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와 활자 ; 02
연금술사 부근의 이야기. 알반 기사단 관련 묘사는 대부분 저의 상상입니다.
베르다미어는 고개를 들어 포도주 빛 하늘을 보았다. 그의 손에서 신들의 검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별안간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바깥의 혼잡스러움과 제 마음에서 들려오는 불평을 견디지 못해 그림자 세계로 뛰어 들어온 참이었다. 그림자 세계의 검은 태양이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란 적 없어.”
지금까지의 총평이었다. 종말의 서니 뭐니 하는 건 옛날에 이미 충분히 겪었다고 생각했다. 온몸이 번쩍거리는 드래곤을 만나고, 또 멸망에서 무언가를 구하고. 사건에 휘말리는 것도 정도가 있다. 티르 코네일에 발을 디딘 지가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엘프와 자이언트 사이에 끼어 끙끙거리고 용들의 알력 다툼 사이에서 사실은 내가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라며 천진한 소리를 하던 게 어제 같은데 이젠 뭐? 칼리번? 키홀은 증발하면서 무슨 놈의 힘을 넘겨주고 간 건지. 제대로 쓰기야 했고 몸에도 이상은 없는데 찜찜해 죽을 지경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제 몸이 수많은 힘을 담은 용광로라도 된 기분이다. 지나가는 떠돌이 용병이 어이! 이것 좀 맡아줘! 하고 또 새로운 힘을 몸에 던져 넣는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브류나크를 내려다보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아드니엘한테나 갈걸.”
황금빛 용은 자신의 감응자를 끔찍이 아끼는 성정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베르다미어와 잘 맞았다. 그들은 한참 교류가 없어도 절친한 친척 사이 같았다. 베르다미어는 가끔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드니엘을 찾아가 조잘거렸고, 용은 그의 쬐끄마한 감응자가 거대한 발톱 사이에서 재잘거리는 것을 온화하게 지켜보았다. 골드 드래곤은 감응자의 성격을 닮는다던데, 베르다미어는 자신의 어디에 저런 온후하고 자상한 일면이 있는지 가끔 궁금해했었다. 음, 뿔피리를 불면 냅다 메테오부터 쏴주는 건 좀 닮았을지도 모른다. 감응자의 투덜거림을 모두 들어준 용은 그가 레네스를 떠나는 것을 보며 언제나 같은 말로 배웅했다.
‘그대의 운명은 그대의 것이니, 그대의 선택을 의심하지 말게.’
베르다미어는 거의 항상 나이도 어린 게 어려운 말만 한다며 작게 툴툴거렸지만, 그 말은 코우사이의 전언과도 어딘가 닮아 있었다. ‘진실한 용기를 지닌 전사는 그 자신이 삶의 주인이기에 결코 운명을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닌 사람도 있나? 운명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비슷한 말이겠거니 싶었다. 운명이 뭔데? 그의 마음이 계속해서 툴툴거렸다. 바란 적 없는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는 게 운명이라면 그거야말로 사양이다.
그는 의미 없이 브류나크 끝으로 땅을 쿡 찍었다. 땅이 폭발한다든가 하는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하지. 반신화도 안 했으니까. 그는 부루퉁하게 생각했다. 신의 힘을 얻으면 모든 게 권태로워지고 사는 게 재미없고 전투도 너무 쉬워지고 할 거란 상상들을 많이 하는데, 베르다미어가 실제로 손에 넣은-갖고 싶지도 않았던- 신의 힘은 그것들과는 약간 동떨어져 있었다. 강하긴 한데, 편하기도 한데, 그냥 그것뿐이다. 검 좀 좋은 거 쓴다고 갑자기 일당백이 되지는 않잖아. 그런 거지. 그는 애꿎은 땅을 몇 번 더 브류나크로 쿡쿡 찔렀다.
“... 하여간 신이 문제야.”
결론은 이렇게 났다. 따지고 보면 또 신들끼리 모여서 또 이런 난리가 난 게 아닌가? 피해는 결국 인간이 다 입었다. 포워르도 좀 손해 본 것 같긴 한데 우리 편 아니니까 거긴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키홀은 죽었는지 증발한 건지 하여간 이제 나타나지 않을 거고, 모리안과 네반은 자매인 것 같았으니까 거긴 또 거기 나름대로 지지고 볶겠지. 베르다미어는 신랄하게 생각했다. 모리안은 이번에 그를 도와주었지만, 파이톤 나이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네가 신의 힘을 얻으면 여신이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너희 밀레시안은 여신의 용병으로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보일 듯 말 듯 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여신이 에린의 원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밀레시안을 일부러 끌어들였다고? 그는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잊지도 않았다.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실제로 밀레시안은 ‘위험한’ 일들의 최전선에 있곤 했다. 옛날 같으면 무슨 헛소리냐며 노발대발했겠지만 한 번 배신을 당하고 나니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슬그머니 그 말을 한쪽에 메모했다. 배신의 결과가 그 하나만 손해 보는 거였다면 그런 습관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 나는 빨간 드래곤이 정말 싫어. 난 화산도 싫어. 베르다미어는 발끝으로 브류나크 때문에 푹 팬 땅을 대충 메웠다.
