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렌에 대해서

그 환상에 대해서

아줄 아셴그로토 드림

환상은 언제나 돈이 되었다. 지적 생명체들이란 결국 스스로 이상향을 그리는 존재였기에, 아무리 어리석은 자도 낙원을 꿈꾸기 마련이었고 자신의 완벽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지불할 수 있었기에, 환상과 소망은 언제나 타인을 가난하게 만들고 나를 배부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의 환상은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지는가.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로,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가진 판타지를 저울 위에 올려 본 적이 없었다.

 

먼 옛날 내가 원했던 것은 내게 없는 것을 채우는 것.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깔보지 않도록, 나를 비웃었던 이들이 내게 머리를 조아릴 정도의 힘과 능력을 가지는 것. 그것은 대단히 단순한 욕구였고, 나는 그것을 내가 가진 환상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충족시켜 나갔다. 피나는 노력으로, 연구 끝에 갈고 닦은 유니크 마법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도 구걸하지 않고, 오로지 혼자서.

 

─하지만, 사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이상향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걸 알게 된 것은 17살의 늦가을. 내가 상실감 속에서 오버 블롯 하고, 학기 초부터 나를 애먹인 이가 딱딱한 가면 속에서 신의 얼굴을 보인 날.

 

그는, 내가 사랑하는 그 여자는 나도 모르는 내 환상을 알고 있었다.

 

괜찮다고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어떠한 적의도 악의도 없다. 언제나 불필요할 정도로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있는 나를 아이 달래듯 무른 어투로 어르며, 내가 가진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는 그의 얼굴은 신의 것과 닮아 있었다.

대가 없는 애정. 조건 없는 상냥함. 저울에 올려놓은 것이 없음에도 내게 내밀어지는 달고 묵직한 충족감.

평생을 타인의 환상으로 장사를 해온 내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환상을 내어주는 그것이, 정녕 신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무력하게도 그 사랑 속에서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가 상상해 온 어떠한 환상보다도 내게 잘 맞아서, 나는 저항하거나 반항하는 짓도 할 수 없이 여덟 개의 다리와 두 개의 팔을 속박당하고 말았다.

 

우습기도 하지. 그 누구보다도 자비롭지 않은 내가 자비를 입에 담으며 타인의 환상을 금화로 바꿔온 대가가, 부력을 잃고 자애의 바다 속에서 가라앉게 되는 것이라니.

 

나는 그가 내게 준 충족감에 대한 대가를 내기 위해 저울에 모든 것을 올려놓아 보았지만, 신의 얼굴을 한 그 여자는 저울 위에는 아무것도 얹지 않았다. 마치 환상은 어리석은 이들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듯,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것을 내밀어도 받질 않았다. 그것이 나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을, 나를 다시는 뭍으로 올라올 수 없는 깊은 심해에 처박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 사랑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없었다.

 

내가 거래 중 봐온 사랑들은 이렇게까지 지고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냥 눈에 보이는 실체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수많은 환상들 속. 그저 망상일 뿐인 사랑들 속에서도 이렇게나 순교(殉敎)적인 사랑은 없었다는 말이었다. 아니, 오히려 굳이 따지자면 환상 속의 사랑들이야 말로 가장 추잡하고 덧없었지. 상대가 누구든 바뀔 것 없는, 스스로의 판타지를 채우기 위한 일방적인 욕구들. 누군가를 이해할 생각은 없고 그저 제가 이해받고 구원받기를 기다리는 이기적인 감정을 최대한 요란하게 치장한 형태. 그것이 내가 본 사랑들. 그렇기에 나는, 수많은 능력을 손에 넣길 바랐으면서도 타인의 애정을 바란 적은 없었다. 나를 이해 할 생각도 그럴 지능도 능력도 없으면서, 그저 적당히 달콤한 짓이나 할 상대로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은 역겨워서. 자신이 생각한 환상에 나를 덮어씌우고 내가 거기서 벗어나면 노골적으로 실망할 것이 뻔히 보이는 이들이 불쾌해서.

