핀잔,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손짓. 이것들을 담고 나니 돌아온 것에 현실성이 덧칠되었다. 그래, 이것이 그리웠다. 그들과, 세상과, 숨도 그리웠지만 가장 그리웠던건 지키지 못한 약속과 담아내지 못한 마음과 그 모든 것의 주인이었다. 앞으로 어떤일이 또 일어날지는 모르겠으나 우선은 앞의 작은 몸을 끌어안아 다시 놓게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온달?"

"생일은 아직인가?"

"...아직이에요. 이번에도 놓쳤으면 얼굴 볼 일은 없었겠네요."

"항상 늦어서 미안하군. 그럼 고룡의 후예께서는 어떤걸 원하시나. 내 최대한 맞춰보지."

"그런 건 선물을 주는 쪽이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요? 기대 해놓고 착하게 굴지도 않는 게 실망스럽네요."

"그럼 만들 수 있는 것은 전부 해드려야지."

한 팔로 단단히 붙잡고서 꽃이 내려 앉을 곳을 손으로 훑었다. 처음 내린 화관에, 두를 수 있는 목걸이, 발목에 걸어도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가장 소망하는 바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중히 잡아 물었다.

"그럼, 이곳에 끼워드려도 만족 하시는가?"

팔을 풀어내어 한 쪽 무릎을 닿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끼운다. 손 끝까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 보이는 허상이 보인다. 언젠가의 침묵처럼, 이번에는 달싹이는 쪽이 반전된 채로 허락을 구하여 기다린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길고, 어쩌면 짧은 시간이 흐르고서야 시프리에드의 입이 열렸다.

"그걸 가장 기다렸어요."

답이 떨어지자, 그 위에 입술이 내려 앉는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처럼, 도장을 찍는 것 처럼. 깊게 누르더니 떼어내어선 다른 시간을 걷는 이에게 다정을 넘은 것을 내어준 고룡의 후예에게 웃음을 보인다.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게 된 이가 자신과 종속된 이의 손을 맞잡아 애정을 담고 속삭였다.

"그럴 줄 알고 있었어."

"뻔뻔해라."

"그래도 좋지 않나?"

"그렇다고 치죠."

"사실 오자마자 바로 끼워주는 것도 생각했지만, 이제는 시간이 많으니 당신의 생일까지 기약해야겠어."

"제대로 해주든, 똑같이 해주든 틀리기만 해요."

"하하, 이거 무서워서 기억을 제대로 해내야겠군."

품 안에 몸을 그러안는다.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길, 자신이 가장 원하던 길의 끝이 마주해주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시프리에드."

"네."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알려줄 수 있나?"

그로서, 완벽한 평화가 자리하게 되었다. 흔하지 못한 기적을 통하여, 기적이 만나서, 식상하다면 식상하게. 사랑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모든 사랑으로 새로운 시작을 앞두게 되었다. 이방인이 아닌 자와, 속하게 된 이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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