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Reverse Pride

사바나클로 기숙사 드림

 

공휴일이라 아예 수업이 없는 금요일 오후.

모처럼 생긴 여유를 즐기기 위해 교과서와 필기 노트 대신 얼마 전에 산 책을 읽어보고 있던 아이렌은, 그림과 고스트의 연락을 받고 게스트 룸으로 향했다.

 

“레오나 선배, 언제 오신 거예요?”

 

방에 처박혀서 이어폰까지 낀 후 독서하고 있어 손님이 온 줄도 몰랐다.

멋쩍어하며 묻는 아이렌과 달리 그림이 문을 열어준 덕에 당당하게 안에 들어온 레오나는 소파에 드러누운 채 대꾸했다.

 

“내가 찾아오면 안 될 장소에 온 건가?”

“아뇨, 그게 아니라……. 오실 줄 알았다면 청소라도 해 뒀을 텐데.”

“별로 치울 것도 없어 보이는데.”

 

마치 제 방인 것처럼 편히 누워있는 레오나는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대로 고물 기숙사의 게스트 룸은 그리 지저분하지 않았다. 결벽증이 있는 이가 본다면 이것저것 지적할지 몰라도, 적어도 먼지가 풀풀 날리거나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엉망이진 않았다.

너무나도 편안해 보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이렌은 할 말을 고르는지 눈만 깜빡이더니, 이내 다소 엉뚱한 질문부터 꺼냈다.

 

“시원한 게 좋으세요, 따뜻한 게 좋으세요?”

 

여기 온 이유나 연락을 안 한 이유를 물을 줄 알았는데, 손님 대접부터 하는 게 우선이라는 건가.

레오나는 참으로 예의 바른 반응에 눈썹을 까딱이더니, 선의가 무색할 정도로 무관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아무거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아무거나 내올 거예요.”

“……시원한 거 아무거나.”

 

사실은 정말 아무거나 내어 와도 상관없다. 마음에 들면 마시면 되고, 성에 차지 않으면 입에 대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굳이 저렇게 한 번 더 묻는다면, 제 대답 여부에 따라서 엄청난 게 나올 수도 있으니 선은 그어주는 게 좋겠지. 아이렌은 대단히 상식적인 사람으로 보이며 실제로도 그런 편이지만,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이 학교의 말썽꾸러기들 조차 기겁할 기행을 하지 않던가.

조금 더 성의가 들어간 대답을 들은 아이렌은 금방 부엌으로 가더니, 냉장고에 있던 캔 음료수 두 개를 꺼내 돌아왔다.

 

“무슨 일이세요?”

 

소파 옆 1인용 의자에 앉아 제 몫의 음료수를 딴 아이렌은 마시며 이야기하자는 듯 레오나에게 나머지 캔을 내민다.

레오나는 팔을 뻗어 파인애플과 망고가 그려진 캔을 확인하더니, 마실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당분간 신세 좀 지도록 하지.”

“예?”

“빈방은 많지 않나? 정 아니라면, 여기서 자도 상관없고.”

 

여기라 하는 건, 게스트 룸을 말하는 건가.

고귀한 몸이 이런 응접실에서 잔다고 하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그는 식물원에서도 잘만 누워 자던 사람이었으니 소파 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아이렌은 뜻밖의 요청에 고민하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세 가지만 물어도 되나요.”

“뭐지?”

“첫 번째. 당분간이라고 하면 대강 며칠 정도 인가요? 추정치라도 말씀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글쎄다. 홀리 데이가 끝날 때까지?”

 

그러면 오늘을 포함해 일요일까지, 3일 정도인가. 그 정도면 부담이 되진 않는 건지 아이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오자 경계심을 늦춘 레오나는 얼른 답변을 끝내고 싶은지 상대를 재촉했다.

 

“두 번째는?”

“식사는 세 끼 다 드시나요?”

“…….”