그는 브류나크를 가방에 쑤셔 넣고 오래된 검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의 검은 허물없는 친구처럼 친근하게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다시 그림자 세계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팔라라를 볼 때처럼 눈이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불길하고 기분 나빴다. 역시 그냥 아드니엘한테 갈걸. 도망치듯 들어오긴 했지만, 기왕 임무를 받고 뛰어 들어온 거 할 일은 해야 했다. 싸울 때는 잡생각이 나지 않으니까 차라리 이쪽이 나을지도 몰랐다.
“받은 임무가 뭐더라.”
새도우 커맨더 퇴치던가? 아, 귀찮은데. 그는 새로 들인지 얼마 안 된 말을 불러내어 갈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말은 투레질하며 그를 맑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약간 입술을 오므리며 고민했다.
“이런 애를 데리고 싸워도 되나.”
말은 머리를 그의 턱 밑에 디밀며 항의하듯 푸르릉, 소리를 냈다. 그는 낄낄 웃으며 말의 얼굴을 삭삭 쓰다듬었다. 나이도 어린 게! 애정 어린 잔소리가 잠깐 굴러 나왔다.
“위험하니까 싸울 때 너무 가까이 있지는 마. 알았지?”
아직 망아지인 말이 알아들은 것처럼 팔짝거렸다. 베르다미어는 말을 좀 더 쓰다듬어 준 뒤 훌쩍 안장에 올라탔다. 한 손엔 검을 들고 말에 올라탄 품새가 제법 노련한 전사의 티를 냈다. 그는 길을 따라 달려가기 전에 꿍얼거렸다.
“이거 끝나면 꼭 티르 코네일에 들러야지.”
말발굽이 땅을 박찼다. 스산한 고요뿐이던 그림자 세계에 곧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휘날리고 숙련된 검 끝이 갑주를 찢었다. 쇠붙이가 저들끼리 부딪칠수록, 수세에 몰릴수록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달아났다. 심장이 뛰고 위협을 감지하는 감각들이 날을 세웠다. 그의 붉은 눈동자 한 쌍이 타오르듯이 빛나고 척추를 따라 전율이 흘렀다. 죽지 않으니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쳐 쓰러지는 것도 잠시뿐이다. 그는 비어 있던 손으로 허리춤에 걸린 검을 하나 더 뽑아 들었다. 연마된 검의 표면이 검은 태양의 빛을 춤추듯이 반사한다. 소복하던 고민과 생각은 삶이 대롱거리는 칼끝에 베이듯 사라졌다. 하기야, 이것이 용병의 삶이었다. 잡다한 생각은 먼지에 불과할 만한 위험을 마주하며 등에 진 의뢰를 해결하는 게 용병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웃기지도 않는 소리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나오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고마워요, 에린에 와주셔서.’
그는 그것이 단지 ‘위험을 막아주는 댐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의 검이 크게 반원을 그렸다. 그래, 그런 일만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적들이 스러지고, 다시 나타나고, 전투의 열기가 밀물처럼 몰려온다. 그는 피부가 달궈지는 사이에 다시 되뇐다. 마음은 숫제 기도문처럼 낮고 작게 속삭였다. 나는 신들의 편리한 도구 따위가 되려고 온 게 아니다. 나는 이곳에...
나는 이곳에 평화를 부르러 왔다.
견습 기사들 중 우수한 인재들이 정식으로 기사 신분을 받는 서임식은 기사단에 몇 없는 연례행사였다. 기실 매년 정식 기사들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지만 기사단은 대충 퉁쳐서 ‘연례행사’라고 불렀다. 조직의 규모가 한정적이다 보니 상다리가 부러지게 손님을 대접하거나 견습 기사들을 먹이고 입히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명예로운 행사를 준비했다. 행정 담당자들이 일주일 전까지 머리털을 뽑아가며 고민한 결과로 기사단의 위엄은 언제나 지켜지는 편이었다. 기사단을 떠받치는 거대한 가문의 지원도 크게 한몫하곤 했다.
