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극

수신자 없음

세븐틴 아포칼립스 합작 IF:Run to you 투고 글 수정 업로드

극단 by -

재난 상황에서 라디오는 다른 전자기기가 사용되기 어려운 환경에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써 중요하게 여겨졌다. 특정 주파수에 맞춰놓으면 송신되는 재난 상황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그렇기에 사람들은 라디오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곤 했다. 물론, 구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도 쓰지 않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저 어딘가에 있을 기계를 찾기만 하면 되었다.

라디오를 얻게 된 건 찬이 기억이란 게 남기 시작한 어린 시절 때였다. 그가 제 형들과 함께 밖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건이 있는지 찾던 여느 날과 다를 게 없던 하루, 2층 정도 되는 건물이 모인 곳을 찾아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들은 다른 건물에서 특별한 물건을 찾지 못하고 거의 빈손으로 세 번째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불편한 마스크를 만지작거리던 찬은 둘째 형을 바라보았다. 그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는지 표정이 굳어져 있었지만, 석민과 찬 모두 차마 그것을 벗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게, 평범한 사람이라면 숨도 쉬지 못할 공기 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유해 물질이 가득한 공기 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아도 됐다. 정확히는 석민은 일정 시간—정확히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동안 마스크가 없어도 괜찮았고, 찬은 아예 필요 없었다. 그런데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이유는 첫째 형이 신신당부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는 절대 마스크를 벗지 말라고. 너희가 마스크를 벗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티 내지 말라고. 석민과 찬 모두 형의 말을 의심하거나 따르지 않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형의 말을 따르긴 했지만, 이유를 알지 못해 생기는 의문은 늘 품고 있었다. 그 의문은 계속해서 입 밖으로 나오려고 했고, 그래서 둘은 그 마음을 꾹 억누르며 제 형에게 묻는 말이 여러 개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형, 잠깐 마스크 벗어도 돼? 겨우 꺼낸 질문은 바삐 움직이던 지훈의 눈동자가 둘에게로 향하게 만들었고, 조용히 하라는 듯한 그의 손동작에 끝맺어지지 못했다. 지훈은 재빨리 창문과 문을 잠그고 외부에서 내부를 볼 수 있을 만한 부분을 다 커튼이나 먼지 쌓인 천 쪼가리를 끌어다 죄다 가리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지금 그가 혹시 모를 시선으로부터 자신들을 가리기 위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채고 그것을 거들었다. 물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아는 것과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숨겨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형이 왜 자신들을 가리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켜볼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자신들 외의 사람 기척조차 느낀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큰형은 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계속해서 주변을 의식했고, 동생들을 무언가로부터 감싸려는 듯이 행동했다. 그들은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둘이 성장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생긴 깊은 생각은 결국 형이 하는 이런 행위들이 평범한 행동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 동시에 형이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까지 눈치채버렸고, 묻지도 못한 채 지금 형을 불안하게 만들 무언가의 시야를 전부 차단하는 데에 힘쓸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창이 모두 가려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스크를 벗어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신경 못 쓰고 있었네. 진작 말하지.

석민과 찬은 그의 허락이 떨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마스크를 벗고 숨을 편히 내쉬었다. 아냐, 밖에 많이 다녀야 하는데 오래 쓰고 있을 줄도 알아야지. 형은 엄청 잘 쓰고 있잖아. 나도 형처럼 잘 쓰고 다니고 싶어. 그는 한 마디씩 덧붙이는 동생들을 눈에 담다가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는 그들과 다르게 제 마스크를 단단히 고정한 뒤, 잠깐 쉬고 있으라며 혼자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은 쉬어야 할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당장 제 형을 앉혀다 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꼼짝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예상했기 때문에 그들은 원래도 쉴 생각 없던 몸을 바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석민은 찬에게 자신이 큰 방을 맡을 테니 작은 방을 맡아달라 부탁했고, 찬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까운 작은 방 한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없이 방치된 인공물들이 그렇듯 방은 먼지가 잔뜩 쌓이고 물건이 어지럽게 놓여 있어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돌아다녔다. 그는 서랍의 칸마다 쓸만한 것이 없나 열어 보기도 하고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주워서 만져 보기도 했지만, 특별히 필요해 보이는 것이 없어 다른 방을 찾아보아야 하나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그의 시야에 비교적 상태가 멀쩡해 보이는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입김을 불고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니 어떤 기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 듯한 상자였다. 하지만 처음 보는 모양이었고, 사용해 본 적 없는 것이었기에 물건의 정체에 관해선 형들이 보는 게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알 수 없는 기기를 양손으로 안아 든 채로 급히 형들에게 달려갔다. 형, 이거 뭐야? 석민은 서랍을 죄다 열어 살피다 말고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제 동생의 품에 있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뱉어냈다.

