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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라 왕국의 기사들은 언제나 바쁘다

하데스와 제레미, 그리고 마더 고리의 레몬청

말이 유독 많고 탈은 더욱 많은 코넬라 왕국. 이곳의 국민들은 다들 어찌나 사고뭉치인지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매일매일 기가 막히는 사고가 터졌다. 코넬라 왕국 국민 중 반은 사고를 치는 사람, 반은 사고를 수습하는 사람, 그리고 나머지는 그걸 구경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하데스와 제레미는 오늘도, 오늘도! 사고를 치는 사람 중 최고인 왕세자 앞에 섰다.

“이를 어쩌면 좋아.”

왕세자의 눈물과 콧물이 묻은 연분홍색 손수건이 시녀의 손 위에 세 개째 놓였다. 시녀는 축축하게 젖다 못해 진한 분홍색으로 변해버린 손수건을 당장 버려버리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사실 제레미의 얼굴도 시녀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제레미는 왕세자를 버리고 싶어 하는 얼굴이라는 것 정도일까. 그의 옆에 곧게 서 있는 하데스는 이 방 안에서 유일하게 무표정한 사람이었다. 왕세자가 네 번째 손수건을 꺼낼 때까지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하데스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저하.”

하데스가 입을 열자 왕세자가 코맹맹이 목소리로 웅, 하고 작게 대답했다. 눈만 올려서 하데스의 눈치도 보면서.

“제가 지난번에 드렸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응……."

“뭐라고 말씀드렸죠?”

“또 사고 치면 왕국 밖으로 갖다 버리겠다고…….”

“네. 정확합니다.”

“그, 근데 이번엔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아스텔이 길을 착각하는 바람에…….”

“저하께서 아스텔 양에게 로나르 3번가가 아니라 로나르 31번가로 주소를 잘못 알려주신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이미 알고 있었구나.”

왕세자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데스의 얼굴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딱딱해 보였고, 제레미는 내심 왕세자가 하데스에게 혼나는 장면을 제법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하데스는 왕세자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 내가 잘못했네. 아스텔에게도 사과하도록 하지.”

왕세자는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하데스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제레미는 왕세자를 위로하는 척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둘 다 무엄함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작태였으나 어느 누구도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치셨습니까?”

“……. 알고 온 거 아니었어?”

“저희는 정보부원이 아닙니다.”

아스텔은 하데스와 제레미가 궁에 들어오는 걸 보고 울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것만으로도 하데스는 왕세자가 또 사고를 치고 자신을 불렀음을 알아차리고 일단 혼부터 낸 것이었다. 왕세자는 왠지 모를 억울함을 느끼고 꿍얼거렸다.

왕세자의 말을 요약하자면, 다음 주에 옆 나라 왕국의 똥강아지이자 왕세자의 약혼녀인 프리메라 공주가 오기로 해서 대륙에서 제일 유명한 레몬청 장인에게 레몬청을 아주 어렵게 주문했는데 레몬청을 받자마자 냄새를 맡아보겠다며 뚜껑을 땄다가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그걸 그림 위로 엎어버렸다는 것이었다. 하필 다시 담지도 못하게 병목부터, 모조리 다.

"새로 주문하시죠?"

"그 장인이 마지막으로 만든 레몬청이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

"이제 레몬이 없어서 못 만든대요."

"저하가 하도 사정을 해서 겨우 한 병 빼돌린 거였대요."

왕세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시녀들이 한 마디씩 보탰다. 왕세자가 다시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쨌든 지금은 구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하데스는 쯧, 혀를 찼다.

"다른 소유자에게서 사 오는 건?"

"그럴 순 없다! 공주님께 드리는 건데 어떻게 남이 샀던 걸 줄 수 있어?"

이번엔 왕세자가 난리였다. 왕세자의 뒤에 선 시녀들이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저었다. 하데스는 왕세자가 목욕하기 싫은 강아지처럼 왕왕거리는 무시했다. 다들 왕세자를 나 몰라라 하는 와중에도 제레미만이 웃는 얼굴로 왕세자의 징징거림을 들어줬다. 하데스와 제레미는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왕세자에게서 풀려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냥 사 오죠."

제레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궁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사 오는 게 웬 말이냐며, 레몬청 장인의 손에서 즙을 짜서라도 레몬청을 구해오겠다던 말은 전부 잊은 듯했다. 하데스는 새삼스럽게 제레미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져 경멸하는 눈으로 제레미를 흘겨보았다. 이 새끼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가? 아직도 지긋지긋해할 구석이 남아있다니, 그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내가 이런 새끼라는 거 잘 알면서. 곱게 휘어진 제레미의 눈이 뒷말을 대신했다.

"경이 대견해서."

하데스는 씹어 삼키듯 말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다. 그냥 더러운 것도 아니고 아주 지독하게 드러워서.


"에잉. 아무리 기사님들이라도 그런 이유로 장부를 드릴 순 없죠. 저희도 먹고는 살아야지."

상인이 설렁설렁 종이를 넘기며 말했다. 방 안에 감도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사환은 서둘러 집무실을 떠났다. 사실 상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마더 고리의 레몬청'은 애당초 코넬라 왕국의 생산품이 아니었다. 장인 마더 고리도 코넬라 왕국의 사람이 아니었고, 심지어 이 상인도 외국인이었다. 그가 굳이 손님들의 신뢰를 잃어가며 장부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왕세자 저하의 명입니다."

"아, 예. 저희 단골 고객 중에는 황제 폐하도 있으십니다."

상인은 이제 귀찮아하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다. 하데스의 인상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마음 같아선 이 건방진 상인을 다섯 대쯤 맨주먹으로 쥐어패고 장부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아니면 특별 감사를 실시해서 상단을 모조리 다 뒤엎고 싹싹 비는 상인 놈의 뒤통수를 지근지근 밟는다든가. 그러나 이 상인은 제국민이었다. 다섯 대가 아니라 한 대만 때려도 외교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약소국인 코넬라 왕국은 제국에게 쩔쩔맬 것이고.

"아니, 그리고 고리 할멈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소식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통째로 주겠다는 손님도 있었는데, 코딱지만 한 왕국의 왕세자가 간절히 사고 싶어 한다고 애걸복걸을 해서 우리 할멈이 정가에 판매했는데 은혜를 이렇게 원수로 갚습니까? 그 목걸이에 다이아몬드 몇 개가 박혀있었는지 알면 기사님도 이러시지는 못할 겁니다."

