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과 건국의 꿈
지구 멸망 직전에 우리는 모두 비행기에 타 있었다 사실 개죽음만 면하려고 간 거였지 우리도 모두 죽긴 매한가지 너무 슬퍼서 울었다 창이 넓고 크게 휘어져 있어서 탁 트인 비행선 여행하는 것처럼 구름 위를 날았다 그곳엔 나의 동창들이 있었다 삶의 한 추억 조각처럼 아름답고 조용하지만 마냥 즐거워 보이는 표정의 모두와 셀카를 찍으며 마지막의 마지막 기념을 하다가 오렌지빛 구름을 봤는데 참 아름답고 위험해 보였다 얼마나 아플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죽음이란 어떤 걸까 저런 가시적 죽음 손 대면 감당할 수도 없이 터져버릴 것 같은 부풀어오른 젤리 구름 속에 방사능 유독 가스 하여튼 영 점 몇 초만에 사람들을 흔적도 없이 녹여버릴 기체의 무언가가 가득 차 있는 것 그건 지상의 지구가 그 가스로 가득 찼다는 뜻 포화 상태로 모자라 구름까지 가득 부풀려버렸다는 것 하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사진을 또 찍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누구에게 보여주지도 못한다 우리는 몇 시간 있다가 전부 싹 죽게 되는걸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한 촬영이었고 그걸 떠올리니 아쉽고 서운해졌다 모든 게 리셋된다는 사실이 며칠 뒤에 아름다운 구름이 더는 존재하지 않고 나 이런 걸 봤어 하고 자랑할 방법 필요 하나 없다는 사실 또한
하지만 곧 우리는 안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방법을 알려줬다
장면이 바뀌어 우리는 살아남았고 태초의 지구로 돌아왔다 그래보았자 생명체가 나타나기 전 흙과 물과 땅이 있는 무인도뿐인 지구였지만 나는 어쩐 이유에서인지 고려의 건국이 나중으로 미뤄지면 좋을 것 같다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던 중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더 번영할 거야 실패를 덜 겪을 거야 사실 나도 뭣도 모르고 지껄이던 중이었다 신라과 고려가 무슨 차이가 있는데? 잠깐만 나 말하고 있잖아
그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내 옆 방에는 내 친구가 있었는데 그애는 피폭을 당했다 애들은 걔를 배척했고 나도 불편해했다 죽기까지 하진 않지만 어쨌든 머리는 빠졌고 예전과는 달라지기 마련 그 애는 자꾸 다가오려 했지만 어딘가 예전과 다르게 주눅들어 있었고 원망이 조금씩 쌓이는 것 같았고 오기가 생기는 거 같았다 꿈 속에서 그게 참 무서워 문을 걸어잠그고 방에 있었는데 그 문고리가 참 못 미더웠다 어느 순간 그 애가 문 여는 소리도 없이 방에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두려워 방 문 열고 나갔는데 그 애는 자기 방에 있었다 나를 쳐다보면서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어딘가 응시하는 표정으로... 눈빛이 고요해보여 정말로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유리에 붙어 나를 목표로 삼을 것처럼 보였다 꿈 속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 법 멈출 수 없는 상상이 의지를 잃고 뻗어나가기 전에 나는 급히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안감 없어지지 않았고 눈을 꽉 감았다 떴는데도 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고 어딘가에 머리를 세게 박아야 꿈에서 깰 수 있다는 말 떠올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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