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마환생

광마환생 8화

사내는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한참 동안 사무치는 그리움 속에서 꿈을 헤매곤 한다. 이상하리만큼 생생한 꿈을 꾸고 일어나면 꿈의 내용과 현실이 분간되지 않는다. 꿈속에서 사내는 강호인으로 사대 악인 중 둘째였으며 멸문당한 문파의 생존자였고 종남에서 문파를 세웠다.

그럴 때마다 사내는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정신이 들 때까지 거울 속의 자신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어렸을 때는 기억으로, 커서는 꿈으로 따라붙는 일련의 장면들. 그것은 현실의 삶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사내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기억이 망상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소중한 이들을 잃고 못난 사람이 된 망상 속 굴곡진 삶보다 조부모와 부모가 모두 건재하며 화목한 가족이 지금의 그에게는 현실이다.

검도를 택했던 것은 그러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과 검을 휘두를 수록 몸에 밴 듯 떠오르는 감각 속에서 이도 저도 아닌 채 사내는 방황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사내는 의식적으로 망상 속 장면들을 멀리했다. 검을 휘두르는 횟수가 줄어들고 종국에는 그만두게 되었다. 검은 그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는 더 이상 방황만 하고 있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망상이 경고하는 것이 있다면 소중한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을 수 있다는 사실. 그렇다면 지금 소중한 사람들의 곁에서 하루라도 많은 날을 함께 보내겠노라. 사내는 그렇게 결심하고 귀향했다.

할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며 배우는 동안 그를 괴롭히던 망상은 조금씩 희미해져 깨어있는 동안은 그 감각이 거의 없어질 정도가 되었다. 이제 망상이 아니라 그저 꿈이 된 것이다. 사내는 자신의 선택이 맞았노라 생각하며 안도했다. 이대로 계속 지내다 보면 완전히 잊게 되겠지. 사내는 왠지 모를 섭섭함을 애써 무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동안 꾸지 않던 생생한 꿈을 꾸었다. 평소와 달리 악몽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잃고 검에 피를 묻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객잔에서 의형제들과 술잔을 나누는 꿈이었다.

사내는 오늘도 찬물로 세수를 했다. 하지만 좀처럼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거울 속의 자신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사내는 정신없이 일을 했다. 잡초를 뽑고 가지를 치고 잘 여문 농작물을 수확하는 동안 강렬했던 그리움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남은 것은 가득 찬 바구니를 보며 느끼는 성취감 뿐이었다.

그 때, 방문객이 찾아왔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찾아온 것은 중년인 한 명과 청년 둘. 가족끼리 캠핑 왔다가 길이라도 잃었나? 사내는 말 없이 그들을 둘러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셋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문득 잘생긴 청년이 헛기침하면서 입을 열었다.

“크흠, 지나가다 목이 말라서 그러는데 물 좀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아, 네. 잠시만요.”

“그리고 집이 예뻐서 그런데 안을 좀 구경해도 될까요?”

“하지 마 미친. 사이비냐?”

“동의한다. 막내야, 그만해라.”

물을 가지러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사내는 기시감에 문득 멈추어 섰다. 그리고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한 얼굴과 목소리, 막내라는 호칭.

사내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가까스로 평상심을 유지하며 컵에 물을 따라 가져다주자 산발을 한 청년이 도중에 가로채더니 한 번에 들이켰다.

“캬, 물맛이 좋네. 고맙수. 그럼 이만.”

산발 청년은 빈 물컵을 돌려주고는 우물쭈물 서 있는 잘생긴 청년을 단호하게 끌고 떠났다. 중년인은 사내를 한 번 보더니 가볍게 묵례를 하고 둘을 따라나섰다.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이 언젠가 보았던 모습과 겹친다. 잊은 줄 알았던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원래 나도 저기에…….

사내의 손에서 빈 물컵이 미끄러지더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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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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