лев

Aksel Valerian.

  • 2022.11.08


열린 창 안으로 들어오는 늦가을의 밤공기는 누군가에게는 선뜩함을, 누군가에게는 싸늘함을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제게는 그저 봄바람의 살랑거림과 다를 바 없다 하더라도. 

흐린 달은 미동없이 떠 있고,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까만 하늘 위로 흰 담배연기만 대신해 수놓아진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왼눈을 감으면, 조금 더 뿌연 잔상이 남은 시야가 들어찬다. 

제 시야가 흐린 것인지, 담배연기가 차오르는건지 모를 만큼.  


창백한 빛깔의 벽. 일정한 소리를 내는 전자기. 누군가의 고함. 녹슨 바퀴의 마찰음. 그것을 뒤로 한 채. 제 시야에 목적지가 나올 때까지 거침없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601호. 숫자를 확인하고 부술 듯 쾅. 문을 열어내면, 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돌아본다. 이거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다음. 다음. 오케이. 확인.

"... 하하하... 하... 안녕...?" 

" 안녕? 안. 녕?"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걸 보고 목덜미를 잡았다... 이 인간은. 

쾅쾅 발을 구르며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이는 꼴에 제 덩치보다 큰 남자의 멱살을 틀어쥔다. 

"변명."

"하하하. 그게, 그러니까,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말 똑바로 안-, 그래~ 어쩌다 보니 다 터지고 부러지고. 그러다 수술도 하고. 죽을 고비도 넘고. 어?"

"... 미안." 

미친 새끼야. 네가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사람 걱정시킬래? 어? 사과하면 다야? 사과하면?!? 왁왁대며 한껏 분을 쏟아내고, 그러고도 모자라 발을 구르고. 걱정이 안도가 되고 안도가 분노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지만. 어디 이게 하루 이틀 일인가. 화를 내는 제 꼴이 우스워져 병상 옆 의자를 끌어 앉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 제 뺨에 우둘투둘한, 오랜 화상과 동상의 흉터가 섞여 제 색이라곤 없는 손이 닿는다. 

"...형 손 차갑다. 몸 다 꿰매 놓고 능력을 왜 써. "

" 너 열 식히라고..."

이걸 한 대 때려 말어. 하는 눈에 생글거리는 얼굴이 담기면, 더 화를 내지도 못하고 늘어졌다.

사람 걱정만 잔뜩 시키고... 이건 반칙이지. 가만 생각하다 또 열받는지 침상에 엎드린 채 으어아아어 괴성을 질러낸다. 

" 진짜 짜증나... 안다치겠다고 약속한지 반년도 안되서 깰 약속이면 하지나 말던가!!"

" 알았어 알았어. 진정해 진정. 쉿."

"...개짜증나...개싫어..."

" 걱정 했어? 죽기라도 했을까봐? "

" 안했겠냐?!?"

" 하하핫 걱정마. 형 무슨 일 있어도 안 죽어. 나 없으면 너 달랑 혼잔데. 내가 어떻게 죽냐?"

" ..."

"그러니까 표정 풀어봐. 응? 이번엔 진짜 약속. 다음엔 절대 안 다칠게."


" 갔다가 언제 오는데? "

" 글쎄 한 일주일 걸리지 않나 싶은데... 왜 보고 싶을까 봐?"

" 징그럽다 떨어져라 "

" 너무해~! 너 어릴 땐 잘만 안겨 오더니 이렇게 형 밀어내기 있어?"

...왜 갈 수록 더 정신연령이 낮아지지 저건. 

"왜 갈수록 애가 돼가냐는 얼굴인데? 사관생도면 준사관인데. 이렇게 하극상 하는 건가? 악셀 발레리안 레프 생도."

"... 좀 가. 그냥 가. 아주 그냥 가서 돌아오지 말아 주시죠. 레프 대위. "

"아 왜~~"

엉겨오는 몸을 퍽퍽 때리고 차며 밀어낸 뒤에야 한숨을 푹 쉰다. 피곤하게 진짜... 현관앞에서 이게 몇 분째야. 

" 또 이상한 거 주워오지나 말고 이상한 사람한테 뭐 주지 말고 좀. 돕는다고 설치지 말고. 얌전히 다녀와."

" 이게 컸다고 형한테 잔소리하는 거 보게. "

" 헹, 형 전적 생각해봐라. 어디 가서 돈이나 떼먹히고 다닌 주제에..."

