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필링필링

5.0 에필로그

필링필링(Pilling Feeling)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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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로로-

새소리가 따뜻한 아침의 시작을 알렸다. 지난주였던가, 지지난 주였던가. 내담자의 추천으로 바꾼 모닝콜이었다. 몇 주간 듣고 있는데, 의외로 질리지도 않고 좋은 것을 보니 역시 추천받기를 잘한 것 같다. 멍한 머리를 억지로 굴리며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겨우 잠이 깨었다. 지금 시간은 6시. 대강 헬스장에서 운동한 뒤 출근하면 적당할 시간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없는 기력을 끌어올리려 노력하며 손등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여느 때처럼. 그런 아침이었다.


“타냐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주말 동안 잘 지내셨어요?”

“당연하지. 이따 또 봐?”

바글바글, 언제나와 같은 악수회의 풍경이었다. 타냐는 개운한 기분으로 직원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었다.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언제나 지각하는 사원들은 있고, 나중에야 겨우 시간을 내서 나를 찾아오고는 했다. 나가 군 역시 종종 그런 축에 속했다. 텔레포트 특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 특유의 느긋함으로, 끝의 끝까지 시간을 끌다가 오곤 하는 것이다.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오려나? 싶어 핸드폰을 들여다보려는 찰나-

팟,

“타냐 선배?”

“나가 군? 늦나 싶어서 전화하려고 했더니.”

“늦으면 연락해달라고 한 게 언제 적 얘긴데요…. 이젠 안 그래도 돼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한테 나가 군이 어린 건 마찬가지,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에휴, 나가 군이 한숨을 쉬었다. 마저 손을 잡아 주고 자리를 철수하는 것을 도와준 나가 군의 말을 들어보니, 이미 사사 씨가 전화한 모양이다. 이래 놓고 이제 내 모닝콜은 받지 않겠다니, 귀여울 뿐이다. 기분 좋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가 군이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괜히 툴툴거리는 것이 보이긴 했지만, 흔히 있는 일이라 별 타격도 없었다.

“아, 이거 부탁하셨던 거요.”

그때, 준비물을 깜빡한 초등학생마냥 잠시 팟, 소리와 함께 사라졌던 나가 군은 다시 팟, 소리를 내며 내 옆에 나타났다. 작은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로고를 봐서는….

“앗, 제가 부탁한 커피콩 빵…!”

“부탁이라기엔 심부름 값까지 받아버렸지만요.”

“그래도 고마워요. 아무리 제가 여행을 갈 상황이 아니어도 그렇지, 이런 부탁 하면 실례인 거 아는데….”

지난주부터 먹고 싶어서 계속 생각이 났던 커피콩 빵이었다! 파란 종이봉투를 끌어안으며 어린아이처럼 발을 굴렀다. 서른 살 먹은 어른이 이러면 꼴불견이라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이런 먹을 거야말로 소소한 행복인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줬던 돈보다 많이 사 온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분명 검색했을 때 나온 최신 게시글에서 봤던 대로 돈을 줬는데…. 뭐, 그새 할인을 하거나 했을 것이다.

“가는 김에 사 온 건데요 뭐.”

“그게 고맙다는 거죠.”

“-뭐가 그렇게 고마운데요?”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시간에 상담 일정이 있던가? 5시에서 10시로 자리를 옮긴 자유 상담 시간은 전처럼 즉흥적으로 내담자를 받고 있긴 하다. 마침 상담실에 도착하고 있던 참이고. 뭣보다, 이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은-

“뀽, 커피콩 빵이네요? 상담실에서 먹을 거면 저도 먹어도 되죠?”

“귀능 씨?”

“나가 군, 서장님이 찾으시던데~”

“네?!”

“엄청 화나셨-”

팟,

나가 군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 품에 커피콩 빵 봉투를 두고. 나는 멍하니 시선을 돌렸지만, 귀능 씨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며 화사하게 웃을 뿐이었다.

“상담받으러 오신 거예요?”

“네. 아침부터 펫숍 얘기를 들어버렸지 뭐예요~”

“저런, 제가 드린 반지는요?”

“아무래도 좀 거부감이 들어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귀능 씨의 상담 주 사유는 트라우마다. 귀능 씨 자체는 너무나 확고한 신념과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서, 트라우마로 인한 행동밖에는 도와줄 것이 없을 정도로 단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만들었던 평정심 유지용 반지를 줬다. 내가 없는 유사시에 트라우마와 관련된 일로 자해 행동을 할 경우 사용하도록 준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 처음에는 잘 쓰는가 싶더니, 이젠 이 모양이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와서 차라도 좀 마시고 가요. 대나무 드릴까요?”