엄지손톱만 한 다이아몬드가 12개나 박혀있었다고요. 예? 아시겠어요? 수수료로 그 보석 하나만 받았어도 보석박치기로 별장 한 채는 살 수 있었는데! 상인이 거의 눈을 까뒤집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가 다시 앉았다. 절대로 장부를 내어줄 기세가 아니었다. 제레미가 신기하다는 듯 인위적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인가? 마더 고리가 제법 돈을 밝힌다는 소문은 나도 들었는데."

"그럼요. 밝히는 수준이 아니라 미친 수준이지만요. 어떨 땐 저처럼 돈밖에 모르는 저 같은 상인도 치를 떨게 할 지경이에요."

"그런데 왜 마더 고리는 다이아몬드 대신 우리 저하에게 레몬청을 팔았을까?"

"저도 그게 의아했죠."

상인은 의미 없이 넘기던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이미 별장을 구입하기 위해 선금을 지불하고 가계약서까지 써놓은 상태라, 고리 할멈 앞에 드러누워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할멈의 러그에 똥을 싸겠다고 징징거려서 겨우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고리 할멈을 알아 온 그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다.

"고리 할멈이 그러더라고요.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봐도 고리 할멈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상인은 말을 끝맺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아무튼 장부는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네. 그래요. 장부는 포기하죠."

웬일로 제레미가 순순히 대답했다. 상인은 놀란 듯 잠시 눈을 들었다. 하데스도 '이 새끼가?'라는 눈으로 제레미를 보았다. 그들을 얄팍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제레미보다 하데스가 훨씬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제레미야말로 집요함과 치졸함으로는 어느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이 분야의 일인자였다. 제레미가 히죽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흉계가 느껴질 법한 음흉한 미소였다.

"그런데 어쩌죠? 제가 여기에서 왕세자 저하께서 하사해 주신 블루다이아몬드 반지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이번에는 하데스와 상인이 동시에 '이게 웬 개소리?'라는 눈으로 제레미를 보았다. 제레미가 능청스레 반지 자국이 남은 손가락을 만져댔다.

"여기에 들어오기 전에 착용하고 한 번도 빼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아, 혹시 아까 들어왔던 사환이 훔쳐갔나? 그 반지는 저하의 권위를 대신하는 반지라서 다른 곳으로 반출되면 절대 안 되는데, 어쩌죠. 하데스 경?"

상인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제레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압수 수색이라도 할까요? 일주일 정도면 찾겠죠?"

이런 치사한 자식……. 어디에선가 소리 없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상인이 이 말도 안 되는 개소리에 항의하려던 순간이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후 한마디도 한 적 없는 하데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무심한 어조였다.

"그거 큰일이군."

상인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왕세자가 하고많은 기사단원 중에서 굳이 하데스와 제레미를 골라서 이번 일을 맡긴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필요하다면 브레이크를 뽑아 버리는 사람과 브레이크가 없으면 엑셀만 밟는 사람이 만나 이루어내는 하모니와 시너지는,

"압수수색은 불가피하겠습니다."

일반인들은 엄두도 못 낼 정도라는 걸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섬에 사람이 산다고?"

제대로 된 항구조차 없는 곳이었다. 거리에서 자동차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이 시대에 차도는 물론이고 인도라고 부를 만한 곳도 없는 섬이 아직까지도 존재한다는 게 신기했다. 꽃과 나무와 잡초가 함께 무성하게 자라난 언덕의 오솔길만이 그들이 가야 할 곳을 알려주고 있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할멈은 그 많은 돈을 두고도 왜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지....... 잠깐. 두 분 다 저를 그런 눈으로 보시는 이유가 뭐죠? 혹시 제가 두 분을 속여서 아무 섬에나 던져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하데스가 조용히 검집에서 손을 뗐다. 하여튼 제법 눈치가 있는 상인이었다. 그는 제법 억울했는지 어떻게 상인보다 더 사람을 못 믿을 수 있냐고 한참을 한탄하며 말롱 대륙의 전 아카데미에서 도덕 교육을 의무화해야 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운전사로 데려온 사환 외에는 아무도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채고 나서야 열흘 후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한 뒤 떠나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는 저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다행이군."

"어차피 모터 소리 때문에 안 들렸을걸."

그의 '모터보트'는 참으로 대단했다. 모터에 경량화 마법을 삼중으로 걸고 그걸 배 후미에 달아서 노를 젓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력으로 바다를 가로지를 수 있다니. 오로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발명을 해낸 상인의 집요함도 대단하고, 그것을 실현해 낸 재력도 대단했다. 코넬라 왕국에서 겨우 몇 달 전에야 왕비님의 비자금을 박박 긁어모아서 국력만큼 아담한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개 상인이 가지기에는 과한 발명품이었다. 어쨌든 그는 상인답게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으로 줄이자는 주의였기에 모터에 소음 약화 마법을 걸지 않았다. 덕분에 아직도 귀에 모터 소리가 울렸으나, 모터가 작동되는 동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

"……."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서로가 없는 듯 각자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하데스와 제레미의 사이는 굳이 최악이라고 지칭하지 않는 게 나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심지어 부모님까지도.) 그들이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 줄 알았다. 둘이 연무장에서 칼을 들고 싸워대서 연무장 바닥에 피가 고이다 못해 흐르는 지경이 돼도 "친구끼리 싸우면서 크는 거지."라고 말하고 지나가거나 "너희는 여전히 싸우는 걸로 대화를 하는구나. 언제쯤 철들 거니?"라고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중 제일은 제레미의 약혼녀였는데, 하데스가 보기에 그녀는 심한 망상증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세찬 바닷바람에 꽃이며 풀이 제멋대로 누웠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아마 그들이 오지 않았다면 나름대로 조화롭게 자랐을 식물들은 단단한 군화에 소리도 없이 밟혔다.

"며칠 전에 슈니치 영애랑 만났다면서?"

제레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말을 꺼냈다. 하데스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혀를 찼다. 마침 제레미는 시야를 방해하는 나뭇가지를 손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제레미의 오른손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반지가 햇빛에 반짝거렸다. 하데스는 반지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눈가를 찌푸렸다.

"나한테 돈봉투를 주더군."

"영애가? 정말 대단한 영애라니까. 받았어?"

"그래."

"오."

