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들과 이혼하는 법

[BL] 1. 이혼을 하려면 일단 (1)

리마 by 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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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가 물러서 녹기 직전이 되면 가장 달콤하다고 즐기는 이들이 있듯이 사람도 그런 모양이다. 아슬라가 수리모랑 혼인한다는 소식이 퍼질 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반기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신경쓰지도 않았다.

예순을 넘기면서 수리모는 순례로 다른 집에 장가들든 누구랑 혼인하리라는 생각은 아예 접었다. 때문에 수리모는 마리한께서 중매를 서주시려 불렀다는 말이 놀라웠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마리한께서 점지해주실 혼처가 퍼뜩 떠오르지 않았다. 또래 여성들은 짝이 필요없었다. 그래도 마리한께서 뜻이 있으셔서 자신을 부르셨을 것이다. 수리모는 마리한께서 자리를 내어주시자 공손히 앉았다.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수리모 배우자감은 아직 오지도 않았어요.”

“사브랑에 사는 분이 아니십니까?”

“수영에서 올라오는 중이에요.”

그 말을 듣자 수리모는 핏기가 가셨다. 수영에 배치되어 20년간 해적을 막아낸 명장이 수영에 있긴 했다. 하지만 명장 하슬라는 수영에 배치될 때부터 안팎으로 장군을 보필해온 배우자가 있었다. 마리한께서 자신을 시앗으로 보내실 줄은 수리모도 짐작하지 못했다. 장군이 자신보다 스무 살은 어린 것은 둘째치고 수리모는 너무 옛날 이야기라 자신이 마리한을 돌볼 때도 말씀드리길 잊었던 사실을 꺼냈다.

“마리한, 그가 제 벗의 딸이라 제가 의무를 다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장군을요? 아니, 수리모를 시앗으로 보낼 수 있나요. 새신랑으로 보내야죠.”

수리모가 말이 없는 사이 서류를 펴서 들여다보던 마리한은 고개를 저었다. 마리한 말씀에도 수리모는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수영에 여성은 셋인데 둘은 혼인했고 한 사람은 홀로 지낸다고는 들었다. 수리모는 공연히 그 중에서 가장 이름있는 사람만 떠올린 자신이 부끄러웠다. 홀로 지낸다던 이가 자신과 나잇대도 비슷하니 마리한께서 맺어주시려는 사람이 맞는 모양이다. 수리모는 마리한께 황송함을 드러내려고 했다. 마리한은 서류를 다시 반 접어다 덮어두었다.

“아슬라는 정직하고 정많은 사람이니 수리모도 마음에 들겠죠.”

“아슬라가 하슬라 동생인 아슬라입니까?”

“그 말고 수영에 있는 아슬라가 있어요?”

“아슬라는 남성입니다.”

“그렇죠. 순례 한 번 안 가서 배울 게 많겠지만 인물도 좋고 똑똑하고 성실해요.”

“아슬라도 하슬라처럼 제 벗의 아이인 건 기억하십니까?”

혹시나 아까 처음 알린 사실을 마리한께서 잊었나 기대했지만 마리한은 잊지 않았다.

“마흔 해를 안 봤으면 벗이라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가깝게 여깁니다.”

“그동안 아슬라를 한번도 만나지도 않았잖아요?”

“그렇지만 저는 그 아이들 돌잔치도 갔어요.”

수리모는 아직도 마흔 해도 더 전에 갔던 그 아이들 돌잔치를 선명히 기억했다.

지금 마리한께서는 까닭을 밝히지 않으시고 사촌형을 부르시지 않지만 윗대 마리한 시절에 수리모는 사촌형과 함께 마리한이 내린 명을 받들었다. 하슬라와 아슬라 돌잔치에 마리한께서 보내시는 선물을 전달하는 일도 그 중 하나였다.

