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iseau bleu sonate

Dear. My blue bird - 2023.12.31

BLUEBIRD SONATA by 감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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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31


톡. 톡. 톡... 뚝.


펜촉이 기어이 부러졌다. 쓰기 위한 도구로서의 존재가 아닌, 단순한 의지와 용도와는 무관한 소리를 내는 물건으로 전락한 것에 대한 말로다. 까만 잉크가 종이 위로 점차 스며들면서, 줄줄 새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뭇 뚱했다. 마치 고민에 빠져있는 듯한 느낌도 있었고, 생각에 잠겨 부러진 펜촉 따위에는 무심하게 관심을 두지 않는 무정한 시선으로도 보였다.

정답을 말하자면, 미카엘레. 그의 정신이 다른 곳에서 유유자적 헤엄치느라 펜촉이 부러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더해서 흘러나온 잉크가 어느새 종이를 푹 적시고 소맷단까지 적시고 있는 것도. 소맷부리가 까만 잉크로 물들어 맨살에 닿을 때쯤 옅은 분홍 눈이 데구르르 굴렀다. 이런. 옷 갈아입기 귀찮은데. 


촉이 부러진 펜을 아무렇게나 책상 위에 올려놓고 벗어나면 걸음은 금세 제 개인 공간으로 옮겨졌다. 세면대로 향해 물 소리와 함께 잉크가 묻은 살을 깨끗이 씻어내었다. 새 셔츠를 입으면서도 어딘가로 도르륵 시선이 흘러갔다. 장식장 뒤편 음각된 상앗빛 작은 문으로. 깜빡. 마치 어떤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그 문을 노려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업무 시간이었다. 


미카엘레는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하지 않았던 짓을 자행했다. 가령 회의 중 다른 생각하기, 일정 착오로 혼자서 주섬주섬 나갈 준비하기, 멍때리기... 누가 보아도 정신이 어딘가로 도망가고 있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물론 정답이다. 실제로 그의 정신은 육체랑 동떨어진 곳에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다. 육체는 얌전히 앉아있었지만, 정신은 얼마 전의 제 컬렉션 룸에 보낸 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재생하기와 되돌리기를 반복적으로 누르며 복기하고 있었다.


노을이 들이치던 창가, 노을에 반짝이던 보석 머리들.

창틀에 올려놓고 했던 키스. 제 목 안으로 꼴깍꼴깍 넘겨주던 독.

노닥노닥 줄다리기하듯 시시콜콜한 신경전. 


“얼굴이 오렌지빛이네요. ”

“어쩐지 얼굴이 따뜻하더라니. ”

“마왕님 같아요. 역광이라. ”

“그래요? 그럼…, …Wer reitet so spät durch Nacht und Wind-? ”


고저를 오가는 미성, 피치를 따라 점점 빨라지고 올라가던 것. 빛을 받아 다이아몬드 부스러기라도 되는 것처럼 반짝이던 먼지들. 


-und wiegen und tanzen und singen dich,


온통 죽은 것들 사이에서 울리던 장송의 세레나데란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됐다. 신화에 나오던 세이렌의 공연이 이러했을까.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미카엘레 바실리 아트록스 라는 인간이 ‘인간에게’ 진심으로 반한 순간이.

그는 그때 처음으로 시간을 박제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렌지빛 노을이 들이치는 창가에 걸터앉아 홀로 마주한 관객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그 광경은 가련한 제물의 독백 같기도, 창가에서 로미오를 기다리며 흥얼거리는 줄리엣과도 같았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미카엘레와 유론 둘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경고등이 울린 참이다. 이게 유론의 허니트랩이라면 자신은 꼼짝없이 걸린 삼손이고 그는 데릴라가 되겠지. 미카엘레는 순간적으로 제 손이 맨손인지 장갑을 낀 손인지 의식했다. 노래하는 카나리아를 새장에 가두고 날개를 꺾어 날아가지 못하게 한 다음 자신만을 위한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 그것은 아주 오랜 역사로 검증된 행동이지 않은가. 

푸른 머리카락은 사파이어로, 희고 고운 피부는 진주로. 반짝이는 녹색빛 눈은 에메랄드가 좋겠지. 가진 미색을 해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듯 박제하는 상상을 했다. 손끝에서부터 변질하는 피부는 고울 테다. 조금 아파하긴 할 테지만...어쩔 수 없지. 혼탁한 눈물을 저 조밀한 입술 사이로 흘려 넣고 귓가에 노래를 불러달라 속삭여야겠다. 모든 세공이 끝나면 바로 여기에. 노을이 비산하는 창틀에 전시하듯 올려놓고 단단하게 굳어진 무릎 가에 뺨을 부빈다면…

그 가정만으로 아찔한 감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기만하듯 언제나 호선을 그리던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려 내려올 만큼.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은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이성이고, 사리 분별이라는 이름의 인내심이었다. 미카엘레가 진정으로 박제하고 싶은 것은 유론이라는 사람 그 자체라기보단, ‘지금’이라는 바로 그 순간 자체를 박제하고 싶은 욕구에 가까웠다.

