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생일 연성

Pick Me!

사감조 드림

* 이데아랑 카림은 우정드림, 나머지는 연애 드림 이지만……. 퉁쳐서 사감조 드림이라 썼습니다.

* 장렬한 분량조절 실패 주의.


“꼬붕, 생일 선물로 뭔가 받고 싶은 건 없냣?”

 

유난히 따뜻한 3월의 마지막 날. 기숙사의 모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운 아이렌에게 말을 걸어 온 건 제 자리에서 벗어나 침대 머리맡에 올라온 그림이었다.

오늘따라 피곤해서 졸음이 쏟아지던 아이렌은 비몽사몽 한 상태로 되물었다.

 

“갑자기?”

“갑자기, 가 아니지! 다음 주에 생일이면서 무슨 소리냣!”

“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몽롱한 자안이 잠깐이나마 빛을 되찾는다.

잠깐 돌아온 정신으로 머릿속 달력을 뒤적여 본 아이렌은 ‘아’하고 짧게 한탄하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자기 생일도 잊고 있던 거냐고…….”

“별로 관심 없으니까. 보통 4월 5일쯤 되면 기억나긴 했지만.”

 

다른 사람 생일은 더 일찍 눈치채면서, 왜 자기 생일은 코앞에 와서야 눈치채는 걸까.

함께 지낸 시간이 제법 쌓였음에도 여전히 파트너의 사고 체계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은 팔짱 낀 채, 꿈나라로 가기 직전인 아이렌에게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래서, 받고 싶은 건?”

“네가 사 주려고 물어보는 거야, 그림?”

“뭐, 일단은 들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흐음.”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기껏 물어봐 주었으니 대답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고 싶은데도 계속 말을 거는 그림 때문에 흐릿한 의식으로 대화하는 아이렌은 드물게도 솔직하게 제 욕망을 드러냈다.

 

“……비취 팔찌.”

“엥?”

“비취 팔찌가 가지고 싶어. 끈으로 구슬 엮은 거 말고 고리 형태로 된 거. 옛날에 갖고 싶어서 한창 찾아보다가 그대로 잊어버렸는데, 얼마 전 인터넷 쇼핑 중 우연히 본 후로 또 가지고 싶어졌거든.”

 

갖고 싶은 이유는 잘 알겠다. 다만, 그거랑 별개로 상당히 뜬금없는 물건을 원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평소 아이렌이 그다지 치장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그림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설마 장신구를 말하다니.”

“내가 장신구를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이상해? 귀걸이는 나름대로 많이 사 모았는데.”

“이상하다기보단, 그걸 선물로 받고 싶다고 말하는 게 의외라고 할까…….”

“아. 그건 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전설이 있어서 그런 거거든.”

“전설?”

“응. 사실 전설이라기보단 풍습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당장이라도 잠들어 버릴 것 같으면서, 어쩜 입은 멈추지도 않고 계속 움직이는 걸까.

아이렌은 눈을 감은 채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살던 곳의 이웃 나라에선, 여자가 비취 팔찌를 가지고 있으면 소유자가 위험할 때 대신 깨져서 목숨을 살려 준다는 이야기가 있거든.”

“흠. 부적 같은 건가?”

“그렇지. 뭐, 미신이긴 하지만 꽤 흥미로운 이야기잖아? 그래서 가지고 싶더라고.”

 

‘애초에, 액막이로 가지기엔 이미 너무 많은 위험을 겪기도 했지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장난스럽게 덧붙인 아이렌은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그 상태를 보아하니, 그림이 말만 걸지 않는다면 5초 이내로 잠들 것 같았다.

꾸벅꾸벅 조는 아이렌을 보며 한숨 쉰 그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음. 그럼 알겠다고! 비취 팔찌다 이거지!”

“정말 사 주게……? 등급 낮은 옥은 얼마 안 할 테지만, 너 돈 없잖아.”

“흥! 그건 꼬붕이 신경 쓸 게 아니라고!”

 

새침하게 답한 그림은 ‘잘 자라!’는 인사만 남기고 푹신푹신한 잠자리에 몸을 뉘었다.

드디어 찾아온 침묵에 마음 놓고 잠들 수 있게 된 아이렌은 옆으로 몸을 돌려 눕더니, 새우처럼 몸을 만 후 베개 하나를 끌어안았다.

 

‘……진짜 사 오진 않겠지.’

