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들과 이혼하는 법

[BL] 1. 이혼을 하려면 일단 (2)

리마 by 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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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돌잔치때는 몰라도 지금 아슬라는 하슬라 밑에서 해적들을 퇴치하며 군공을 쌓아 나라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군인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서기로서 마리한께서 내린 일을 다루는 수리모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혼사때문이 아니더라도 수리모는 그간 아슬라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 40년간 끊긴 집안 관계때문에 해적을 소탕하고 다닌 일 외에 수리모는 아슬라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사실 수리모는 아슬라를 알지 못했다. 40년 전 돌잔치에서 본 아기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작년 여름에 태풍 피해가 심했다고 들었어요.”

“수습이 빨리 끝났습니다.”

군인들이 다 그렇지만 아슬라도 낯을 가렸다. 수리모는 아슬라와 조금 더 길게 대화할 수 있을 만한 주제를 꺼냈다.

“수영에서는 평소에 무얼 드시나요?”

“요즘은 농사가 되어서 채소도 잘 나옵니다. 그전까지는 해초를 많이 먹었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아슬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은 무엇을 드십니까?"

아마 자신도 저 나이때였다면 저렇게 물었을지 모른다.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는 모습 덕분에 수리모도 아슬라에게 살갑게 대답했다.

“봄이 되니 일이 많아서 식사때를 맞추기 어려워요. 누룽지를 만들어뒀다 나중에 먹어요. 다행히 제가 누룽지를 많이 좋아해요.”

아슬라는 또 한참 조용했다. 수리모는 아슬라가 대답하기 좋을 만한 말을 꺼냈다.

“봄이라 수영에 일이 많겠어요.”

“겨울을 빼고는 봄, 여름, 가을 거의 비슷하게 대민지원을 많이 갑니다.”

“순례객들과 비슷하네요."

“저희는 별로 혼인 생각이 없습니다.”

“아슬라도요?”

“예.”

아슬라랑 이야기를 나누자 수리모는 걱정이 싹 가셨다. 아슬라는 마리한께서 짝을 찾아주려고 부르셨다는 사정은 모른다. 하지만 수리모와 혼인하라고 명하시면 아슬라는 거절할 사람으로 보였다. 숙제 하나를 해결하자 수리모는 아슬라를 만나면 꼭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올해 생일에는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가요?”

아슬라는 수리모를 멀뚱멀뚱 보았다. 사브랑 시내가 살짝 보일 정도가 되어서야 답이 나왔다.

“책이 좋습니다.”

“책이 좋았나요?”

돌잔치 이후로 만난 적은 없지만 수리모는 자신이 해온 예상이 오늘 맞아서 흐뭇했다. 아슬라는 수리모가 보낸 생일선물을 알차게 썼다. 어쩌면 입대해서도 심심하면 수리모가 필사한 책을 읽었겠다. 공들여 필사한 보람을 느끼자 수리모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해마다 수리모는 하슬라와 아슬라 생일을 신경써서 챙겼다. 아기 때는 조그만 베개며 집에서 가볍게 신을 버선을 지었다. 매번 선물을 쌀 보자기를 골라 물들이고 시간이 나면 자수도 놓았다. 선물도 그냥 고르지 않았다. 이전 마리한을 섬길 때 수리모는 학교에서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 이름 중에 아슬라가 나오자 기억해두었다. 그 후로는 보자기는 곱게 물만 들이고 수리모는 필사하느라 시간을 들였다. 책은 귀해서 집에서 마음껏 보기 어려웠다. 수리모는 마리한께 빌린 희귀한 책을 필사해 아슬라에게 생일마다 한 권씩 선물했다. 아이들 생일날 아침마다 수리모는 사촌형에게 부탁해 그날은 가장 먼저 선물부터 보냈다. 저녁에는 선물을 잘 보냈는지 사촌형에게 확인했다.

