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넷째 장
루크 헌트(+빌 셴하이트) 드림
나의 르나르, 괜찮니? 이런 때에 공책을 건네어 주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네가 걱정되어 어쩔 수가 없었단다.
영화연구회 소속인 우리 기숙사 후배들에게 들었단다. 빌과 싸웠다고 하던데. 후후, 정말 대단하구나. 동급생도 아니고 후배 중에서 그 빌 셴하이트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데. 심지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으로 잘 넘어가곤 하는 네가 빌과 싸우다니. 하지만 싸운 이유를 듣고 나서는 네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단다. 나는 너를, 그리고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게 무엇인지 잘 아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동아리에서 일이 있었다지? 게다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빌과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 중재하던 빌과 마찰이 있었던 것뿐이지 원흉은 따로 있다던데. 내가 잘못 안 게 아니라면 말이야.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좀 놀랐단다. 설마 대놓고 네 앞에서 각본 담당은 필요가 있니 없니 하는 사람이 나올 줄이야. 심지어 그렇게 말한 당사자가 내놓은 글은 묘하게 네 글을 닮았다지? 아이렌 군이 드물게도 화가 나 목소리를 낸 것도 당연해. 엄연히 동아리장인 빌의 허가를 받고 들어온 자리고, 정말 각본만 적는 게 아니라 촬영 보조 일도 같이하는 걸로 아는데. 책임자도 아닌 다른 사람이 네 자리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심지어 대신 차지하려 하기까지 하다니. 이런 상황에서 누가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니.
그래도 빌이 허튼소리는 잘라 내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잘 중재시켜 주었는데, 네가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고 항의했다더구나. 아예 결투로 승부를 보자고까지 말했다는 게 사실이니? 그게 사실이라면, 빌이 화를 내는 것도 이해는 간단다. 네 손을 소중히 해야지. 마법도 못 쓰는 네가 손발로 싸우다 다치기라도 하면 부원들 모두가 슬퍼할 테니까.
어쨌든. 지금은 일단락되었다곤 하지만 일이 끝났다고 감정도 끝이 나는 건 아니지. 어떤 감정들은 때론 모든 게 끝난 후 몰아치기도 하니까. 그게 걱정되어 펜을 들었단다. 혹 마음에 응어리가 있다면 언제든 내게 말해주렴. 같이 차라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참, 빌은 지금 괜찮단다. 처음 기숙사에 들어올 때는 화가 좀 난 듯 보였지만, 지금은 평정심을 되찾았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사과하렴. 이번 일은 네가 먼저 사과하는 게 좋을 거야. 아마 그러면 빌도 금방 제게도 실책이 있다고 인정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사과하렴. 네가 자존심 때문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두 배로 혼나는 게 무서워 몸을 사리고 있을 거 같아 남기는 조언이란다.
그리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한 마디만 더 남기자면……. 빌의 언행이 너무했다고 생각하거나 서운한 점이 있어도 그러려니 해주렴. 동아리장이라던가 사감같이 사람들을 조율하고 돌보는 직책을 맡은 자들은 중재를 위해선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낼 수 없잖니. 너무 네 편만 들어주는 건 옳지 않으니 어느 정도 중립적 태도를 보였을 텐데. 그 점 이해하리라 믿는단다.
……음. 생각해 보니 믿는다고 해놓고 굳이 이런 걸 써놓는 게 우습게 보이겠구나. 널 못 믿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저 너를 달래주고 싶어서 이러는 걸 알아주렴. 누구든 좋아하는 것에 흉터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법이잖니. 세상의 풍파 속에서 상처는 날 수 있지만, 그 상처가 흉지지 않기를 바래 구구절절 길어진 거니 노여워 말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선배. 저는 괜찮아요.