 

그림의 지갑 사정은 자신도 잘 안다. 단언컨대, 그 돈으로는 절대 패물은 못 산다. 하지만 아이렌은 그 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선물을 받고 싶어서 안달 나 있던 것도 아니라, 사 온다면 오히려 그쪽이 더 곤란했으니 말이다. 그림이라면 아무것도 안 줘도 되고, 그냥 참치 통조림 하나만 줘도 고맙지.

그러니 그림도 방금 나눈 대화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아이렌은 그냥 그렇게 믿고, 그대로 잠들었다.

 


 

 

그로부터 일주일하고도 하루 뒤. 4월 8일의 이른 아침.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습관대로 아침 일찍 일어난 아이렌은 간단히 씻은 후 방으로 돌아가려다가, 아래층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에 의아함을 느끼고 계단을 내려갔다.

 

“세상에.”

 

담화실에 도착한 아이렌은 하루아침에 달라진 내부를 보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언제 꾸며놓은 건지는 짐작이 가지 않으나, 어젯밤까지만 해도 깔끔하다 못해 휑했던 공간이 지금은 훌륭한 생일파티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 아이렌! 어서 와. 마침 널 위한 장식이 다 끝난 참이야!”

 

얼이 빠져서 감탄하는 아이렌을 반기는 건 흐뭇하게 웃고 있는 카림이었다.

그 부름을 듣고 나서야 담화실 구석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여섯 사감을 발견한 그는 눈치를 살피며 손님들에게 다가갔다.

 

“대체 언제…….”

 

말끝을 흐리는 아이렌은 기뻐하는 건지 곤란해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빌은 부담스러워하는 게 팍팍 느껴지는 후배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답해주었다.

 

“네가 깨어나기 전 얼른 와서 해치웠지. 넌 늦게 자서 밤에 와서 할 수도 없었으니까. 문은 고스트들이 열어줬어.”

“그래도 절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이것 봐라. 또 고맙다는 말보다는 사양하는 말부터 나오지 않는가.

빌은 지나치게 겸허한 상대에게 잔소리 한마디를 해주려다가, 오늘이 어떤 날인지 떠올리고 입을 닫았다. 다른 날이면 몰라도, 생일 아침부터 쓴소리하는 건 역시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고운 입술이 인내심으로 꾹 다물린 사이. 뒤에서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리들과 아줄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이렌, 오늘은 네 생일이잖아. 오늘 같은 날까지 그렇게 거절할 필요는 없어.”

“맞습니다. 오늘 정도는 사양말고 호의를 받아주세요. 기쁜 날이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아이렌의 방어적인 태도에 잔소리하는 대신 부드러운 말로 회유하러 들었다. 그들로서는 아침 일찍부터 모여 학교의 홍일점을 위해 장식에 공을 들인 만큼, 부디 상대가 이 노력을 기쁘게 받아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두의 생각이 같지는 않은지, 시큰둥하게 벽에 기대어 선 레오나는 이럴 줄 알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저 녀석은 이런 건 별로 안 기뻐할 거라고.”

“레오나, 분위기 초 칠 거면 그냥 가.”

“하, 와서 도우라 할 땐 언제고 왜 이젠 가라고 하는지 모르겠군.”

 

빌의 경고를 코웃음 치며 흘려넘기는 레오나는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는 듯 말하면서도 전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하…….’ 오늘도 사이가 좋은 빌과 레오나의 입씨름을 보며 어색하게 웃은 아이렌은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구석에 박혀있는 이데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의 주인공과 시선이 마주친 이데아는 ‘히익’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더니, 쭈뼛쭈뼛 거리를 좁히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아, 아이렌 씨. 생일 축하하오. 모바일 게임 생일 보너스는 잘 챙겼는지?”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데아 선배. 물론 챙겼죠. 12시 되자마자 전부 로그인 했거든요.”

“오호. 역시 부지런하구려. 우히힛. 생일 설정을 할 수 있는 게임은 이런 점이 좋지.”

 

매니악한 주제로 떠드는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정말로 로맨틱한 분위기라곤 한 톨도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두 사람만이 사이좋게 이야기 중인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흠흠.’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한 리들은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아이렌, 생일 축하해. 이거, 생일 선물이니 받아주겠어?”

“앗, 감사합니다. 리들 선배.”