 

이건 왜 묻는 거지. 설마, 머무는 동안 제가 모든 걸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레오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상대는 가족도 기반도 없는 다른 세계의 이방인임을 떠올렸다. 최소한의 생활비는 크로울리가 해결해 주겠지만, 그 외 비용은 아르바이트 같은 걸로 충당할 테니 입이 늘어난 걸 부담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나.

자신은 가난을 모르지만 제 바로 옆에서 쫑알거리는 후배는 대단히 돈에 민감했기에 저런 생각도 할 수 있었던 레오나는, 제 교복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그걸로 뭐라도 사 와서 방에 넣어주던가.”

“아니, 방에 넣어달라니. 제가 무슨 간수도 아니고……. 그리고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아, 그런가? 어쨌든. 부모처럼 일일이 챙길 필요 없어. 필요한 게 있다면 시킬 테니.”

 

누군가는 옆에서 살뜰히 시중들어 주는 걸 좋아할지 몰라도, 레오나는 그런 건 딱 질색이었다. 그에게 있어 최고의 시종은 부를 때 빠르게 와서 일을 처리해 주는 사람이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옆에 늘 붙어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더 물을 게 있나?”

 

이 이상 더 물을 건 없지 않나.

레오나는 그리 생각했지만, 아이렌의 의외성은 그가 방심한 사이에 이를 드러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어쩐지. 왜 안 묻는가 했더니.

올 게 왔다고 생각한 레오나는 원래라면 가장 먼저 제게 왔을 질문을 능숙하게 회피했다.

 

“꼭 알아야 하나?”

“궁금하니까요. 혹시 제가 도왔다가 곤란한 일에 휘말리진 않을까 걱정이고요.”

“러기 녀석에게 한마디 듣긴 하겠다만, 그 외엔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것조차도 네가 모른 척하면 엮이지 않을 수도 있고.”

 

‘아, 그 녀석은 네게 한마디도 못 하려나.’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레오나가 어깨를 으쓱이자, 주스를 홀짝이던 아이렌이 슬쩍 그를 노려보았다.

후우, 하고 작게 한숨 쉰 아이렌은 반쯤 남은 주스를 내려놓았다.

 

“제가 거절한다고 해서 나갈 건 아니죠?”

“잘 아네.”

“뭐, 애초에 선배는 통보만 하시면 되잖아요. 강자는 약자에게 부탁이나 애원을 할 이유가 없죠.”

 

어찌 보면 비굴한 말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쪽보다는 이렇게 지극히 현실적인 쪽이 나으리라. 야생은 냉정하며,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이 없는 이들은 자신 나름의 생존법을 찾아야지 맹수에게 덤비면 안 되는 법이니까.

 

“점심은 드셨어요?”

 

아직 내용물이 남은 캔을 챙겨 일어난 아이렌은 출입문으로 향하며 묻는다.

생각보다 더 간단하게 숙박 허락을 받자 김이 샌 레오나는 질문에 대꾸하는 대신 제 쪽에서 새로운 질문을 했다.

 

“넌 아무나 와서 재워달라고 해도 재워주나?”

 

그 질문의 의도는 명백했다.

‘왜 이렇게 쉽게 제 부탁을 들어주었냐’가 아니라, 말 그대로 ‘다른 놈들이 와서 네 거처에서 자겠다고 해도 허락할 거냐’는 뜻이었지.

말속의 진의를 분명 알아챘을 텐데도 짐짓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인 아이렌은 대단히 상식적인 반응으로 대응했다.

 

“누가 며칠이냐 머무느냐에 따라서 다르지 않을까요. 이유도 들어봐야겠고요. 범죄라도 저지른 거라면 곤란할 거 같거든요.”

“어처구니가 없군. 위기감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저런. 누가 허튼짓을 하려고 하면 우리 착한 고스트들과 제 파트너가 가만히 안 있을걸요. 무엇보다 전 돈 되는 것도 가지고 있지 않거든요.”

 

과연 그럴까. 그 ‘착한 고스트’와 ‘파트너’는 이 대화가 어찌 흘러가는지 들리지도 않을 장소에 몸을 피하고 있지 않나.