본디 마리한과 하슬라, 그리고 수리모는 집안은 달라도 조상이 같았다. 각 집안의 시조는 세쌍둥이였는데, 자매들은 샤로를 세우고 사브랑을 서울로 삼았다. 그 중 마리한의 조상님은 가장 첫 마리한으로 셋 중 둘째인 가슬란이었다. 나라 안에 널리 알려진 명장 하슬라와 동생인 아슬라의 조상님은 막내인 하슬란이었고, 수리모네 조상님이 첫째였던 아슬란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전설같은 먼 옛날 이야기고 지금은 조상님들의 이름을 딴 집안들로 나뉘었고 사람들도 같은 집안으로 여기지 않았다. 집안 사이는 집안이 나뉜 이후부터 서먹했지만 20년 전 사건을 기점으로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면 왕래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 돌잔치정도나 되어야 갈까.

수리모는 두 아이들을 위해 챙긴 선물을 무릎에 얹고 있었다. 사촌형은 마리한께서 맡기신 선물을 무릎에 얹었다. 사촌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들 아버지가 자신과 절교한다는 말을 전해주었을 때처럼.

“저들이 우릴 환영할까? 덕우는 두 번 다시 널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마리한께서 아이를 낳으실 때도 선물을 보내주셨으니 보답을 하셔야지. 마리한께서 보내셨다고 하면 들여보내줄 거야.”

수리모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수리모에게 덕우는 여전히 벗이었고 한번도 보질 못했어도 아이들은 조카같았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탄 수레를 끄는 양은 하슬란댁 앞에 당도했다. 항상 궁에서 만났던 터라 수리모는 벗이 사는 집이 낯설었다. 개나리색으로 염색하고 색실로 자수를 놓은 옷차림을 보면 누구나 수리모와 사촌형이 아슬란 집안에서 온 사람이라고 알아차렸겠지만 양과 수레를 맡아주던 하슬란가 사람들은 별말이 없었다. 다른 손님들을 따라 잔치자리로 가다가 수리모는 반가운 사람과 마주쳤다.

“모야!”

덕우는 마지막에 봤을 때처럼 여상하게 인사했다. 당시에 말은 그리 전했어도 지금은 개의치 않는지, 아니면 좋은 날에 손님들 앞이라 조심하는지 수리모는 상관하지 않았다. 덕우는 수리모와 사촌형을 이끌고 돌상과 바로 접하는 앞자리 두 곳으로 데려갔다.

“일은 좀 어때?”

“마리한께서 댁에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돌을 축하드립니다.”

사촌형이 끼어들어서야 수리모는 자신이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지 떠올리고 정신을 차렸다. 벗은 예의를 지키는데 자신은 해야할 일도 잠시 잊었다. 사촌형은 사람 좋게 말을 이었다.

“사브랑에 돌아오셨다는 말씀은 못 들었습니다만 돌아오신 모습을 보니 반갑습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덕우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하기사 예전에 궁에서 일할 때도 덕우는 사촌형과 자주 본 적도 없었다. 밤이 늦어서 수리모가 자기 숙소에서 재울 때야 잠깐 문턱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본 적은 있었다. 누가 봐도 예의만 차린 인사를 어색하게 여기던 친구는 가까운 사람들이 나타나자 다시 편안해보였다.

“슬라야, 슬아야, 손님들이 정말 많지?”

돌잔치 주인공들은 자기 고모와 그 남편의 어머니 품에 하나씩 안겨 잔치가 벌어지는 마당을 돌아보고 있었다. 막 100일 지난 마리한네 아기를 봐온 수리모 눈에 이 아기들은 엄청나게 컸다. 사촌형도 같은 생각이었나보다.

“아기들이 3살은 되어 보입니다.”

“아직 위아래 이가 4개씩만 났습니다.”

의례적인 말은 이미 주고받았고 따로 친분도 없는 두 사람은 더 말이 없었다. 수리모는 그 사이에 끼어들기 힘들었다. 주인공들이 돌상 뒤에 마련된 조그맣고 높다란 의자에 앉으면서 돌잔치가 시작되었다.

“덕우야, 시작하게 이리 와.”

“누나, 나 친구 거기 데려가도 돼?”

“너는 그러면 좀 빨리 말하지 그걸 지금 와서 말해? 이쪽에 와서 앉으세요.”

