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아티] 눈꽃이 피면 별의 요람으로

03.

파이널 판타지 14 알피노 르베유르x아스트리엘라 로판AU

"아, 좋은 아침, 아리엘. 간밤엔 잘 잤는가?"

"…좋은 아침. 잘… 잤어. 고마워."

"그래, 다행이네. 알리제도 조금 전에 일어났으니 둘이 같이 아침 식사를 하면 되겠군."

아리엘은 머뭇거리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자그마한 창 앞에 일자로 놓인 조리대, 조금 떨어진 뒤의 식탁 앞에 앉아 금방 우린 듯한 홍차를 마시고 있는 알피노의 손에는 글씨가 빼곡한 이름 모를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일주일. '새벽'의 이름 아래 한 팀이 된 세 사람에게 주어진 강제 휴식 기간이었다. 제안을 수락하면 당장이라도 임무를 맡길 것 같았던 민필리아는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건 제대로 된 휴식이에요. 앞으로 일주일 간 무기 들 생각은 마세요. 돌의 집 근처에도 오지 마시고요." 라며 약속한 은신처로 그들을 몰아냈다.

은신처로 제공된 곳은, 돌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의 작은 집이었다. 바닷가 오두막이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지내는 것까지 셋이 함께여야 한다는 건 몰랐던 사실이므로 막 동료가 된 소년소녀들은 퍽 당황했다.

집 안의 구조는 단촐했다. 부엌과 식당을 겸하는 공간, 가림막 없이 이어지는 거실, 거실 한 켠의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2층에 방이 세 개. 그 중 둘은 바로 옆에 붙어 있었고, 남은 하나는 커다란 장식장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 자연스레, 떨어진 방은 유일한 남자인 알피노가, 나머지 두 방은 알리제와 아리엘이 각각 사용하게 되었다. 아리엘이 떨어진 방을 사용하겠다고 했지만 알리제가 강경히 기각했다. 바로 옆 방에 제 쌍둥이 오빠가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듯 했다. 한 날에 태어났어도 남매는 남매였다. 덕분에, 아리엘은 첫 날 잠을 설쳤다.

둘째날. 알피노가 가장 일찍 일어났고, 알리제가 그 다음, 아리엘이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본래도 아침잠이 많은데다 늦게서야 겨우 잠든 탓에 눈 뜬 시각은 정오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쌍둥이는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거의 잊어버렸던 아침 인사를 주고 받는 일은 상당히 어색했다. 또래의 동거인들이 있다는 사실 또한, 많이 어색했다.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 입장이라 더더욱 그랬다. 아리엘은 자기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셋째날. 일어나는 순번은 바뀌지 않았지만 셋 다 오전 중에 하루를 시작했다. 쌍둥이가 권하는 아침 식사를 거절하지 못한 아리엘은 그들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맛은, 그닥 좋지 않았다. 아리엘은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가 작은 노트를 사 왔다. 그리고선 점심 시간이 되기까지 방에 틀어박히더니, 손수 꼼꼼히 간단한 레시피를 몇 가지 정리해 메모한 노트를 쌍둥이에게 건넸다. 필체를 숨기기 위해 왼손으로 시간을 들여 눌러 쓴 비뚜른 메모장을 그들은 기쁘게 받았다. 그 날은 아리엘이 점심부터 저녁까지 요리를 맡았다.

넷째날. 사흘이면 충분히 쉬었다며 알리제가 외출을 제안했다. 점심을 먹고 나섰다가 한 두 시간 후에 비를 맞고 돌아왔다. 매일같이 아침 인사와 밤 인사를 주고 받고 함께 식사를 하고 간식을 먹으며 별 것 없는 대화라도 하다 보면, 그리고 그게 앞으로 같이 활동하게 될 또래들이라면, 자연스레 없던 정도 생겨날 수밖에 없다. 각자의 비밀과 처지도 잊고, 난데없이 쫄딱 젖은 자신과 동갑내기 소년소녀를 돌아본 아리엘은 드물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희귀한 순간을 목격한 알피노와 알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간, 마주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섯째날. 오늘. 쌍둥이와 거리감이 좁아진 아리엘은 도리어 더 어색함을 느꼈다. 벌써 제법 익숙해진 부엌에서, 달궈진 프라이팬에 달걀을 깨뜨리며, 조금 뒤에 앉아 조용히 독서중인 소년을 매우 의식했다. 곧이어 그 자리에 있는 이가 둘이 되면 그 어색함은 배가 될 것이다. 거리감이 좁아졌다는 건, 어찌 할 도리 없이 박혀 있던 얼음 조각이 고작 너닷새만에 결국은 녹았다는 의미다. 일주일이나 한 지붕 아래 휴식 시간을 내어준 건 민필리아의 통찰력인가, 혹은 그러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비롯된 배려였을까.