그리고 아마 여기에 자러 오는 놈들이 있다면, 그놈들의 목적은 대부분 금전적인 게 아닐 터.

레오나는 이 학교에서 단 하나뿐인 희소품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이렌은 여름의 초목보다 짙은 녹색 눈동자가 부담스러운 건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웃었다.

 

“그리고 본인도 재워달라고 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요?”

“내가 ‘아무나’인가?”

“……그건 아니긴 하죠.”

 

사람마다 관계를 정의하는 기준은 다르다지만, 자신들의 사이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건 참으로 양심 없는 짓이리라.

비록 도덕관념이 다른 이들에 비해 다소 독자적인 면이 있다 하는 아이렌이라도, 보편적 상식은 잘 알고 있었다. 괜히 제 뺨을 손등으로 훔친 그는 아까 무시당한 질문을 다시 입에 올렸다.

 

“그래서, 점심은요?”

“주면 먹도록 하지.”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그의 대답은 다시 성의를 잃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렌은 그 티 나는 차이를 불쾌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신기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지?”

“아니, 저희 남동생이 생각나서요. 남자애들은 말하는 게 비슷한가?”

“…….”

 

아이렌의 남동생이라면, 분명 자신보다 어리다는 뜻이지 않나. 애초에 아이렌은 자신보다 4살 어리니, 못해도 5살 연하겠지.

즉. 아직 새파랗게 어리다는 소리인데, 대체 뭐가 비슷하다고 하는 건가.

상대가 자신을 아이 취급한다고 생각한 레오나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지자, 아이렌은 무어라 해명하기보다는 자리를 뜨는 걸 선택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보아하니, 제가 잘못한 건 아는 모양이다. 얼른 꼬리를 내리는 아이렌의 태도에 노여움을 가라앉힌 레오나는 열린 문틈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 대화를 다 들었던 걸까. 문밖을 서성거리는 고스트들은 눈치만 볼 뿐 게스트 룸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적어도 자기 기숙사 안에서 만큼은 대장 노릇을 하고 있나 보군.’

 

만약 고스트들이나 그림에게 얕봐지고 있다면, 방금 대화를 듣고 ‘왜 상의 없이 손님을 받느냐’라고 한마디 들을 수도 있을 텐데. 다들 아이렌에게도 제게도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아이렌이 먹이사슬의 아래층에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겠지.

역시, 겉보기엔 만만해 보여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애초에, 보통내기라면 이 악동들 뿐인 학교에 적응하지도 못했을 거다.

 

“선배, 식사하세요.”

 

몇십 분이나 지났을까. 아이렌은 따뜻한 비프스튜를 들고 게스트 룸으로 돌아왔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요리를 했을 리는 없을 테니, 이건 아마 본인들이 먹고 남긴 점심이겠지. 하지만, 남은 거든 뭐든 먹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무엇보다 아이렌은 손재주가 나쁘지 않으니까 맛이 형편없지도 않겠지.

레오나는 고소한 향이 풍기는 비프스튜에 이끌려 드디어 상체를 일으켰다.

 

“방 말인데요, 제 방 바로 옆방이 그나마 깨끗한데 거기서 주무실래요?”

 

음식만 가져다 주고 돌아갈 생각이었던 건지, 아이렌은 도로 앉지 않고 선 채로 말을 걸었다.

자신도 모르게 상대와 빈 자리를 한 번 번갈아 본 레오나는 금방 시선을 수저로 옮겼다.

 

“누워서 잘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어.”

“그러면 다행이고요. 식기는 나중에 치우러 올게요. 입에 맞으시면 좋겠네요.”

 

필요한 일만 하고 자리를 뜨는 아이렌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보아하니, 레오나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니 괜히 거슬리게 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용히 자리를 뜨는 아이렌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레오나는, 그제야 주스 캔을 따서 마른 목을 축였다.

 

‘귀찮게 이것저것 묻거나 들러붙지 않는 건 좋다만…….’