그거 라디오 아니야?

라디오? 찬은 제 품 안의 기계로 시선을 옮겼다. 이 기계의 이름이 라디오라는 건가? 이전에 그는 형에게 전파를 통해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수단들이 대부분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들었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했던 휴대전화라는 무선통신기기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배웠다. 그런데 작은형은 제 쪽으로 다가오더니 다이얼을 만지작거리며 이거 있으면 뭐라도 들을 수 있겠다며 웃고 있었다. 형, 이거로 뭘 들을 수 있는데? 글쎄, 형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아마 방송? 원래 재난 상황에 라디오로 방송해 주거든. 물론 그것도 사람이 있을 때 얘기지만…… 그의 손동작에서 낯선 것을 대하는 머뭇거림이 없는 것을 눈치챈 찬은 라디오를 두 형들만 사용해 봤던 것, 그러니까 자신이 세상에 나기 전이거나 까마득하게 어릴 때에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리라 판단을 내렸다. 전에 접한 적 있었다면 분명 형이 이게 무엇이고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알려주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찬은 이 기계가 쓸모 있고, 쓸 수 있길 바랐다. 형에게서 라디오를 가져가자는 말이 나오길 바랐다. 둘의 대화 소리를 들었는지 다른 방에 있던 지훈이 색이 바랜 표지와 내지의 공책 두 권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뭐 찾았어?

지훈이 형, 이거. 석민이 형이 라디오라는데. 이거 가져가도 되는 거예요?

찬은 곧바로 몸을 그에게로 돌려 라디오를 보여 주었다. 지훈은 찬에게서 그걸 받아 들더니 이리저리 돌려보며 상태를 살폈다. 찬은 괜히 시선을 내리깔고 제 옷을 만지작거렸다. 바라던 답이 오지 않을까 걱정돼서였다. 혹시 사용 못 할 것 같다고 하면 고쳐서 쓰면 안 되냐고 물어볼까 고민도 했다. 분명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찬에게는 꽤 길게 느껴졌던 잠시동안 대충 훑는 것 같으면서도 섬세하게 살핀 그는 동생에게 챙겨 가자는 답을 선물해 주었다.

라디오면 할 수 있는 게 많으니까. 상태 좋아 보이니까 제 기능 안 돼도 뜯어서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찬은 지훈과 라디오, 석민을 차례차례 바라보며 웃었다.

그렇게 가져온 라디오는 지훈이 이전에 미리 구해 두었던 배터리를 넣어 전원이 들어올 수 있게 만들었다. 지훈이 전원을 켜자 지지직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석민과 찬은 형이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하니 바뀌는 숫자에 집중했다. 숫자가 바뀔 때마다 소리가 끊겼다가 다시 나오는 게 반복됐다. 다른 소리는 없었다. 전파가 잡히지 않아 나는 잡음. 같은 소리를 수십 번 끊고 수십 번 듣는 것을 반복한 뒤에 지훈이 한숨을 내쉬며 라디오의 전원을 꺼버렸다. 기대는 안 했지만. 그는 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꾹 삼키며 고민을 시작했다. 앞으로 라디오를 쓸 일이 있을지, 있다면 제 동생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아니라면 어떻게 쓰는 게 좋을지……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민을 끊어낸 건 동생들의 목소리였다.

형, 어때? 쓸 수 있는 거야?

안 될 것 같아? 고장 난 건가?