젊은 나이에 이 집안을 이끄는 어르신이 된 덕우의 누나인 동해는 동생에게 말할 때랑 다르게 자신들에게는 사근사근했다. 옻칠한 의자 2개가 더 날라져 올 동안 동해는 동생을 아기들 왼편 의자쪽으로 옮겼다. 아기들이 중앙에 앉고 아이들 오른편에는 수리모와 아이들 고모부, 사촌형이 앉혀졌다. 벗과 이야기를 나누러 온 건 아니지만 수리모는 오랜만에 만난 벗과 다시 이야기할 시간이 멀어지자 울적해졌다. 상 앞이 정리가 되자 동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해둔 인사를 시작했다.

“오늘 우리 하슬라와 아슬라 첫 돌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해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의도치 않게 잘 보이는 자리에 앉지만 친구네 좋은 날을 망칠 수는 없었다. 수리모는 애써 표정을 밝게 했다. 하지만 자신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수리모 왼편에 앉은 아기는 벌써부터 시무룩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웅크렸다. 누나가 옆에 있긴 했지만 오른편에는 모르는 아저씨가 앉아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수리모는 괜히 아기에게 미안했다. 아기도 원해서 자기 옆에 앉지 않았을 테고 가족이 옆에 앉길 더 원했을 텐데. 아이들 고모부가 속삭였다.

“슬아가, 아슬라가 낯을 많이 가려요. 오늘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봐요.”

“아기땐 다 그런가봐요.”

아슬라는 반가운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손님들이 나뭇잎에 이름과 예상하는 돌잡이 물건을 적어낼 동안 하슬라는 마치 손님들이 무얼 하는지 아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가며 지켜보았다. 아슬라는 상을 덮은 천을 잡고 꼬물거리다가 놓았다. 추첨상자에 나뭇잎들이 들어가고 손님들은 삶아서 간 호박과 설기, 칡차를 먹으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척이나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도 동해가 일어나 행사 진행을 재개하자 잠시 조용해졌다. 아이들 할머니께서 소천하시면서 아이들 고모부의 어머니께서 대신 나오셔서 실타래 두 개를 가지고 나오셨다. 이 즈음 되니 손님들 화제는 주변에서 봤던 돌잡이로 바뀌었다. 손님들 대부분은 아이들이 붓이나 철필을 잡으리라 예상했다. 수리모도 고모부가 친절하게 나뭇잎을 찾아다줘서 돌잡이 예상 물건을 쓰긴 했지만 맞출 자신은 없었다.

돌잡이는 누나인 하슬라가 먼저 시작했다. 하슬라는 돌상 위에 놓인 조그만 밥상 아래에 손을 넣더니 상다리를 잡고 번쩍 들었다. 행여나 상 위에 있던 돌잡이 물건들이 아이에게 떨어질까봐 옆에서 받쳐주려던 덕우는 하슬라가 눈높이 위로 든 상을 보고 손을 거두었다. 상은 수평을 이루었고 돌잡이 물건들은 구르지도 않고 그대로 얹혀 있었다. 막 돌을 맞이한 아기가 보이기 어려울 균형 감각이 내심 자랑스러웠던 동해도 동생을 말리지 않았다. 감탄하는 소리들은 더 커졌지만 조그만 팔이 떨리기 시작하자 동해는 아기 옆에 앉은 동생에게 눈짓해서 상을 내리게 했다. 이제는 아슬라 차례였다. 예상한 물건을 잡는지 궁금했던 손님들 몇은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 상을 쳐다보았다. 낯선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던지 아슬라는 몸을 반대편으로 웅크렸다. 혹시나 아슬라가 의자에서 떨어질까봐 지켜보던 수리모는 소매가 당겨지자 팔을 내려다보았다. 아슬라는 개나리색 소매를 꼭 잡고 있었다. 올록볼록한 자수가 마음에 들었겠거니 했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소매를 놓을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돌잡이상으로 유도할 요량으로 수리모는 허리띠에서 두루주머니 하나를 풀어서 아이 눈앞에 달랑거렸다. 자투리 비단으로 만든 두루주머니는 알록달록한 데다 손수건을 넣어두어서 폭신폭신했다. 예상대로 아슬라는 달랑거리는 두루주머니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리모는 아슬라가 눈으로 따라가기 쉽도록 두루주머니를 천천히 상 위로 가져다두었다.