 

저렇게까지 거리를 둘 줄이야. 서운함 같은 웃기지도 않은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인제 와서야 내외를 하는 게 우습지 않나.

러기를 피해 급히 나오느라 배에 든 게 없는 레오나는 제 기분이 묘한 이유를 곱씹기보다는 따뜻한 스튜를 입에 흘려 넣었다.

 


 

아이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인지, 저녁이 되도록 고물 기숙사에 찾아오는 사바나클로 학생은 없었다.

아니, 어떤 손님도 오지 않는 걸 보면 애초에 찾아오겠다고 한 이들을 모두 내친 걸지도 몰랐지. 평소에는 옥타비넬 녀석들이나 1학년 녀석들이 문이 닳도록 드나드는 곳이 이곳이지 않던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탓에 담화실에서 아이렌이 가져다준 콘솔 게임기용 체스로 시간을 죽이던 레오나는 어두워진 창밖을 확인하고 제게 준비된 방으로 향했다.

 

“벌써 주무시러 가세요?”

 

아무래도 옆방이다 보니, 움직임이 보였던 걸까.

방에 들어가 문을 살짝 열어놓고 책을 읽고 있던 아이렌은 어슬렁거리는 그림자를 눈치채고 말을 걸었다.

 

“넌 안 졸리냐.”

“아직 밤 11시인데요.”

“…….”

 

대체 이 계집애는 몇 시에 자는 거지. 휴일이 아니라, 평소에도 이 시간엔 깨어나 있는 건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밤 11시를 낮 11시처럼 대하는 후배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 지은 레오나는 방향을 틀어 아이렌의 방으로 향했다.

 

“뭘 하고 있지?”

 

바로 옆에 선 레오나 때문에, 커다란 그림자가 제 머리 위로 드리운다.

아이렌은 조명을 가리는 그림자 탓에 글을 읽을 수 없어, 책을 반쯤 접은 상태로 표지를 보여주었다.

 

“선배도 읽어보실래요?”

“됐어. 난 잘 거라서 책을 읽을 시간은 없거든.”

 

표지만으로 내용을 파악할 수 없지만,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이뤄진 색 배합과 불길한 제목을 보아하니 스릴러나 추리 계열 소설이겠지. 이 겁쟁이가 늦은 시간에 읽고 있다면 호러 소설은 아닐 테고.

어찌 되었든, 자신은 잠을 포기하면서까지 우중충한 이야기를 읽고 싶진 않다. 레오나가 단호히 거절하고 자러 가자, 아이렌은 그를 붙잡지 않고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인사할 뿐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선배.”

“아, 그래.”

 

예의상으로라도 ‘너도 잘 자라’라고 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는 최소한의 대꾸만 할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부터 매지컬 시프트 연습을 위해 일어나는 습관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어제는 낮잠을 좀 오래 자서 그런 걸까. 레오나는 굳이 일찍 일어날 일이 없는데도, 아침 해가 지평선에 걸쳐져 있는 시간에 눈을 떴다.

 

‘몇 시지?’

 

허전한 방을 채우는 어슴푸레한 빛과 서늘한 공기를 보아하니, 아직 아침보다는 새벽에 더 가까운 시간인 모양이다.

하여간, 이래서 습관이란 무섭다. 원래라면 이 시간에 사바나클로에 있는 연습장으로 향했을 걸 아는 레오나는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하지만 이왕 일어났다면, 배라도 채워야지. 부엌에 가면 뭐라도 있을 걸 아는 레오나는 방을 나섰다가, 문이 굳게 닫힌 아이렌의 방 앞에 멈춰 섰다.

 

분명 어제 제가 자러 갈 때까지만 해도 문이 열려있었는데. 자기 전 닫은 것인가.

 

방 안에 있는 게 다른 이였다면 어찌 되어도 좋았을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신경이 쓰인다. 레오나는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차가운 복도에 서 있다가, 결국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

 

두 사람 몫의 숨소리만 들리는 방 안에는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잠든 그림과 이불을 반쯤 걸치고 자는 아이렌이 있었다.