마리한께서 아직 업무를 보실 시간이라 수리모는 아슬라를 데리고 자신이 머무는 별채로 향했다. 이전 마리한인 보문께서 수리모가 궁에서 편히 일을 보도록 마련해주신 곳이었다. 수리모가 별채 마루에 아슬라를 앉히고서야 아슬라는 손에서 놓지 않던 짐을 마루에 내려두었다. 수영에서 오는 길이니 하슬라 장군께서 부친 서류가 있을지도 몰랐다. 짐을 싼 보자기를 풀자 천에 싸둔 물건들이 하나씩 나왔다. 그중 가장 조그만 보따리를 제외하고 아슬라는 다른 물건들을 전부 안아 들었다. 수리모는 순전히 그 조그만 보따리가 혹시라도 아슬라가 잊었을 기밀서류가 든 보따리일까봐 넌지시 물었다.

“이것도 마리한께 드릴 선물인가요?”

“아, 그걸 잊었습니다.”

아슬라는 들고 있던 짐을 모조리 내려두더니 마루에 다시 앉았다. 마리한께 보이기 전에 수선을 해야 하는 물건일까? 수리모는 아슬라가 풀이나 새 종이를 찾으면 가져다줄 요량으로 곁에서 기다리고 섰다. 그리고 가장 조그만 보따리 안에서는 나무로 만든 납작한 상자가 나왔다. 이상하게 수리모는 상자가 낯익었다. 아슬라는 이리저리 상자를 만지더니 뚜껑을 열어서 세웠다. 상자 안이 보이자 수리모도 이 상자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혼인하길 원하는 다른 남성들처럼 수리모도 젊은 시절 순례다닐 때는 짐에 항상 저런 휴대용 화장갑을 넣어다녔다. 지금이야 아침에 등청할 때 화장을 하고 식사를 하고 나면 별채에서 화장을 고치는 터라 수리모는 휴대용 화장갑을 못 본 지 40년이 되었다.

“화장을 자주 하지 않으시나요?”

“예. 오늘은 자부가 챙겨가라고 성화여서 가지고는 왔습니다.”

“자부께서 그러셨나요?”

"하슬라 장군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아슬라는 무슨 일로 부름받았는지 모르지만 가족들은 내막을 아는가보다. 화장갑은 새것인데 아슬라는 화장갑이 자기를 물기라도 할 것처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서 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아슬라는 화장품을 경계했다. 수리모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정착할 집을 찾아 순례다니는 남성이면 절대 저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순례객들은 화장갑도 모자라 족집게며 갖은 꾸밈 도구를 챙겨다녔다. 수리모가 빤히 보자 멋쩍었는지 아슬라가 설명했다.

“이것들을 바르고 나면 얼굴이 간지럽습니다.”

“그래서 씻고 계셨군요.”

"혹시라도 씻게 되면 마리한을 뵙기 전에 쓰라는 말은 들었습니다."

"굳이 바를 필요는 없어요."

수리모가 처음 아슬라를 봤을 때는 눈썹도 단정하게 나있어서 태어나기를 털이 보기 좋게 난 줄 알았다. 아무래도 그간 누군가가 얼굴을 관리해준 덕에 아슬라 눈썹이 보기 좋은가보다. 반듯한 코로 시선을 내리다가 수리모는 계속 마룻바닥에 손님을 앉혀두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어났다.

“방석이랑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여기서 쉴 줄 알았습니다. 아슬라랑 서로 할 이야기가 많아보입니다.”

별채 안으로 들어가려던 수리모는 마루에서 일어서자마자 그대로 굳었다. 마리한께서는 수리모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자 손짓하셨다.

“앉아도 됩니다. 수리모가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왔습니다. 벌써 신랑이랑 많이 친해졌나봅니다.”

아슬라는 어리둥절해서 수리모를 올려다보았다. 수리모가 조심스럽게 앉자 아슬라는 몸을 돌려서 마리한께 인사를 올렸다.

“마리한을 뵙습니다.”

현재 샤로를 돌보는 마리한인 형산은 어머니께서 가르치신 대로 행동했다. 형산은 꾸미지 않은 아슬라를 보고도 어떤 평가도 하지 않았다. 절을 올리고 아슬라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한께 다가갔다.

