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죽음은 어디서 시작해서

Duskwood 제이크 드림

장르연성 by 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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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 10 이후 시점
    * OC 설정 대거 차용
* AU
* 퇴고 예정 없음

이블린 소여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그러나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얼굴에 분칠을 하고 색색의 깃털과 꽃을 흔들며. 하지만 이블린은 관광지와 축제 모두에 관심이 없었다. 물론 갈 곳 또한 없었다. 그냥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즐거운 사람들 틈에 혼자 혼란스러운 낯으로 남았다. 날씨는 쌀쌀하고 하늘은 거뭇했다. 새까만 페이스 페인팅이 그녀의 옷에 조금씩 얼룩을 남겼다. 애매한 해방감과 불안이 한꺼번에 닥쳤다. 비행기까지 타고 샌디에이고로 날아왔는데도 자꾸 기시감이 들었다. 도망을 치면서도 과감하지 못한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러나 그 자괴감까지도 곧 쓸려 내려갔다. 행렬과 춤, 그리고 또다시 춤이 그녀를 이리저리 떠밀었다.

목소리는 나붓했고 부드러웠다. 내가 인파를 좀 줄여 줄까. 이블린, 너는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블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걷다 말고 무작정 좌회전했다. 그러고 몇 발짝을 걸어갔더니 길이 끊겨 있었다. 등 뒤에선 여전히 떠드는 소리들이 요란했다. 추로스 냄새가 빼곡하게 들어선 부스들 사이를 메우고 맴을 돌았다. 속이 뒤집혔다. 팔에 걸친 쇼핑백이 슬슬 팔꿈치 안쪽을 압박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인파에 성공적으로 섞여든 척을 하기 위해 구매한 판초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입을까? 아니면 차라리 이런 축제엔 제대로 질려 버린 현지인 흉내를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샌디에이고 투어 트롤리 스티커를 쇼핑백에 붙여 놓은 이방인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즐기고 있나? 그럴 리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완벽한 여행이다.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며 이블린은 두껍고 투박한데다 색도 못생긴 판초를 어깨에 둘렀다. 그러면서 목소리가 좀 날아가길 빌었다.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도 한 생각이었다. 한숨이 튀어나왔다. 심장께가 불편했다. 그녀는 핸드백을 뒤적여 갈색 약병을 맨 위로 끄집어냈다. 눅눅한 공기에 천수국 향이 실려왔다. 흥겨운 노랫소리도 함께였다. 그녀는 노래 가사를 단 한 음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블린은 등을 돌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 왜 네 비서에게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지?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가? 물론 주체는 그녀 자신이다. 무엇으로부터? 이블린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발을 밟은 여자가 덩달아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희게 칠한 얼굴이 불쑥 다가오자 그녀는 지레 겁을 먹었다.

“죄송해요, 실수였어요!”

여자가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사과했다. 하지만 이블린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늘에서 우르릉 하는 소리가 울렸다. 공기가 찝찔했다. 인파에 떠밀려 그녀의 몸이 부스 안으로 푹 밀려들었다. 아까 그 여자가 내일 어디로 출근하는지 궁금한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존재와 아까의 해프닝과 발등의 아릿한 통증이 모두 없었던 일이길 바랐다. 너도 알겠지만, 아주 잠깐이면 된다. 궁금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자 목소리는 잠깐 조용해졌다. 그리고 다시. 하지만 아까 그 여자는 네 발등뼈를 거의 부러뜨릴 뻔했다. 이블린은 그 말을 무시했다.

진녹색 어닝과 갈랜드가 그녀의 머리에 닿을 듯 낮게 걸려 있었다. 이블린은 정체도 모르는 부스 안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등 뒤에 조악하게 꾸려진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선인장과 한 무더기의 천수국도. 달큼한 향이 훅 끼쳤다. 뺨을 쓰다듬는 기척이 퍽 습하고 차가웠다. 이블린은 몸을 바르르 떨며 가게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일을 파는 가게인 듯했다. 멕시코 억양이 강한 남자가 다가왔다.

“제단에 관심이 있으세요?”

“…이 막대들은 뭐죠?”

강마른 손끝이 제단에 꽂힌 나무 막대들을 살짝 건드렸다.

“추모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꽂는 거예요.”

적고 싶은 이름이 있나? 로렌 소여가 최근에 죽었지. 이블린은 그녀가 직접 정신병원에 처넣은 제 아버지 소식을 아주 가끔씩, 그러나 주기적으로, 보고받고 있었으나 건강 악화에 대해 들은 적은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의 급사를 알릴 때 의료진의 무척 당황했던 목소리도. 남자는 추모용 막대에 돈을 받지 않았다. 그게 전통이라고 했다. 이블린은 오직 그 막대 값을 지불하기 위해 평소와 같은 재료와 같은 용량으로 제조된 오일에 평소의 두 배 값을 냈다. 남자의 입꼬리가 하늘을 찔렀다. 못마땅한 목소리가 옆에서 울렸다. 그녀는 약간 쌤통이라고 생각했다가, 그 생각의 깊이만큼 자괴감을 느끼고 그만두었다.