지훈은 자신이 말이 없자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득 자신이 이렇게 굳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습이, 그리고 이 시간이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굳어 있는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저를 집중해서 쳐다보는 동생들을 보면 절로 지어지는 미소에 양손으로 둘의 머리를 잔뜩 헝클여 주었다. 아니, 잘 되는 거야. 지금 송신되는 게 없어서 그래. 석민과 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당연히 들리는 것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가 없었고 실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형을 보고 있으면 라디오를 켠 채로 기다리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니까, 자신들처럼 이곳에 지내는 어떤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둘은 주기적으로 라디오를 들었다. 물론 들리는 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기에 정확히는 라디오를 켜서 의미 없는 신호음을 자주 들었다고 정정하는 것이 옳았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은 설레는 일이었다. 주파수를 나타내는 화면에서 숫자가 이리저리 바뀔 때마다 신호의 잡음만 가득 찬 소리가 이어지는데도 설렜다. 사람이 멸종하다시피 한 세계에서 자신 외에, 같이 있는 형들 외에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전까지 찬에게는 이 장소에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이런 세상으로 바뀌기 전으로 돌아가는 일―물론 찬은 이전의 세상이 어땠는지 알지 못하기에 형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만 하고 있다―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일어나지 않을 일에 합리적인 기대를 갖게 되면서, 그는 작은 형과 함께 구름과 먼지에 가려져 조금 밝게 빛나는 원으로만 보이는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부터 저물 때까지 긴 시간을 라디오와 함께 보냈다. 지훈은 동생들이 무소식에 지쳐 하루이틀만에 관둘 거라고 생각했으나, 성실함과 끈기로 지지 않을 성격을 가진 둘은 며칠이 지나도 기다림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생긴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다가 석민은 찬에게 라디오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기 시작했다. 휴대전화가 있던 시절에는 휴대전화로도 라디오를 들을 수가 있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제가 어릴 땐 집에 작은 라디오가 따로 있었다고 했다.

가끔 혼자 방에서 있다가 밖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리면 나도 밖으로 나왔어. 그리고 라디오 가까이 앉아서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이랑 듣는 사람들이 보낸 이런저런 이야기, 음악에 담긴 이야기를 한두 시간 정도 들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던 것 같다며 덧붙이는 걸 들으면서 찬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는 형이 하는 이야기라면 뭐든 좋았지만, 그게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면 호기심 때문에라도 고개를 더 격하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매번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해 했고, 석민은 그에 응하듯 기억을 더듬어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줬다. 가끔 노래도 불러줬다. 어릴 때 지훈이 들려주던 자장가나 동요 말고는 노래를 들어본 적 없었던 찬은 눈까지 감고 경청했다. 이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평소처럼 라디오를 켠 채로 석민이 이야기를 하고, 찬은 그것을 듣고 있는 날이었다. 라디오에서 신호음 사이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둘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누군가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야기를 멈추고 급히 라디오로 시선을 돌리고 귀를 기울였다. 심장 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는데 신호음은 더 커서 명확하게 들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석민은 라디오 다이얼을 돌려 소리의 크기를 키웠다.