어찌 되었든 아스트리엘라는 책임을 전가하는 이도, 잘못된 원망을 끝까지 품고 있을 이도 아니었기에.

"앗, 아리엘이 먼저 내려왔네.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알리제."

"…좋은 아침."

"뭐야, 알피노. 먼저 아침 먹었어?"

"으음… 아리엘이 적어 준 대로 뭔가 해 보려 했는데, 부끄럽게도 불 조절을 실패한 듯 해서……."

"내보이기 민망해서 그냥 먹어 없앴다?"

"……알리제,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아, 조금만 더 빨리 내려올걸! 구경거릴 놓쳤네. 부엌은 말짱했어?"

놀릴 기세가 가득한 얼굴로 웃은 알리제가 과장된 몸짓으로 주변을 살폈다. 늘 저를 놀리는 데에 진심인 쌍둥이 동생의 앞에서 알피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락없이 그 나이대 청소년기를 지나는 남매의 모습이었다. 다듬어진 서체로 유려하게 쓰인 서신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것들. 그리고 딴 생각을 하면 꼭 그에 휩쓸려 사고를 치고 마는 아리엘은, 계속 등 뒤를 의식하다 프라이팬을 잘못 쥐고 말았다. 급히 손을 뗐지만 반사적인 신음이 새어나갔다. 뒤에서 들려오던 활기가 뚝 끊겼다. 곧장 그녀의 양 옆으로 긴 그림자가 쑥 드리웠다.

"데였어? 봐봐."

"아니, 괜찮…"

"얕게 데였어도 화상은 화상이네. 보여주게."

"……."

마음의 거리를 줄인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는 걸 보이듯이. 아리엘은, 손에 입는 열상은 익숙하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잠자코 알피노의 손을 타고 터져나온 치유의 빛을 받아들일 밖에는.

* * *

똑똑, 문을 두드리는 맑은 소리가 났다. 아리엘은 침대 위에 주술봉을 놓아두고 노크에 응해 문을 열었다. 알리제였다.

"아, 아직 안 자고 있었네. 다행이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니까……. 왜…?"

"저기. 괜찮으면 잠깐 우리랑 같이 차라도 마시지 않을래?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

미소를 띠고 있긴 했지만 알리제의 눈빛은 진지해 보였다. 아리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를 따랐다.

약하게 때운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그 앞에 놓인 소파에 적당히 앉으니 알피노가 데운 찻잔을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맑은 빛깔의 백차가 그 안을 쪼르르 채웠다.

"…고마워."

"복숭아 백차를 좋아한다고 했던 게 떠올라서 말이네. 오후에 나갔을 때 사 두었네."

아리엘은, 감각이 예민한 만큼 입맛도 까다로웠다. 가리는 게 많다는 뜻이다. 훨씬 더 귀하게 자랐을 알피노, 알리제보다도 더. 조금이라도 식감이나 향이 맞지 않으면 먹지 못했고, 그 향을 내는 뭐가 들어갔는지도 종종 알아차렸다. 음식도 그럴진대, 맛보다 향으로 마시는 차 종류라고 가리지 않을까. 그냥 가볍게 마시려고 모르고 집어 온 차는 추천을 요청한 대로 꽃향기가 나긴 했으나 약간의 알싸함이 있었다. 치른 값이 아깝고 그냥 버리기도 그래서 마시긴 했으나 미묘하게 표정이 굳은 아리엘을 보고, 알피노가 넌지시 취향을 물었다. 가벼운 질문이었기에 아리엘도 가볍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무척 세심한 다정함이었다.

