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검마편)

[광마회귀] 비망록備忘錄 (검마편劍魔篇) -1-

NCP. 독고검마.

魔神寝宫 by 魔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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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備忘錄

[명사] 1. 잊지 않으려고 중요한 골자를 적어 둔 것. 또는 그런 책자.

1. 남자의 첫 기억은 목검에서 시작되었다.

부모의 얼굴도 목소리도, 형제가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고 그저 목검을 쥐고 서 있었던 순간만 기억이 난다.

질이 썩 좋지 않은 까슬한 목검을 쥐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머리 위에서 웅웅 울리는 어떤 목소리가 떨어졌다.

- 마음껏 서로를 때려죽여라. 살아남는 놈은 제자로 삼겠다.

아이는 함께 서 있던 다른 아이들이 두려움에 질린 채 서로의 눈치를 보는 것을 알고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왜 아무도 움직이질 않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목검의 거스러미를 더듬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터지며 장내를 짓누른 무거운 침묵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모두가 비명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아이가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 근처에 서 있던 다른 아이들은 뒤늦게 이변을 눈치채고 비명을 질러댔고, 그것을 들은 또 다른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터뜨리고…….

그 뒤로는 아수라장이었다. 두려움에 질린 어린아이들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향해 마구잡이로 목검을 휘둘러댔다. 당연하게도 한 번, 두 번 맞는 정도로 죽는 아이는 없었다. 있는 힘껏 휘둘러봤자 어린아이의 완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맞은 게 아파서 나오는 울음소리는 점점 더 거세졌는데… 몇 번을 더 맞고 바닥에 엎어진 아이들이 늘어나자 울음소리도 비명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 바닥에 엎어진 아이들은 모두 코와 입에서 피를 쏟고 있었고 간혹 머리가 움푹 파여 있기도 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숨을 쉬지도 않으면서도 눈은 뜬 채였다.

빛을 잃은 꺼먼 눈들이 살아남은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커먼 시선 속에서 아이도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차별적으로, 마구잡이로 휘두르진 않았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머리 속이 차분해서 침착하게 다른 아이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몸이 생각했던 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아서 힘들긴 했다. 아이도 몇 차례를 얻어맞고는 아파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지만 끝내 목검을 손에서 놓치지도 않았고, 바닥을 뒹굴며 울지도 않았다.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아이와 덩치가 제법 큰 아이였다. 아이보다도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덩치 큰 아이는 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유일하게 서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냅다 달려들었다.

수련하지 않고 훈련도 받지 않은 어린아이의 공격 따위가 위협적일 리 없었으나, 문제는 아이 역시 어떤 수련도 훈련도 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는 점이다. 그나마 달려오는 거리가 있었기에 아이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격이 떨어지면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타고나길 장사로 타고난 건지, 아까 어떤 아이가 덩치 큰 아이의 공격을 제대로 막지 못해 엉덩방아를 찧은 직후 머리를 한 대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정직한 공격을 예상한 아이는 막을 시늉을 하다가 옆으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목검이 제법 매서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때렸다. 자기 기세에 못 이겨 비틀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오금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덩치 큰 아이는 크게 휘청거리더니 철푸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아이는 목검을 높게 치켜들고 덩치 큰 아이의 머리를 빡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많이 아팠는지 덩치 큰 아이는 피할 생각도 하질 않고 엉엉 울며 머리를 감싸며 바닥을 뒹굴었다. 아이는 머리를 감싼 손과 팔까지 퍽퍽 때려댔다.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제 덩치 큰 아이는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와중에 큰 동작을 계속 반복했더니 팔이 후들거리고 손바닥에서 배어 나온 땀 때문에 목검이 몇 번이고 미끄러졌다. 그럴 때마다 목검을 고쳐 쥐었다. 열한 번, 열두 번, 열세 번. 몇 번을 움찔움찔 떨던 덩치 큰 아이의 몸이 드디어 축 늘어졌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헉헉, 숨을 몰아쉬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덩치 큰 아이의 머리를 후려쳤다. 열여덟 번.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으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므로 이것은 확인 사살이었다.

아이는 덩치 큰 아이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부드럽고 말랑했던 손바닥이 까슬한 나뭇결에 까지고 거스러미가 박히고 땀과 피에 젖어 엉망진창이었다. 그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손만 떨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몸이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숨이 막힌 것인지 가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까지 아파왔다. 하지만 진정시킬 생각이 들지 않아 그냥 그대로 앉아있자. 갑자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이는 옆에 놓아두었던 목검을 다시 쥐며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옷을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리가 군데군데 하얗게 센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사람과도 싸워야 하나?’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남자는 아이보다 키가 두 배는 커 보였고, 허리춤에 진검도 차고 있었다. 예전에 보았던 ‘강호인’들보다 더 무서운 분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순순히 죽어줄 수는 없었다. 아이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생각을 읽은 건지 어땠는지. 한참 동안 아이를 들여다보던 남자가 말했다.

“일어서라. 약속대로 제자로 삼아주마.”

아이는 아까 들렸던 목소리의 주인이 이 남자임을 알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아이를 본 남자가 몸을 돌려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아이는 남자의 뒤를 따랐다.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빠른 걸음걸이에 반쯤 뜀박질을 하며.

아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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