서임식 당일은 애 어른, 견습 정식 할 것 없이 몹시 분주했다. 카즈윈도 예외는 아니었다. 슬쩍 빠져나가자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그의 서임식이었다. 빠져나가면 경을 칠 게 빤했고 그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게으름을, 아니 깊은 생각에 빠지지는 않았다. 꼭두새벽부터 게이트를 꾸미고, 정리하고, 갑옷을 윤이 나게 닦거나 구유를 닦고 말들에게 새 건초를 주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다 보면 팔라라가 밝게 떠올랐다. 함께 정식 기사로 올라가는 몇몇 아이들이 바닥에 퍼진 걸 바라보던 카즈윈은 냉큼 어깨가 붙들려 끌려왔다. 그래도 서임을 받는 날인데 멀끔해야 하지 않냐는 말과 함께였다. 그는 당장에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곁에서 피네가 함박웃음을 지은 채 그를 붙잡고 있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는 여러 명의 손길이 그를 때 빼고 광내는 동안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게이트를 구경했다. 견습 기사들이 몇 시간동안 매달린 덕분에 게이트는 몹시 깨끗해졌고, 지저분하던 훈련 구역도 제법 모양새가 갖춰져 있었다. 행정 담당자들은 번쩍번쩍한 게이트를 바라보곤 늘 이러면 얼마나 좋겠냐며 옆에서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카즈윈은 주신께서 강림하셔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마음 속으로 장담했다.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참을성 있게 빗기는 손길을 거울 너머로 흘긋 바라보았다. 힘들텐데, 그냥 포기하지. 이 말은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분해진 그가 뿌듯하게 이마를 닦는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진작 나와서 그를 기다리던 피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와, 차분해졌네. 몰라볼 것 같아.”
“.... .... 어색해....”
“그래도 서임식이잖아. 정돈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을걸?”
“... 그래...”
그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식 기사가 된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온갖 기사단 인원이 다 모이는 행사에 이목을 받으며 서 있자니 약간 속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카즈윈, 그렇게 싫어?”
“......”
“에이, 카즈윈도 서임식 봤었잖아. 생각보다 금방 끝날 거야. 자, 새 갑옷 입으러 가자.”
카즈윈은 피네의 손에 이끌려 터덕터덕 걸으며 하늘을 흘끔거렸다. 보는 처지에서야 금방이었지만 실제로 서임을 받는 처지에서는 어떨지 몰랐다. 비 같은 거라도 내리면 좀 더 빨라질 텐데. 그는 게이트마냥 번쩍거리는 갑주를 바라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를 쏙 빼놓은 모든 사람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서임식의 절차는 길었다. 오찬과 저녁 만찬이 식순에 같이 있었으니 오죽할까. 견습 기사들은 몇 년에 한 번 단장을, 아니 단장을 직접 보지는 못하더라도 단장이 직접 쓴 헌사를 들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되도록 식순을 몽땅 소화하려고 노력했다. 카즈윈? 처음엔 그도 모든 식순에 참여했던 것 같다. 그는 반쯤 정신을 다른 곳에 빼 두고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임식은 견습 기사들의 경력에 관계없이 비슷한 나이끼리 묶여 진행되었다. 보통 나이가 많은 순서부터 서임을 받았고, 카즈윈은 제법 어린 나이였기에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푸른 꽃잎이 날리고 새로 정식 기사가 된 이들이 주어진 영광에 벅차하며 눈을 빛내는 명예의 현장이었다. 축복받은 검이 그들의 어깨에 놓이며 사명의 무게를 넘겨주고, 그들은 영원히 사명에 헌신하겠다고 맹세하는 성스러운 예식이기도 했다. 피네는 그들을 바라보며 작은 감탄을 뱉었다.
“멋지다. 나도 언젠가 선배의 자리에서 서임식을 보고 싶어. 직접 검도 들어보고 싶고.”
카즈윈은 한쪽 눈썹만 까딱였다. 대강 ‘너라면 그럴 수 있겠지’라는 뜻이었다. 피네는 부스스 웃었다.
“카즈윈은 어때?”
“... 별로 흥미 없어.”
피네는 잠시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카즈윈은 혼자 생각했다. 검을 직접 들고 기사들에게 서임을 내리려면 적어도 조장 자리에는 올라가야 한다. 글쎄,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신만이 아시겠지. 그는 여전히 뽐내지도 않고 지나치게 겸손하지도 않았다.
“... 그것보단 어느 조에 가게 될지가 궁금한데.”