침입자가 온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잠든 태평한 마수와 홍일점의 모습에 자신까지 맥이 풀린 레오나는 옆으로 몸을 웅크린 채 자는 아이렌에게 다가갔다. 플로이드가 부르는 별명에 걸맞게, 마치 새우처럼 구부정하게 누워 자는 아이렌은 웬만해서는 깨어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긴장감이 없는 건지, 아니면 어찌 되든 좋다고 생각하는 건지.’

 

바로 옆방에 외간 남자가 자는데 문도 잠그지 않는다니. 만약 자칭 상냥한 학원장이 이 사태를 알게 되면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미 쓰러질 짓을 좀 많이 한 것도 같긴 하지만……. 중요한 건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거 아니겠나.

슬쩍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새까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평소 단정하게 땋아 다닐 때는 티가 나지 않았지만, 이렇게 보니 참으로 숱도 많고 긴 것이 빌이 신경을 쓰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선배?”

 

최대한 조용히 있는다고 입을 다물었지만, 역시 인기척이 느껴진 걸까. 잘 자고 있던 아이렌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자신을 올려다본다.

하지만 완전히 정신이 든 것은 아닌지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는 ‘으음’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이다가, 느릿느릿한 음성으로 질문했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네가 늦잠 자는 게 아닐까 싶다만.”

 

사실은 제가 일찍 일어난 거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이 빈틈 없는 녀석을 놀려먹겠나.

레오나는 기회를 잘 노려 사냥감을 손으로 굴렸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렌은 농담에 맞장구를 칠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답을 듣고 나서도 흐릿한 눈으로 레오나를 바라만 보던 아이렌은 제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손을 붙잡더니, 그대로 체온이 높은 손등에 뺨을 비볐다. 부드럽고 말랑한 살덩이가 피부에 닿자 저도 모르게 뜨거운 숨을 삼킨 레오나는, 제 손에 매달리듯 머리를 비비는 상대를 말리지 않았다.

 

“아이렌.”

 

속삭이듯 부른 이름에, 도로 잠들기 직전인 아이렌이 희미하게 웃는다. 당연하지만 움켜쥔 손은 놓아주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 꽉 잡은 것도 아닌데 상대의 손을 떨쳐 낼 수 없는 레오나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가만히 있다가, 그대로 아이렌의 옆에 몸을 뉘었다.

 

“……하아.”

 

어제는 그리 거리를 두더니. 오늘은 이리 귀찮게 굴다니. 어느 쪽이 진심인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어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는 손을 내버려 둔 레오나는 배를 채우는 걸 관두고 눈을 감았다.

 


 

그 시간, 사바나클로 기숙사.

아침 운동을 위해 일찍 일어난 잭과 레오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한 숨도 자지 못한 러기는, 담화실에 나란히 앉아 연락이 두절된 채 돌아오지 않은 레오나의 행방을 추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물 기숙사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거져?”

“예. 저도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정황상 가능성이 있다 봅니다.”

 

잭이 이렇게 말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오후. 에이스와 듀스는 고물 기숙사로 가 아이렌과 게임을 하려고 했지만 방문을 거절당했다고 했다. 듣자 하니, 기숙사 대청소 중이라 손님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나 뭐라나. 하지만 다른 기숙사 1학년들……. 예를 들어 같은 영화연구부 소속인 오르토가 동아리 관련 일로 얼굴을 보겠다고 요청한 것도, 사과를 가져다주겠다는 에펠의 방문도 거절했다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아이렌은 고작 대청소 같은 이유로 사람을 들이고 싶지 않은 게 아닌 듯 보였다.

‘으음.’ 잭에게 어제 1학년 학생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러기는 팔짱을 낀 채 침음 했다.

 

“아이렌 군은 정직한 편이지만,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렇죠. 선의의 거짓말이라면 할 테고, 아마 레오나 씨를 감싸려고 했다면…….”

“아, 정말! 레오나 씨를 감쌀 필요는 조금도 없는데! 하여간 아이렌 군은 가끔 너무 물러져서 큰일임다!”