애석하게도 흐르는 시간을 박제할 요량은 없었고, 미카엘레는 그 사실을 꾸준히 상기하며 그를 동부로 돌려보내는 것에 온 힘을 다했다. 실로 보스다운 인내심이고 참으로 치졸하기 짝이 없는 이유다.

인내심의 고삐가 풀린 태는 종래에 나왔었다. 종종 단독 공연을 해줄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그가 그렇다고 대답했으니 겨우 그것 하나로 만족했었다. 

문제는 그 이후로 나사 하나라도 빠진 것처럼, 그 시간을 복기하는 것에 있었다. 

미카엘레는 자신이 33년간 했던 ‘사랑’이 단순한 착각이었음을 인정했다. 그것들이 사랑이었다면 지금의 그가 유론에게 느끼는 감정의 형태가 규명되지 않는다. 미카엘레는 질시와 탐닉, 소유욕에 익숙했다. 평생을 가져오고 사랑이라 여긴 것들이다. 다만 현재의 그가 느끼는 것들은 사뭇 달랐다. 

조금은 멍하고 입술이 자주 마르며 오렌지 껍질만 봐도 오렌지빛으로 물들었던 그 순간이 떠올라 쿵쿵 귓가에서 심장 소리가 요동치는.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멍하니 다른 생각에 잠겨있던 입술이 열리면 결국 인정의 말이다. 입 밖으로 뱉고 나니 심장이 점점 더 크게 쿵쾅거렸다. 

“보스. 뭔진 모르겠지만 그거 아닙니다. 그게 뭐든 사랑이면 큰일 나요.”

“아니야. 사랑이 맞는 것 같아.”

“예, 아닙니다.”

중얼거리는 말은 또 언제 들었는지 재깍 반대해오는 제 수하를 보며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아? 삐죽이는 입술이 두어번 어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이 맞다. 알아서도 안 되고.

미카엘레는 유론 카나리아의 얼굴에서 뱀의 형상을 지운 적이 없었다. 단 한순간도.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파티장에서부터 그는 카나리아 사람이었고, 다시 마주친 시엘라의 카페에서도 그는 나트릭스의 뱀이었다. 그러니까, 언젠가 ‘노래하는 새의 이름을 달고 어째서 요람으로 갔느냐’는 순수한 물음을 다시 질척이는 혀끝으로 올려내 삼키길 반복하는 꼴이 되었다. 끈덕지게 혀뿌리를 감고 목 안으로 넘어가는 물음이 식도를 넘어 위장 안을 불편하게 불렸다. 

“ … 크리스는?”

“둥지 내에 있을 겁니다. 심부름시키실 일이라면 건너오라 할까요.”

“음음, …아냐.”

간헐적으로 오가던 편지는 이번엔 제가 회신할 차례였다. 시계를 한번 보고, 편지가 들어있던 서랍 손잡이를 손끝으로 톡 쳤다. 아니지. 아니야. 변덕처럼 계획을 수정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급한 일정 없지? 나 오늘부터 휴가.”

“예……오…ㅖ?”

“왜?”

“아아뇨, 갑자기요. 지금요. 여기서요.”

핸드폰을 켜 한참을 찾아 내리던 번호를 발견하면 빠르게 문자를 남겼다. 

[오늘 데이트 어때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황당해하고 있는 얼굴을 담는 눈꼬리가 휘어졌다. 

“응. 내일까지 연락 없으면 그때 카포들한테 알려. 나 휴가 간다고.”

“...”

결정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미카엘레는 벗어둔 자켓을 챙겨 서둘러 제 집무실을 나갔다. 물론 그 모습을 보며 ‘대체 이번엔 또 무슨 병이 도져서’, ‘이번에 또 어디로 가는데.’ 를 차마 묻지 못하고 불안하게 보는 동공만 두 개 남았다. 


일에 몰두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주치의 소견을 따라, 미카엘레는 종종 갑작스러운 휴가를 냈다. 어디까지나 그를 보필하는 크루들에게 갑작스러운 일이지 그 자신에게는 계획하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다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충동적으로 든 생각이고, 충동으로만 내린 결정이었다. 누가 알겠는가. 사뭇 단출해 보이기 까지 한 차림으로 겁도 없이 나트릭스의 카포러짐을 찾아가는 사람이 서부에 둥지를 튼 주인이라고. 

동부는 서부보다 3시간 정도 시차가 나던가.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맞추려다 보니 마땅히 준비한 것도 없다. 공항에서 빌린 렌터카가 시원하게 내달리다 작은 꽃집 앞에 멈췄다. 온실 출신 꽃들이 만발한 꽃집은 한겨울에도 진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 주인의 설명을 한 귀로 흘리며 알록달록한 꽃바구니들을 지나치다 문득 눈이 간 것은 화려한 색채도 없이 진한 향을 뿜어내는 꽃에 시선이 머물렀다. 

“오른쪽은 수선화, 왼쪽은 튜베로즈라는 꽃이에요. 향은 왼쪽이 좋지만, 선물용이라면 수선화가 낫지 않을까요?”

“이건 선물용이 아닌가요?”