막대를 받아들고 이름을 적었을 때 이블린은 마땅히 그것을 꽂아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허공에 떠 있었다. 결국 막대는 핸드백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듣기로는 그녀처럼 구는 사람이 제법 있다고 했다. 제단은 어디든 있으니 꽂으면 된다고 그가 친절하게 덧붙였다. 그녀는 민망하게 판초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음식 냄새가 나는군.

“장담하건대 네 취향은 아닐걸.”

“예?”

이블린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점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주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판초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취향엔 안 맞는 거 같아서요. 중얼거리자 그가 웃었다.

“환불해 달라고 우겨 보십쇼. 받아줄지 누가 압니까.”

“그럴 것까진 없구요…….”

왜? 목소리는 간결했다. 이블린은 본능에 가깝게, 그 질문의 중심이 판초 자락 따위에 있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가게에서 나올 즈음에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녀의 목 뒤로 손이 넘어왔다. 판초 위로 빠져나온 후드가 뻗쳐 있던 머리를 눌렀다. 이블린은 후드 끈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걸었다. 몇 발자국마다 해골 모양 가면을 팔았다. 그녀는 나붓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밑져야 본전이겠지. 그녀는 그 직후 가장 먼저 보인 가면을 구매했다. 고등학교에서 연극을 할 때도 이런 얼굴을 모두 덮는 가면은 써 본 적 없었다. 이블린은 한참 허둥대고서야 가면을 제대로 썼다. 덜 불편하게 쓰려면 후드를 벗어야 했는데, 그랬더니 크기가 한참 남아서 고무줄 매듭을 줄여야 했다. 전시된 기념품들에 가려져 가로 폭이 무척 좁아진 거울에 전신을 비집어들듯 비추자 모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해골 탈을 뒤집어쓴 금발의 강마른 여자.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어딜 가야 천수국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블린은 노점 사이를 뚫고 한참 걸었다. 사실은 기껏해야 두세 블록쯤 떨어졌을 뿐이었지만, 보이는 기념품들을 무차별적으로 구매하느라 걸음이 한참 느려졌다. 저자들을 파산하게 해줄까. 그녀가 세 번째로 바가지를 썼을 때였다. 그 말을 듣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지만 가면 때문에 아무도 그걸 볼 수 없었다.

가게를 나오면서 이블린은 한숨을 쉬었다. 너 이미 두 번이나 그런 적 있잖아.

알고 있었나? 돌아오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겼다. 이블린은 입술을 꾹 앙다물었다.

모를 리가 없지. 타이밍이 그랬는데.

이블린. 그들은 회의장에서 널 모욕했다. 기억하나?

그걸 내가 기억하는지는 이 문제와 무관해.

아니, 상관이 있다. 그들은 사업적으로도 손해를 가져올 패였으니까.

너랑 이런 이야기 하기 싫어.

어째서지? 이건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이다. 왜냐면,

“닥쳐, 제발 좀…….”

결국 이블린은 소리 내어 욕설을 씹어뱉었다. 말을 잃었는지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블린은 흐느끼면서 식당가로 향했다. 매운 향신료 냄새가 났다. 사람들은 술을 약간씩 마시고 얼굴이 벌겋게 익어 떠들었다. 그곳에서는 가면을 뒤집어쓴 이방인 하나가 울어도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이브, 제발. 내가 미안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이블린은 가면 위에 양손을 얹었다. 종이에 편지를 쓰듯 꾹꾹 눌러 울면서 걸었다. 머리가 아팠다. 거리는 길었고, 사람은 무척이나 많았으며 각자의 이유로 모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식당가의 불빛이 쓰라린 이블린의 눈을 찔렀다.

순전히 체력적인 이유로 울음이 그치고, 딸꾹질이 터졌다. 그때 그녀의 발은 다시 길 끝자락에 있었다. 아주 유심히 귀를 기울이면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올드시티의 외곽이었다. 이블린은 핸드백 속 막대기에 생각이 닿았다. 이대로 마을을 벗어나 알 수 없는 땅을 무단으로 침범하고 횡단해서 대로에 올라서면 어떻게 될까.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군. 그녀는 숨을 참았다.