 

애초에 지금 레오나가 본인 기숙사를 떠나 엉뚱한 곳에서 자는 이유가, 언제나처럼 고작 귀찮은 일을 회피하고 싶어 저러는 건데. 아무리 제가 아끼는 이들에겐 물러지는 아이렌이라지만, 이런 일까지 봐주는 건 모두에게 악역향을 끼치는 일이지 않겠나.

러기가 머리까지 헝클이며 절규하는 걸 본 잭은 그 고통을 공감한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가볼까요? 아니면, 역시 먼저 연락을?”

“정말 레오나 씨를 숨겨주려고 하는 거라면 연락해봐야 오면 안 된다는 말만 할 텐데여? 아니면, 레오나 씨가 도망갈 시간을 주거나 아예 다른 곳에 숨길지도 모르고…….”

 

부정하고 싶지만, 이게 맞다. 잭은 제가 너무 정직한 행동을 하려 했음을 자각하고 입을 닫았다.

‘애초에, 내가 왜 이런 것까지 신경 쓰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속으로 한탄을 이어간 러기는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이 휴일들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얼른 가자고여!”

“예, 앞장서겠습니다!”

 

그렇게 사바나클로 기숙사로 나온 두 사람은, 레오나를 검거하기 위해 바람과 같은 속도로 고물 기숙사로 향했다.

아직 학교에 있는 대부분은 잠들어 있을 시간. 휑한 거리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두 사람은 숨을 고른 후, 절제된 노크로 자신들이 왔음을 알렸다. 하지만 아직 모두 잠든 시간인지, 문을 열어 준 것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손님이네. 어서 와.”

 

스르륵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고스트였다.

러기는 반투명한 유령 몸 너머로 보이는 어둑한 복도를 살펴보며 물었다.

 

“혹시 레오나 씨 여기 있슴까?”

 

고스트는 대답 대신 스르륵 자리를 비킬 뿐이었다.

‘역시나!’ 말보다 확실한 행동에 잭의 예상이 맞았음을 눈치챈 러기는 믿음직한 후배와 함께 내부를 살피러 들어갔다.

 

“잭 군, 1층을 살펴 주세여. 저는 2층으로 가겠슴다.”

“예!”

 

이왕 둘이서 온 거라면 함께 다니는 것보다는 각자 찾아보는 게 효율적이겠지. 반드시 레오나를 찾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2층으로 올라간 러기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을 찾다가, 문이 열려있는 방을 발견했다.

 

“아.”

 

이 방은, 분명 아이렌의 방인데.

여기 있을 리는 없지만, 문이 열려있으니 일단 살펴보긴 해야겠다. 러기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슬쩍 방 안으로 들어가 레오나를 찾아보았고…….

 

“……!”

 

둘이서 쓰기엔 좀 좁아 보이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 방의 주인과 제 기숙사 사감을 발견하고 얼어버렸다.

이미 구석에 잠든 그림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러기는 머리에 열이 올라 머뭇거리다가, 이내 이성을 되찾고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이거, 그. 아니겠지?’

 

여긴 그림도 함께 쓰는 방이고, 둘 다 옷도 멀쩡하게 입고 있지 않나. 무엇보다 무슨 일이 있었다면 문이라도 닫았겠지.

얼굴의 열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한 러기는 갑자기 다른 의미로 머리가 뜨거워져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이 사람이 진짜…….’

 

자기는 선생에게 혼날까 봐 종일 상대를 찾아다녔는데, 당사자는 팔자 좋게 자고 있다니. 그것도, 학교 홍일점이랑 사이좋게 붙어서 말이다!

 

“레오나 씨.”

 

아이렌까지 깨울 생각이 없는 러기는 슬쩍 손을 뻗어 레오나의 등을 두드린다.

그리 큰 부름도 아니고 거친 손길도 아니었지만, 레오나는 깊게 잠들지 않았던 건지 금방 눈을 떴다.

낯선 인기척이 누구인지 확인한 레오나는 질렸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한숨 쉬며 대꾸했다.