“저는 그 커피콩 빵이 좋아요~”

“좋아요. 그럼 같이 먹어요.”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이 늘었다고 해서 투덜거릴 마음은 없으니, 도와주면 될 일이다. 소파에 드러누워 영화를 볼 때의 기분, 비 내리는 날 오후의 티타임, 겨울 바다를 보는 기분…. 머릿속으로 여러 후보들을 넘겨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귀능 씨는 그런 나의 옆에서 뭐라 재잘대며 따라왔다.


“-그래서 또 혼내셨어요?”

“그놈들이 정신을 못 차리니까 그러지. 출장조를 닮은 건지, 기물파손이 일상이야 아주.”

어쩌다 비행조의 얘기를 듣게 된 거지? 분명 버터컵에서 교육받은 상담사 몇 명이 롤링핀으로 이직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롤링핀이 조금씩 규모를 늘리고 있는 만큼, 타냐가 더 무리할 게 아니라면 더 많은 상담 인력이 필요했다. 결국 그 인력이 버터컵에서 교육받은 인원으로 충당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서 서장님과 얘기를 나누러 왔는데…. 비행조를 한참 혼내고 난 뒤였나 보다.

난 일단 자연스럽게 손을 잡으며 서장님을 달랬다.

“기물파손이면 보상 때문에 롤링핀 측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매번 그렇게 말하는데 발전이 없어, 발전이”

끙, 실제로 그래서 할 말이 없다. 비행조에서 기물파손 건으로 혼나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그리고 열 중 여덞은 내가 서장님을 달래러 와야 했다. 덤으로 후원금도 얹어주면서.

그렇다고 무작정 같이 욕해줄 수도 없고, 굳이 비행조에 대한 조언을 하며 같이 해결 방법을 찾아주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서장님 입장에서 화가 나는 건 당연해요. 벌써 몇 번째예요.”

일단 공감해주고, 살살 달래는 수밖에 없지.

“…”

“? 왜요?”

“아니, 됐다.”

…? 하지만 오래 그럴 필요도 없이, 한 마디 만에 서장님이 진정하셨다. 특기가 좀 잘 들었나? 당황스러워서 서장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니, 부러 그럴 것 없다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정확히는 김이 팍 샌 얼굴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왜? 아니, 뭐 기분이 나아지셨다면야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서장님이 대충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서장님이 나를 종종 어린애 취급할 때가 있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좀 맥락이 없는 편이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럼 일단 이거요. 부탁하셨던 명단이에요. 롤링핀에서 한 번 더 확인해주시면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인원들로 골랐어요.”

“…이 정도면 버터컵 후원자 아니고 대표 수준 아니냐?”

“아이참, 공무원은 투잡 못 하잖아요.”

“그런 얘기가 아닐 텐데….”

원래 주제로 돌아와, 우리는 버터컵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내가 실질적으로 버터컵의 대표인데, 언제까지 롤링핀의 히어로로 고생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서장님은 내게 상담을 받지 않는다. 그저 간단한 컨디션 조절(화나면 무력해지니까)을 맡기는 것뿐이다. 아마 그래서일까, 다른 히어로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과는 다르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스푼의 간부로 떵떵거리면서 버터컵의 대표로 편하게 살아가라는 말을 하는 거겠지.

“이제 제가 맡고 있는 롤링핀의 히어로는 고작 10명이에요. 뭐, 버터컵은 별도지만.”

“…”

“그분들이 이제 제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실 때, 그때가 되면 정리해볼게요.”

“하아, 그런 얘기가 아니라…. 일이 너무 많은 건 인정하지?”

“…네.”

“좀 줄여. 방송사에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지 말라고. 그놈들은 네가 오냐오냐하니까 밑도 끝도 없이, 참….”

-왠지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기분이기도 하다. 어색하게 웃으며 네, 네, 대답하고 있으면 온갖 걱정하는 소리를 쏟아낸다. 요번에도 히어로 활동을 하다가 욕을 들어먹었던 것을 들으셨나 보다. 서장님은 내가 히어로 활동을 하면서 당하는 일들(납치나 협박, 폭언과 악플)에 유난히 걱정스러워하는 면이 있었다. 내가 많이 연약해 보여서 그런 걸까? 그래도 버터컵에서 호위해주느라 많이 고생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고 나면 차라리 상담 활동은 히어로들로 국한하라고 하는데, 역시 그럴 순 없다. -이젠 말이 길어져서 너무 시간을 끌고 있기도 하고…. 이럴 땐 서장님이 물러나게 하는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전 이 일이 좋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서장님.”