제레미가 하데스를 보며 즐거운 얼굴로 웃었다. 하데스는 또 새삼스럽게 빡이 쳤다. 제레미와 친하게 지내지 말아 달라고 짜증을 내는 슈니치 영애에게도, 이 모든 상황을 방관하기만 하는 제레미에게도. 그리고 제레미가 너무 싫어서 제레미를 보자마자 칼질을 하게 될 것 같으니 제발 저 새끼랑 같이 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는데도 또 제레미와 자신을 함께 부른 황태자에게도. 하여튼 모든 원흉은 저 새끼 때문이었다. 제레미 어거스트. 제레미 로스첸트. 저 빌어먹을 자식. 하데스는 가끔 제레미를 생각하면 목이 졸리듯 숨이 막혔다.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거나 시시때때로 솟구치는 감정에 대해 말로 설명하기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가 한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그녀는 왕국 내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럼에도 자신이 느끼는 바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을 찾아내지 못한 것을 보면 자신은 언어적 소양이 다소 모자란 모양이었다.

"네 자존심에 그런 건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포스타 장군께서 전쟁 채권을 사기꾼에게 매각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용건만 말해."

그에 반해 제레미는 말을 아주 잘했다. 그를 싫어하던 사람들도 제레미와 몇 번 대화를 나누면 그를 제법 유쾌하고 농담을 잘하는 건실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감정을 제레미가 겪는다면, 그는 하데스가 몇 년째 발견하지 못한 단어들을 쏙쏙 뽑아내 남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제국인 상인처럼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걸, 하디. 왕세자 저하께서는 우리가 친하게 지내길 바라신다고."

그러나 하데스는 그에 관한 사소한 단어 하나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렇기에 제레미는 어떠한 발견도, 발명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동차든 모터보트든 모터가 있어야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슈니치 영애 얘기는, 그래. 그냥 너와 대화하기 위한 소재일 뿐이야. 그런 의미에서 영애에게는 늘 감사하고 있어."

"직접 감사를 전하지 그래."

"그럴 순 없지."

제레미는 제법 재치 있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하데스는 제레미가 이다음에 할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이전에 한 번 내뱉은 말일 수도 있었다. 몹시도 선명한 기시감이 들었다. 하데스가 고요히 가라앉은 눈으로 제레미를 보았다.

"재미없잖아, 그건."

하데스는 제레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팔을 뻗어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모두가 마주치기를 꺼리는 세로로 긴 눈동자가 제레미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녀의 눈동자는 오로지 탐색만이 목적인 듯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았으나 멱살을 쥔 손은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졸라 죽일 듯 힘을 주고 있었다. 제레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양손을 들고 아프다며 죽는 시늉을 했다. 하데스가 오른손 주먹을 꽉 쥐고 그의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내리치려던 순간이었다.

"쯧쯧쯧."

어디선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대화에 집중했기 때문일까?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던 터라, 둘은 제법 놀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허리가 굽어질 대로 굽어진 할머니가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한 손에는 피크닉 상자를 든 채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떼이잉, 쯧쯧쯧!"

짹짹짹짹. 새 소리가 맑게 울렸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땅에 던져놓고 피크닉 바구니를 힘겹게 땅에 내려놓았다. 원래 자주 오던 장소인 듯, 피크닉 바구니가 있는 부근만 단단하게 터가 다져져 있었다.

"요오즘 젊은 것들은 말이여. 쌈박질을 할라면은 얌전히 즈들 집 마당에서 쌈박질 할 것이지, 이런 쥐똥만 한 섬까지 기어들어 와서는 처싸우고 지럴염병을 못해서 안달이여? 할 일이 없으면, 염병. 집에 처박혀가지고 새끼나 낳고 오순도순 감자나 처먹으면서 자빠져있을 것이지. 왜 여까지 와서 지럴이여, 지럴이."

하데스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힘이 빠져나갔다. 둘은 멍하니 욕 비슷한 것을 하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자글자글한 주름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서슬 퍼런 시선으로 하데스와 제레미에게 호통을 쳤다.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뭣들 혀? 빨랑 피크닉 준비 안 혀? 아주 둘이 애 셋 낳을 때까지 여기서 지랄하고 있을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둘은 차렷 자세로 우렁차게 대답한 뒤 피크닉 상자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어 정돈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착각이 아니었다. 고리 할멈은 방금 코넬라어로 말했다. 제국 공용어가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대략 50년쯤 된 이야기다. 모든 대륙에서, 그 어떤 신도 예언하지 않은 3일 간의 개기일식이 관측되었다. 신의 진노인가? 세상이 결국 멸망하려는가?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고, 그 불안은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그날로부터 장장 3년 동안 인간은 곳곳에서 출몰하는 마수와 싸워야만 했다. 자고로 난세에는 언제나 영웅이 등장한다는 격언에 걸맞게 나타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지금의 황제 되시겠다. 황제는 3년 내내 온 대륙을 휩쓸고 다니며 마수를 박살 냈고, 여러 곳에서 참 많은 돈과 다양한 선물을 받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고리 할멈의 레몬청이다. 고리 할멈은(그땐 할머니가 아니었겠지만.)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직접 만든 레몬청을 선물로 주었다. 마수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시원하고 상큼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참으로 맛있구나."

어느 나라의 어떤 임금이 했던 말과 유사함을 인정한다. 아무튼 개기일식이 일어난 지 3년째 되는 날, 이번에는 온 대륙에 3일 간의 백야 현상이 관측되었다. 마수들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는 햇빛을 피해 꼭꼭 숨었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서두가 참으로 길었다. 고리 할멈의 레몬청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이로부터 2년 뒤의 일이다. 황제는 온 제국민의 염원대로 마수전쟁 내내 그녀의 옆을 지킨 호위무사와 결혼하여 임신했다. 황제의 성깔머리에 맞게 입덧도 심히 고약해서 그녀는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눈앞에 마수가 있다면 당장 모가지를 딸 눈깔로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시원하고 상큼한 음료수가 먹고 싶구나."

이 소문을 들은 고리 할멈은 황제에게 레몬청을 진상했다. 황제는 꼴까닥꼴까닥 레모네이드를 원샷했다. 그리고 입가를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참으로 맛있구나."

자. 지금까지 성실하게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이 장황한 이야기의 어디에도 코넬라 왕국은 언급되지 않았다. 고리 할멈은 제국민이었다. 고리 할멈과 코넬라 왕국의 접점은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데스와 제레미도 알고 있던 사실이라 그들은 고리 할멈을 만나기 위해 제국까지 기차를 타고 갈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참말로 맛있구만."

고리 할멈이 코넬라 왕국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제국의 서쪽 해안의 무인도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리 할멈이 사투리가 섞인 코넬라어를 익숙하게 사용하는 것은, 글쎄.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새가 짹짹거리고 파도 소리가 들리는 오솔길에 노란색 돗자리 위에 앉아 하데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코넬라어를 아십니까?”

