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은밀한 속박
레오나 킹스카라 드림
레오나가 생각하는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유일한 감독생은 겁이 많기에 신중한 인물이었다. 언제나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고, 최악의 결과부터 최선의 결과까지 무수한 경우의 수를 고려하며, 위험이 큰일에 함부로 무언가를 걸지 않는 신중한 사람. 그게 바로 아이렌이란 여자였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렌은 이따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대범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모호한 태도를 보여선 안 되는 상황이나 빠른 결정이 필요한 순간, 그리고 저 자신의 결정에 확신이 있는 경우. 그리고 반드시 쟁취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면, 신중한 사냥꾼 같은 아이렌은 순식간에 브레이크가 없는 불도저가 되곤 했다.
그래,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레오나 선배, 이거 읽으실 줄 아세요?”
수업이 없는 휴일 오후. 겁도 없이 갑자기 사바나클로 기숙사에 쳐들어온 아이렌은 다짜고짜 레오나에게 낡은 책 하나를 내밀었다. 아침 연습 때 두고 온 물건을 챙기기 위해 매지컬 시프트 연습장에 다녀오던 길이던 레오나는 대담한 상대의 행동이 귀찮다기보다는 의아한지,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한쪽 눈썹만 까딱였다.
“갑자기 뭐냐. 기숙사까지 쳐들어와서.”
“이거, 고서점에서 구한 건데, 아무래도 고대 주문이랑 관련된 책인 거 같아서요.”
과연. 제가 고대 주문학에 능통한 걸 알고 찾아온 것인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이를 찾아가는 건 현명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점은 무모하다고밖에 말할 수밖에 없다.
아마 넘쳐나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어 이런 짓을 벌인 거겠지. 신중하지만 대범한 아이렌의 성미를 잘 알고 있는 레오나는 호기심으로 두 눈을 빛내고 있는 후배의 손에서 책을 받아 갔다. 낡아서 변색 되고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한 책에는 알아볼 수 있는 글자와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뒤섞여 쓰여있었다.
“과연. 기초적인 고대 주문 관련 안내서군.”
“교과서 수준의 기초인가요?”
“아마 이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보다는 어려울 거다. 딱 봐도 전공 서적인 듯하니, 여기 수준이랑은 안 맞겠지.”
이렇게 낡아버린 전공 서적이라면, 아마 몇백 년 전 학자가 만든 책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온 건지는 모르지만, 이 섬은 나름대로 마법사 양성 학교가 두 개나 있는 곳이지 않던가. 오래전 두 학교 중 한 곳에 교수로 근무하던 이가 팔아치우고 간 걸지도 모르지.
“선배는 읽으실 수 있죠?”
책을 훑어보는 레오나의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아이렌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엔 최대한 무덤덤하게 굴려 하는 주제에 이럴 땐 아이처럼 솔직해지다니. 넘쳐나는 지식욕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렌이 우습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답했다.
“뭐. 읽는 거 정도라면 얼마든지. 이 언어는 고대어 중에서는 꽤 알려진 편이니까. 짧은 문장은 당장 해독되지만, 책 전부를 읽어내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다.”
“굉장하네요, 선배.”
“하, 낯간지러운 소릴 하는군.”
“그래도 정말 굉장한걸요. 누가 그랬는데, 사람은 다양한 언어를 알수록 세계가 넓어지는 거라고 했거든요. 지식의 폭이 넓어지는 걸 넘어서, 갈 수 있는 곳과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거니까요. 선배는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영역까지 넘나들 수 있는 거잖아요. 그건 굉장한 게 맞아요.”
그런 식이라면 별별 언어를 다 알고 있는 러기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으리라. 물론, 실제로도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갈 녀석이니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듣기 싫은 말은 아니다. 유능하다는 말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다소 뻔해 보일지라도 진심을 담은 찬탄에 입꼬리가 조금 더 위로 올라가는 레오나였다.
“어떤 주문들이 있어요? 그거라도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용기를 낸 걸까. 아이렌은 슬쩍 눈치를 보며 레오나에게 부탁했다.
레오나 킹스카라는 제게 별로 이득이 될 거 없는 부탁을 들어줄 만큼 관대한 왕은 아니다. 심지어 강하고 부유한 그는 어지간해서는 거래에 응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원하는 게 있다면 그가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주거나 정말로 필요로 할만한 걸 내미는 수밖에 없었지.
아이렌은 그걸 모를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솔직하게 원하는 걸 요구하는 건, 상대에게 ‘원하는 거래 조건이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노련한 상대의 제안이 참으로 발칙하다고 느낀 레오나는 읽던 책을 덮어버렸다.
“수업료라도 내고 알려달라고 하지 그러나, 아이렌.”
“으음, 얼마면 되나요?”
“하, 됐어. 뭘 진지하게 반응하는 건지 모르겠군.”
아마 농담인 걸 알면서도 저러는 거겠지. 레오나는 그런 능청스러운 후배의 태도가 싫지 않았다. 그게 이 성실한 후배 나름의 농담일 테니까.