따뜻한 찻물을 한 모금 머금으니 반응을 살피듯, 그러나 예의에 어긋나지는 않게, 푸르른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러왔다. 본래 타인의 눈을 깊이 응시하지는 못하기에 단 한 번도 제대로 오래 마주 본 적은 없는 그 두 눈이, 깊고 깊은, 가장 맑은 바닷물로 빚은 단 하나의 보석 같다는 감상.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의식의 흐름. 새삼스럽게 드는 생각에, 알피노는 상당한 외모의 미소년이니 말이다. 눈으로 자아낸 듯 하얀 머리칼은 솜털처럼 가볍고 보드라워 보이고, 선한 눈매 안에 박힌 새파란 두 눈.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미(美)는 미로 남을 매끄러운 선으로 곱게 그려진 얼굴이다. 그리고 아리엘은, 전부 차치하고 가감없이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와 같이 예쁘게 생긴 사람을 좋아했다. 그러니 다시금 새삼스럽게 생각을 해보자면, 그러한 외관에, 그러한 다정함까지, 그는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인물이었다. 덧붙여, 여기서 말하는 '좋아함'은 평범하게 호감을 사기 쉬운, 이라는 의미이다.

"…어라. 아리엘, 낯빛이 붉은 것 같은데. 열 있어?"

이어지던 혼자만의 감상과 생각들은, 알리제의 한마디에 파도 끝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지근에 앉은 그녀를 보고 가만히 눈을 깜빡인 아리엘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흐음, 하고 목소리를 길게 늘인 알리제는 그녀의 쌍둥이 형제와 빼다 박은 고운 얼굴에 아니면 됐다는 표정을 띠곤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뺨이 발그스레한 아리엘이니 불 앞에선 더 붉어 보일 수도 있겠다 넘긴 듯 했다. 아주 잠깐 넋을 놓고 있던 것에 가깝던 아리엘은 조용히 찻잔만 비워냈다. 그녀가 잘 마시는 것 같으니 알피노도 안심한 듯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알리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니?"

"……뭐긴. 이제 강제 휴가도 끝이잖아."

자그마한 딸기잼 타르트 쿠키를 바삭바삭 두 번에 나눠 먹은 알리제는 가볍게 손을 털고는 말을 이었다.

"그 전에 한 번은 정리를 하고 시작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군."

올 것이 왔다. 아리엘은 긴장을 감추기 위해 부러 눈을 내리깔았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은 있는 대로 어영부영 지내왔지만 이제부턴 다른 의미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자신이 두 사람이 찾고 있는 모르피나 가의 영애 아스트리엘라 라는 것을 들켜선 안 된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들이 저를 찾는 진짜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빚이 있으니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건 거짓은 아닐 테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그들이 지켜야 할 비밀을 늘리지 않기 위해서다. 신분을 숨기고 그들의 나라를 무너지게 만든 원인인 이곳에 망명한 와중에, 그녀의 존재까지 숨겨야 하게 된다면 제약이 더 커질 터였다. 그러니 그녀가 정체를 밝히는 건 먼저 그녀 자신이 숨지 않아도 될 때여야 했다.

"그래, 그럼, 아리엘. 먼저 이야기해주었으면 하네. 그 날 내가 모르피나 영애의 친우였던 자인가 물었을 때, 자네는 부정하지 않았네. 그리고는 민필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였기에, 나는 그걸 긍정의 뜻으로 이해했네만……. 직접 대답해주겠나? 자네는, 그녀의 친우였던 자인가?"

"……."

거짓말을 못하는 것과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다른 일. 거짓말을 하는 것과 자신을 숨기는 일 또한 다른 일이다. 아리엘은 짧게 침묵한 뒤에 조곤히 대답했다.

"…아니. 하지만, 그녀를 잃어서도, 잊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야."

이제 아리엘은,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주일은 짧지만 또한 긴 시간이었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건네주는 다정함을, 아리엘은 언제라도 잃고 싶지 않아졌다. 청명한 하늘색 눈이 조용히 내리감겼다.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잊어도 그녀 스스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잊지 않아야 하니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그 목숨을 내버려선 안 되니까. 모호하게 돌려 말하는 대답뿐이라도 무언가 중요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겠구나 정도로 정리해둘 수는 있을 테다.