“아는 거 알면서 뭣 하러 물어?”

“…….”

익숙한 꼰대 조의 말에 하데스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반사적으로 죄송합니다, 라고 말할 뻔했다. 제레미는 반대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웃음을 참는 부하 직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고리 할멈은 더 대답해 줄 마음이 없는 듯 슬슬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데스는 그녀가 정리하기 편하도록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레미는 먼저 나서서 고리 할멈 대신 쓰레기를 정리하며 돗자리를 곱게 접어 피크닉 바구니 안에 넣었다. 고리 할멈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하데스를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는 말롱 대륙의 전 아카데미에서 도덕 교육을 의무화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고리 할멈이 그러든 말든, 하데스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것을 참으며 고리 할멈이 그 상인과 일하는 이유를 대충 알 것 같다는 생각이나 했다.

“저도 동감합니다, 마더 고리. 시대가 발전할수록 더욱 가치를 발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인데 젊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요.”

제레미가 슈니치 영애에게 말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리 할멈에게 말하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팔 한쪽을 내밀었다. 고리 할멈은 하데스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제레미의 팔에 지팡이를 짚지 않은 손을 올렸다.

“그래도 남편 쪽이 뭘 좀 아는구먼. 마누라가 저래서 속 좀 썩겠어.”

“네. 아주 많이 썩입니다.”

하데스가 이게 뭔 개소리냐는 눈으로 제레미와 고리 할멈을 보았으나 둘은 친손주와 할머니처럼 다정하게 보폭을 맞춰 걸음을 옮겼다.

“자네 같은 젊은이라면 내 마지막 레몬청을 맡겨도 아깝지 않겠구먼.”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하데스는 왕세자고 뭐고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세상이 너무 피곤했다. 그녀의 시름과는 상관없이 오솔길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넓은 초원과 광활한 바다가 보였다. 섬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신 작은 섬과 어울리지 않는 굉장히 고급스럽게 생긴 하얀색 집이 섬 한가운데에 떡하니 있었다. 누구든 마음이 풀어질 법한 그림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제레미가 단박에 탄성을 내뱉었다. 요즘 유행하는 넓은 정원이 있지도 않고 덩굴이 화려한 아치문도 없었으나, 깔끔하고 단정해서 어느 누구든 마음에 쏙 들어할 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세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오솔길을 지나며 봐온 나무들과는 달리 잎이 무성하지도 않고 훤칠하지도 않은 볼품없는 나무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나무 자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보석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햇빛을 담은 바다가 반짝이는 것처럼 찬란하게 눈부신 나무였다. 고리 할멈이 지팡이 끝으로 나무를 가리켰다.

“저 나무가 내 레몬청의 유일한 비기여.”

“범상치 않아 보이네요.”

“글치. 마지막일텐게 많이 봐둬.”

“마지막이요?”

고리 할멈은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도 버거운지 힘든 기색으로 허리를 폈다. 고리 할멈은 제레미에게 대답을 해주는 대신 턱짓으로 하데스에게 일을 시켰다.

“따 와.”

하데스는 왜 그걸 굳이 나한테 시키는지? 라는 눈으로 고리 할멈과 제레미를 보았다. 고리 할멈은 그럼 내가 하리? 라는 눈으로 보았고 제레미는 히죽거리며 고리 할멈을 부축하고 있는 팔을 들어 올렸다. 결국 하데스가 짜증을 삼키고 제 발로 나섰다. 반짝이는 나무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몹시도 상서로운 기운을 자아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감탄을 내뱉으며 감상에 젖을 만도 하였으나, 상대는 하데스였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애처롭게 흔들리든 말든, 새콤달콤한 레몬 냄새가 사람을 홀릴 듯 풍기든 말든 하데스는 손을 뻗어 무신경하게 똑, 똑, 똑 레몬을 땄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레몬의 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나무 자체는 몹시도 싱그럽고 생기 넘쳐 보여서 나뭇잎 사이를 잘 살펴보면 얼마든지 레몬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아아아아아.

세 개째의 레몬을 따자 여인들이 구슬프게 우는 듯한 한숨 소리가 바람 속에서 울렸다. 하데스는 레몬을 품에 안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돌연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나뭇잎들이 사나운 기세로 저들끼리 몸을 부딪쳐댔다. 고작 세 그루의 나무 사이에서 하데스는 돌연 동화 하나를 떠올렸다. 폭풍이 불어 집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이상한 세계로 가게 된 소녀의 이야기다. 팔다리가 부러진 허수아비와 도끼를 잃어버린 양철 주전자가 나오는 동화였던가?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아 하데스는 다시 떠올려보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동화에는 강아지가 나왔던 것 같다. 아니, 그래. 시골들쥐가 나왔다. 시골들쥐는 잡아먹혔다. 아마도……. 인간에게.

“하데스 아브락사스!”

하데스는 자다가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제레미가 지척까지 다가와 하데스의 팔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손아귀의 힘이 제법 강해 붙잡힌 곳이 시큰거렸다. 바람이 길게 불었다. 하데스의 긴 머리가 엉망으로 휘날렸고 하데스는 조금 늦게 자신이 레몬을 떨어트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굳이 더 보태어 설명하지 않아도 제레미 로스첸트는, 제레미 어거스트는, 아니. 정정하자. ‘제레미’는 몹시도 의뭉스러운 남자라 으레 귀족들이 그렇듯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강박적인 구석이 있었고, 남이 있든 없든 늘 자신의 표정을 입술 사이로 감추었다. 그런 이유로, 하데스는 제레미의 이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절박함과 두려움, 그리고 희끄무레한 공포심이 어린 검은색 눈동자와 다급하게 벌어진 붉은 입술. 있는 힘껏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 연신 오르락내리락거리는 어깨.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하데스는 어렵지 않게 그 표정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단박에 짜증이 일었다. 그녀는 그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으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왜.”

제레미의 눈동자가 조금 더 커졌다. 제레미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하데스를 붙잡은 손을 고쳐 쥐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야 제레미는 손을 놓고 입술을 굳게 닫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 레몬이 땅에 떨어졌으니 주의하라고.”

제레미는 그 말만을 남기고 돌아가 버렸다. 넋이 나간 듯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이 꼴사나웠다.

“얼간이 새끼.”