 

보라색 리본으로 포장된 검은 상자는 손바닥보다 조금 근 크기였다. 무엇이 든 건지 달그락 소리가 나는 상자를 조심스레 받아 든 아이렌은 찬찬히 선물을 살펴볼 틈도 없이, 곧바로 제게 내밀어지는 또 다른 선물도 챙겨야 했다.

 

“아이렌 씨, 생일 축하드립니다. 제 선물도 부디 받아주세요.”

“물론이죠. 고마워요, 아줄 선배.”

 

아줄의 선물은 작은 종이가방에 담겨있었다. 옥타비넬 기숙사의 색과 닮은 그 물색 가방은 입구가 테이프로 봉인되어 있어 내용물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물론, 입구가 열려있다 해도 느긋하게 선물을 보고 있을 시간 같은 건 없었지만.

너무나 바쁜 그는 제 손안에 들어온 선물들을 다 정리할 틈도 없이 빌의 선물도 받아야 했다.

 

“생일 축하한단다. 아이렌. 여기, 선물이야.”

“감사합니다. 아, 잠깐만요. 손이 모자라네…….”

 

아이렌은 종이 가방은 왼쪽 손목에 걸고, 상자는 왼손에 든 채, 비어있는 오른손으로 빌의 선물을 받았다. 어느새 양손이 꽉 찬 아이렌을 본 카림은, 허둥지둥하는 상대를 배려하여 제 선물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아이렌, 내 선물은 여기 둘게!”

“감사합니다, 카림 선배. 그……. 너무 비싼 건 아니죠?”

“응? 아, 물론이지! 쟈밀이 ‘아이렌이 부담스러워할 테니 적당히 금액을 맞춰!’라고 했으니까!”

“그거 다행이네요. 하하…….”

 

사실 쟈밀이 저렇게 말했다 해도, 카림이라면 그 ‘적당히’의 선을 잘못 잡을 가능성도 크다. 아이렌은 차마 값이 얼마나 나갈지 모르는 카림의 선물 옆에 제가 받은 선물들을 정리한 후, 레오나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뭘 봐?”

“……아니. 아녜요. 예.”

“쯧.”

 

어째서 상대가 자신을 본 건지 모르지 않는 레오나는 혀를 차더니, 포장지도 리본도 없는 상자 하나를 아이렌 품으로 던졌다.

 

“귀염성 없기는. 달라고 하면 될 것을.”

 

‘어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상자를 허겁지겁 받은 아이렌은 제 순발력이 영 떨어지지 않음에 감사했다. 내용물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상대가 주는 선물을 바닥에 떨어뜨릴 수는 없지 않겠나.

거친 선물 전달에 불평할 법도 한데도 그저 선물 상자를 매만질 뿐인 아이렌은, 의외라는 듯 순수하게 감탄했다.

 

“준비 안 해왔을 줄 알았는데!”

“넌 나를 어떻게 보는 거냐, 아이렌.”

“사바나클로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군림자, 똑똑한 만큼 수업을 빠지시는 레오나 킹스카라 사감님?”

“하여간 그놈의 입은.”

 

어이없다는 듯 웃는 레오나는 그제야 벽에 기댄 몸을 일으켜 아이렌 곁으로 다가왔다.

다들 선물을 건네는 와중.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 이데아는 랩이라도 하듯 빠른 목소리로 중얼중얼 속삭였다.

 

“아이렌 씨. 내 선물은 게임에서 보내놨으니, 확인을…….”

“아. 그건 이미 봤어요! 고마워요, 이데아 선배. 저 그 아이템 필요했는데!”

“우히힛. 졸자 같은 고인물에겐 서너 개쯤 있지만, 역시 뉴비들은 구하기 힘든 템이니 좋아하리라 생각했소이다.”

 

자신만 줄 수 있는 선물을 준 것에 일종의 성취감 같은 거라도 느끼는 걸까. 이데아는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히든 공략지를 찾아낸 게이머처럼 웃고 있는 이데아를 귀여워하는 눈으로 보며 선물을 정리하던 아이렌은 제가 받은 선물의 수를 무의식적으로 세다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저, 그런데 말이죠. 지금 이거 사감들끼리만 먼저 와서 축하하려고 모인 건가요?”

 

이 자리에 모여있는 이들의 공통점을 정확하게 짚어낸 아이렌에게, 빌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각 기숙사의 대표인 우리가 고물 기숙사 대표인 너를 위해 파티장도 꾸며주고 선물도 전할 겸 모인거긴 하지만,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럼, 말레우스 선배는요?”

“아.”