“수영에서 마리한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말린 홍합과 미역입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선물을 대신 받아서 넣어두러 가는 척 수리모는 종종걸음으로 불편한 곳에서 사라지려고 했다. 아슬라는 이따 마리한께서 일 보러 가시면 궁에서 데리고 나오면 된다. 하지만 수리모 예상보다 아슬라는 날카로웠다.

“방금 저를 누구 신랑으로 여기고 부르셨습니까?”

“장군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말씀 없으셨습니다.”

이 자리를 벗어났다가 상황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모르고 싶지 않았다. 수리모는 걸음을 멈췄다. 어쩌면 아슬라를 꾸며주고 화장품까지 챙겨준 사람들도 누구랑 혼인하는지는 몰랐을 것이다. 수리모처럼 혼담이 들어온 상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수리모 뜻과는 다르게 대화는 자꾸만 이어졌다.

“수리모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면서 얼굴을 익히라고 내가 아슬라에게 남편감으로 추천할 이를 보냈습니다.”

아슬라는 저 멀리 오도카니 서있는 수리모를 응시했다. 마리한 앞이라 수리모는 자신을 변호할 수 없었다. 자신이 마리한 말씀을 받든답시고 응큼한 속셈으로 아슬라를 만나러 나온 늙은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살아오면서 수리모도 좋은 소리 들을 일만 하진 않았다. 수리모는 오늘만큼은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로 좋지 못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그리 운이 나쁘진 않았다.

다시 아슬라와 얼굴을 마주하자 형산은 입술을 지그시 물고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슬라는 평온한 목소리로 여쭈었다.

“수리모 아저씨는 제 아버지에게 벗이 아닙니까?”

마리한께서 둘을 맺어주려 한다는 소식은 그때까지는 형산과 당사자인 아슬라, 수리모밖에 알지 못했다. 그날 저녁이 되자 소식이 조금씩 집안에 돌았다.

하슬란 저택에 20년만에 아슬라가 돌아온 날에 집안 사람들은 아슬라가 전한 소식을 듣느라 조용했다. 고모부가 만류하는 데도 상을 나르고 수저를 놓으면서 아슬라는 오늘 겪었던 일을 빠짐없고 꾸밈없이 밝혔다. 당연히 하슬란 사람들은 마리한의 서기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아슬라에게는 고모이자 하슬라 집안을 이끄는 동해는 나랏일 때문에 출장을 다녀오느라 아슬라가 저녁을 먹기 시작할 때야 돌아왔다. 스무 해만에 보는 조카를 반기기도 전에 고모는 할말 많은 사람들 한 무리와 마주쳤다. 특히 동해의 남편인 마니가 목소리가 가장 컸다. 아슬라가 수영에서 나라를 지킬 동안 수리모에게 쌓인 감정이 유독 많았던 마니는 동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동해가 겉옷을 벗어두고 씻고 저녁을 먹으러 나올 때까지 개인적인 감정까지 더해 오늘 일어난 일을 전했다. 다른 사람은 물릴 수 있어도 남편은 그러지 못했던 동해는 남편이 하는 말을 적당히 걸러 들었다.