더스트……

더스트? 찬은 겨우 알아들을 수 있던 단어 하나를 되새겼다. 그 의미는 잘 모르지만 기억해 두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석민은 이 알 수 없는 소리를 둘만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지훈을 찾으러 몸을 일으키고, 급하게 형을 부르며 뛰어나갔다. 남은 동생은 형의 발소리를 제하고 뚝뚝 끊기는 말소리를 알아들으려고 모든 집중력을 라디오에 쏟아부었다. 어떤 말을 할지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는 듯 끊기는 빈도수와 시간이 길어지더니 다시 신호를 찾는 소리만 들려왔다. 석민에 의해 달려온 지훈은 찬에게로 다가왔다. 지훈은 소리에 예민했다. 가까워질수록 선명히 들리는 라디오가 내뱉는 소리가 급히 저를 부른 동생의 말과 달리 전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들릴 것이 없겠다고 판단 내린 그는 라디오 소리를 줄였다. 말소리가 들렸다고? 뭐라고 하는지 들었어? 석민은 소리가 하도 뭉개져서 누군가가 말하고 있다는 것도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찬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잘 안 들렸어요. 석민이 형이 형 데리러 간 후에는 더 안 들렸는데, 그전에 겨우 들은 게 더스트? 더스트라고 하던데. 이 한 단어만 듣고 나머지는…… 지훈은 미간을 좁혔다. 더스트라고 했다고? 그는 말없이 생각에 빠졌다. 더스트라고 말한다는 건 돔 안의 사람이거나, 적어도 돔 안의 지식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가장 문제인 건 자신이 목소리를 듣지 못했고, 들어도 누구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을 게 분명하기에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락 방식을 확실히 정하고 올 것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기에 확실히 하지 못한 것이 이런 난제가 되어 돌아왔다. 지훈은 후회했다. 그리고 제 어린 동생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주기 위한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지훈은 더스트가 밖의 먼지를, 그리고 지금 자신들이 있는 이곳을 뜻하는 단어라고 설명했다. 너희도 대충 알고 있었겠지만, 우리 말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어. 대충 만 명쯤 되려나. 그 살아남은 무리 중 하나가 전파를 통해 의사소통하고 있는 것 같아. 석민과 찬은 천천히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는 형을 바라봤다. 그 살아남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돔이라는 곳이 있어. 아까 말한 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은 죄다 고르고 골라진 사람들이야. 자신들을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다니는데, 진짜 뭐, 인간 멸종을 바라던 신들 사이에서 선택받고 살아남은,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더스트가 생길 줄 알고 있었으면서 자신들만 살겠다고 작은 돔 하나 만들어서 도망간 겁쟁이들이지. 그 사이에 자신들을 지키거나, 잘 살게 만들 머리 쓰는 평범한 사람들 조금까지. 나도 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어. 그 사람들이 말하는 일종의 기회였지. 그런데, 자기들만 살아남겠다는 터무니없는 말에 따르기가 싫더라. ……. 다행히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었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못 볼 꼴 평생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아서, 다시 밖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자고 했어. 그러려면 돔 밖에서 있을 사람이 필요했고, 같이 돔으로 들어갈 사람이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난 그런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나가겠다고 했지. 나 말리면서 자기가 가겠다고 계속 떠드는 거 막느라 힘들었다. 아무튼 난 그 사람들 도움 받아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돔으로 들어가지 않았어. 겨우 마련한 마스크 단단히 쓰고 밖을 돌아다녔지. 그러다 너희를 만났고. 지훈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로 제 손만 만지작거렸다. 이야기를 듣던 둘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지 못해서 말없이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다시 지훈이 말했다.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는 피해야 할 목소리인지, 반겨야 할 목소리인지 모르겠어. 확실히 하려면 다시 또 라디오 켠 채로 계속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전까지 밖에 돌아다니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 같고. 이어지는 정적에 지훈은 몸을 일으켰다. 늦기 전에 이야기해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 말을 하긴 했지만, 역시 너무 이른 게 아니었나 하면서도 가족 사이에 숨기는 것만 늘어나는 것보다 낫다는 상반되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저를 보지도 못하는 동생들에 아직 다 하지 못한 뒷말을 잇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마음이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해야 했다. 진실을 말해 줬으니 이제 떠나겠다고 할지 모를 둘을 위해 미리 운을 떼 주어야 했다. 이런 게 형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석민, 이찬.

돔으로 가고 싶으면 말해. 어떻게든 해 볼게.

가고 싶다고 하면 나도 다시 돔 안으로 가야 하고, 간 뒤에는 지금까지 자신을 속였다며 너희가 날 남처럼 대할지 모르지만. 그러면 조금 슬플 것 같지만. 가고 싶다면. 뒷말은 속으로 삼켜버렸다.


지훈이 밖으로 나가고 석민과 찬은 남겨졌다. 긴 이야기를 마친 형 앞에서 차마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형이 자리를 비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돔이라는 곳을 안 것은 처음이었다. 더스트 전에도 너무 어렸기 때문인지 돔에 연관이 없어 관련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고, 만약 들었어도 돔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조차 못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뒤늦게 이에 관해서 알게 되었다고 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형이 이곳에 있고, 동생이 이곳에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싶었다. 오히려 형이 자신들은 생각도 없는 돔으로 가고 싶다고 하면 보내 주겠다고 말하는 게 속상했다. 형은 우리랑 떨어지면 안 슬픈가. 석민이 애꿎은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찬이 슬쩍 석민의 손을 잡아 왔다.

형.

응, 찬아.

갈 거야?

어디를…… 어디를 가?

지훈이 형이 말한 곳.

아니, 안 가고 싶어.

그치?

응…….

나도.

와, 진짜. 나도 나지만, 지훈이 형 너무 걱정이 많다. 안 그래?

응, 우리는 생각도 없었는데.