천수국을 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아무 식당으로나 이어진 줄에 섰다. 지친 몸이 가늘게 흔들렸다. 꽃 한 송이를 품에 안고 흔들리고 있자니 바로 앞에 선 가족이 자리를 양보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블린은 가면도 벗지 않은 채 손을 휘저었다. 괜찮다고 두어 번 말하자 그들은 곧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녀는 깊이 고독을 들이쉬었다. 잉크와 나무 맛이 나는 고독이었다. 사실 그녀는 어디에서나 같은 향의 공기를 마시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줄은 금방 줄어들었고 그녀의 앞 순서였던 가족이 식당에 들어섰다. 식당에선 노래를 틀어둔 것이 아니라 누가 마이크를 쥐고 직접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흥겨운 멜로디였다. 가까이 서 있었음에도 노래 가사는 들리지 않았다. 예닐곱 살은 된 듯한 검은 고수머리 남자애가 아버지 손을 꼭 쥐고 흔들었다. 이블린은 줄에서 한 발짝 옆으로 빠져나왔다. 뒷사람이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가를 빠져나왔다.

하늘하늘 흔들리며 걷는 그녀에게도 공평하게 밤이 왔다. 사방에 흐드러진 천수국이 노랗게 빛났다. 함께 얽혀 있는 조명이 빛을 내는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이블린은 손에 쥔 꽃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있느라 그녀의 꽃은 차라리 녹색에 가깝게 보였다. 어닝도 대부분 걷어져서 갈랜드 틈으로 하늘이 곧장 보였다. 잿빛이었다. 달이나 별은 보이지 않았다. 배고프지 않나?

“괜찮아.”

마음이 복잡하면 으레 식사를 거르는 습관은 좋지 않다.

“내가 식사를 거르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답시고 구내식당 직원을 우선 해고하고 보는 건 좋은 짓이니, 그럼.”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녀는 정수리 위로 스치는 무언가를 느꼈다. 갈랜드가 그만큼 처져서 걸려 있나 하고 이블린은 하늘을 괜히 쳐다보았다. 숨길이 뚫리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한숨이 역류했다. 그녀는 숨결을 내 주고 다시 정수리에 어루만짐을 받았다. 시선이 한참동안 가면 속 어둠에 붙박여 있었다. 꽃이 흔들리는 게 갑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블린은 핸드백에 넣었던 막대를 꺼내 꽃줄기와 함께 쥐었다. 별로 소용은 없었다. 하지만 기분은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관광안내소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참 걸으니 커다란 제단이 나왔다. 제사용 음식이 차려져 있고 꽃을 헌화할 수 있는 테이블이 따로 놓여 있었다. 무덤가에 가서 혼자 청승 떨다가 귀신처럼 잠들어 볼까 했는데. 하하. 이블린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추모한다고 모인 사람들은 다들 즐거워 보였다. 기타를 치고 스텝을 밟고 웃었다. 웃지 않는 건 이블린뿐이었다. 잉크와 나무 냄새, 그리고 목소리. 판초 위로는 화려한 불빛들이, 밑으로는 밤의 냉기가 스미기 시작했다. 발 아래에 그림자가 없었다. 이블린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환호성에 묻혀 그녀의 귀에조차 들리지 않았다. 발등이 아픈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블린은 핸드백 가장 위쪽에 들어 있는 약병을 떠올렸다. 그것도 아니다. 그녀는 무언가 더 심각한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턱과 입술이 덜덜 떨렸다. 아무도 그걸 알아주지 않았다. 이블린. 아무도.

그녀는 헌화하는 방법을 몰랐다. 하지만 물어물어 어떻게든 제단에 꽃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이브? 손에 있던 걸 모조리 그곳에 두려던 이블린을 제지하며 직원이 웃었다.

“막대는 저기 꽂으시는 곳이 따로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 강마른 여행객을 친절하게도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블린은 그가 원래 서 있던 곳으로 걸어가 본업에 집중할 때까지 숨을 참았다. 폐가 아릿했다. 이브, 내 말 들리나?

날 두고 갈 셈인가?

“그래야만 해.”

이블린.

“나 그만뒀어.”

무엇을?

“…회사를.”

그러니까 그녀가 도피하듯 샌디에이고행을 택했을 때부터 그녀는 아무 곳에도 행선지를 알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왜? 한참을 기다린 질문이 또 흘러나왔다. 이블린은 울며 웃었다. 가면을 벗자 젖은 얼굴에 밤바람이 스쳤다. 흰 이마를 어루만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의 울음이 거세어졌다. 그러는 동시에 이블린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원망했다.

“네가 무서우니까.”

거짓말이지. 나는 널 잘 안다.

“꺼져 버려.”

역시 거짓말이군.

“제발, 제이크. 죽어 버리란 말이야.”

이블린은 천수국 틈으로 그의 이름이 적힌 나무 막대를 꽂았다. 그것으로 그가 죽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살아 있는 심장에 칼을 욱여넣듯 힘을 주어 밀어 넣었다. 꾸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막대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손바닥에 나뭇조각이 박혔다. 이블린은 곧장 뒤를 돌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다음 갈 곳을 정하지 않고 정처 없이 어둠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흐느낌이 여전히 남아 그녀의 뒤에 이지러졌다. 그리고 곧 흩어진 그림자처럼 자취를 감췄다.

//6,511자 11.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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