아슬라가 마리한께 부름을 받아 갔다. 마리한께서 아슬라에게 수리모랑 혼인하라 하셨다. 가끔 마리한께서 짝을 지어주시긴 했다. 하지만 보통은 나잇대와 관심사가 맞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아슬라는 수리모 아들뻘인 데다 아슬라네 집안인 하슬란과 수리모네 집안인 아슬란은 혼인을 반길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나랏일을 맡아보긴 해도 동해는 이런 일들은 머리가 아팠다. 서로 안 보고 사는 집안 사람들끼리 혼인하길 마리한이 바라는 이유를 굳이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아슬란에서도 수리모를 통해 소식을 듣고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가뜩이나 남의 집 돌잔치에서 집안 사람과 관련도 없는 아기 이름이 아슬라라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아슬라가 당연히 아슬란 사람이거나 아슬란과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말 거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슬라를 따라 아슬라가 무공을 세우면서 질문은 더 늘었다. 아기 이름까지 닮게 지은 것치고는 벌써 40년째 하슬란에서는 이제까지 서로 챙기던 집안 어르신 생신이며 대소사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샤로가 세워지고 오랜 세월 동안 지켜온 관례라 아슬란에서는 아직도 관습을 지키고는 있지만 현재 집안을 이끄는 태화가 물러나면 그 뒤로 두 집안 사이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아슬란에는 대를 이을 사람이 없었으나 다행스럽게도 태화에게 동생인 수리모가 혼담을 주선한 덕에 태화는 아들을 마리한께 장가보내고 집안을 맡길 수 있었다. 사이가 좋든 어쨌든 샤로에서 가장 큰 두 집안은 어디에서는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태화는 되도록이면 하슬란과 무난하게 지내고 싶었다. 마리한께서 뜻이 있으셨겠지만 태화라도 함부로 마리한을 찾아가서 의도를 여쭙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흔 해 넘게 아슬란을 돌본 태화가 보기에 이 혼담은 하슬란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었다. 해는 이미 졌고 태화는 내일 아침 집안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할 내용부터 정리해야 했다.

태화가 하던 생각과 하슬란네에 벌어진 상황은 조금 달랐다. 밤이 되자 혼담은 하슬란 집안을 들쑤셔놓았다. 소식을 들은 집안 사람들은 달이 하늘 중앙에 가도록 잠들지도 않고 깨어있었다. 20년 전 해적들이 사브랑 시내까지 들어왔던 후로 방범용으로 늘 켜둔 마당 불빛 아래로 모인 사람들은 저녁 식사 때 들은 소식을 되풀이해 이야기했다. 특히 하슬라와 아슬라에게 고모 남편 되는 마니가 울분을 참지 못했다.

“20년 전에 아슬라를 그렇게 홀대하고 이제는 아슬라 자리를 가로채간 늙은이한테 장가들랜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무도 누구 홀대 안 해, 누가 자리를 가로채.”

동해는 정말 자러 가고 싶었다. 뛰어난 수학자이자 측량사인 동해는 날이 풀린 이래 출장업무가 줄을 지었다. 대부분 옛날에 동해가 측량했던 곳에 방문해 다시 측정하고 정해진 땅 가름선이 맞다는 걸 확인해주는 일이었지만 내일 아침에도 출장가려면 이 시간에는 잠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냅뒀다간 집안 사람들 모두 내일 아침에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흐느적거릴 터라 동해는 마당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집안 사람들은 동해 목소리가 들리자 말을 멈추고 동해를 돌아보았다. 동해는 나온 사람들을 확인했다. 다행히 당사자는 보이지 않았다.

“혼담만 들어왔지 혼인이 잡히진 않았습니다. 날이 밝아야 사정을 알아볼 수 있으니 오늘은 이만 주무십시오.”

웅성거림은 한참 전에 멈췄다. 사람들은 방으로 흩어졌다. 동해는 남편을 데리고 방으로 가면서 물었다.

“슬아는 안 나왔네?”

“잠들었어. 푹 잠들어서 깨워도 안 일어나더라고.”

“자는 애를 왜 깨워?”

그렇게 방으로 돌아와서 누웠지만 마니는 동해가 잠들고 나서도 눈도 감지 못했다. 마니가 보기에는 아슬라에게만 유독 세상이, 마리한이 각박하게 굴었다. 입학하기도 전에 그랬고 나이가 차서 부군 후보들을 교육시키는 곳에서도 그랬다. 수군이야 아슬라가 제발로 들어갔고 하슬라가 보살폈으니 마음놓았지만 오늘 같은 일까지 벌어지면 어쩔 수 없었다.