“주머니는 상 위에 있어요. 이제 뭘 고를까요?”

금방 상을 바라보던 아슬라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수리모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소매를 베고 누웠다.

그게 40년 전 마지막으로 아슬라를 만났을 때였다. 결국은 아슬라가 복주머니를 고른 셈 치고 선물 추첨은 마감되었지만 돌잔치를 마치고 손님들 절반이 돌아갔을 때도 아슬라는 손에서 소매를 놓지 않았다. 사촌형이 아슬라를 협박도 해보고 아기손가락 하나씩 떼어내려고 하면서 분위기는 조금 험악해졌다. 수리모가 마리한네 아기를 돌보던 경험으로 급히 아슬라를 재우고 나서야 둘은 돌아올 수 있었다. 수리모 눈에는 40년이 지나도 벗의 아들은 아기였다. 하지만 수리모가 거들어 키웠던 이도 수리모 눈에는 여전히 아기였다. 다 자라서 이제 딸도 하나 낳았지만 여전했다. 자신을 보는 눈빛이 무덤덤해지자 수리모는 괜히 겁이 났다.

“나는 수리모가 데려온 남자랑 혼인했고 수리모가 원하는 건 다 해줬어요. 나는 수리모가 하는 말을 들어주는데 수리모는 내 말을 전혀 안 듣네요.”

그 말에 마리한으로서 언제든 명을 강요할 수 있다는 내용은 없었지만 수리모는 다른 말보다 그 말이 무서웠다. 누나를 제외하면 오랜 세월 봐오며 정을 쌓은 사람이라곤 마리한 집안밖에 없었다. 수리모의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기둥이 수리모에게 실망해서 더는 가깝게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수리모는 자기 생각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사촌형은 이번엔 따라오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 모두가 그렇듯 수리모도 사촌형이 많은 일을 하는줄은 알아도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수리모를 보기만 하면 따라가려고 하던 사촌형이 오늘은 없어서 홀가분했다. 마리한은 수리모가 뜻을 굽히자 흡족했다. 수영까지 갈 필요 없이 사브랑으로 오는 길을 따라가면 아슬라를 만날 수 있다며 마리한께서는 수리모를 마중보내셨다. 궁을 나설 때에는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막상 집을 나서면서 든 생각덕에 기분은 확 바뀌었다. 어쩌면 아슬라도 혼인을 탐탁찮게 여길 수 있었다. 아슬라도 별안간 남자랑 혼인하라고 하면 거부할 확률이 높았다. 불현듯 아슬라가 마리한 부군 후보에서 제명당한 후에도 20년을 말없이 근무강도도 센 수영에서 보냈다는 사실이 수리모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남자는 마리한 말씀을 받들 수도 있었다. 생각해도 답은 없고 수리모는 잠깐 머리도 식힐 겸 가까운 냇가로 발을 돌렸다.

마침 냇가는 나무로 둘러싸여 사람들 눈을 피하기도 좋았다. 저 멀리 금샘이 있는 봉우리가 보였다. 가팔라지면서 수레에서 내렸던 수리모는 양들을 잠시 수레에서 풀어냈다. 양들은 멈춰서 한 곳만 응시했다. 수리모는 모르지만 아마도 물 속에 양들이 낯설어할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수리모는 미련없이 쉴곳을 찾으러 다시 양들을 수레에 매려고 몸을 돌렸다.

“머무르셔도 됩니다.”

그제야 물이 흘러내려가는 굽이에 사람이 얼핏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는 사람은 수리모에게 굉장히 낯설게 보였다. 볕에 구석구석 골고루 탄 몸은 밤껍질처럼 반들거렸다. 융기한 상완이두근과 상완삼두근은 두툼하게 발달되어 두드러진 광배근으로 물기를 떨궜다. 어쩌면 씻고 있느라 화장이 지워져서 저 남성이 낯설게 보였나보다. 아니면 씻느라고 치레걸이를 전부 벗어서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아 익숙하지 않았나보다. 솟은 외복사근으로 떨어진 물방울들이 복직근을 향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수리모는 왜 이 사람이 낯설게 보였는지 알았다. 멀리서도 한 눈에 성별을 알아차린 이유가 있었다. 수리모가 몸을 돌리고 서자 몸을 씻던 사람은 다시 수리모를 불렀다.

