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e
逃避
2022. 11. 19
77%
군화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벽을 치고 다시 공명한다. 건들거리는, 어슬렁대는 걸음이 목적없이 움직이는것 같다가도, 시선은 곧게 뻗어 목적성을 담고 있었다. 물기가 가시지 않은 적색을 대충 털고,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걸어간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습관적으로 씹으며. 익숙하기도, 낯설기도한 문 앞에서야 멈추고, 이내 문고리 위로 손이 올라간다. 반쯤 고리를 돌려내고 멈춘다.
왜 왔지?
그제서야 생각을, 이유를 찾아낸다. 다시 문고리를 놓고 뚫어지게 문을 노려본다.
소령 이원결.
상체를 뒤로 물리고 여전히 한 손은 문고리에 올린 채. 적힌 문패를 태우기라도 할 요량인지 한참을 못 마땅한 눈으로 응시한다. '딱히 용건 있어서 온 건 아니긴 한데...' 파륵 올라간 눈썹을 꾹꾹 손으로 내린다. 괜히 핑곗거리를 찾느라 멈칫한 손끝이 톡톡 문고리를 두드리고 다시 꽉 고리를 잡는다.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냈다. 쿵. 벽에 부딪힌 문이 소릴 내고, 팔짱을 낀 채 문턱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다.
창문을 등진 인영이 역광을 맞아 검게 물들어 있는 것을 물끄러미 본다. 눈을 깜빡여내도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가늘게 뜬 눈이 말없이 응시했다.
77%
"...레프 중위는 손이 노크를 하면 부서집니까?"
"엉. 부서져."
적당히 고개를 까닥하고 대수롭지않게 대답했다. 노크는 무슨. 흘긋 내린 시선으로 문턱을 본다. 괜히 발끝을 문턱에 올려보고 넘을 듯 말듯 아슬한 선 위에 위태로이 서 본다. 곡예라도 하듯 올린 발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리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본다. 노을이 밀려오는 창가는 익숙한 눈부심이라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려낸다.
"말도 없이 왜 보고만 있어요. 왜 온겁니까?"
왜 왔더라. 아직, 못 찾았는데. 성급하게 문을 연 것을 탓하기라도 하는지 허공에 뜨인 손을 숨기려 괜히 물기가 남은 머리를 턴다.
아, 그게 있었지.
"...여행책. 궁금하면 오라며."
저가 생각해도 그럴듯한 핑계인건지.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간다. 같으면서도 다른듯한 내부를 눈으로 훑어내고 한발 한발 떼어 다가간다. 파란색 폴더와 펜, 종이뭉치들이 가지런하게 흩어져있는 책상앞에 다다르고서야 기울어지는 고개와 같이 삐딱하게 기댄다.
"관심없는줄 알았는데요."
"없었는데. 생겼어. 그냥 변덕."
서류를 쥔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본다. 펜을 내려놓고, 폴더를 접고, 미묘한 규칙이 새겨져 있는 일련의 행동들을 무감한 눈으로 구경하다 문득, 손등에 새겨진 생채기에 시선이 꽂힌다. 익숙한 것이 아닌 이질적인 것이 꼭.
저건...
못 보던건데.
75%
그새를 못 참고 비뚤어진 눈꼬리가 찌푸려진다. 과식이라도 한 것 마냥 속이 꼬이는 기분에 쯧. 혀를 차내고 고개를 돌린다.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흩어도 시야보다 민감한 감각은 뒷 곁의 기척을 기민하게 잡아낸다. 서류를 정돈하고, 의자를 끌고, 몸을 일으키는. 천자락이 쓸리는 소리가 명확하게 귓가를 때려 다시 눈을 돌려 바라본다.
마음에 안들어.
73%
영문도 모르고 나락을 간 기분은 얼떨떨하게 몸을 일으켜낸다. 자신이 왜 패대기 쳐진건지도 모른 채. 튀어나온 자존심이 멍청한 기분의 멱살을 잡고 지익 발을 끌어낸다. 어느새 곁을 스쳐가는 손을 잡아낸다.
"...?"
손등에 남겨진 상처를 제 손으로 덮듯이 잡고, 덤불마냥 흰 손가락을 얽어 잡는다. 이유도 모른채.
얽힌 손가락새로, 맞닿은 살갗으로 흘러오는 한기에 서리 낀 호수에 던져지기라도 한 듯 숨통이 트인다. 반사적으로 돌린 숨이 입술 새로 흩어지고, 귓가에 다시 들어오면 인상을 와작 찡그려낸다.
73%
"필요없어."
"...? 그럼 왜 잡습니까."