하데스는 검은색 뒤통수를 보며 씹어먹을 듯 중얼거렸다. 레몬이 땅에 떨어졌으니 주의하라고? 이런 레몬 씨를 발라내서 먹여도 시원찮을 놈 같으니.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레미는 번번이 자신의 ‘어떠한’ 모습을 마주하기 무서워 도망쳐버렸다. 하데스는 그 꼴이 지긋지긋했다. 그럼에도 하데스가 제레미를 닦달하거나 다그치지 않는 것은 그럴 만한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레미가 스스로 그은 선을 넘어와야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었다. 하데스는 제레미에게 쉬운 길을 걷게 할 생각이 없었다. 하데스는 제레미가 고리 할멈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쳐다보았다. 다시 생각해도 저 새끼는 맞아도 싼 놈이었다.

“?”

하데스는 레몬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가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레몬은 흙이 조금 묻은 것을 제외하면 멀쩡했다. 문제는 그녀의 손이었다. 레몬을 쥔 그녀의 투박한 손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 만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요요한 반짝임이 눈을 사로잡았다.

설마.

하데스는 엄습해 오는 불길함을 억누르며 레몬 나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생기 넘치고 반짝이던 나무가 그 짧은 사이에 수십 년의 시간을 보낸 듯 바짝 말라 있었다.


“반짝거리는구먼.”

“네. 반짝거리네요.”

“눈이 너무 부시는디.”

“샹들리에 같군요.”

두 사람이 말을 하든 만담을 나누든 하데스는 망연자실하게 자신의 손바닥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코넬라 왕국에는 아주 몹시 중요한 날, 매우 가끔 드물게, 왕비님이 특별히 위신을 세우고 싶어 하실 때만 착용하는 엄지손톱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다. 왕비님은 당신이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반지를 몹시 아꼈으며, 남편과 자식보다 그 반지를 더욱 아꼈다. 그리고 하데스의 손은 그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더욱 휘황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 상태로 왕국에 돌아간다면 왕비님은 당장에 그녀를 감금시키고 장인을 불러 그녀의 살을 알뜰살뜰하게 깎아서 장신구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손톱 하나까지 바득바득 깎아내겠지.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왕실 기사단 전원이 주 7일 24시간 내내 단 1초도 비는 시간 없이 감시할 것이다. 하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가씨, 미쳤어?”

“아이고, 시상에.”

제레미가 식겁을 하며 하데스의 손에 들려있는 단검을 빼앗았다. 그 짧은 사이에 하데스가 자신의 손을 토막 낼 기세로 칼을 빼든 탓에 손바닥에 깊은 자상이 생겼다. 그러나 그녀의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반짝이는 빛이 모여 상처를 단숨에 아물게 했다. 하데스는 이제 놀라거나 절망할 기운도 없었다. 이제는 그저 이 불행이 얼른 자신을 떠나기만을 바랐다.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처자구먼, 시상에나. 내가 오래 살기는 혔지. 요런 험한 꼴을 다 보고.”

고리 할멈이 호들갑을 떨며 혀를 끌끌 찼다. 하데스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고리 할멈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에 겁을 먹을 만도 하건만 고리 할멈은 노인 특유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 없는 눈으로 하데스를 보며 히죽 웃기만 할 뿐이었다. 고리 할멈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을까? 어째서 하필 자신에게 레몬을 따오라고 시켰을까? 이런 일이 일어난 게 과연 처음일까? 고리 할멈이 씨익 웃었다.

“그래서 처자를 골랐지. 역시 내가 옳았구먼.”

“…….”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나 고리 할멈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하데스는 다소 진정한 모습으로 고리 할멈의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마저 이야기하라는 뜻이었다. 제레미는 그 와중에도 고리 할멈의 옆에 서서 괴로운 목소리로 하데스가 하도 반짝이는 탓에 사이비 종교에서 만든 신상이 떠올라 당장이라도 전 재산을 바쳐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고리 할멈은 제레미의 고충을 반영하여 하데스를 가릴 수 있도록 그녀의 앞에 커다란 전신 거울을 놓는 것을 허락했다.

“이미 짐작들 혔겄지만, 저 나무는 보통 나무가 아녀. 황금의 신이자 모든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신인 미다스가 세이렌의 여왕에게 선물한 나무여. 맨 첨에 세이렌의 여왕은 미다스가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을 줬다고 생각혔었지. 아주 등신 같은 생각이었어.”

“여왕은 미다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군요.”

“그려. 신은 늘 지들 맘대로 생각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제. 세이렌이 인간을 유혹혀서 죽게 만든 것처럼, 황금빛이 나는 나무는 세이렌을 유혹해 세이렌들이 밤낮없이 식음을 전폐하며 나무만 보게 만들었어. 상황이 이리되자, 세이렌의 여왕은 미다스의 침전에 엎어져갖고 질질 짜면서 어째 그런 선물을 주었는지 물었어. 미다스는 여왕의 머리칼을 쓸며 너희 세이렌과 똑같은 것을 선물하기 위해 자신이 노력한 것을 알아주지 못하는 여왕에게 섭섭하다고 염병을 떨었지.”

“본론만 말할 수 없나?”

졸지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 하데스가 고리 할멈의 말을 잘랐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거울 너머로 안쓰럽다는 듯이 제레미의 허리를 토닥이는 고리 할멈의 손이 보였다.

“마누라땜시 남편이 허벌라게 고생이 많겄어.”

“제 마음을 알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랄염병이 따로 없었다. 고리 할멈은 하데스를 무시하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요약하자면, 세이렌의 여왕은 그녀의 영혼을 바쳐 나무의 반짝임을 봉인하였다. 그러나 신의 성물을 완전히 봉인하기에는 힘이 부족해 미처 봉인되지 않은 반짝임은 나무의 열매인 레몬으로 만들어졌다. 이 레몬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천상의 맛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왕을 잃은 세이렌들의 잇따른 저주로 인해 누구든지 레몬을 따면 죽음을 속삭이는 환청을 듣고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있다가 그대로 굶어 죽거나, 레몬의 반짝임을 대신 갖게 되어서 반짝임에 홀린 사람들에 의해 죽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

“그래서 내가 처자를 고른겨.”

지독하게 유치한 일에 휘말렸다. 하데스는 두통이 밀려와 다시 이마를 짚었다. 고리 할멈은 하데스의 심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이었다.

“이리 오랜 시간을 살다 보면은 사람이 쪼까 보이는디. 남편 놈은 정신머리가 아주 찻잔만도 못하게 연약해가꼬 레몬을 따자마자 고대로 죽어버렸을겨.”