 

짧게 탄식한 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아하니, 아이렌이 묻기 전까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설마 파티장을 꾸미는 동안 아무도 부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니. 아무리 말레우스가 모임에서 빠지는 일이 잦다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아무도 연락한 사람 없습니까?”

 

리들은 이런 상황은 익숙하다는 듯,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차례대로 돌아오는 대답은, 처음 이 의문을 제기한 아이렌을 탄식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왜 연락하지?”

“난 릴리아에게 전해달라고 연락했는데! 메시지를 못 받은 걸까?”

“이런, 또 이런 일이…….”

“아무도 서너 번 확인을 안 한 점이 우습구려.”

 

뻔뻔한 레오나와 양심은 있어도 책임감은 없는 카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고개 젓는 아줄과 어이없어하는 이데아까지. 그 누구도 당장 디어솜니아로 가서 말레우스를 데려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이렌은 이 학교 학생들의 단결력을 다시 한번 실감하고 말았다.

나 몰라라 하는 이들을 반쯤 감은 눈으로 훑어본 빌은 이미 엎질러진 물은 수습할 수 없다는 듯,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차피 네 생일파티가 열리는 건 알고 있으니 파티 때 오겠지. 그것보다, 옷 갈아입고 올래? 머리랑 화장은 내가 도와줄 테니.”

“그래도 되는 거예요?”

“어머, 이 내가 단장을 해주는데, 불안한 거니?”

“아니! 그거 말고요! 말레우스 선배요!”

“걔가 애도 아니고, 괜찮겠지.”

 

‘정말 괜찮은 건가.’ 아이렌은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말레우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러 갈 수는 없었다. 자신을 위해 모인 손님이 여섯이나 있는데, 제가 가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게다가 뒤늦게 사실을 알고 상처받느니, 아예 모르고 넘어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고민하던 아이렌은 결국 어제 받아둔 생일 당사자를 위한 의상을 입으러 가버렸다. 아직 잠들어 있는 그림이 깨지 않게 조용히 옷을 갈아입은 그는 거울 속에 비치는 조금은 낯선 제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쭈뼛쭈뼛 아래층으로 향했다.

 

“저, 이상하지 않나요?”

 

마법사도 아닌 자신이 이렇게나 동화 속 마법사 같은 옷을 입다니. 참으로 묘하다. 늘 입는 교복과는 다른 호화로운 장식이 낯설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이렌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채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다행인 점은, 손님들의 반응은 당사자가 걱정한 것보다 훨씬 호의적이라는 것이었다.

 

“와! 아이렌, 정말 잘 어울려! 예쁘다!”

“음. 나쁘지 않아. 나중에 머리도 올리고, 화장도 하고 나면 더 좋아지겠지.”

“근사하구나, 아이렌. 이상하지 않으니 고개 들렴.”

 

카림의 감탄은 따뜻했고, 빌의 평가는 냉정하긴 해도 빈말일 가능성이 없어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다 갖춘 리들의 말은 어찌나 달콤한지.

아이렌은 듣기 좋은 말에 멋쩍어하며 고개를 들었고, 그와 동시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줄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 안 이상해요? 어때요, 아줄 선배?”

“예?”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아이렌을 보고 있던 아줄은 그 질문에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안경을 고쳐 쓰는 척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추, 충분히 어울리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보다 아이렌 씨, 선물을 열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예? 지금 열어봐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 꼭 지금 개봉해 주세요.”

“아줄 선배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안 그래도 다들 뭘 준비했을지 궁금한 참이었으니 아이렌에겐 잘된 일이었다. 물욕은 없어도 상대가 제게 무엇을 주었을지는 신경 쓰이는 그는 선물 더미에서 아줄이 준 종이 가방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분들 것도 열어봐도 되나요?”

“물론이지.”

“상관없어! 아이렌이 좋을 대로 해줘!”

 

소리 내어 대답하는 건 리들과 카림뿐이었지만, 빌은 고개를 끄덕였고 레오나는 반대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전부 동의했다고 생각해도 좋겠지.

 

“그럼, 아줄 선배가 먼저 말을 꺼내셨으니 아줄 선배 것부터 열어보고 나머지도 볼게요.”

 

호기심과 기대로 마음이 들뜬 아이렌은 조심조심 스티커를 떼어냈다.