이렇게만 써놓으면 또 괜찮지 않은데 일단 괜찮다고 둘러대는 것처럼 보일까 봐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아리방을 나오고 나서 1시간 정도까지는 화가 나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지만 좀 쉬고 명상하고 나니까 나아졌어요. 단것도 먹었고요. 일단락된 일인데 계속 화내봐야 저만 손해인 일에, 종일 기분 상해 있는 건 바보짓이잖아요? 저는 감정을 오래 끌고가지 않으려고 하고, 실제로도 그러는 편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솔직히, 처음엔 빌 선배에게도 화가 났거든요. 저는 선배가 선택한 사람이고, 지금까지 맡은 일도 큰 문제 없이 잘해왔으니까요. 그러니 저런 말을 하는 상대를 내버려 두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무능해서 쫓아내야 한다는 이야기였으면 몰라, ‘왜 있는지 모르겠다’라니. 그래놓고 각본은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하고. 모순되는 주장이라서 황당하잖아요? 이건 그냥 무슨 말이든 해서 절 쫓아내려는 걸로밖에 안 보였죠. 트집 잡는 걸 받아주면 온갖 이유로 무슨 짓이든 벌어질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까진 없었나 싶어요.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당연히 의도를 의심해야겠지만, 당사자는 어떤 이유에든 진심으로 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 의견을 냈을 뿐일 수도 있잖아요. 의견 한 번 냈다고 지레짐작하고 강경하게 대응하면, 건설적인 토론은 물 건너가는 법이죠. 그래서 빌 선배가 옳았구나 싶어요.
그리고 빌 선배에게 딱히 마음 상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저는 빌 선배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안 져줄 거 같은, 올곧고 신념 있는 점이 좋은 거니까요. 오히려 저를 아끼니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다그치신 거 아닐까요. 원래도 다정한 사람이면 모를까, 여러모로 칼 같아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사람이 자신에게만 무르길 바라는 건 웃기는 일이죠. 그건 그냥 특권을 누리고 싶은 거거나, 상대의 외적인 점만 좋아하는 거라고요.
그것보다, 지금은 화가 가라앉으셨다 하니 다행이네요. 나중에 가서 꼭 사과할게요. 사실 다음번 동아리 활동 시간까지도 화난 상태이시면 어쩌나, 뭐라고 사과하셔야 진심이 전해질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아마 빌 선배도 제가 매일 그러려니 하다가 폭발해서 놀라지 않으셨을까요, 하하.
어찌 되든 좋은 이야기지만, 저랑 싸운 그 부원은 이번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 근신하라는 처분을 받았어요. 저는 근신 정도로는 안 된다고 했다가 빌 선배랑 싸운 거였는데, 지금은 뭐 근신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요. 좀 더 빨리 복귀해도 괜찮다는 생각도 하고요. 자비나 자애의 정신으로 그런 건 아니고요, 영화연구부가 그렇게 대규모 동아리는 아니라서 한 명 빠지면 다른 사람들 일이 더 많아지거든요. 말하자면, 공익을 위해서라고 할까.
그 자식 상대 각본이 제 것과 비슷했던 것도……. 뭐, 제 글만 봤으니 그렇게 된 거겠죠. 콩 심은 곳엔 콩이 나지 팥이 나지 않으니 뭐 어쩌겠어요. 그러니 딱히 절 따라 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당당하게 내민 거죠. 흔히 말하길 무식은 죄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지적받고도 고치지 않는 게 문제인 거지. 그러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려고요. 응용력이 없고 흡수한 걸 조금씩 바꿔 뱉어내면 그건 창작자가 아니라 복사기죠. 본인도 그걸 깨달아야 할 텐데.
그냥 이렇게 생각하려고요. 얼마나 좋은 작품이 찍히려고 이런 일이 생기나, 하고 말이죠. 마음속 응어리는 없지만, 선배랑 차는 마시고 싶으니까 언제든 연락 후 놀러 와 주실래요? 벽난로 앞에 앉아서 꿀이랑 시나몬을 잔뜩 넣은 홍차라도 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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