그래서, 자신은 이 부탁을 들어줄까 말까.
레오나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손익을 잘 재어 본 그는, 자신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했으니까.
아이렌은 소란스러운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순간에도 차분하게 대답을 기다릴 줄 알았으며, 넘치는 에너지로 쓸데없는 소음을 만들어 내는 일도 없었지. 곁에 둔다고 해서 기가 많이 빨리지도 않으니, 잠깐 옆에 세워놓는다고 해서 귀찮을 일은 없을 거다.
무엇보다, 여기서 제가 거절하면 이 호기심 덩어리가 어디로 가겠는가?
인간보다 아득히 오랜 역사를 알고 있는 어느 도마뱀 요정 왕자에게 가거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대 언어에는 기본 이상의 지식이 있는 스카라비아의 부사감에게라도 가면 곤란하다. 제가 얻는 이득보다도 무언가를 빼앗기는 손해에 더 민감한 레오나는 금방 적절한 보상을 찾아내어 아이렌에게 제시했다.
“그래, 일주일 정도 러기 녀석이 날 찾을 때마다 훼방 놓아주면 좋겠군.”
“훼방?”
“그래. 날 못 봤다고 거짓말하거나, 녀석이 날 찾으려고 할 때마다 붙잡아 두는 거야.”
의도적으로 입을 다무는 일이 있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아이렌에겐 이건 꽤 힘든 조건이겠지. 다른 이라면 진작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아이렌의 대답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도와주지 않는 정도라면 할게요.”
그래. 그거면 됐다. 그게 이 계집애에게 있어서 최선일 테니까.
코웃음을 친 레오나는 다시 책을 펼쳐, 고대 주문이 적혀있는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그래, 어디 보자.”
1학년인 아이렌에겐 분명 용을 써도 해독할 수 없는 주문들이겠지만, 아마 성적이 우수한 3학년 정도라면 이런 문장들은 몇 시간이면 해독해 낼 수 있겠지. 그리고 레오나는 취미로 고향의 석판 속 고대 언어를 해석해 보던 사람이니, 이 정도는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느리게 눈동자를 굴리며 주문과 그 밑의 설명을 읽은 레오나는 검지로 문장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풍요를 비는 주문이다. 풍년기원제 같은 때에 쓰였지. 실제로 식물 생장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군.”
“헤에.”
“그 밑에 이건 노화를 늦추는 주문. 장생종들로부터 전해 받은 주문이라 하지만, 속도가 늦춰지기만 할 뿐 멈춰지지는 않았다는군.”
“과연. 뭐든 영원한 건 없다는 거군요.”
어차피 제가 사용할 수는 없는 주문이기 때문일까. 아이렌은 어른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귀를 열고 고개만 끄덕인다.
아, 역시 이 녀석은 부산스럽지 않아서 좋다. 시끄러운 건 오직 머릿속뿐이지. 신중함과 대담함, 냉담과 이상(理想), 현명함과 고집스러움, 그리고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하나로 뒤엉겨 날뛰는 그 머릿속 말이다.
말은 잘 들어도 여러모로 시끄러운 제 기숙사 녀석들과 말도 안 듣고 시끄럽기까지 한 조카의 얼굴까지 차례대로 떠올린 그는 제 다음 말만을 기다리는 아이렌을 흘끔 훔쳐보곤, 또 다른 문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건…….”
잠깐 목소리를 죽인 레오나는 갑자기 얼굴 사이의 거리를 좁히더니, 현대 언어로는 발음도 힘든 그 주문을 직접 소리 내어 귓가에 속삭였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달콤한 저음에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선 아이렌은 황급히 고개를 뒤로 빼며 귀로 제 손을 가렸다.
“……그, 그건 무슨 주문이에요?”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져 허둥지둥하는 아이렌의 모습에 웃음이 터질 뻔한 레오나는 소리 죽여 기쁨을 삼키고,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안타깝게도 뜻까지 알려면 추가 결제가 필요하다만.”
“예? 이, 이거 사기 아녜요? 아까까진 그냥 알려줬잖아요.”
“사기라니. 이거 섭섭하군. 기껏 읽어줬더니. 모든 서비스는 한도가 있다고.”
사실은 추가 결제를 해도 알려줄 생각은 없다. 알려주고 싶지 않으니까.
‘상대방의 영혼과 제 영혼을 잇는 주문. 효과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하지만, 누군가는 주문이 제대로 먹히기만 한다면 상대는 어떤 의미로든 제 곁에서 머무르게 된다고 전해진다.’
그런 낯간지러운 진실을, 제가 왜 알려주냐는 말이다. 이 여자가 어떤 형태로든 제 무리에 있기를 바란다는 욕망을, 굳이 당사자에게 알려줄 이유가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 이상의 대금은 네 능력으로는 지불할 수 없을 거 같군. 아이렌.”
레오나는 이 이상 어울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책을 덮은 후, 고서(古書)를 아이렌의 품에 떠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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