“괜찮아요, 금방 씻고 나갑니다.”

수리모가 그이를 등지고 나무 뒤에 선 지 한참이 되어서야 씻던 이는 수리모를 재차 불렀다.

사브랑에서 수영 사이에 있는 땅은 재개간될 예정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다. 20년 전이지만 해적들이 침입한 이래 여전히 남쪽으로 가길 꺼려하는 이들이 많았고 수리모도 그랬다. 이곳에서 누나의 남편이며 그때 죽은 집안사람들이 꽤 많았다. 시신을 수습하려고 내려갔던 날 이후로 수리모는 사브랑 남쪽 바깥으로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수리모는 어쩌면 낯선 이가 아슬라를 알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낯선 이는 막 머리카락을 말린 참이었다. 그 머리카락이 살짝 엷은 빛깔에 조금 붉어보였다. 수리모는 이 사람이 바닷가에서 지냈으리라 예상했다. 옛날에 덕우가 한동안 바닷가를 따라 올라가서 보급하던 시절에 머리색이 저랬다. 거기에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 다듬은 모양을 보면 군인으로 보였다. 행여 아슬라는 몰라도 아슬라가 지내던 수영 분위기는 설명해줄 것이다. 낯선 사람과 말문을 틀 요량으로 수리모는 허기질까봐 챙겨왔던 말린 무화과가 담긴 주머니를 열어서 내밀었다.

“끼니 때도 다 되어가는데 조금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수영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예. 수영에 가십니까?”

군인은 바위에 올려둔 짐을 치우고 수리모에게 자리를 권했다. 수리모도 편안히 앉아서 간식을 즐기고 싶었던 터라 고마움을 표시하고 바위에 손수건을 두 개 깔아 자리 둘을 만들었다. 그 사이 낯선 이는 수통에서 조그만 바가지에 물을 부어 수리모에게 건넸다.

“수영에서 오시는 분을 맞이하러 갑니다.”

“수리모 아저씨되십니까?”

막 목을 넘어가던 무화과가 갑자기 딱 굳었다.

수리모는 물로 무화과를 넘기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아기 모습은 어디에도 이이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아저씨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는 모습을 보면 아슬라도 자신을 아직 아버지 벗이라고 여기나보다. 예비 가족으로 보는 낌새는 하나도 없어서 수리모는 안심했다. 소화가 어느 정도 되자 수리모는 푹 쉰 양들과 아슬라를 챙겨서 일어났다.

원래 아슬라랑 아슬라가 챙겨올 짐을 실으러 데리고 온 양과 수레는 아슬라랑 수리모를 따라가기만 했다. 무거울 테니 수레에 짐이라도 실으라고 해도 아슬라는 사양했다. 아슬라가 타려 하지 않는데 자신만 타고 마리한 앞까지 데려갈 수는 없었기에 수리모도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다. 시내까지는 아직 멀었고 드문드문 고대인들이 살았던 탑들이 하나씩 보이기만 했다. 사브랑 사람들의 남쪽기피 성향 때문에 시내는 남쪽으로는 확장되지 않았다. 자칫하면 예비 신랑일 사람과 말없이 걷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수리모는 말을 꺼냈다.

“참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희한하게도 젊은 시절 겪었던 다시없을 고통스럽던 일들은 마치 번개가 치듯 인생에서 그 순간만을 정복하고 뚝 끊겼다. 딱 하슬라와 아슬라가 돌잔치한 그날부터 수리모가 기억하는 인생은 잔잔하고 평온했다. 갑자기 마리한께서 중매서시기 전까지는.

“잘 지냈답니다. 아슬라께서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예.”

“마리한께서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아십니까?”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는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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