선물의 가치는 크게 상관없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예쁜 쓰레기’를 주더라도 자신을 위해 뭔가를 준비했다는 게 의미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선물이 무엇이라도 자신은 진심으로 고마워할 수 있다. 그리 자신하며 내용물을 꺼낸 아이렌은, 뜻밖의 물건에 뒷골이 얼얼해졌다.

 

“……어?”

 

가방 속에 있는 건 연한 녹색과 라벤더색이 조화롭게 섞인 비취 팔찌였다.

물기를 머금은 투명한 비취는 분명 아름다웠지만,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 아이렌은 감탄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이거, 혹시?”

“마음에 드십니까? 제가 고심해서 고른 팔찌입니다만…….”

 

아줄은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아이렌은 알고 있었다. 어째서 아줄이 수많은 선물 중에서 하필 이 팔찌를 사 온 건지 말이다.

 

‘그림 이 녀석, 설마 선배가 시켜서 물어본 거야?’

 

졸린 와중에도 일주일 전 그림과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고 있던 아이렌은 그제야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그냥 그림이 궁금해하는 줄 알고 답했었는데, 설마 그게 아줄이 부탁해서 한 행동이었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머리끈이나 가지고 싶다고 할 걸 그랬다. 그거라면 아무리 비싸도 얼마 안 할 텐데, 하필 비취 팔찌 이야기를 해버리다니.

제 얼굴이 비칠 정도로 영롱한 비취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아이렌은 부담스러움을 억누르며 웃어 보였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예뻐요. 제 팔에 잘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맞을 겁니다! 맞지 않는다면 마법으로 크기를 줄이거나 늘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비취 팔찌는 그렇게 끼는 게 아니지만, 그런 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대체 얼마짜리인지 감도 오지 않는 팔찌를 얼른 가방에 집어넣은 아이렌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른 선물을 집었다.

 

“그럼, 다음엔 빌 선배 걸…….”

 

생각지도 못한 술수에 걸려 당황하긴 했지만, 좋게 생각해야지. 어차피 가지고 싶었던 거니, 이참에 기쁘게 받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아이렌은 이다음 제게 닥칠 시련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고, 어떠한 마음의 준비도 없이 상자를 열었다.

 

“……허?”

 

빌이 준 상자 안에 든 것은, 우윳빛의 얇은 비취 팔찌였다. 믿기지 않지만, 이번에도 제가 갖고 싶다고 말했던 물건이 나왔다는 말이었다.

이게 기뻐할 일이 아니다. 직감적으로 그걸 눈치챈 아이렌은 얼른 눈알을 굴려 사감들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무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빌, 황당해하며 그런 빌을 보는 아줄, 그리고 눈에 띄게 당황하는 리들과 카림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레오나까지.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에 이데아는 재미있는 건수라도 잡았다는 듯 두 눈을 빛내고 있었지만, 그를 제외하고는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 잠깐만요.”

 

뭔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잘못되었다.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고 만 아이렌은 남아있는 선물을 전부 풀어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

 

‘그림, 이 자식. 아주 전교에 떠들고 다녔냐고!’

 

리들의 선물은 복숭아색에 가까운 홍옥 팔찌. 카림의 선물은 영롱한 청록색의 비취 팔찌. 그리고 레오나의 선물도, 당연하다는 듯 비취 팔찌다.

갑자기 팔찌 부자가 된 아이렌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혹시 다들 절 놀라게 해주려고 선물을 통일하기로 했나요?”

 

사실 그랬다면 그들이 당황할 이유가 없겠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건 그냥 푸념이다. 아닌 걸 알면서도 현실을 잊기 위해 말해보는 투정 말이다.

레오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우습지도 않다는 듯, ‘쯧’하고 혀를 차며 답했다.

 

“아무래도 네 털 뭉치 파트너가 입이 좀 심하게 가벼웠나 보군.”

“그림……!”

 

이럴 줄 알았으면 졸음에 몸을 맡기고 그냥 잘걸. 왜 자신은 그때 그런 대답을 한 걸까.

아이렌이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서 한탄하고 있을 때. 2학년 사감들은 한 마디씩 내뱉으며 이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려 해보았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누군들 예상했겠습니까? 하아, 이것 참…….”

“뭐, 장신구는 많을수록 좋잖아! 매일 바꿔 끼는 재미도 있고 좋지 않을까?”

 

카림의 말은 얼핏 들으면 긍정적이고 현명해 보였지만, 아이렌은 거기 동의하지 못했다.