고리 할멈이 거울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하데스를 보며 히죽 웃었다.

“바깥양반땜시 마누라가 아주 쌩고생을 하겠구만.”

하데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들어야 할 말이 남아있었으나 고리 할멈은 오랜만에 손님 대접을 했더니 피곤하다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데스는 고리 할멈의 앞을 막으며 반사적으로 지랄하지 말라는 말 중에서 맨 앞 글자만 말했는데, 그걸 또 눈치챈 고리 할멈이 “지랄하지 말라고?”, “지랄 말고 레몬청이나 만들라고?”, “지랄 염병이라고?” 라면서 노인을 공경하는 방법을 전혀 배우지 못하는 코넬라 왕국의 기사들이 불쌍하다고 고함을 질러댄 탓에 그녀를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주먹에서 힘 풀어, 아가씨. 어차피 다치지도 않는다잖아?”

“남을 다치게 할 순 있지.”

예를 들어 저 멀리 코넬라 왕국 한복판에서 하늘색 파자마를 입고 쿨쿨 자고 있을 왕세자라든가. 아니면 가까이에 있는 제레미 어거스트라든가. 하데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제레미는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모르는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2층으로 가서 짐이나 풀자고. 그래도 손님방이 있다니 다행이지.”

어차피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으나 하데스는 꾹 참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들은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마주했다. 2층은 복도식으로, 곧바로 바깥이 보이는 커다란 창문 하나와 문 하나만 있는 매우 단출한 구성이었다. 그렇다. 문이 딱 하나였다.

찰나의 순간에 하데스와 제레미의 눈이 마주쳤다. 제레미가 눈을 휘며 샐쭉 웃었다.

“너……!”

하데스가 한꺼번에 세 계단 위를 뛰어오르는 것보다 제레미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빨랐다. 찰칵. 뒤늦게 하데스가 문의 손잡이를 잡아 보았으나 문은 이미 잠긴 뒤였다. 문 안에서 제레미가 무어라고 말하는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하데스는 너무나 오랫동안 참았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쾅!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지진이야! 고리 할멈이 소리를 지르며 베개를 끌어안고 집 밖을 탈출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음 날 아침, 고리 할멈은 깊이 잠들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데스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성실하게 훈련을 하고 씻고 고리 할멈의 허락 없이 빵까지 구워 먹었다. 제레미는 찬바람이 훤히 드나드는 2층의 손님 방에서 악몽을 꾸며 잠꼬대를 하길래 깨우지 않았다. 고리 할멈은 10시가 돼도 일어나지 않았다. 11시 30분쯤 제레미가 드디어 악몽에서 깨어나 퀭한 얼굴로 내려왔을 때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하데스는 고리 할멈을 깨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하데스가 아무리 깨워도 고리 할멈은 도통 일어나질 못했다. 하데스는 고리 할멈이 죽은 건 아닌지 그녀의 코에 손을 대어 숨을 확인해야 했다.

“으음…….”

고리 할멈이 뒤척이며 불편한 신음을 냈다. 하데스가 할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점심때가 다 됐으니 일어나시죠.”

“…….”

고리 할멈이 입을 벌리고 힘들게 두 눈을 떴다. 그 모습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리 할멈은 눈을 뜨고 난 뒤에도 몇 번 더 숨을 꿀꺽꿀꺽 삼켰고 지친 기색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데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고리 할멈은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장 오늘 오후에 죽는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으리라. 차라리 레몬을 들고 왕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데스는 왕세자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싶었고, 이런 손을 가지고 살고 싶지도 않았다.

“레몬을…….”

“…….”

“껍질을, 까.”

고리 할멈은 한숨처럼 아주 느린 제국어로 말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데스는 잠자코 고리 할멈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제레미가 차려놓은 점심을 먹은 뒤 하데스는 과도를 챙겨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의 앞에는 접시 두 개와 레몬 세 개가 놓여있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하데스는 어째서 고리 할멈이 제레미가 아니라 자신에게 일을 맡겼는지 알게 되었다.

“아가씨, 왜 그렇게 땀을 흘리는 거야? 더워?”

“꺼져.”

“레몬이 단단한 거야? 쉬었다가 하든지 아니면 돌아가면서 하는 게 어때?”

“꺼져.”

“그럼 땀이라도 좀 닦아가면서 해.”

“꺼지라고 했다.”

하데스가 살벌하게 경고해도 제레미는 섬세한 손길로 하데스의 이마에서 땀을 닦아냈다. 하데스는 그의 손길을 애써 무시하며 레몬을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제레미는 하데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더는 말을 걸지 않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다시 한번 레몬 껍질을 베어냈다.

살려……줘. 나 무서워……. 아가씨, 하디. 날 버리지 마…….

하데스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레몬 껍질을 깔 때마다 머리에서 사특한 목소리가 울렸다. 세이렌들은 하데스가 레몬을 까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처음에는 세이렌의 구슬픈 노랫소리와 애원이었다. 하데스는 머리에 울리는 소리를 태연하게 무시하며 껍질을 깎아냈다. 마물의 소리는 그녀의 알 바가 아니었다. 하데스의 거침 없는 손길에 노랫소리가 잦아들고 다음으로 아버지의 호소와 질책이 이어졌다. 그러나 아브락사스 대장은 딸을 하루라도 나무라지 않으면 입에 혓바늘이 나는 특이한 체질의 소유자였기에 하데스는 적장의 모가지를 꺾듯 무심하게 껍질을 깎았다. 뒤를 이어 폐하와 왕세자의 지엄한 왕명과 협박이 이어졌다. 솔직히 왕비님이라면 모를까, 두 분은 협박하는 게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아서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그러자 세이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 인간은 뭐야? 고리 할멈은 대체 어디에서 이런 끔찍한 인간을 데려온 거지?

어째서 이 모든 소리를 듣고도 꿈쩍하지 않는 거야? 이유가 뭐야?

그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없는 걸까? 하지만……. 아니야. 이들은 이 인간에게 충분히 중요한 사람인 걸.

그렇다면, 얘들아.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어때?

저 심약해 보이는 남자를 말하는 거야?

하데스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자 순식간에 세이렌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하데스는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타인에 대한 감정이라고는 귀찮음 정도가 전부인 하데스에게서 두 가지 이상의 감정을 유발하는 존재는 그가 유일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삶에 증명되지 않는, 기록에 한 줄도 적히지 않을 감정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렇기에 그녀는 제레미의 약혼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제레미는 고작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약혼을 감행할 남자는 아니다. 그는 자신과 지독하게 비슷한 면이 있었기에, 약혼을 거절할 만한 합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슈니치 영애와 약혼했을 것이다.

