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설탕 절임
트레이 클로버 드림
* 23년도 트레이 생일 연성
* 오리주가... 많이 나옵니다.
CUC의 3학년 기숙사 안. 모두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늦은 시간, 불이 꺼진 벽난로 앞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커다란 그림자가 달빛을 받아 모습을 드러낸다.
‘우왓.’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 물을 마시러 가던 블라섬은 희미한 뒷모습이 묘하게 익숙한 걸 눈치채고, 공용공간에 있는 전기등을 켜 주변을 밝혔다.
“카티, 뭐 하는 거야?”
무언가 골몰히 생각 중이었던 걸까. 카타리나는 한 박자 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여러 약초와 허브를 조합한 향료를 휴대용 파이프로 피워대고 있던 그는 상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역으로 엉뚱한 질문을 해왔다.
“백모란이여, 그대는 보석을 선물 받으면 기쁜가?”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생각해 보니 이 애는 늘 뜬금없었지. 1학년부터 쭉 그랬는데, 지금 와서 놀라기도 좀 그렇다.
블라섬은 잠깐 고민 후, 대단히 상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뭐,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거라면 기뻐할지도.”
“그 정도 보석이 아니라면?”
“당연히 고맙긴 하지? 나를 좋아해서 준 거 아냐. 하지만 다른 애들만큼 감복하지 않을 건 확실하지.”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는 블라섬이 이리 대답하는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보석상이었으니까. 자신이 소유하지 않더라도 좋은 보석과 귀금속들을 잔뜩 봐온 탓에, 어지간한 물건으론 감탄하지 않게 된 거였지.
‘으음.’ 급우의 대답에 잠깐 고민한 카타리나는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더니, X자 모양으로 뱉어냈다.
“역시 단걸 보내는 건 관두는 게 좋은가.”
“아, 남자친구에게 선물 사 주게?”
“그렇지. 곧 생일이라서.”
“그래?”
그거라면 고민될 만하지. 생일은 중요한 이벤트고, 연인은 중요한 관계이지 않나? 무려 중요한 게 제곱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블라섬 플루멧이라는 여자는 본래 남 연애 이야기를 듣고 상담해 주는 걸 좋아했으며, 그 대상이 제 절친이라면 더더욱 흥미로워했지. 이런 재미있는 화제를 놓칠 사람이 아니란 뜻이었다.
황당해하던 얼굴에 금방 생기가 돈 그는 냅다 카타리나의 옆에 앉았다.
가까이 앉자, 주변에 은은하게 퍼져있던 살구꽃 향기가 더 짙게 느껴졌다.
“너희, 알아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했지?”
“글쎄다. 아마 10년 즈음 되었나. 아니, 12년?”
“기억 못 하는 거냐고!”
“소꿉친구니까. 정확히 언제부터 알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하긴 하지.”
한 동네에서 같이 크며 자란 것도 모자라, 부모님끼리도 이미 아는 사이다. 그러면 거의 18년 인생을 다 안다고 봐도 되겠지만, 은근히 고지식한 면이 있는 카타리나는 아무래도 이 ‘알아 왔다’라는 말의 기준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제 친구는 뭐가 문제라 이렇게 진지할까. 블라섬은 꼭 제가 노인과 대화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일단 이야기를 진전시켰다.
“그럼 그동안은 매년 뭘 줬는데?”
“그때그때 달랐지. 주로 트레이가 가지고 싶어 하는 걸 미리 알아뒀다가 선물했어. 하지만 최근 3년간은 미리 알아두기가 힘들어서 고생 좀 했지. 1학년 때는 핸드크림, 2학년 때는 목도리였던가. 기뻐했는지 아닌지는 몰라. 아마 트레이라면 그리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고맙다고 했을 테니.”
“그럼 그냥 무난하게 케이크는……, 아.”
거기까지 말한 블라섬은 눈치채고 말았다. 왜 카타리나가 자신을 보자마자 그런 엉뚱한 질문을 했는지 말이다.
듣자 하니, 카타리나의 남자친구네 부모님은 베이커리를 한다고 했던가? 케이크나 과자는 지겹도록 먹어보았을 테고, 직접 만들어 보내주는 걸 봐선 저 자신의 기술도 뛰어난 모양인데, 케이크를 보내주는 건 영 현명하지 않은 거 같다.
제 일도 아닌데 어느새 심각하게 같이 고민해주고는 블라섬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장난스레 친구의 옆구리를 찔렀다.
“에휴, 넌 너무 심각하게 고민한다니까! 네가 준 거면 뭐든 좋아할 테니 그냥 ‘남자친구 선물 추천 리스트 TOP10’ 같은 거 안에서 골라 줘!”
“이왕 주는 거라면 신경 써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 다만.”
“이렇게까지 고민할 필욘 없잖아? 애초에 네 남자친구는 네 생일 때마다 그냥 케이크 보내주는 걸로 통일하지 않았어? 그런데 너만 이렇게 고민하는 거 아냐?”
“그건 내가 좋아하는 거니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게다가 매년 맛도 다르게 보내준다네.”