찬은 제 작은 형의 젖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입을 꾹 다물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게 꾹 참았다. 혼자 나간 형을 다시 찾아서 데려오는 게 먼저였다. 그는 잡은 형의 손을 꼭 고쳐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에 석민도 그를 따라 일어서서 같이 지훈을 찾기 위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니까,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은 설레는 일이었다. 사람이 멸종하다시피 한 세계에서 다른 목소리를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데에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고, 기대하고 있는 소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해가 머리 위에 떠서 나름 햇빛이라는 게 생길 때쯤 눈을 뜬 찬은 제 머리맡에 놓인 라디오를 찾았다. 인공적인 소리라고는 자신이 내는 소리밖에 없는 것이 싫었던 찬은 손을 더듬으며 라디오의 볼륨을 키웠다. 기계의 전원이 켜진 이후로 듣기 싫은 소리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나고 있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하는 마음에 작은 소리 하나에도 귀를 기울였다. 물론 그 마음이 보답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준비까지 마치고선 다시 라디오 옆에 앉았다. 새삼 빈 옆자리가 신경 쓰였다. 몇 시간 뒤, 그는 혹시나 했던 마음을 역시나로 바꾸면서 라디오의 볼륨을 작게 줄였다. 늘 그랬듯 오늘도 노력의 보람이 있는 날은 아니었다. 설렘이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지만, 그는 이미 이 상황에 적응된 지 오래였기에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초연했다. 그저 바라는 소식이 조금이라도 빨리 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제 형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긴 그런 것도 다 알면 자신의 운명도 알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게. 알아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했고. 찬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부서진 건물 잔해를 붙잡았다. 잔해 때문에 길은 막혔고, 돌아가자니 예정보다 시간이 한참이나 더 걸릴 것이 예상되었기에 하늘을 향해 곧게 서 있지 못하고 부서져 누워 있는 건물을 넘어가야 했다. 왜 하필 이렇게 부서져서 길을 막고 있는 건지. 혼자 그런 투정을 할 법도 하지만 그는 묵묵히 두 팔에 힘을 주어 잔해 위로 몸을 올렸다. 이렇게 건물이 부서져 생긴 잔해들은 죄다 온전치 못한 형태를 하고 있어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창문이 되어 있었을 유리는 중심을 잃으면 곧바로 찌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날카롭게 서 있었기에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집중해야 했고, 콘크리트는 충격이 가해져서인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것 같아 늘 상태를 살피며 다녀야 했다. 그는 겨우 잔해를 넘어 다시 발이 에 붙었을 때 한숨을 돌리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찬은 생각했다. 이 넓은 땅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형들과 함께 있을 때 즐거웠던 것을 생각하면 합당한 기대였다. 물론 지훈이 형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돔 안의 높은 사람들 같은 자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찬의 발에 채던 돌부리가 짧게 공중을 날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더니 이리저리 구르다 풀에 걸려 멈춰 섰다. 그는 더스트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던 풀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곧 부서진 고층 건물의 밑부분에 덩굴 타고 오른 식물들을 담을 수 있었다. 이걸 헤치고 들어간 만큼의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마스크를 단단히 고정하고,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건물 안에서 기계 부품들을 발견했다. 부서지지 않은 것들이 꽤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바람에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것들이 많아 보였다. 찬은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 매고 있던 배낭 하나를 가득 채웠다. 라디오의 배터리가 곧 떨어질 것 같아서 비교적 상태가 좋아 보이는 건전지도 여러 개 챙겼다. 그는 이대로 집까지만 가면 한동안 라디오와 관련된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기억을 더듬어 형이 들려줬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음만 알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멋대로 가사를 붙여 보기도 했다. 그러다 어색함을 느껴 그만두기도 하고, 나중에 형에게 들려주고 싶다며 기억에 담기도 했다. 하루빨리 전할 날이 오길 기다리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찬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인기척이라고는 제가 내는 것 외엔 머리카락을 이루고 있는 단백질만큼도 없을 도시가 무언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정확히 무엇이 달라졌는지 짚어내진 못했다. 어쩌면 달라진 게 없을지도 몰랐다. 정말, 그저 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감도 믿지 못하면 안 된다고 형에게 배웠었다. 형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그는 걷는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불길한 느낌.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형들과 함께 지냈던 집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마련한 거처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숨이 차고, 힘이 빠지려는 몸을 이끌어 급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곧바로 문을 걸어 잠그고, 가방을 내려놓은 채로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한 곳에서 어떤 소리가 난다면 그건 긍정적인 신호일까, 부정적인 신호일까? 그는 급하게 뛰려는 심장에 손을 얹고 호흡을 억누르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평소 습관대로 커튼을 쳐 두어서 다행이었다. 빨랐던 호흡이 안정되고 그가 늘 차고 있는 손목시계의 분침이 반의반 바퀴 정도 돌았을 때, 찬은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단순한 착각이었나? 건물 안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눈이 어둠에 적응되어 돌아다니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시 가방을 주워 들고 테이블 위로 얹으면서 의자를 잡아당겼다. 그는 몸을 굽혔다. 그리고 기계음. 찬은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는 이 소리를 알았다. 큰형이 자동차라는 과거의 이동 수단에 시동을 걸려고 했을 때 들어 본 소리였다. 이게 들릴 정도면 굉장히 가까운 곳에서 나는 곳이었다. 그의 머리가 순식간에 너무 많은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형들인가? 하지만 지훈이 형은 이곳에서 지낼 때 석민이 형과 저를 과보호하는 것처럼 어떻게든 지켜 주겠다는 듯이 행동했고, 석민이 형도 그런 형을 알아서 이렇게 위치 노출이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라디오를 통해서 소통하자는 약속이 있었다. 그리고 라디오는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찬은 저 소리가 형들의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다음 질문을 떠올렸다. 그럼 저건 누구지? 그는 다급하게 몸을 낮춘 뒤, 문과 창문을 둘러봤다. 분명 조금 전에 모두 가려져 있는 것을 확인했고, 그리고 문을 잠그며 들어왔음을 알고 있음에도 본능적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모든 감각이 곤두섰다. 제 숨소리와 심장박동 소리가 거슬릴 정도였다. 그는 숨소리를 죽이고, 발소리를 죽인 채로 창문 아래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전보다 소리가 더 가까워진 듯했다. 이 방향에 있는 건 무너진 건물과 그 잔해로 죄다 망가진 도로였다. 차는 그 도로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커튼을 들춘다면 바로 볼 수 있는 위치지만, 찬은 그러지 않았다. 누군지 알기 전까지, 그리고 안전이 보장되기 전까지는 이곳에 사람이, 자신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여지조차 주어서는 안 됐다. 하지만 인간이란 야생동물보다 본능은 무디면서 상상력은 뛰어나 온갖 것에 겁을 먹으면서 살았던 존재다. 이찬이 과거 평범하게 살았던 사람보다 감이 좋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인간이었기에 불필요한 걱정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돔 사람들? 밖에 사람이 남아있었다면 분명 전에 마주쳤을 거야. 근데 차를 운전한다는 건…… 그 사람들이 여긴 또 왜? 형들은? 그런 걱정을 듣기라도 한 듯 한동안 선명히 들리던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동시에 자동차에서부터 나오던 빛이 사라졌는지 다시 적응하지 못한 눈으로 어둠 속에 들어온 것처럼 앞이 까맸다. 그는 그렇게 눈을 뜬 채로 밤을 보내야 했다.