"...아 그건 그냥 준거라니까 그러네. 너야말로 밥 잘 챙겨 먹고 학교 잘 다니고 있어. 아, 목 긁지 말고..."

"... 혀 물지 말고, 덥다고 아이스크림만 먹으면 안 되고, 잘 때 창문 꼭 잠그고 자고. 맞지? 너 늦으셨어요. 대위님이 지각하면 모양 빠진다며. 알았으니까 이제 가. 잔소리 그만하고 좀."

늘 일러주는. 이제는 전부 외워버린 잔소리 목록들을 먼저 줄줄 뱉으며 가라는 듯 손을 휘젓는다.

내가 아직도 애인 줄 아나... 죽은 눈으로 툭툭 다리를 걷어차며 현관 밖으로 쫓아낸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창밖에서도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드는 걸 어이없이 보고 마주 손을 흔들다가. 커튼을 확 쳐버린다. 하여간... 진짜. 저건 철이 안 든다 안 들어. . 소파에 드러누워 티비를 틀고 의미 없이 채널을 돌리다 휙 리모컨을 던진다. 시끌시끌했는데 한 사람 없다고 이렇게 썰렁하냐...

"얼른 갔다가 얼른 와. 얼른."


빈 복도를 울리는 걸음 소리가 유독 크다. 낯선 포르말린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이고 그것을 덮으려 뿌린 싸구려 방향제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복도 끝 익숙한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몇 모여 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철문을 열면. 저가 춥다고 느낄 만큼 낮은 온도의 내부와 그 중앙에 차디찬 스트레처 카 위로 시트에 덮인, 인영이 보인다. 

" - 빠르게 연락 드리지 못 해 죄송 ─"

" ─ 몸으로 막아내어 ─ 해당 가이드는 ㅅㅐㅇ ㅈㅗㄴ ─ "

뒤에서 저를 잡는 손을 뿌리치고 느리게,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이라도 된 마냥 아주 느리게 발을 끌어 앞에 서면, 흰 시트 위로 손을 올린다. 손끝에 시트가 잡히지 않아 다시, 아니, 다시. 

그렇게 겨우 끌어내리고, 누워 있는 이의 얼굴을 눈에 담은 채. 바닥에 닿은 무릎에서 타일의 감촉이 느껴졌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알료샤. 

형.

말해봐. 

네가 왜 여기 있냐고. 


23시 58분.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금 창밖을 바라본다. 담뱃잎과 종이가 탄 연기가 여전히 흘러 위로 올라간다.

일순간 들이치는 바람은 시원하기도, 싸늘하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 계절은 돌고, 작별을 고한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오는데. 넌 왜.

답답한 흉통, 두근거리는 심음, 귀 울림, 아래의 말소리, 복도의 인기척. 그것들이 한데 뒤섞여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 던져져 가라앉는 기분은 어떤가. 잘 모르겠다.

이젠 흉조차 남지 않은, 제어구의 감각만 기억하는 손목을 매만진다. 디바이스의 수치를 확인하고 다시 돌려 덮고. 네가 있었다면 분명 잔뜩 걱정 어린 낯으로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 놓았겠지... 그러면 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꺼지라고 했을테고.

네가 있었다면 달랐을 수도 있을까. 센티넬이니 가이드니. 그딴 복잡한 거 생각도 안 할 때처럼 말이야. 그래도 지는 건 싫으니까 열받으면 들이받기도 했었을 테고... 같이 임무 나가서 실컷 놀다가 돌아와서 술이나 진탕 마시고 뻗을 수도 있었겠네. 아, 담배 피우는 건 싫어했으려나...

"...한심한 새끼... 그깟게 뭐라고 약속 한번을 안 지켜."

필터까지 타들어 가는 담뱃불을 멍하니 응시하면, 새붉은 빛이 눈에 담겼다. 창틀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으면, 위태롭게 떨어질 듯 아닐 듯 서 있는 꼴이 꼭...

"... 알아. 안다고. 아는데."

알아서 싫은거야. 알아도 싫은거야. 좋아할 수 밖에 없다는 건. 싫어하면 안된다는 얘기는 아니잖아.

"적어도 나는 그러면 안되잖아."

호감을 가진다는건, 내가 원한게 아니잖아. 

"그래. 너처럼 한심하게 그렇게는 안할거야. 그걸로는 안돼? "

한심하게 휘둘릴 생각 없어. 

너처럼은 안할거야.

그래. 그렇게는 안할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