다시 입술을 다물어낸다. 여전히 덤불처럼 얽힌 손가락을 본다. 그러게. 왜 잡았지. 눈썹이 산을 그리듯 비죽 비뚜름히 올라가고 불퉁한 눈으로 바라본다. 잡으면 안돼?
"그냥 잡고 싶어서 잡은건데."
그럼에도 얽은 손가락에 힘을 풀진 않는다. 손목의 워치를 보는 시선을 보아도, 불만스런 눈으로 얼굴을 응시한다. 한숨을 쉬고, 털어내듯 뿌리친다.
기분이
나쁘다.
오르락 내리락 반복하는 제 감정을 익숙하게 눌러낸다. 하루이틀인가. 스치듯 먼저 걸음을 옮기고 제 방이라도 된 듯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는다. 다리를 꼬고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다.
"뭐해. 이번엔 안읽어줘?"
울대가 오르고 내려간다. 뚱한 표정으로 말을 삼키는 것을 본다. 작게 한숨을 쉬고 책장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뒷목을 감싼 넥카라 틈새로 제가 뜯어낸 자국을 담아낸다. 턱을 괸 손이 토독 제 뺨을 두드린다. 어깨선을 따라 옮긴 시선이 책등을 쓸고 꺼내는 손을 보다가, 손등의 자국에 괜히 혀를 씹는다. 익숙한 핏물을 삼키며 목을 축인다.
76%
뭐지. 이건.
나
배고픈가.
제 허기와 갈증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음에, 익숙하건만. 미묘히 어긋난 감각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뺨을 두드리던 손끝이 멈추고 뚝, 손톱을 박아넣는다. 뺨에 느껴지는 화끈한 감각에 아래로 긁어내려던 손이 우뚝 멈춘다. 손톱끝에 걸리는 살점의 감촉에 다시 한번 눈을 깜빡여낸다. 돌아보는 눈을 마주하고, 예민한 표정이 다가오는 것을 본다. 손목을 잡고 내리는 것을 무시한 채 응시한다. 맞잡은 손목에서 닿는 기운에 펼쳐 놓은 생각을 접는다.
78%
복잡하게 펼쳐진 생각의 파편을 접고, 다시 그 위로 접고. 또 접는다. 내쉬는 한숨이 저가 내는건지, 무언가가 내는건지. 잡힌 손목으로 시선을 옮기고 힘을 뺀다. 알았어. 알았어. 순응하듯 탈탈 털어내고서야. 다시 시선을 마주한다. 숨이 트인 것과 반대로 불편한 칼날 위에 서있는 기분이라. 긴장을 푸는 순간 아래로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아서. 소파에 등을 기댄다. 가이드와 센티넬의 관계라는 것은 불편하기만 해서. 쓸데없이 반기는 몸뚱아리가 혐오스러워서. 그래서 기분이 나쁜거라 섣불리 재단하고 찍어낸다.
"사람 보자마자 가이딩 흘리는 것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이거 짜증나거든?"
올려보는 눈이 불만을 품고 데룩 굴러간다. '센티넬을 사람으로 본다 했던가.' 삐딱하게 접힌 생각을 따라 또륵 흘러간다. '네 말을 믿어야 할까?' 섣부른 기대가 가져온 실망을 투둑 아래로 튿어 내버린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체념하는 빛을 덤처럼 얹어 내버린다.
70%
"아. 씨발."
참지 못 한 조각이 흘러나오고서야 고개를 돌리고 울컥 치받는 분노를 표출하듯 밀쳐낸다. 몸을 일으키고 달라진 눈높이와 거리를 재듯 반걸음 물러난다.
짜증나.
분명 왜 또 이러냐고, 이번엔 또 뭐가 문제냐고 묻겠지. 아니면 늘 똑같은 싸움의 전조던가. 학습된 패턴이 이어지기 전에 몸을 돌린다. 손톱끝에 걸린 제 살점이 거스러미 같아 꽉 쥐고 흩어낸다.
"그냥 갈란다. 책은 나중에 볼래."
혼재된 감정을 들여보기도 전에 드러날까 등돌린채 뒤곁으로 말을 던진다.
알아서 받던지. 말던지. 내 알바는 아니지. 너랑은 고작 그 정도의 관계니까.
부자연스러운 감정의 설계는,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 짓누를것이 뻔하다. 그러니 다 지어지기 전에 망가뜨리는게 낫지않나? 섞이던 감정이 비산해 흩어진다. 명확히 익숙한 것만 골라낸다. 분노. 혐오. 부정. 반발. 거부. 망가진 파편을 일부러 골라내고 그 위에 얹어버린다. 무게조차 없이 가볍고 또 가벼운것을 앎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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