그리 말하는 카타리나는 무표정한 표정을 허물고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만족감 가득한 미소에 블라섬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억울하게도 저 대답에 반박할 수 는 없었지. 그간 2년 정도 배달되어 온 카타리나의 생일 케이크를 옆에서 한 입 얻어먹어 본 제가 말하는데, 제 절친의 남자친구가 만든 케이크는 정말 맛있었으니까. 그런 걸 매년 다른 맛으로 선물해 준다? 자신 같아도 생일이 기대되어 견딜 수 없을 거였다.
“저어, 나도 의견을 내도 될까?”
“으왁!”
진지하게 고민하느라 주변에 누가 다가오는지도 모르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건, 아직 교복 차림인 포플러였다.
깜짝 놀라 소리치는 블라섬과 달리 평온한 얼굴로 상대를 확인한 카타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 모시나비 아닌가. 물론이지.”
“여태 선물한 것 중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걸 참고하면 어때? 시간이 지나서 기호가 바뀌었다면 모를까, 축적된 데이터는 배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과연, 일리 있는 말이군.”
유용한 조언에 진달래색 눈동자를 빛내며 기억을 되짚어 본 카타리나는, 몇 초 뒤 당당하게 답을 내놓았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너, 진짜 이상한 곳에서 허술하구나.”
“그런 이야기 자주 듣는다네.”
블라섬이 아픈 곳을 찔러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카타리나의 태연함에, 포플러가 ‘후후’하고 웃었다. 보아하니 그는 제 조언이 그리 유용하게 먹히지 않았음에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 듯하였다.
후우, 하고 길게 연기를 내뱉은 카타리나는 향료가 떨어진 파이프의 불을 껐다.
“이러다간 핼러윈 선물만 덩그러니 보내게 생겼구먼.”
“핼러윈 선물도 같이 보내?”
“그렇다네. 며칠 차이 안 나서, 떨어져 지낸 이후로는 같이 보내주고 있다네.”
“흐음.”
일주일 간격으로 택배를 보내느니, 같이 보내는 게 낫다는 건가. 포플러는 이걸 ‘경제적’이라 생각했고, 블라섬은 이걸 ‘귀찮아서 한 번에 처리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타리나의 말은, 이렇게 다른 관점을 가진 두 친구가 같은 소리를 하도록 만들었다.
“매년 핼러윈에는 트레이가 좋아하는 제비꽃 설탕 절임을 만들어 주었는데, 올해도 그걸로 만들어야지. 그건 실패한 적이 없고, 오히려 주지 않으면 ‘올해는 그거 없어?’라고 해서 뒤늦게라도 만들어 주곤 했거든.”
뭐야. 이미 답 나왔잖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그거네.”
“그거구나.”
“음?”
그렇게나 좋아하는 거라면, 좋아하는 것의 선택지를 넓혀서 주면 되는 거지.
블라섬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포플러와 눈빛을 교환하고, 카타리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카티, 이번 주말은 바빠질 거야.”
그리고 10월 24일. 트레이 클로버의 생일 하루 전날.
하츠라뷸 기숙사에는 달콤한 향이 풍기는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트레이 군, 이게 뭐야?!”
케이터는 택배 상자 가득 든 꽃들을 보고 식겁했다.
아니, 그건 그냥 꽃들은 아니었다. 설탕을 입혀 작은 용기에 종류별로 나눠 담은 설탕 절임이었지. 제비꽃은 물론이요, 장미, 팬지, 베고니아, 패랭이꽃까지. 먹일 수 있는 꽃은 다 있는 것 같았다.
트레이는 생각을 잃을 수 없는 차분한 얼굴로 택배 상자 안을 내려다보았다.
“내 생일선물.”
“누가 보낸 건데?”
“여자친구.”
아, 그 고지식한 아가씨 말인가.
자신의 ‘친구’도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고, 트레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준 탓에 알음알음 카타리나에 대해 알고 있는 케이터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놀렸다.
“굉장하네, 이거 다 직접 만든 거 아냐?”
“그렇겠지.”
“우와……. 트레이 군, 엄청나게 사랑받고 있잖아~?”
하지만 아무리 놀려도 트레이는 반응하지 않는다. 평소라면 쑥스러워하거나 멋쩍어해야 할 텐데, 지금은 내용물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며 짧게 답할 뿐 반응하지 않았다.
아, 역시 처치가 곤란해서 고민에 빠진 건가. 여자친구가 준 생일선물이니 곤란한 티도 못 내는 거라면?
‘하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많이 받으면…….’
아무리 좋아하는 거라 해도 이렇게나 많이 받으면 부담스럽겠지.
그렇게 생각한 케이터는 단 걸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친구를 위해 선뜻 도우러 나섰다.
“나 하나 먹어도 돼?”
“아니.”
“응?”
“카티가 나 혼자 먹으라고 했거든. 안 줄 거야.”
아, 지금 보니 이 녀석. 웃고 있다. 아주 은근하게, 하지만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웃고 있다.
케이터는 그제야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보이지 않았던 트레이의 미소를 확인하곤 기가 차서 헛웃음 지었다.
‘와, 닭살 부부다.’
이럴 땐 대놓고 기뻐해도 되는데. 하여간 징그러운 커플이다.
케이터가 닭살 돋아서 어깨를 떠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트레이는 수많은 꽃 절임 중 제비꽃이 든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달콤하고 향긋한 설탕 절임의 향은 꼭 연기처럼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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