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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의 바다

혹은 메마른 바다의 회선곡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위풍당당하게 지나는 태양은 세상을 덮은 모래를 내려다본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빛이 주변을 메운다. 방랑자는 머리 위에 드리운 검은 베일을 조금 당겨 쓴다. 내딛는 걸음이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진다.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 무게 없는 깃털처럼 사구 위를 총총 걸어다닐 수 있긴 하다. 실제로 몇 번 해 본 적도 있다. 그 때는 물 위였지만. 어린 인간들은 자신이 파도마저 가라앉아 잔잔하기 그지없는 바다 위를 3분 가량 저벅저벅 걷고서야 믿어주었다. 물론 이제 와서는 큰 의미도 없는 일이다. 물 위를 걷는 것도, 그를 믿는 것도, 모래 위를 걷는 것도.

그래서 방랑자는 발이 빠지면 빠지는 대로 그냥 나아간다. 당연히 거북이 기어가는 것보다 느린 속도다. 산란기의 바다거북들은 제법 고생이었겠다 싶다. 더는 보기 힘들어진 권속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걷는다. 어차피 시간은 많다.

사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렇게 됐다. 따져 보면 살면서 정신을 차린 것도 몇 번 되지 않는다. 기껏 세 번 정도다. 한 번은 대해일 앞에 제물로 바쳐졌을 때였고, 한 번은 인간을 그리 친애하지도 않는 주제에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려는 신들을 막을 때였으며, 한 번은 정확히 52일 전 웬 오아시스 안에서였다. 방랑자는 그 때마다 새삼스레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거대함과 지성체의 삶이란 얼마나 허무한지에 대해 깨달았다. 영겁의 시간을 보내기엔 하등 좋을 것이 없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방랑자는 곧 쓸데없이 철학적인 어쩌고들을 가라앉혀 두고 발 닿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그런 것처럼 보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의 눈에는 지하의 수맥조차 보이지 않는) 사막을 홀로 걷고 있자면, 무시하던 것들이 자연스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보라, 지금도 쓸데없이 긴 이 세상의 역사에 대해 희구하며 어째서 욕심은 끊이지 않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제 발로 멸망에 머리를 들이미는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용케 완전히 망하지 않고 어찌저찌 명맥을 이어 간다. 신이건 인간이건 똑같다. 쇠락하여 무너지고 잊힐지언정 온전히 명맥이 끊기지는 않는다. 제법 신기한 일이다. 이 생각을 알았다면 솔... 태초의 빛은 네가 할 소리냐며 반문했을 것이다. 방랑자는 괜히 그에 답하듯 허공에 손사래를 친다. 괜한 손짓이었다. 맞는 말이었으므로. 그는 저 어찌저찌 살아가는 어쩌고에 제일 부합하는 존재였다. 뭐, 두 번 정도 부활했으면 사실 조금 과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얼마 전까진 분명 한 번뿐이었는데. 52일 전을 기점으로 해서 두 번이나 부활한 무언가가 되었다.



자의는 아니었다. 두 번째는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가 산산조각난 제 신체를 간신히 수습하여 어느 사구에 몸을 뉘였을 때는 이게 정말로 마지막이겠구나, 했다는 이야기다.

생각보다 빠르긴 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그리 될 줄 알았기에 놀라지 않았다. 후회할 것도 딱히 없었다. 지켜보던 아이들을 더는 보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묘한 침잠 정도. 가호를 주던 이가 사라지겠지만, 그들은 괜찮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이 사막을 떠돌아다니며 조각을 심어 두었던 것 아니겠는가. 사막의 오아시스가 전부 마르기 전까지, 그들은 잊힌 바다의 노래를 전하며 살아갈 것이다. 오아시스가 사라지면 바다 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사막의 모래로 흩어진 지 오래일 테니, 그것도 괜찮지. 신체의 말단부터 차츰 물이 되어 모래 속으로 스며들었다. 땅 깊은 곳에서 흐르던 얕은 수맥이 이 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저 물줄기가 모래를 뚫고 솟아나기 전에 자신은 완전히 흩어질 것이다. 운이 좋다면 기껏해야 사막에 또 다른 오아시스 하나가 생겨나는 정도겠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누군가 바다를 불렀다.

눈을 떴다.

그래, 눈을 떴다. 물 속이었다. 새하얀 머리칼이 너울너울 흔들렸다. 옷자락이 빛을 고스란히 받아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느릿한 눈 깜박임이 물결을 만들어냈다. 자연스레 손을 뻗어 그것을 어루만졌다. 이쯤이면 고래든, 지나가던 물고기 떼든, 그것도 아니면 가재든 가까이 다가와 손에 몸을 부비곤 했는데. 무엇도 오지 않았다. 조금 쓸쓸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어린 바람 대신, 억센 모래바람이 불었다. 사막이었다.