그게 전부다. 하데스도 제레미도, 서로에게 애틋하기에는 너무나 이성적이고 건조한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제레미는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어 사랑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무서워하는 애송이다. 나그네가 두툼하게 껴입은 외투를 벗기기 위해서는 바람이 아니라 햇빛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제레미의 기저에는 달콤함이나 따뜻함이라고는 한 줌도 찾아볼 수 없어서, 제레미는 그런 것들이 닿으면 도망치기에 바빴다. 하데스가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을 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 대신 그의 얼굴에 다짜고짜 주먹을 메다꽂은 이유였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하데스와 제레미는 단어 그대로 하루가 멀다하고 싸웠다. 제레미는 그냥 지나갈 수 있는데도 괜히 하데스를 건드렸고, 하데스는 그냥 무시할 수 있는데도 굳이 제레미에게 응수했다. 가볍게 말싸움만 하고 지나가는 날도 있었고 피가 나고 흉터가 생길 때까지 싸운 적도 있었다. 제레미는 하데스에게 얻어맞아 어깨가 탈골된 날에도 웃었다.

이렇게 애원하는 게 아니라.

하데스는 고통으로 인해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나 괴로워서 어쩔 줄 모르고 애원하는 제레미를 본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세이렌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알고 있었으나, 거듭된 훈련으로 감정과 감각을 수만 번 깎아내 더는 깎아낼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흔들렸다. 그녀는.

쨍그랑!

결국 하데스는 마지막 레몬 껍질까지 모두 깎은 후 쓰러졌다. 과도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하데스는 제레미가 받아냈다. 어느 순간부터 하데스는 제레미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데스는 그녀가 쓰는 검처럼 고지식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 어떤 고통이 그녀를 깎아내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쓰러지는 것이다. 제레미는 하데스를 소파 위로 옮겨놓고 고리 할멈의 방으로 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고리 할멈은 여전히 혼곤하게 잠에 취해있었다. 제레미는 그다지 놀란 기색 없이 고리 할멈을 강제로 일으켜 세워 앉혔다. 고리 할멈은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휘청거렸다. 제레미는 일말의 동정이나 망설임을 내비치지 않으며 단단히 고리 할멈을 앉혔다. 고리 할멈은 뒤늦게 무례한 침입자를 알아보았다.

“너는 못해. 너는.”

말을 하다 말고 고리 할멈이 눈을 감았다. 제레미가 고리 할멈의 양 어깨를 잡고 두어 번 흔들었다. 고리 할멈이 힘겹게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포기혀.”

“아뇨.”

“자네는 못한데도. 자네가 감…….”

고리 할멈이 아까와 똑같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생명력은 꺼져가고 있었다.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입을 벌린 채로 숨을 쉬었다. 단잠에 빠진 듯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숨이 유독 길었고 주름진 눈가와 투박한 손이 미동 없이 고요했다. 제레미가 다시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네. 맞습니다. 전 못해요. 그래서 전 시도도 안 할 거예요. 허락받으려고 이러는 거 아닙니다.”

“…….”

“아직 할 수 있으시잖아요?”

그늘 한 점 지지 않은, 땀방울 하나 없는 얼굴로 제레미 로스첸트가 웃었다. 고리 할멈은 죽음이 담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평탄히 살긴 글렀어. 둘 중 하나라도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어야 하는디.”

“그게 저희의 매력이죠.”

제레미가 준비해 온 종이와 펜을 꺼냈다.


하데스는 그 후로 꼬박 열흘이 지난 후에 눈을 떴다.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들은 소식은 제레미가 슈니치 영애의 결혼 소식이었다.

“결혼?”

“네.”

“지금 결혼식 중이래요.”

“아가씨를 깨울까 말까 엄청 고민했는데, 가주님께서 일부러 깨우지 말라고 하셔서…….”

말을 흐리는 시녀들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누가 봐도 기대감에 찬 얼굴이었다. 하데스는 이마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누가 봐도 개빡친 얼굴이었다. 사실 이 결혼식은 지나치게 빠른 구석이 있었다. 하데스가 단박에 ‘이 새끼들이 내가 의식이 없는 사이에 날치기로 결혼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라고 눈치챌 정도로. 통상적으로 귀족들의 결혼식은 약식으로 준비해도 3개월이 넘게 걸린다. 왕국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결혼식은커녕 혼수품도 오가지 않았는데 열흘 만에 결혼이라고? 이 개새끼들이.

“어머, 아가씨. 이제 막 일어났는데 어디를 가시려고요?”

“아이, 참. 몸이 괜찮은지 보고 가시지. 정 가시려거든 이 옷을 입고 가세요.”

한 시녀가 말리는 척을 하고 한 시녀가 기다렸다는 듯 흰색 정장을 내밀었다. 누가 봐도 결혼식에 입고 갈 만한 옷은 아니었다. 하데스가 옷의 색깔에 대해 지적할 새도 없이 시녀들이 잽싸게 옷을 갈아입혔다. 검과 총까지 착용한 후 하데스는 방문을 부술 듯이 열고 나왔다.

“다녀오세요, 아가씨!”

“쟁취하세요, 아가씨!”

시녀들이 배웅을 하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나오자 이번에는 아브락사스 대장이 배웅을 나왔다. 하데스가 짜증을 숨기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를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차에 아브락사스 대장이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어딘지는 알고 가야지.”

“왕궁 예식장이겠죠.”

하데스는 타박하면서도 순식간에 아버지의 손에서 청첩장을 빼냈다. 아브락사스 대장은 딸이 청첩장을 가져가기 전에 먼저 손을 피한 후 잔소리 겸 설교를 하려다가 허망하게 빼앗기자 당황해 딸의 뒤통수에 대고 홀로 외쳤다.

“기어이 갈 생각이냐?”

하데스는 대답도 하지 않고 새하얀 망토를 휘두르며 집을 나섰다. 빠른 걸음이 어느새 달음박질로 변했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데스는 가끔 제레미의 결혼식을 상상하곤 했다. 상상 속에서 하데스는 언제나 그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동료 기사들의 옆에 앉아 박수를 쳤다. 제레미가 어떤 사람과 어떻게 결혼을 하든 자신의 행동은 늘 같았다. 하데스가 지금 뛰고 있는 이유는 그저 그의 결혼식에서 박수를 치기 위해서였다.

“헉. 하데스 경이다.”