“그건 아니지만, 꽃말이 … 조금, 음. …위험한 관계, 달콤한 목소리… 그런 것들이에요. 낮에는 향이 없다가 밤만 되면 향이 진해지거든요. 그래서 적절하지 못한 관계를 질타할 때 쓰기도 해요.”

“나쁘지 않네요. 이걸로 주시죠.”

깜짝 놀란 주인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꽂혀있는 한송이를 꺼내 향을 맡았다.

부적절한 관계.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저가 제안하러 가는 관계란 그런 쪽이니까. 

뉘엿뉘엿 깔리는 짧은 겨울 해를 레드카펫 삼아 사뿐히 밟고, 작은 꽃다발도 한손에 그러쥐고 걷는 걸음이 제법 경쾌하다. 여느 때처럼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린 입매는 흥얼흥얼 노랫말을 읊었다. 

“Leise flehen meine Lieder Durch die Nacht zu dir - In den stillen Hain hernieder Liebchen, komm zu m...”

m...ir? 

끝을 얼버무린 노랫말과 함께 걸음이 멈췄다. 까딱 기우는 고개 끝으로 데구르르 눈동자가 굴렀다. mir.

“...나한테 날아왔으면 좋겠네.”

괜히 꽃다발 위로 코를 묻고 속삭였다. 그리하면 꽃잎 사이로 말이 숨겨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한 향이 비강 안쪽으로 스며들어 혼몽했다.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한다거나, 제 사랑이 부정되는 경우의 수는 생각하지 않았다. 서둘렀다는 감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내세울 것 없는 이들이나 자신 없는 법이지. 차곡차곡 머릿속으로 그가 거절하지 않을 미끼들을 정리하며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속절없이 넋을 놨다. 0.5초 정도. 

“오랜만이네요. Mr. J. 갑자기 무료해지기라도 했어요?”

짧은 겨울 해는 이상하게 미적이며 아래로 떨어졌고 그 탓에 오렌지빛으로 물들어있는 푸르고 흰 뺨을 보는 순간.

미카엘레는 그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요. 보고 싶어서 왔죠.”

오늘의 걸음은 그저 단순히 미셸 록사트가 론 아리나를 보러 온게 아니라 미카엘레 아트록스로서 유론 카나리아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아트록스의 이름을 내려놓고 유론이라는 사람에게 관계의 정립을 제안하러 온 것이다. 이건 그들이 평소에 하던 지독한 놀이랑은 결이 달랐다.

...그러니까, 미카엘레가 준비한 것은 평소의 평화롭고 살벌한 놀이에서나 필요한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악한 뱀에게 치부를 들킬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직 준비가 덜 된 채로 왔는데. 태연함을 가장하며 내민 꽃다발이 왠지 모르게 민망했다. 꽃다발을 받아서 든 채 조곤조곤 울리는 말을 들으며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서로에 대한 말을 나누면서도 머리 한켠은 저울을 이리저리 눌러가며 기울였다. 역시 오늘 말고 다음에 할까. 

“그런데, 유론.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해요.”

“나 믿어요?”

제 물음에 그는 조금 의아한 낯을 띄었다. 왜 이런 걸 묻느냐는 의문이 스친 표정이다. 이내 눈꼬리를 휘고, 입꼬리를 올린 웃음을 그렸다. 세상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빛으로 노래하듯 입술이 열렸다. 

“아니요.”

우리 사이에 그런 게 필요할까요? 꼭꼭 덧붙여 되돌려주는 답까지 완벽했다. 그래. 그럼 그렇지. 유론 카나리아. 이 지독한 독뱀에게 풋풋한 감상이 있을 리가. 마주한 얼굴이 거울처럼 똑같이 사랑스러운 웃음을 그려낸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럼 그냥 내 방식대로 할게요. 어차피 우리 사이에, 그리고 내가 제안할 사이에 신뢰라는 거창한 건 필요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L'amour est un oiseau rebelle …, 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언 십여년 전에 보았던 한 성악가가 부르던 가사를 입 밖으로 되뇌어본다. 사랑은 결코 길들일 수 없는 것. 제 멋대로인 게 사랑이라면, 자신이 지금 하는 짓은 지극히 사랑의 본질에 가까운 행동임이 틀림없다. 그래도 역시 한번 거절당하는 건 조금 가슴 아플 것 같으니까.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턱도 살짝 괴고 눈도 착하게 뜨고, 웃을 듯 말듯 가볍게 입술 끝도 올린다. 잘 생각해봐요. 

“Si tu ne m'aimes pas, je t'aime. 어때요. 나랑 연애할래요?”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거예요. 

사랑에 빠진 남자가 할 법한 모든 멍청한 짓을 한 번씩은 해볼 생각이거든요. 

아니면 내 얼굴은 어때요? 연인으로서 괜찮은 얼굴 아니에요? 

물론 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직후에 당신을 살아있는 보석으로 만들 수 있지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가 서로에게 겨눈 칼날을 치우자는 얘긴 아니에요. 

그건 그대로 두되, 위에 사랑만 얹자는 얘기죠. 어때요?


Schubert - Erlkönig 일부 발췌.

Schubert - Serenade 일부 발췌.

G. Bizet - Opera 'Carmen' Habanera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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