 

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받지 않으려 하면서, 나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쉽게 모든 것을 이해해 왔다. 마치 만인이 원하는 환상이 이러하니, 나도 그런 것을 원하는 게 아니냐는 듯.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나의 상처에 입을 맞추고 뺨의 눈물 자국을 손으로 문질러 지우는 것에만 열중하곤 했지.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자비에 가까웠다. 자비라는 말이 너무 숭고하다면, 동정이라거나 연민이라는 말로 대체해도 좋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것은 사랑은 아니었다. 그래. 적어도 내게는 사랑일지 몰라도 당신에게 사랑일리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해체하고 조각내어 저울에 올려놔도 당신의 환상을 알 수 없었고, 그것을 채워줄 수도 없었기에.

 

“저는 말이죠, 선배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게 행복해요.”

 

언젠가,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해 물었을 때 신의 얼굴을 한 여자는 저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 대답이 대단히 기만적이라고 느꼈으면서도, 눈앞에서 그 말을 부정하고 나설 수는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저렇게 대답하는 당신의 얼굴은 정말로 행복해 보여서.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 하나라도 보답해 주고 싶어 하는 그 모습마저도 가엽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얼굴이라서.

 

“정말 그걸로 된 겁니까, 아이렌 씨?”

“네.”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사람 같군요.”

“설마요, 저도 욕구 정도는 있는걸요.”

“금욕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당신은 아무것도 꿈꾸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 사실 그는 완전히 목석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는 신의 얼굴을 한 것 치고는 꽤나 자신의 욕구에 솔직했다. 즐거운 것을 좋아하고, 맛있는 것도 좋아하며, 따스한 포옹과 입맞춤을 즐기는 솔직한 이였으니까. 하지만 그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 뿐. 동물적 본능 위의, 고지능을 가진 생명체만이 꿈꾸는 환상은 도무지 읽히지 않아서, 나는 저리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으음.’ 내 말에 잠깐 앓는 소리를 내던 그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런 건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까요.”

“네?”

“환상이 왜 환상이겠어요? 이루어 질 수 없는 걸 알기에 환상인 거예요. 그걸 쫓는 순간 사람은 바보가 되는 거예요. 그 환상을 얻자고 자신을 파괴하고, 제 주변 사람을 파괴하고, 그러고 나서도 얻어지는 게 없으면 아무것도 제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울어버리고…. 그런 거, 저는 비참해서 못해요.”

 

차분하게 대답하는 그 얼굴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온화하다 못해 거룩한 표정에 할 말을 잃고,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저는 입에 달기만 한 꿈을 꾸는 것 보다는, 눈앞의 사람이 행복해 하는 걸 보는 게 더 즐거워요. 그리고 저는 선배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렇게 만들 수 있다면 기쁠 거고, 제가 없어지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을 거 같네요.”

 

‘선배를 사랑하니까.’ 그렇게 덧붙인 그는 내 두 손을 잡아왔다. 당신의 환상을 알아내고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 이 몸을 헤집어 피투성이가 된 손을. 부드럽고도, 야무지게.

아아. 당신은 환상 같은 건 믿지 않으면서도 어찌 그렇게 타인의 환상은 잘만 찾아내 엉망 내어놓는지. 아니, 오히려 모든 이의 환상을 보아왔기에, 그 덧없음을 알고 가지고 있었을 환상을 구겨 찢어버렸는지.

어느 쪽이든 나는 당신의 환상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만 확실해 졌다. 그렇게, 나의 환상은 돈도 되지 않는데, 당신은 그 가치 없는 내 환상을 채워주는 것이 행복이라 말하니.

 

‘쓸모없어.’

 

확실히 고결한 사랑이란 쓸모가 없구나. 환상이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추잡하고 역겨울수록 비싼 것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값싼 것의 가치를 알게 된 나는 내 손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그 손에 이마를 가져가 대고, 부디 내 환상이 날이 갈수록 무가치해지기를 기도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커플링
#드림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