찬은 밤을 꼬박 새우고 나서야 떠난 것임을 확신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장한 채로 쪼그려 앉아 있는 상태를 유지해서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갔다. 순간 휘청일 뻔한 다리를 겨우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조금씩 긴장이 풀리기 시작해서인지 눈꺼풀이 무거워졌지만, 그는 커튼을 살짝 들어 주변을 확인한 뒤 가방의 짐을 모두 풀어 정리하고 나서야 몸을 뉘다. 그대로 잠에 들기 전, 가물가물한 눈으로 배터리라도 아낄 겸 전원을 차단해 둔 라디오에 손을 뻗었다. 스위치가 켜지고 다시 전원이 들어온 라디오는 신호음을 뱉기 시작했다. 다이얼을 돌렸다. 주파수가 이리저리 바뀌는 걸 멍하니 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주파수를 조정했다. 211.9라는 숫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고, 그제야 다시 자세를 고쳐 눕고는 눈을 감았다. 자연스레 감긴 눈을 따라 몸에 힘이 풀리고, 의식이 멀어져갔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정적 때문이었다. 라디오를 켠 채로 눈을 감았던 것이 마지막 기억인데 신호음이 가득해야 하는 라디오가 조용하기만 했다. 그 어색함은 그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라디오의 전원이 나간 것은 아닌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후화가 되었다고 한들 새 배터리도 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전원표시등도 초록빛을 내며 밝기만 했다. 기계 고장인가? 찬은 급히 주파수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전파 수신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했다. 숫자가 바뀌자마자 잡음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고장도 아니었다. 심지어 제 평소 습관을 생각하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그 습관은 주파수를 하나하나 맞춰 들어본 뒤, 형들의 연락을 약속했던 그 채널에 고정하고는 몇 시간이고 지직거리는 소리만을 듣는 것이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다시 채널을 돌려야 했다. 주파수를 맞춰야 했다. 그는 다이얼을 쥐었고, 제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숫자가 순식간에 돌아가면서 다시 211.9에 멈추었을 때, 찬은 어젯밤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갔다. 숨을 죽이고,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위를 손으로 꾹 누르며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가.