알피노와 알리제는, 더 묻지 말라는 듯 눈을 감는 소녀를 보며 잠시 조용해졌다. 무언가 더 듣기 위해서는 그만큼 그들을 밝혀야 했다. 그들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띄웠던 서신 몇 장, 그 끝에 얻어냈으나 불발되고 말았던 그 날 밤의 만남. 이어진 비극. 모르피나 가가 이웃의 귀족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한 것은 평화를 위한 호의에서 시작되었을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지금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끝은 어디서부터 예정되었는지도 모를 참혹한 죽음이었다. 쌍둥이는 그 일에 책임을 느꼈다. 그래서 홀로 살아남았을 가문의 아가씨를 찾고, 진실을 밝혀, 갚아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큰 목적은, 무너진 그들의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다. 일이 잘못되게 만든 것은 결국 샬레이안을 치고자 한 무리일 테니 말이다. 잡아낼 수 있다면, 당장은 어렵더라도 분명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이 애에게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일주일 간 그들이 겪은 아리엘이라는 소녀는, 조용하고 극히 내성적이나, 별 보기를 좋아하고, 달달한 것을 좋아하고, 어여쁘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그 나이대의 소녀 그대로였다. 다만 내면의 중요한 것이 부서져 나간 듯 짙은 어둠 아래 스스로를 죽은 듯이 가라앉히고 있는 것이 문제점일 뿐. 남매는 동일하게 짐작했다. 그녀가 사라진 모르피나 영애에 관해 함구하고 있는 것과, 그 문제점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너희들이 그녀를 찾는 이유는, 뭐야?"

질문을 되돌리지만, 소녀는 그들의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전제 하에 그것을 건넨다. 자신이 모든 것을 밝힐 수 없는 한, 그들도 모든 것을 밝히지 않는 편이 공평하다 여기니까.

알리제는 아리엘이 마음에 들었다. 아카데미에서 사귄 동기들도, 사교계에서 자주 만나는 인사들도, 진정한 의미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그녀와 그녀의 혈육은 늘 한 계단 위에 있었다. 재능으로도, 핏줄로도. 타고나는 우수함에는 선택권이 없었음에도.

하지만, 보라. 눈앞의 이 작은 소녀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고서 도리어 한바탕 충돌함으로서 만났다. 그들이 가진 재능에도 그러려니,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게 그녀가 가진 마법적 재능에 따른 것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이다. 아리엘이 두 사람에게 선을 긋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녀의 성격과 성향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허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알리제에게는 있었다. 할 수 있다면, 처음으로 '친구' 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리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이야말로 인연이 아닐까?

한편, 알피노는 신중한 눈길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그 나이대의 소녀 그대로, 라고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소녀는 아니었다. 그녀가 구사했던 마법의 수준은 그녀가 그들과 같은 선재라 치더라도 결코 평범한 학습으론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녀가 모르피나 가의 영애와 극히 친밀한 관계라는 사실을 더한다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그 정도로 위력 있는 마법을 빠르고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배우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허락되었고, 사교계에도 잘 나가지 않았던 백작가의 아가씨와 깊은 친분을 쌓을 수 있었던 자. 같은 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집안의 사람. 어쩌면 그래서, 처음 그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낯익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모르피나 영애의 편인 이상 아군이 되어줄 것은 확실하지만…….

"…우리는 영애와 영애의 가문에 빚이 있고, 그걸 갚기 위해선 그 날 밤 일어난 일의 진상을 알아야 하네. 알아야만, 영애를 도울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그뿐일세."

"……그래. 알겠어."

이것만큼은 결국 첫만남 때와 달라진 것 없이 제자리걸음이었다. 어쩌겠는가. 아직 이른 것을. 그리고 아리엘은, 그들이 더 말해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도 거기까지만 대답한 것이다.

짧게 한숨 같은 것을 내뱉은 알리제가 찻잔을 들었다.

"아리엘, 그녀를 만났다고 했지. 헤어진 것도 그 강가에서였어?"

"응. 날이 밝으니 사라졌어."

"어디로 갔을지, 짐작된 곳은 없었나?"

"…샬레이안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과격파가 세를 잡고 머지않아 많은 것이 뒤집히기에, 그 생각은 접었어."

갑자기 고국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당황한 건 쌍둥이쪽이었다. 모르피나 가가 그들과 접선한 것까지 알고 있었던 건가?

"왜, 샬레이안으로?"