“진짜로 선배님이 오셨어.”

그녀는 왕궁 예식장 입구에 멈춰 섰다. 가시 없는 장미와 카나리아가 음각되어 있는 하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옆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든 말든 그녀는 손을 뻗어 매끈한 장미의 줄기를 만졌다. 카나리아는 장미의 가시에 찔리면서도 장미에게 다가가야 하고, 장미는 자신의 가시를 하나씩 뽑아내야 비로소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하데스는 단 한 개의 가시도 뽑지 않았고 제레미는 하데스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장미와 카나리아가 빤히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가시를 뽑을 준비가 되었냐며 묻는 것도 같았고, 피가 묻은 가시를 가지고 감히 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냐며 호통을 치는 것도 같았다.

“안 돼! 국보가!”

“아브락사스 경!”

하데스는 언제 망설였냐는 듯 하얀색 문을 발로 차고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결혼식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슈니치 영애가 웨딩드레스만큼이나 창백해진 얼굴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서서 제레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카나리아가 자신의 곁을 떠나게 둘 생각도 없었다. 그가 피투성이가 되어도 자신의 넝쿨 위에 피를 흘리며 쉬기를 바랐다.

“막아! 다들 뭐해!”

슈니치 영애가 미리 준비한 건지, 덩치 깨나 하는 남자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그리고 하데스가 아무런 방해 없이 곧바로 제레미에게로 가는 길을 만들어주었다.

“뭐야? 왜 이래? 미쳤어? 야, 이 새끼들아!”

미친 여자처럼 부케로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패고 있는 슈니치 영애의 뒤로 왕세자가 보였다. 왕세자가 슬쩍 엄지를 추켜세우며 하데스에게 윙크를 했다. 하데스는 이 안에서 유일하게 침착함을 지키고 있는 남자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변명해 봐.”

“하하.”

하데스의 서늘한 얼굴을 마주하고서도 제레미는 태연하게 웃었다. 웃어? 하데스는 손바닥으로 제레미의 뺨을 내리쳤다. 짜악도 아니고 퍽! 소리가 울렸고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물론이고 슈니치 영애까지 깜짝 놀라 그들을 바라보았다. 정작 뺨을 맞은 사람은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엄살을 피웠다.

“열흘 만에 깨어났는데 여전히 건강하네, 아가씨.”

“변명.”

“너도 알잖아.”

웃음기가 섞인 대답에 하데스는 입을 다물었다. 제레미의 말마따나 그녀도 알고 있었다.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하데스도 웨딩드레스를 입고 버진 로드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비련의 연인이니 애절한 사랑이니 그런 것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과 마땅히 가져야 할 것 중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는 인간들이었고, 그로 인해 손에 쥔 모든 것들이 잿가루가 되어 흩어진다고 해도 자신의 손안에서 재가 되었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할 비틀린 사람들이었다.

“고리 할멈이 그러더라. 하나가 이상하면 남은 하나라도 멀쩡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게 아니라고. 그 말이 맞아. 이제 와서 내가 너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아는 모든 단어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로 설명하면 뭐가 달라질까?”

제레미가 한 손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 피가 묻은 손으로 하데스의 손을 잡고 멱살을 쥔 손을 끌어내렸다. 하데스는 문득 제레미의 손이 차갑고 땀에 젖어 축축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우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 달이 어떠한 법칙으로 인해 인간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이 땅에 내려앉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레미의 목소리는 고요하고 단조로웠다. 그는 현실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기에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하데스는 섣불리 분노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랬듯,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이건 어떨까. 기약 없는 잠에 빠진 네가 기적처럼 일어나 신성한 결혼의 맹세가 끝나기 전에 날 죽이러 온다면?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떠한 변칙이 너를 깨웠다면?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확률에 너와 내가 선택을 받았다면?”

“그렇다면.”

“그래. 그렇다면.”

참으로 말도 안 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제레미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계산적이며 스스로에게 결백한 확신이 없다면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어느 누구도 결과를 자신하지 못할 조건을 내밀었다. 제레미도 하데스도, 우연과 운명이라는 단어를 경멸했다. 그러나 제레미의 말대로 지금 이 순간이 기적의 결과이며 자연의 변칙이고 신의 선택을 받은 것이라면.

“뭘 망설여, 아가씨?”

제레미는 하데스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은 채로, 늘 웃던 얼굴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웃었다.

“날 파혼시켜 줘.”


……. (중략)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결혼하지 않은 결혼식은 성대한 박수로 마무리되었다. 특히 왕세자와 프리메라 공주가 눈물을 훔치며 기립 박수를 치는 모습은 상단의 기사 사진에서도 볼 수 있다. 비록 이번 일로 인하여 슈니치 가문에서는 고명한 딸자식이 대대적으로 파혼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마더 고리가 마지막으로 만든 단 한 병의 레몬청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리 손해를 보지는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해프닝을 매우 기꺼이 여기는 사람으로서 독자들에게 한 가지 희소식을 알려주자면, 어쩌면 이 이야기와 유사하지만 다를 것으로 예상되는 극이 국립극장에서 공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가 공백으로 남아있고 (제레미 경이 부디 제국금화 20개에 본 신문사와 인터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브락사스 가문의 고소를 피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결혼식에 하객으로 초대받은 행운의 극작가인 미스 헤지스가 역량을 발휘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니 그들과 친분이 없어 결혼식에 초대받지 않은 코넬라 왕국의 국민들과 너무 바빠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코넬라 왕국의 일부 기사단원은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기를 바란다. (후략)

사유지 상주 관리인 급구(2명)

(1) 하는 일 : 주택 및 정원 관리자.

(2) 자격 요건

- 은퇴를 앞둔 집사, 하녀 우대(범죄 기록 대조 필)

- 50세 이상의 부부 혹은 할머니 우대

- 신축 건물이라 청소가 어렵지 않음

- 농사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

(3) 급여 : 수습기간에는 월급 금화 10개. 3개월 이후 협의. 섬 내에 농사 지을 수 있는 땅 두 평을 무상으로 제공. 숙식 제공.

(4) 참고 사항

- 근무지는 제국령이나 코넬라에 가까운 무인도이니 확인 필수(코넬라 국적자 혹은 제국 국적자만 출입 가능)

- 근무지에 집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자급자족이 필수불가결함

- 무인도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포함하여 이력서 작성 요망

(5) 이력서 제출 및 문의 사항이 있을 경우에는 로나르 3번가 아스텔라 베이커리에 영업 시간 내 방문하거나 우편으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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