 

“비취 팔찌는 그렇게 끼는 게 아녜요, 카림 선배.”

“응? 그건 무슨 소리야?”

“제가 이걸 가지고 싶다고 한 계기가 된 풍습……. ‘여자가 비취 팔찌를 가지고 있으면 소유자가 위험할 때 대신 깨져서 목숨을 살려 준다’라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 중 하나는, 보통 비취 팔찌는 손목에 딱 맞게 끼고 다녀서 죽을 때까지 빼지 않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에요.”

“엥, 그래?”

“네. 그래서 팔찌를 낄 때도 손보다 작은 팔찌를 껴야 하니 이런저런 특별한 방법을 써서 끼고, 그렇게 착용한 후엔 손이 멍들기도 하거든요.”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던 다섯 명의 얼굴이 또 한 번 굳어버린다. ‘이야, 완전 실패구려.’ 엉망이 된 주변인들의 표정을 보며 중얼거리는 이데아는 자신과는 관계없는 이 촌극이 그저 재미있는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얄미운 이데아의 말에 오기가 생긴 빌은 그야말로 마법사다운 제안을 했다.

 

“너희 세계는 마법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여긴 마법으로 팔찌 크기를 조절할 수 있으니 관계없지 않니?”

“그럼 풍습이 의미 없어지잖아요? 저는 제 팔에 딱 맞는 운명의 비취 팔찌를 가지고 싶었던 건데……. 아니, 애초에 ‘그림이 절대 못 사 오겠지?’ 싶은 물건이라 솔직하게 말했는데 이 지경이 될 줄이야.”

 

이쯤 되니 일을 저질러 놓고 늦잠 중인 그림이 원망스럽기 그지없다. 아이렌은 지금이라도 위로 올라가 그림을 추궁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 와중, 아이렌의 설명을 가만히 곱씹어보던 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편을 들었다.

 

“아이렌의 말이 맞습니다. 풍습이 그렇다면 마법으로 크기를 바꾸는 건 의미가 없다 봅니다.”

“나 참, 이럴 때까지 규칙을 지키려 들다니. 당신도 대단하군요?”

“난 상식적인 발언을 한 것뿐이야. 아줄. 그러고 보니, 크기가 맞으려나 모르겠네.”

 

아마 대부분은 마법으로 크기를 조절하면 된다 생각하며 디자인만 보고 팔찌를 골라왔을 터. 리들이 입밖에 내뱉은 걱정은, 아마 그 혼자만의 것은 아닐 터다.

그런데.

 

“─그럼 이렇게 하지.”

 

다들 자신이 선물한 팔찌와 아이렌의 손목을 번갈아 보며 숨죽이고 있는 순간.

무언가 좋은 생각이 든 건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레오나가 아이렌의 오른쪽 손목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팔찌들을 다 껴보고, 네 팔에 딱 맞는 걸 끼고 다니는 거야. 그러면 공평하지 않나? 다른 건 기념품처럼 전시해 두든 비상시 처분할 재물로 보관하든 하면 되니.”

“아니, 보통 선물로 받은 걸 처분하면 안 되죠.”

“예시일 뿐이라고, 예시.”

 

아닌 것 같은데. 진심으로 그러라고 말한 것 같은데.

아이렌은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지만, 레오나는 시선도 맞추지 않고 손목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레오나의 파격적인 제안에 다른 사감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의기양양하게 이 도박에 제 판돈을 걸었다.

 

“그거 재미있겠군요. 저는 자신 있습니다.”

“규칙상 그게 맞을 것 같으니, 저도 불만 없습니다.”

“나도 상관없어! 아니, 아이렌만 괜찮으면 나는 다른 걸로 선물을 바꿔줄까?”

 

아줄은 ‘제가 아이렌의 손목 둘레를 모를 리 없다’라는 자신이 있기에 승낙한 것이었다. 리들은 규칙이 있다면 그걸 따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서 승낙한 것이고, 카림은……. 간절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승낙한 거고, 동시에 또 다른 선택지까지 꺼내 들었다.

 

“카림 선배, 혹시 다른 선물도 있어요?”

 

생일 선물을 다른 걸로 바꿔 달라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지금은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아이렌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나 그것도 비싸다고 할까 봐, 조금 더 싼 걸 준비하긴 했는데…….”

“그래요? 이 팔찌, 얼마예요?”

“어어, 얼마더라? 상자 안에 품질 보증서가 있는데, 거기 가격이 있을걸?”