“…고집불통.”

“헤헤.”


“누가 강연 온댔는데 그게 타냐 언니라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많이 놀랐어?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제가 학교 다닐 때도 오셨으면 재밌었을 텐데.”

“하긴, 나가 군도 혜나가 다니는 학교 출신이랬죠?”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흘러, 저녁 시간이 되었다. 늦은 오후에 출근한 혜나를 포함한 비행조와 함께 저녁을 먹는 건 흔한 일상이 된 지 오래. 고기가 먹고 싶다는 혜나의 의견에 힘입어 맛집으로 소문난 삼겹살집에 온 참이었다. 물론 추천의 출처는 내 내담자 중 한 명이다.

내가 싸준 쌈을 야무지게 한입에 삼킨 혜나가 이어서 말했다.

“나 롤링핀에서 일하는 거 아는 애들이, 다 언니 한 번쯤 만나고 싶다더라. 완전 연예인이야.”

“그 덩도야?”

“아무래도, 팬들도 있는 것 같긴 해요.”

“대박이다….”

나가 군, 밥. 아….

나가 군이 후드득 흘린 밥을 수습하는 사이, 사사 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혀 짧은 소리는 여전해서 별 긴장감은 들지 않았지만, 진지하게 들으려고 노력하며 눈을 돌렸다.

“패니라고 해도 이사난 사라미 잇슬 수도…. 더 조시매.”

“그러니까 버터컵 분들이 종종 도와주시고 있는걸요. 괜찮을 거예요.”

“맞아. 매일 밤에도 언니 교대 근무로 지켜준다며?”

“진자?”

“아하하, 부끄럽네요….”

사실이라 부정하지도 못해서 더 부끄럽다. 괜히 쌈을 싸는 데 집중하는 척하며 세 사람의 시선을 피했다.

그동안 나이프와의 교전, 납치, 협박, 폭언 등의 경험으로 내 주변 사람들은 알았다. 내가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버터컵의 운영관리를 담당하는 사원 측에서 나를 24시간 경호할 인력을 빼놓은 상태였다. 그나마 롤링핀의 사원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냥 두지만, 혼자 외출하거나 집에 갈 때 나를 지켜주는 것이다. 3~4시간에 한 번 교대되고, 밤새 문 앞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게 경호라기보단 같이 있는 느낌이라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냥 수다나 떨고 있다. 그래서 딱히 경호라는 실감도 나지 않고 있었는데….

“아앗, 타냐 님 아니세요?”

“쉬라 씨?”

그렇게 상념에 젖어있을 찰나, 버터컵의 복장을 한 작은 다람쥐 소녀 같은 분이 말을 걸어왔다. 버터컵 제4팀의 팀원인 쉬라 씨였다. 쉬라 씨는 손가락만으로도 총을 쏠 수 있어 매우 공격적인 전투 스타일을 가진 팀원이었다. 종종 내 경호를 맡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다른 버터컵 사원들보다 더 자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그, 혹시, 아침에….”

“마들렌 말씀하시는 거라면, 잘 먹었어요. 늘 고마워요. 오늘 경호 맡으셨죠?”

“네…!”

“잘 부탁드릴게요.”

“저야말로…! 앗, 식사 중인데 방해해서 죄송해요! 이따 뵐게요!”

…쉬라 씨는 정말 다람쥐처럼 순식간에 뛰어서 사라졌다. 분명 일행과 저녁을 먹으러 이 가게에 들어서는 것 같았는데, 일행의 팔을 잡아채고 달려 나가는 것이 엔간한 치타 혼혈 못지않게 재빨랐다. 고마운 분이라 밥이라도 사겠다고 하려고 했는데. 멋쩍은 손이 천천히 제자리로 내려왔다.

“언니, 혹시 팬 미팅 해?”

“응?”

혜나가 엉뚱한 질문을 한 건 그때였다. 장난스러운 질문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이기까지 해서 순간 당황했으나, 나 역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그냥 평범한 상사와 부하 사이인걸.”

“하지만 타냐 선배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마드렌도 성물바든 거여써?”

“맞다, 사사 씨도 아까 같이 먹었죠, 참.”