정식 기사가 될 사람들은 늦어도 한 달 전에는 통보받는 편이었다. 새로운 갑주의 제작 때문이었다. 대충 만들 수도 없거니와 이유도 붙이지 않고 다짜고짜 치수를 재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렇다. 그래서 정식 기사가 될 사람들은 서임식 한 달 전부터 티가 나는 편이었다. 카즈윈의 경우 특별히 티가 나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미 모든 동료가 그가 서임 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왜? 카즈윈은 잠시 생각해보다 곧 그만두었다. 하여간 그래서 예비 정식 기사들에게 비밀에 부쳐지는 건 그들이 어느 조에 가게 될지 정도였다. 조장들의 회의로 결정되는 부분이었는데, 정식 기사들이 견습 기사들에 대한 평가를 직접적으로 입 밖에 내는 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이 어느 조에 가게 될지는 서임식 때에야 밝혀지곤 했다. 피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 싶은 조가 있어?”
“딱히.”
“음, 카즈윈이라면 왠지 헤루인이나 엘베드 같았는데.”
그는 별말 없이 표정으로 ‘왜?’라고 물었다. 피네는 카즈윈의 표정을 기사단에서 제일 잘 알아듣는 사람이었다.
“엘베드는 규율이 유연한 편이고, 카즈윈이라면 헤루인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카즈윈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내가 가고 싶다고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긴 해. 나는 어디에 가게 되려나? 난 어디로 가든 좋은데.”
피네는 설렘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서임을 받는 선배들을 바라보았다. 카즈윈은 물끄러미 하얀 머리꼭지를 바라보다 툭 뱉었다.
“네가 잘 지낼 수 있는 곳이면 됐지.”
“하하, 걱정해 주는 거야? 다 멋진 분들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가 성향을 염려하기에는 피네의 성격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는 정확히 그 지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본인이 그렇다니 더 말을 붙일 생각은 없었다. 카즈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서임식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면 성스러운 칼끝이 그의 어깨에 닿을 것이다. 사명이 내려올 것이고, 그는 맹세할 것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절차였다. 책임이 커지는 만큼 권리도 커질 것이고, 위험을 무릅쓰는 만큼 돌아오는 명예도 찬란할 것이다. 카즈윈은 뒷목을 문질렀다. 막상 닥치니 아무리 그라고 해도 약간 긴장되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의자에 파김치처럼 늘어진 다른 아이들보다야 양반이었지만. 그는 조용히 서서 다시 기다리기 시작했다.
카즈윈과 피네를 비롯한 그 나이 또래의 기사 몇 명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흐드러진 푸른색 꽃잎은 붉은 융단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마치 융단이 원래부터 푸른색 실과 붉은색 실을 교차해서 짠 직물처럼 느껴졌다. 준엄한 맹세의 말을 읊는 기사는 그에게 낯이 익었다. 아, 예전에 함께 서고에 들어갔던. 기사는 낭랑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서약을 요청했다. 꿇어 앉은 어린 기사들은 또렷하게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었다. 무엇을 건다는 거창한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조직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들은 그들의 삶을 주신의 뜻과 영광된 길에 바쳤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순백의 검이 그들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사명은 거대한 날개처럼, 동시에 그들을 영원히 묶어 둘 속박처럼 검날을 타고 흘러들었다. 주신의 날개 아래 새로이 태어난 이들을 축하하는 푸른 꽃잎이 뺨을 스쳤다.
카즈윈은 창백한 눈을 깜박였다. 주신의 날개 아래 에린을 보호하는 주신의 검. 어떤 위협에도 꺾이지 않는 냉철한 의지와 마지막 순간조차 버틸 수 있는 믿음을 지닌, 신조차 대적하는 기사. 그는 천천히 일어나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기사단의 선조들도 이러한 서임식을 거쳤을 것이다. 그들도 사명을 지고 온 생애를 태웠을 것이다. 그는 이제 막 그 길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었다. 그는 머리 위로 날려 떨어지는 푸른 꽃잎 한 장을 쥐고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주신의 검은 단지 적을 파괴하는 자가 아니다. 주신의 힘을 등에 업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다. 신성한 서약을 기꺼이 받들고 사명에 반하는 이들로부터, 에린의 존립을 위협하는 이들로부터 이 땅을 지키는 자다. 그는 그제서야 서약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다.
단순히 선택받은 자가 아니다. 기사단은 언제 나타나는지도 모르는 신성력에 매달려 이어져 온 집단이 아니다. 그는 꽃잎을 실바람에 날려 보낸다.
그들은 이곳을 수호하고자 기꺼이 삶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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