사막.

왜?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부른 이의 최후는 짐작이 갔다. 속이 울렁거렸다. 오아시스에서 걸어나왔다. 흔들리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기둥에 기댔다. 익숙한 신전의 양식과 같은 모양새. 모래에 곱게 갈린 돌의 감촉. 바람이 오랜 시간 이것을 깎아내었을 것이다. 정말, 오랜 시간을. 신이 눈 감은 장소에 세워진 신전을. 이제는 누구도 남지 않은 성소를.

누구도.

방랑자는 기둥에서 손을 뗐다.


해가 차츰 먼 곳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잠시 제 자리에 멈춰섰던 방랑자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며칠 정도는 사막에서 묵어도 괜찮은 몸이다. 그래도 슬슬 마을에 들를 때가 되었지.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것은 지루하기 그지없으니까. 자신에게는 시간이 많으니, 벌써부터 혼자서 하는 생각에 질리면 안 된다. 그는 끝없는 고독 속에 미쳐 버린 자들을 몇 알았다. 그런 꼴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마을은 대부분 오아시스를 끼고 있다. 근처의 오아시스는 이틀 정도 꾸준히 걸으면 닿을 수 있을 만한 거리다. 그 전까지는 가명을 생각해 두어야 한다. 아무리 쇠락하였다 해도, 신의 진명은 함부로 말하고 다닐 것이 못 되니까. 악기를 구했던 이전 마을에서는 대강 바다라 했는데, 그게 뭐냐며 이상한 시선만 받았으니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바다가 뭐 어떻다고 그러는지. 사막 사람들은 낭만이 부족하다. 아주 예전, 이 사막이 바다였을 적의 인간들은 제법 낭만을 아는 치들이었는데. 석양이 비추는 윤슬, 볼을 스치는 바닷바람, 파도에 흔들리는 배처럼 울렁이는 속... 아니, 이건 아니지. 아무튼.

적당한 곳에 멈춰 천막을 펴고, 부싯돌을 들었다가 귀찮아 그냥 내려두고, 악기를 끌어와 익숙한 손길로 현을 튕긴다. 바다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모래 언덕 너머로 향하는 태양을 바라본다. 자신이 가진 것 중에 이 사막에서도 제법 쓸 만한 것은 이것뿐이다. 그가 연주하는 곡조에 맞추어 푸른 빛이 허공에 선을 그린다. 한때 사막을 스쳐갔던 옛 이야기 중 그런 것이 있었다. 옛 왕, 죽어 토막나 강에 뿌려졌다 되살아난 왕. 그럼에도 이승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죽은 이들의 세계를 다스렸다는 왕. 빛으로 만들어진 배가 천천히 강을 따라 사자의 세계로 넘어간다. 해가 지자 주변은 순식간에 어둑해졌다. 마법으로 그려낸 배만이 푸른 빛을 뿜는다. 악기를 연주하는 손을 멈추자 배 역시 어둠에 묻혀 사그라든다.

음, 나쁘지 않겠다. 다음부터는 이걸로 해야지.

오시리스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말라붙은 바다에 뿌리를 둔 물의 신. 더는 인간이 마법을 쓰지 못하는 시대의 마법의 신. 누구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쇠락한 신. 어째서 영영 가라앉지 못하고 다시 모래 위에 섰는지. 그 오랜 바다를 기억하는 누군가 남아 있는 건지. 그러나 흐르는 시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므로, T̴̲̠̟̗̰̬̦̤͑́̔̅̾̀͑̄̕͜͢i̶̡̛͇̻͍̱̲̭̳̅̀̏̑̾̀̒͢͡͞ḁ̢̧̨̙̞̤̞̞̅͌̈́̀͊͂͌̆͞ͅm̴̡͎͇̠̯̓͂̂̄̉͌̃ä̵̛̞̙͚͍̭̯̥̯́̍͗̑̚t̷̨̹̖̝̯͕̣̻̓͊̅͒̍̓̆͘͘͢는 희망을 일찍부터 지워두었다. 가호하던 이들을 위해 심어 두었던 씨앗이 결국 자신만을 남긴 닻이 되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러니 그 닻이 닳고 닳아 삭아 없어질 때까지 가라앉지 못한 채, 파도에 흔들리며 방랑하는 수밖에,

​이 광활한 모래의 바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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