“역시 버터컵은 언니 팬클럽 집단이 맞다니까!”

타냐 언니 그 목도리도! 상담실에 있던 얼그레이 가나슈 파이도! 타냐 선배 그 코트도 사원한테 선물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타나 잉기 만쿠나….

순식간에 분위기는 고기 불판마냥 훅 달아올랐다. 다들 경쟁하듯이 내가 선물 받은 것을 맞추려고 드는 것이다. 확실히, 사원을 포함한 지인이나 전 내담자로부터 받는 선물이 많긴 하지만 이렇게 맞춰대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하긴 하다. 감사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기분?

어쩔 수 없다. 그만큼 돌려주려고 해도 잘 받지 않는 것을 어쩌겠는가? 게다가 준 것 그 이상으로 압도적인 선물을 해오는 경우가 생겨서,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선물을 받는 것에 덤덤해진 것이다.

그래도 연예인은 아니지 않나? 애초에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걸.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자, 비행조에게 말했다.

“그래도 연예인 수준은 아니에요. 다들 저에게 고마워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거죠. 쉬라 씨는 아닌 걸로 알고 있지만….”

“그게 더 대다낭거 아니까….”

“음, 오빠 말이 맞지.”

“그, 그건….”

“알아요, 타냐 선배. 마늘 더 드실래요?”

“…”


찌르르-

오늘도 성범죄 피해자의 상담을 위해 두 시간여를 할애하고, 가정폭력 근절을 위한 가족 단위 상담에 시간을 들였다. 그러다 보니 오늘도 퇴근 시간은 달이 뜬 늦은 밤. 함께 걷는 쉬라 씨에게 미안해져서 괜히 눈치를 보게 되었다. 날 집에 데려다주면 바로 퇴근할 수 있는 일일 텐데, 괜히 퇴근 시간을 늦춘 것 아닌가.

“저… 그렇게 눈치 보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타냐 님.”

“그래도 미안한걸요. 괜히 야근시킨 것 같아서.”

“애초에 전 타냐 님이 좋아서 버터컵이 됐는데요, 뭐. 오히려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곁에서 볼 수 있어서 기뻐요.”

백 점 만점에 백 점짜리 대답이다. 그렇지만, 역시 상사 앞에서 솔직히 말하는 게 편할 리 없지.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아 영 안절부절못하다가, 가방에 들어 있는 커피콩 빵을 떠올렸다. 몇 개는 상담실에서 먹었지만, 몇 개는 남겨놓고 깨끗한 비닐봉지에 싸두었다. 나름 새것처럼 예쁘게 포장했는데,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고생하셨으니 이거라도….”

“! 아뇨, 제가 어떻게 타냐 님께 그런 걸 받겠어요!”

“제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요.”

“하지만 타냐 님의 팬으로써, 뭘 받는 일은 없어야….”

“아, 팬이세요?”

“헙,”

어쩐지 태도가 좀 유난스럽다 싶었다.

보통 버터컵의 인원은 인맥으로 구성된다. 나와의 어떤 인연이 있어서 알아서 지원한다는 뜻이다. 뽑을 때도 충성도를 위해 나와의 연관성을 중요시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내담자이거나 내담자의 지인이거나 그쪽에서 지원 보낸 인력, 혹은 타니아나 재단 쪽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쉬라 씨는 그 중 아무것도 해당하지 않아서… 좀 신기하다 싶었지.

인사 담당자는 내가 아니라서 잘 모른다. 이력서에 팬 활동 경력이라도 쓰여 있었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팬에게 팬질하는 대상자와 오래 같이 있는 건 그만큼 좋은 일이라고 들었으니까….

“음…. 사인이라도 드릴까요?”

“! 그, 그럼 감사하죠!”

뭣보다,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대처가 편했다.

“여기, 해주시면….”

“네, 잠시 팬 먼저 꺼낼게요. -어쩌다 팬이 된 건지 물어봐도 돼요?”

그렇게 사인을 해주며, 팬들에게 으레 하곤 하는 질문이 튀어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길거리에서 웬 사람이 펜이라며 사인을 요구할 때마다 나왔던 말이라 거의 입에 붙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엔 그리고 신기하고 낯설었던 사인 요청이, 차라리 사진보단 덜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아, 그래서 질문. 그렇게 버릇처럼 내뱉긴 했지만, 혹시 부담스러운 질문이면 어쩌지? 하는 뒤늦은 걱정이 들었다.

