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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흐름

어떤 추억과 어떤 결말

흩날리는 눈발 속을 여자는 걷는다. 눈 밟는 소리도, 기척도 없다. 두툼한 겉옷 아래 이따금 나부끼는 흰 자락엔 붉은 자욱이 점점이 튀어 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에 들린 칼날엔 피가 얼어붙어 간다. 흰 입김이 흘러나와 허공에 흩어진다. 유령이 아닌, 산 사람이다.

여자는 기억한다. 여자가 방랑 끝에 오래된 수도원에 도착했던 날도 눈이 내렸다. 군에서 뛰쳐나온 여자는 무척 강했으며, 영리했고, 궁지에 몰려 있었다. 사건이 완전히 해결되기까지는 최대한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여자는 그리하여 험한 길을 택했고, 몇 시간의 등반 끝에 구사일생으로 안식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자가 눈에 익숙한 덕이었다.

여자가 나온 학교에서는 생도들에게 눈 속에서 방향을 찾는 법과 생존하는 법을 가르쳤다. 사람을 살리는 법과 죽이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여자는 오래 전부터 동시에 여러 것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저 하나만을 보았다. 사람을 살릴 순 없으나 죽일 순 있다. 갈 곳이 없으므로 길을 찾진 못하나 살아남을 순 있다. 살아남으라고 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아이도 제가 한 말이 어미의 평생을 옥죈 저주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여자는 죽은 아이를 떠올린다. 잊어버린 부모의 얼굴과 잊힌 남편의 얼굴과는 달리 아직도 생생하다. 머리칼과 눈의 색은 남편을 빼다 박았으나 생김만은 여자를 닮았던 아이. 그 회색 눈동자가 제 앞에서 영영 감기던 순간. 망각과 복수의 기로에서 여자는 복수를 택했다. 처음 피를 묻힌 날은 쏟아질 듯 비가 내렸다. 다투는 소리 정도는 묻힐 정도로 거셌다. 밖에는 이따금 천둥이 번쩍였다. 그런 날은 흔하지는 않았으나 아예 드물지도 않다. 수도원에서 지낼 때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과거의 흉터는 잠잠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자는 그 과거를 침묵 뒤에 깊숙이 묻어두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여자는 사라진 것들을 떠올린다. 끊긴 인연들이다. 선의와 애정으로 다가온 남편, 혼자 삭이다 죽어버린 그. 하나 남은 아이, 다른 이에게 죽어버린 그. 명예를 위해 자식을 끊어낸 그들.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던 중에 새로이 다가온, 수도원의, 그 많은 사람들, 자신을 받아주신 그분, 가족... 새로운 가족.

여자는 가족을 아낀다. 가족을 아꼈다. 그래서 죽을 수 있다 생각했다. 자신을 위한 그분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위해서. 그러나 지금은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 죽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그 자리에 소리 없이 멈춰선다. 사실 여자는 도구라도 상관없었다. 침묵으로 묻어둔 기억을 꺼내, 다시금 손에 피를 묻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신실한 교인들. 현명한 교주. 자비로운 신. 이 완벽한 유리 구슬, 아름다운 공동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공동체는 깨어졌고 신은 악마로 바꿔치기당했으며 교주는 그를 주도했다. 의식은 취소되었다. 교인들은 깨지고 흩어져 남거나 죽거나 떠났다. 제 목숨을 바친다 한들 그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릴 순 없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어디서부터 틀어졌던 것인지 모른다. 집어든 칼. 의식을 포기한 교주. 한 줌 남은 믿음. 떠나간 외인들. 새앙쥐. 살해. 손님. 명령. 믿음. 수도원. 도피. 절연. 그 모든 것들을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최초의 살해, 복수가 있다. 여자는 입을 즈려문다. 아니, 그보다 전에 침묵이 있다. 별 것 아니라며 웃던 아이를 향한, 같은 얼굴로 웃던 남편을 향한 자신의 침묵. 그 끝없는 성벽. 단단히 얼어붙은 얼음.

침묵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죽음은 복수로 이어진다. 복수의 뒤에는 도피가 따라붙는다. 자신은 똑같은 형태로 남아서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행동을 한다. 할 수 있는 것은 그뿐. 결국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저 안에 있을 때엔 한 번도 아픈 적 없던 흉터, 얼굴에 그인 낙인이 욱신욱신 아려 온다. 저 뒤에 남겨두고 온 것들을 생각한다. 자신을 버린, 혹은 자신이 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돌이키지 못할 정도로 무너진 것들과 아직 의문으로 남은 것들과 지금 돌아간다면 아직 다잡아 세울 수 있을 것들을, 오래도록, 생각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살아가야 한다.

여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온통 흰 땅을 밟는 소리가 점차 멀어진다.

쏟아지는 눈이 검붉은 칼날을 감추고 발자국을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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