 

“뭐야.”

“뭐야, 가 아니죠! 대체 여기서 무슨…….”

“쉿.”

“……아.”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러기는 급히 입을 닫았다. 아무리 이 상황에 화가 난다고 해도, 제 고함에 아이렌이 깨는 건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쯧.’ 급히 제 입을 틀어막은 러기를 보며 혀를 찬 레오나는 스르륵 침대에서 빠져나오다니, 상대를 끌고 복도로 나섰다.

목소리가 새어 들어가지 않게 방문을 닫은 레오나는 늘어지게 하품부터 했다.

 

“결국 찾아왔군. 이렇게 끈질긴 줄은 몰랐는데.”

“당연히 끈질길 수밖에 없져. 바르가스 선생님이 레오나 씨가 직접 와야 한다고 했잖아여?”

“쳇. 누가 가도 아무 상관도 없을 일에 왜 꼭 주장이 오라고 하는 건지.”

“그건 직접 가서 따져 주세여.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이런 귀찮은 짓 하지 않고 제가 갔다 오고 싶었으니까여.”

 

기분 탓일까. 어쩐지 오늘따라 러기가 제게 더 짜증을 부리는 거 같다.

레오나는 속이 훤히 보이는 러기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대 쪽에서 먼저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던 생각을 꺼내 보였다.

 

“아이렌 군 방에서 잤슴까?”

 

이 녀석. 나를 웃겨 죽이려는 건가.

솔직한 질투에 결국 소리 죽여 큭큭거린 레오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 와중에 그게 신경 쓰이나?”

“왜요? 물어볼 수도 있져.”

“아, 그래? 만약 그렇다고 하면 다음엔 네가 와서 재워달라고 할 건가?”

“절 뭘로 보는 검까?!”

 

러기는 기겁하며 손을 젓지만, 새빨개진 얼굴을 보아하니 아예 그럴 생각이 없는 건 아닌 듯 보였다.

하여간, 이런 놈들이 득실거리는 학교에서 정작 당사자는 얼마나 태평한지. 흔쾌히 자신을 재워주고 옆방을 내어준 태평한 홍일점의 모습을 다시 곱씹은 레오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니까, 전에 내가 준 카드로 아침이나 사 와라. 저 녀석이랑 그 시끄러운 털 뭉치 몫까지.”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지, 저건 또 무슨 소리지.

애매한 레오나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린 러기는 더 캐물으려다가, 더는 입씨름하기 싫다는 듯 심부름에 관해서만 되물었다.

 

“아침 식사는 제 것도 사와도 되겠져?”

“그래. 잭 녀석 것도.”

“……어떻게 알았슴까?”

“하, 뻔하지.”

 

뭐든 다 꿰고 있다는 듯 구는 레오나의 태도가 얄밉지만, 한 편으로는 이 정도 머리는 되어야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너무 잘났기에 반역할 생각도 들지 않는 위대한 사감님을 슬쩍 째려본 러기는 아래층으로 향하며 두 사람에게 동시에 말을 걸었다.

 

“먹고 나면 돌아가야 함다. 알겠슴까, 레오나 씨? 잭 군! 레오나 씨 여기 있슴다. 감시 좀 부탁해여!”

 

‘앗, 예!’ 아래층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참으로 우렁차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그 대답은, 평소 사바나클로의 위계질서와 단합력을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았다.

역시, 다소 귀찮게 굴 때가 있어서 그렇지 윗사람 말은 잘 듣는 녀석들이다. 제가 이끄는 무리가 그리 얼빠진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자 달콤한 잠에서 깬 것도 조금은 용서가 가능해진 레오나는 담화실로 향하려다가, 제 손으로 닫은 방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 딱 저 녀석만 제 무리에 들어와 준다면. 그러면 정말 완벽할 거 같은데.

 

누구든 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의 무리에도 속하려 하지 않는 아이렌의 성정을 아는 레오나는 어디 두고 보자는 듯, 코웃음을 한 번 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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