이찬?

그는 숨을 헉 들이켰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뭘 모르던 시절이라면 깜짝 놀라 웃으면서 반겼을 테지만, 이 채널은 형들과 자신이 약속했던 곳이었고 그렇기에 목소리가 들린다면 분명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잘못된 줄 알고 찬은 지금이라도 라디오를 꺼야 하는지, 이 채널을 듣는 것을 멈춰야 하는지 고민했다. 지금 당장 간단한 짐만 챙겨서 이곳을 떠야 하는 건 아닐까. 목소리의 주인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땀이 차 젖어 들어가는 손을 라디오에 얹어 놓은 채로 목소리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애매해서 듣고 있을지 모르겠네. 어쨌든 이건 양방향 소통이 안 되니까 들었길 바라면서 일단 마저 얘기할게요. 전 원우라고 하고, 지훈이랑 석민이 부탁받아서 왔습니다. 둘 다…… 조금 바빠서. 어디쯤에서 지냈는지, 어떻게 연락해야 하는지 들어서 이렇게 연락 중이에요.

원우? 나한테 왜 이름을 밝히지? 속이는 건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라디오 너머의 누군가가 자신을 소개하는데, 이런 질문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 그를 예상하기라도 한 듯, 원우라고 칭한 사람은 바로 형들의 이름과 함께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찬은 그간 했던 걱정이 헛된 일은 아니었는지 조금 마음이 놓였다. 형에게 같이 지냈던 사람들 이름까지는 못 들었었는데. 형들 무사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잘못돼서 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던 게 괜한 일이어서 좋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제야 라디오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앞으로도 형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바람이 실현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가져서기도 했다. 라디오를 통하지 않아도 될 수 있었다.

이후로 원우라는 사람은 서로가 가진 것만으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나는 게 우선일 것 같다고 말했다. 찬은 그 말에 동의했다. 형들과 헤어지고 자신이 이렇게까지 기다리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형들의 부탁을 받았다는 사람과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돔 밖은 이동 수단이 없는 인간에게는 무한하다고 느낄 정도로 넓어서 만날 장소를 정확히 정하지 않으면 안 됐다. 서로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전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더욱 그랬다. 원우는 자신이 지훈이에게 어느 지역 쪽에서 지냈는지 들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 이후로 이동했을 거고, 반경 5km 이내로 예상했으나 말 그대로 예상이니 정확하진 않을 것 같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거리는 재 보지 않아 몰랐으나 실제로 전에 지냈던 집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으니 그의 말이 맞다는 데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결국 정해진 곳은 찬이 형들과 마지막으로 지내던 집에서 10분 거리의 도서관이었다. 종말 이후의 도시가 그렇듯 지하에는 물이 차오르고, 건물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아서 읽을 수 있는 책도 손에 꼽힐 정도였기에 여전히 도서관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지훈이 동생들에게 뭐라도 주고 싶다며 건물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책 몇 권을 구해 왔다. 구해다 준 책은 1층의 어린이도서관에 있는 동화와 2층의 열람실에 달린 추천 도서 책장에 있는 책들이었고, 전부 다 읽는 데에 3년도 걸리지 않았다. 몇 권 안 되기도 하고, 형이 준 선물이라는 게 좋아서 한동안 책을 끼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찬은 지훈이 책을 읽어 줘서 석민과 함께 그걸 들으며 잠에 들었던 날과 석민이 같이 책을 읽자며 저를 앉히고 제 형이 읽어 주는 걸 듣거나 같은 시간에 같은 페이지를 읽던 날, 형이 책들을 안겨 줬던 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그래서 그 도서관이 잊지 못하는 장소가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다시 갈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곳을 다시 가게 된다니. 형들이랑 함께해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더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

기한은 일주일. 찬은 안을 모두 비워 정리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이동할 준비가 필요했다.

앞으로 수신자는 없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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