“그, 좀 됐는데…. 5년 전에요. 타냐 님 과거 때문에 한동안 떠들썩했잖아요.”

“아…. 그랬었죠.”

“그때 해명하신 게,”

‘제가 충분히 위험하고, 강한 특기를 갖고 있음을 알고 있어요. 운이 좋았을 뿐이지,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른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늘 죄의식을 갖고 있으며,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건 분명 이 사회에 올바른 방향일 거예요. 누군가의 회복을 위해, 혹은 보호를 위해- 그 외의 목적으로 특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런 저를 받아들여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너무 멋있으셔서…. 그때부터 타냐 님과 함께 일하는 히어로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조금은 수줍게 웃으며 사인 종이를 받아 드는 쉬라 씨를 보자, 곧 그의 특기가 떠올랐다. 손짓만으로도 총을 쓸 수 있는 아주 전투적인 특기를 갖고 있었다. 나와 같은 실수를 했을 법도 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엔 무서울 수도 있지만, 나에겐 한없이 안쓰러웠다.

특기는 고르는 것이 아니니까.

예전에, 내 잘못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땐 그저 내 잘못만이 선명했고, 그에 위축되어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해볼 틈도, 나와 같은 사람을 찾아볼 생각도 안 했다. 그냥, 압도적인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을 뿐이다.

“그랬구나…. 고마워요.”

“아아아니에요! 멋있는 건 타냐 님인걸요!”

그런 내 말이 비슷한 사람에게 울림을 남겼다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래서인지,

“-쉬라 씨도 멋있어요.”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이 저절로 튀어나와 그를 다독였다.


철컥-

스푼의 직원 숙소에서 나온 이후로는 쭉 살고 있는 오피스텔. 5년간 삶의 흔적이 묵어 이제는 익숙한 향기를 풍기는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러그 위로 드러누워 버렸다.

“-오늘도 힘든 하루였다.”

그래, 오늘도 지치는 하루였으니까.

분명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과 체력은 별개의 이야기다. 압도적인 업무량 때문에 체력을 늘리기 위한 운동을 계속하고는 있지만, 매번 녹초가 되어서 집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밖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다행인가. 저린 다리를 주무르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부우웅-

“아,”

그때, 전화가 왔다.

[타냐 씨 퇴근하셨어요? 퇴근하면 답 주신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서.]

“아, 이제 막 도착했어요. 내일 약속 시간 때문이죠?”

[네. 전 언제든 괜찮은데 타냐 씨는요?]

“음- 11시쯤 괜찮을까요? 오랜만에 밥 얻어먹고 싶어서.”

[전 좋죠. 그럼 내일 뵈어요.]

오수 씨였다. 오수 씨와는 여전히 막역한 친구 사이다. 여전히 자취 중인 나에게 채소를 제공해주는 고마운 이웃이기도 하다. 매번 장에 가서 사 오는 것보다 훨씬 편하단 말이지. 그래서 가끔 약속을 잡는데 이번에도 그런 경우였다.

아, 그래도 내일은 주말이구나. 푹 쉬겠다.

상담사는 좋은 점이 이거다. 히어로와 달리 현장 업무에 잘 나서지 않기 때문에 웬만하면 주말에 추가 근무를 하지 않는다는 점. 맘 놓고 편한 휴일을 즐길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직장인의 꿀 같은 휴일이 어떤 건지, 매번 경험할 수 있다. 아, 내일 가져갈 디저트들을 좀 챙길까. 핸드폰을 탁자 위에 두고 몸을 일으켰다.

솨아아-

[야, 내일 약속 기억하지?]

그렇게 씻고,

[바쁘다고 튀면 각오해라]

짐을 챙기고,

[밥은 여기서-]

잘 준비를 하는 동안 문자가 왔다. 새삼 주말 동안의 일정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주말이라고 한가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오전에 오수 씨를 만나고, 저녁에는 피오나를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일요일엔 혜나와 쇼핑.

[당연히 기억하지. 내일 봐.]

쉬기는 글렀구나, 나.

한숨이 나오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내 모습이 만족스럽기 때문일까. 조금은 능글맞아진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운이 좋았을 뿐이지,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른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늘 죄의식을 갖고 있으며,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건 분명 이 사회에 올바른 방향일 거예요. 누군가의 회복을 위해, 혹은 보호를 위해- 그 외의 목적으로 특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풋,”

순간 쉬라 씨의 말이 생각나며, 그때의 겁먹고, 서툴렀던 자신이 떠올랐다. 모든 일이 알아서 해결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믿어지지 않아서,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며 마이크에 대고 그런 말을 했었다. 지금, 좀 더 먼 자리에서 생각하면 전혀 그럴 일이 아닌데.