놀람을 간신히 숨긴 알리제의 질문에, 아리엘은 담담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번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 정도는 말해줘도 될 것 같았다.

"대마법사 셀레스티아는 본디 샬레이안 출신의 마법사였어. 세 개의 국가가 하나로 통합될 때에, 그것을 방해하기 위한 북부의 침략을 저해하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운 그녀에게, 세 왕국의 수장들과 그들이 세운 신 제국의 첫 황제는 감사의 뜻으로 셀레스티아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 하나를 들어주겠다 했지."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현세를 살아가는 그 누구든, 모르피나 가의 시작, 마법사들의 도시의 진정한 주인은 처음부터 그 땅에서 나고 자랐다고 알고 있었으니.

소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이어진다. 동화책이라도 읽어주듯이.

셀레스티아는 세로이 세워진 트라이아 제국으로 귀화하기를 청했다. 그녀는 샬레이안의 마법사였으나 샤토토의 흑마법을 물려받았으며, 자신이 가진 재능과 그것이 자아내는 마법의 위력을 잘 알았다. 수많은 지식을 가르치나 적극적으로 행사하지는 않는 점잖은 조국과는 맞지 않는 힘이다. 물론 본국에서도 가족들에게서도 반대의 목소리는 컸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불세출의 마법사라 불리우는 인재였으므로.

그러한 인재가 스스로 굴러 들어오길 청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던 황제는 그녀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셀레스티아는 트라이아 제국의 마법사가 되었다. 그녀가 늘 데리고 다니던 신비로운 푸른빛의 사역마에게서 딴 성을 하사받고, 공신으로서 받아 마땅한 귀족 작위와 대마법사의 칭호도 수여받았다.

"그래서 그녀의 영지는 그녀의 고향 샬레이안과 맞닿은 국경지대에 주어졌어. 그녀는 마법이란 마땅히 사람을 위해 쓰여야 한다 여겼기에, 그 뜻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자신의 영지를 마법사들의 도시로 만들고, 또한 그 뜻을 이어가게 할 자신의 피에 영구한 인장을 찍었고……."

그것이 바로 신체에 새겨진 채 태어나는 나비 문양이다.

<전설과 설화> 같은 책에나 나와야 할 것 같은 이야기였다. 타닥거리는 장작불 소리가 짧은 침묵을 가로질렀다.

"……모르피나 영애에게 들은 이야기인가?"

"…응."

비밀 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셀레스티아의 수기에만 기록된 이야기였다. 이걸로 제 정체를 더 헷갈려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아리엘이 먼저 방으로 돌아가고, 거실에는 장작 타는 소리만이 남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알리제였다.

"있잖아. 아리엘은 영애의 시녀였던 게 아닐까? 백작가의 후원을 받으면서 마법 공부도 하고, 또래인 영애 곁에서 거의 동무 가깝게 지낸 거지. 영애가 가문의 후계자였다면 그녀도 틀림없이 뛰어난 마법사였을 테니. 우리도 연고 없는 변방의 귀족 자제가 그런 식으로 후원 받아 아카데미 들어오는 경우 많이 봤잖아."

"……모르피나 백작은 제자들도 많이 거뒀었다고 하니, 딸의 또래 아이를 하숙생처럼 들이는 일도 가능했을지 몰라."

"그 영애는 사교 모임에도 별로 관심 없었다고 하니까, 그런 식으로 터놓고 지낼 친구 하나 만들어 줄 생각이었을 것도 같고?"

"그래, 일리 있다. 지금으로선 그 추측이 가장 가능성이 높겠어. 그렇다면… 영애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야기도 어쩌면 아리엘이 그녀를 데리고 도주했다가 놓친 걸 수도 있겠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건, 아니겠지?”

“…….”

물론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절망한 영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하나 남은 친구라도 살리기 위해 혼자 떠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거나. 하지만…….

잠시 그림자가 졌던 알피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랬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여기 있지 않았겠지.”

“하긴. ……으으,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되어서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꼬일 대로 꼬였담! 두고 봐, 이렇게 고생고생하게 만든 놈들, 전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우리도 이만 들어가 자도록 하자. 네가 말했던 대로, 이제 강제 휴가도 끝이니까.”

마지막 휴식의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그들은 이제 비밀 정보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수많은 수수께끼를 품에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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