동해는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일찍 일을 마치고 아슬라에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남편은 미동도 없었다. 동해는 최대한 소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불에서 벗어나서 남편에게 아직 따뜻한 이불을 덮어두고 방을 나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마자 마니는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오늘 동해 일은 빨리 끝났다. 새내에서 일을 마치니 점심 때가 조금 지났다. 먹고 가시라는 말도 동해는 사양했다. 사양하는 동해에게 새내 집사청에서는 지난해에 만들었다며 말린 배를 주었다. 동해는 남편 줄 요량으로 말린 배를 짐에 잘 챙겨넣어두었다. 속이 많이 상할 때 맛있는 걸 먹으면 마니는 마음을 추스렸다. 어쩌면 마니 성격에 귀하다며 야단 떨고 아슬란에 보낼 선물로 쟁여두자고 할지도 몰랐다. 밝아진 남편 모습을 상상하고 집으로 향하던 동해는 대문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고 수레에서 내렸다. 순례객들이 올 때가 되긴 했다. 누가 봐도 아슬란식으로 귀퉁이를 튼튼하게 박은 수레를 보자 사람들은 길을 내주었다.

동해는 문앞을 막은 물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다가갔다. 문앞에 흙벽돌을 한번에 여럿 찍을 때 쓰는 틀이 나와 있었다. 단지 흙벽돌을 꺼내지 않고 그대로 그 위에 글자를 파넣었다. 오늘 아침까지 동해는 이런 문구를 문앞에 써놓자는 건의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날이 풀렸고 샤로 곳곳에서 순례객들은 짐을 메고 사브랑 시내 유적지로 모여들었다. 수레를 태워 보낼 정도로 사는 집이면 순례를 보내지 않았다. 순례객들은 걸어서 사브랑에 입성했다. 고대인들이 남긴 작품들을 감상한 뒤에 순례객들은 자신들이 점찍어둔 집안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순례객 대부분은 순례객 본인을 비롯해 가족까지 먹여살릴 만한 여력이 있고 널리 알려진 집안을 찾았다. 사브랑에서, 샤로에서 그만한 집은 현재 하슬란밖에 없었다. 그리고 점심 때에 도착했다가 그들은 문 앞에 놓인 문구를 보았다. 순례객 사절.

그들 중에서 하슬란 집안 인근에 사는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본 것을 어른들께 알렸다. 집안 어르신들은 믿고 싶지 않았다. 하슬란에서는 이미 30여년 전에 순례객을 평생 받지 않겠다고 한 전적이 있었다.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순례객을 다시 받긴 했다. 오늘까지는.

집이 하슬란네에서 먼 순례객들은 입구에서 머뭇거리며 기다렸다. 하슬란 사람 한 명이라도 나오면 물어보려고 했지만 해가 솟도록 어째 한 명도 문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올해 순례보낼 걸 예정하고 준비해주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들은 그냥 집 앞에 써져 있는 말만 보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인근 어르신들은 직접 보고 확인하려고 하슬란네로 향했다. 아들들은 뒤따랐다. 순례보내는 마당에 집안 어른이 따라오면 흉보일 수 있었다. 막상 사절 문구를 직접 보고 나니 어르신들은 당황스러워서 자식 곁에 다가가 섰다. 순례객을 보낸 집에서는 적어도 가을까지는 성인 남성 1명분 식량을 마련하지 않아도 되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한 사람 먹일 식량을 어떻게 마련할지도 문제지만 달팽이를 기르고 각종 작물을 기르는 법을 어디서 배울지도 문제였다. 일단 하슬란네에서 숙식하며 살림하는 법을 배우면 다른 집에 장가보내기라도 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실습공간도 모자라고 교육과정을 이수하느라 모든 것을 세세히 배울 수는 없었다. 30여년 전 하슬란에서 순례객을 받지 않을 때 사브랑에서 아들 둔 집들은 군대로 보낼 생각까지 했었다. 군인들은 ‘마리한의 남편’이라고 불리긴 해도 복무하는 동안 마리한을 볼 일도 없었고 훈련과 밭일, 대민지원을 모두 맡아야 했다. 그리고 현재 나라의 총사령관은 하슬라 장군이었다. 하슬란 집안의 다음 대 어르신일 하슬라이다. 이러나 저러나 하슬란 대문 앞에 모인 이들은 어떡하든 아들의 미래가 하슬란 사람들에게 달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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