엄마의 죽음에 대한 건 결국 내 착각, 피오나와는 지금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다. 당시 구속된 전 남친, 베델의 경우엔 그 당시 충분한 보상과 함께 치료도 해주었다는 사실을 왜 그땐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저 무서워하기만 했던 자신이 안쓰럽고, 또 우습다.

이제 일반 시민 역시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부 악플러만 물고 늘어질 뿐이다. 그 정도는 이제 아무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

나 역시, 이제 신경 쓰고 눈치 보는 건 ‘내 사람’뿐.

그 이상은 굳이 윤리를 따져가며 지나치게 오지랖 피워가며 움츠러들 필요도 없고, 그럴 여력도 없다. 그냥··· 내 사람들을 챙기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물론 그것은 결코 방관의 의미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란 다른 사람의 배가 될 테니. 그러니 내 눈 안에 들어오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얘기다. 마치 감시자이며 심판관이자, 히어로라도 된 것처럼.

그것을 그때의 나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지.

“아,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 나이프가 잡히지 않았었나. 캘린더를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내가 간부들을 찾아가 선전포고를 하기 이틀 전. 그래, 5년 전 오늘이 맞다.

나이프 때문에 많이 고민했었지.

그동안 생각하고 싶지 않아 미뤄두었던 온갖 원론적인 고민들이 날 찾아와 괴롭히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모르를 찾아가기까지 하고 말이지. -결국 결론은 ‘내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누구든 가만둘 수 없다는, 더없이 이기적인 방향으로 이어지고 말았지만, 난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선을 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서야.

그런 큰일을 벌일 정도로 내 담은 크지 않고, 내 사람들이 나쁜 방향으로 흘러 들어갈 거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야,

부웅-

[타냐쎔, 나 그 소설 다 읽었다!]

[다음 연재 언제야 ㅠㅠ 나 벌써 못 기다리겠어]

"…레인 씨."

이런 소시민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그러겠는가.

그 이후는 간단하다. 간부들의 일이 나를 부채질한 것이다. 히어로의 최악의 말로를 목격하고, 내가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내가 뭐라고 감히 그들을 판단하겠는가’의 ‘무엇’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자신감 없는 나로 남아 우유부단하게 있을 바엔 나 자신이 히어로가 되어 보이겠다고, 내 생각의 옳음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란 영웅을 자리에서 끌어내릴 힘이 충분해서요. 여러분의 선악을 가릴 수 있는 동등한 위치라고 할 수 있겠죠.’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 간단한 결론을 두고 내가 그리 고민했던 이유를, 난 알고 있다.

내 고민의 시작은 아주 어렸을 때의 고민이었지만, 불을 붙인 것은 고등학생 때 발현한 특기였다.

상대의 감정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 원치 않았고, 예상도 못 한 효과로 민폐도 많이 끼쳤다. 그 모든 실수들이 내게 주홍글씨를 남겼다. 안 그래도 심약하고 소심한 성정을 가졌는데, 더 움츠러들게 된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특기가 무서워 혼자 있는 자리가 더 편안했다.

-혹시나 민폐를 끼칠까 봐 무서워 언제나 YES맨이었다.

-누구든 곧 나를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벽을 쳤다.

내 사람이랄 게 생길 수가 없는, 마음 붙일 자리 하나 없는 생활이었다. 내가 도움 될 자리만 있다면, 뭐든 게걸스럽게 받아 삼키며 집착하는 것이 내 일상.

“스푼에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그 모든 것을 바꾼 것은 스푼이었다.

-나는 이제 일 말고도 즐거운 일이 많다.

-이젠 끝없이 고민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주관도 생겼다.

-상황에 저항하지 않는 대신, 직접 방법을 구상하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의지하는 사람이 생겼다.

부우웅-

[잘 들어갔어요?]

[오늘도 고생했으니까 푹 자요]

“앗,”

그렇게 나는 훨씬 나아질 수 있었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해요]

[얼른 자요]

[(이모티콘)]

바뀌어 가는 내 모습이 생생했다.

[전 오늘도 야근:(]

“…푸핫,”

그것이 나를 하루하루 웃음 짓게 만들었다.

 

아, 히어로를 사랑하는 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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