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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L/아지르

리그 오브 레전드 - 아지르 드림

몽유기담 by 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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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되는대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걷고 있는 길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내가 발을 디뎠을 때 제대로 걸을 수 있는 땅이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였다.

길을 잃어버린 미아. 꼬인 실타래. 나는 눈앞을 어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치우며 한탄했다. 솔직히 말해 기분이 그리 좋진 않았다. 직장을 잘려서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다. 백수다. 그렇다곤 해도 큰 감흥이 있진 않았다. 조금 아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내일부터 출근 안 해도 되는구나―하는 속 편한 홀가분함과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정도. 나름 대륙에서 엘리트라 손꼽히는 소환사, 전직 소환사였던 나는 발길을 멈추고 적당한 나무둥치에 걸터앉았다.

전쟁학회는 썩어 있었다. 정치질, 권력 싸움, 불법 거래. 그게 싫어서 한직으로 도망쳤지만 뭐, 결국 결과는 이 꼴이다. 딱히 슬프진 않았으나 허탈하기는 했다. 학문의 장, 전쟁을 중재하자는 취지, 균형의 수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었다.

내 이력서에 경력으로써 한 줄 추가된 사항에 대해 곱씹던 나는 내 볼을 스치는 바람에 눈길을 주었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몇 번이고 바람이야 불었지만,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바람이었다. 내가 눈길을 주었을 때엔 이미 황금빛 바람과 함께 이형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을 대할 때엔 이것저것 생각해야할 게 많다.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할 때엔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나는 로브를 추스르며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의외의 장소에서 뵙습니다, 폐하.”

“짐이 가지 못할 곳은 없노라, 소환사여. 드넓은 제국 곳곳은 물론이며 슈리마로 통하는 길목 하나까지도 짐의 권능 아래에 있느니.”

갑주를 두른 큰 키의 형상이 내 앞에 드리워야 할 햇빛을 가로막고 있었다. 빛나는 황금빛 갑주에 매의 모양 투구, 고귀한 보랏빛 비단 천을 두른 모습은 인간의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초월자의 오만한 대답에 나는 그냥 웃었다.

“울고 있던 게냐?”

“예?”

눈을 껌벅인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눈꺼풀에 평소 이상의 수분은 없었다. 나는 간단히 부정했다.

“아뇨, 전혀.”

“전쟁학회에서 내쳐져 실의에 빠졌는가 했더니, 아니었나보군.”

쓰게 웃는다. 내 상황까지 그의 귀에 들어갈 줄은 몰랐다. 아니, 당연한가. 내가 맡고 있던 일은 학회에 등록되어 있는 챔피언들의 현황을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말뿐인 관리랄까. 그 덕에 이리저리 얼굴을 많이 내비치는 것이 일인데, 당연하지만 대다수의 챔피언들은 학회에서의 그러한 참견을 좋아하지 않았다. 잘못하면 최악의 경우 사망, 사망이 아니더라도 된통 뒤집어쓰기 딱 좋은 임무이므로 다들 기피하는 임무지만 어쨌든 그게 내 일이었다. 한 마디로 더 밀려날 곳이 없는 한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지르의 말에는 오류가 있었다. 나는 그 점을 지적해주었다.

“내쳐진 게 아니라 스스로 나온 겁니다.”

“별 차이 없지 않느냐.”

큰 차이가 있는데요. 사직서를 강요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직서를 던졌다는 것은 내 자존심에 대해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대가 그런 곳에 둥지를 틀 필요는 없노라고.”

푸른 눈이 가늘게 뜨였다. 동공의 구별 없이 푸른빛으로 눈구멍을 불태우면서 아지르, 부활한 사막의 황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에게 어울리는 곳은 따로 있느니. 짐의 손을 잡으라. 슈리마, 짐의 영원한 제국 안에 그 어느 곳보다 아늑한 보금자리를 내어 주리라.”

그 말 그대로 손을 뻗는다. 그의 팔을 감싼 단단한 황금빛 완갑은 길고 아름다운 장식 천을 드리우며 내 눈 앞에서 멈추었다. 내밀어진 손이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차마 그 앞에서 티 나게 한숨을 내쉴 수 없어 나는 입 밖으로 샐 것 같은 숨을 삼켰다.

“저에겐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 사양하지 않았던가요.”

“겸손도 계속되면 독이 되는 법.”

재촉하듯 손가락 끝이 움직였다. 그의 완갑에서 뻗어 나온 비단천의 끝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그래, 아름다웠다. 사실 그의 몸에 밴 오만함, 초월적 능력, 높은 지위 등을 제쳐두더라도 그가 아름답게 생긴 존재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초월체들이 모두 그렇지는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대는 더 이상 소환사가 아니다. 천하 그 어디에도 짐의 곁 외, 그대가 있을 자리는 없느니.”

아, 이건 맞는 말. 어디에도 내가 있을 자리는 없다. 실직의 여파는 컸다.

“짐에게 오라.”

그의 손은 긍정의 대답 외에 받아들일 생각 따윈 없어보였다. 실제로 그럴 게 분명하다. 아마 그대로 무시당한 채 납치된다거나 그러지 않을까? 나는 이 오만한 황제의 손을 쳐내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런다고 별로 다를 것 같진 않다. 분노는 확실히 살 것 같다만, 그 뒤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역정을 내며 나에게서 돌아설까, 아니면 거절에 대해 보복할까, 아니면 거절을 깨끗이 받아들일까. 소환사를 집어치울 때에는 눈에 뵈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신경 쓰였다. 나는 웃었다.

“손님으로서라면 생각해보겠습니다.”

어차피 지금 당장 갈 곳도 없다.

“폐하의 친구로서라면 기쁘게 가죠.”

잠깐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대답이 그의 마음에 들 만한 것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타협에 익숙하지 않은 오만한 황제는 푸른 빛 안광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감히 황제의 친우를 운운하다니, 불손무례하기 그지없구나.”

“송구하옵니다.”

그 시선을 나는 가볍게 고개 숙여 넘겼다. 이런 교환은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다.

“실로 고집쟁이로다. 뭐, 좋다. 두 번 다시 슈리마를 떠날 생각은 들지 않을 터이니.”

과연 그럴까. 그 곳이 내 길일까. 내 꼬인 여행의 종착지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중간지점에 지나지 않을까.

“짐의 이름으로 보호와 안전, 풍요를 약속하노라.”

어쨌든, 여행자로선 이만큼 든든한 것도 없다. 나는 웃으며―황송하게도 황제이신 그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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