 

그러고 보니 아까 팔찌를 꺼낼 때, 밑에 종이가 하나 껴있긴 했다. 아이렌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증서를 펼쳐보더니, 그 안에 적힌 금액을 보곤 비명에 가까운 소릴 질렀다.

 

“바꿔주세요, 제발 바꿔주세요! 제 몸값보다 비싸잖아요!”

“엑, 아이렌. 사람은 사고파는 게 아닌데?”

“비유예요, 비유!”

“아. 알았어! 그럼 나중에 다른 선물 들고 올게!”

 

대체 얼마이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가. 다들 그걸 궁금해 했지만, 저 선명한 청록색을 보아하니 보통 비싼 비취가 아닌 건 분명하다.

카림의 선물을 다시 포장해 건네준 아이렌은, 남은 네 개의 팔찌를 늘어놓고 심호흡했다.

 

“좋아. 그럼 후보는 총 4개인가……. 어떤 게 딱 맞더라도 불평하기 없기예요. 아시겠죠?”

 

네 사람은 각자 다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 초조함, 확신, 그리고 여유로움까지. 각기 다른 네 가지 색의 팔찌처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사감들을 보며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헛웃음을 흘린 아이렌은, 손을 미끌미끌하게 만들기 위해 핸드크림을 잔뜩 바른 후 하나씩 팔찌를 오른팔에 껴보았다.

어떤 것은 손을 통과하지 못했고, 어떤 것은 너무 여유로워 팔에서 빠져나갈 것 같다. 비슷한 듯 확실히 다른 크기의 팔찌를 하나씩 걸쳐 본 아이렌은 힘겹게 제 팔에 들어간 후 손을 나오지 못하는 한 팔찌를 선택했다.

 

“아무래도, 이게 제일 딱 맞는 거 같네요.”

 

투명한 흰색에 금빛 무늬가 마블링 된 그 팔찌는, 이 파격적인 제안을 한 이가 선물한 것이었다.

 

“이럴 수가…….”

“으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말도 안 돼. 왜 하필 레오나야?”

 

레오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바라지 않았던 결과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빌은 ‘왜 하필’ 같은 소리까지 붙이며 안타까워했다.

승자가 된 레오나는 소파에 기대 끅끅거리는 이데아 이상으로 얄밉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이 빌, 그 반응은 뭐지?”

“레오나, 설마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이런 제안을 한 건 아니겠지?”

“글쎄다. 나는 그저 ‘내 선물이 제일 크기가 적당해 보였다,’ 라고만 말해두지.”

“너…….”

 

생각해보면 좀 이상했다. 빌은 제안을 할 때부터 지나치게 여유로웠던 레오나의 태도를 떠올리고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린 건 아닐지 의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오나가 치사한 방법을 쓴 건 아니었다.

……물론 ‘언젠가 아이렌이 제 팔찌를 껴보고 얼마나 크기가 안 맞았던가를 기억하고 팔찌를 골랐다’라는 사실을 숨기고 이런 내기를 제안한 건 다소 비겁하다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사실이었지만, 중요한 건 그 사실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이런,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때. 탄식과 비웃음이 뒤섞인 파티장에 뒤늦게 일곱 번째 사감이 도착했다.

손에 남아도는 핸드크림을 티슈로 닦고 있던 아이렌은 늦게나마 찾아와 준 말레우스를 웃는 얼굴로 반겼다.

 

“말레우스 선배! 오셨군요?”

“릴리아가 카림이 보낸 메시지를 이제야 봐버렸거든. 이미 준비가 끝난 후 와버린 것 같지만, 일단 왔다만…….”

 

늦은 이유를 설명하던 말레우스의 눈이,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비취 팔찌로 향한다.

‘아, 혹시.’ 아직 긴장을 풀어선 안 되었다는 걸 깨닫고만 아이렌의 눈앞이 다시 한번 새하얗게 질렸다.

 

“그 비취 팔찌들은, 혹시?”

“설마 선배도?”

“…….”

 

아무래도 대답은 듣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제 예상이 틀리는 일은 없었고, 난감해하는 말레우스의 표정은 이미 답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아, 오늘 파티에 그림을 짚에 엮어둔 굴비처럼 걸어둬야지.’ 그렇게 결심한 아이렌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여담.

Q. 왜 하필 비취 팔찌인가요?

A. 제가 한 3일 전부터 옥팔찌가 갖고싶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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