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악백의] 천악하중량고

포타 백업

"문주, 듣기로는 자네도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병증이 있다고 하던데."

"그런 편이지."

하오문주의 잔이 비워지는 것을 본 백의가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천악이 요즘 잡기를 익히고 있네."

무슨 잡기를 배우고 있는지 맞춰보라는 기색에 문주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내가 보기에, 천악 선배는 무공 외에는 세상사에 일체 관심이 없는 사내야. 관심을 둘래야 둘 수도 없지."

흥미롭다는 듯이 주시하던 백의가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문주. 그게 내 탓이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내 말이 틀렸나?

백의가 짧게 한숨을 쉬더니 잔을 채웠다.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애초에 그 놈은 무공을 익히는 것 외에는 전부 쓸 데 없다고 여기는 놈이다."

"글쎄, 내 생각은 다른데."

문주가 검지를 뻗어 잔을 살짝 두드렸다. 그러자 꽃잎이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듯이 백색의 기운이 잔 속에 물결을 일으켰다.

"무림맹주가 된 것이 나라면 강호에는 은둔 고수 자하서생이 등장한 것이나 다름없어. 바다를 보러 떠난 사나이, 동방에서는 서쪽으로부터 온 재해, 강호에서는 동쪽으로부터 온 빡빡이들의 대사형이자 천하맹의 맹주, 그것이 나야."

손가락이 닿은 곳으로부터 시작된 물결은, 이어서 흘러나온 온기에 밀려 온데 간데 없이 사그러들었다.

"허나 지금 무림맹의 서고에 드나들 수 있는 것은 똥싸개지. 어때? 전전직 무림맹주와 전직 총군사의 뒤를 이어 맹주가 몽연서생이 될 수 있다고 보나?"

잔에서 한기와 온기가 일으키는 소용돌이를 바라보던 백의가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서생이라는 자들은 한 가지 사상에 대해서만 깊이 파고드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도 않아. 장인은 장인을 알아본달까. 운향문주도 장인이었으나 내가 보기에 무공의 수준도 상당하고 세상에 관한 이해가 높은 사내였어. 그러니 어쩌면 세상의 이치가 보기보다 단순할지도 모르지. 결국은 만류귀종이란 뜻이야."

문주는 여전히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잔을 들어 천천히 비웠다.

"어렵게 찾을 것도 없어. 나는 뛰어난 검객이지만, 근래에는 신궁이 되었고, 이전에는 낫질의 달인이었지. 참고로 계두국수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그것은 적당히 넘기자고. 요리 외에는 모든 것을 잘 하는 사내, 그것이 나다. 물론 미인과도……, 젠장. 이것도 넘어가자고."

문주는 갑자기 인상을 팍 쓰고서는 잔을 채우자마자 순식간에 털어넣었다. 그러고는 캬, 좋다, 하면서 천박한 감탄사를 내뱉고는 다시 잔을 채웠다. 이번에는 백의의 잔이었다.

"너도 그렇지 않나? 내가 짐작하기론 예술의 경지가 상승한 단계가 무학과 무관하지 않을 듯한데. 아님 말고."

문주가 건네는 잔을 받아들면서 백의가 황당하다는 듯이 답했다.

"너는 대체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알아내는 것이냐."

"그러니 네가 아니라 내가 천하제일인이 된 거지."

백의가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한숨을 쉬며 잔을 입에 대었다.

"그렇다고 해도 천악 선배가 그림이라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크게 놀란 백의가 잔을 떨어뜨리자 그것이 탁자에 닿기 전에 문주가 재빨리 붙잡아 잔을 다시 채웠다.

"세상에 수많은 잡기가 있는데 어떻게 그리 확신할 수 있단 말이냐?"

대단히 한심하다는 얼굴로 문주가 혀를 찼다.

"사람이란 쉽게 변하지 않아. 선배가 갑자기 백응지로 내려와서 저 똥싸개와 금화루나 기웃거릴거라곤 생각하기 어렵지. 그러니 산장에서 혼자 사색하면서 즐길만한 것일테고."

백의가 더 설명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했다.

"천악 선배의 무학은 대단히 방대하고 깊지만 바라보는 세상은 매우 협소해. 한때는 노예, 그 다음엔 죄수였던 사내, 이제야 원하는 삶을 살게 된 사내가 바로 선배지."

"문주, 말을 함부로 하는군."

순식간에 서늘하게 변한 백의의 낯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두 사람의 역린을 모르지 않음에도 굳이 들춰낸 문주는 개의치 않는 듯 한 잔을 더 비워냈다.

"생각해보라고, 네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천악 선배도 마찬가지겠지.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 너는 천악 선배에게 그림을 가르쳐 본 적도 없고 가르칠 생각도 없을 거야. 그건 천악 선배도 마찬가지고. 그렇지 않나?"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그림을 그려보라고 한 것은 나고, 천악이 내게 수련을 강요하던 때도 있었다."

그 말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문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니, 생각난 게 있어서. 그보다는, 너는 흑선을 증오하면서도 배운 것이 그뿐이라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지금은 그 길에서 벗어났어. 당연한 일이야. 증오하는 이를 닮아가는 것 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맞다."

"그런데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 천악 선배는 그림을 익히기 시작했단 말이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마 네가 더 잘 알거야. 내가 보기에, 최근에 너는 외공이 더 발전한 것 같으니까."

한참을 말없이 술잔에 뜬 달을 바라보던 백의가 입을 열었다.

"발전한 것이 맞지, 그 호랑이 놈 정도는 들쳐 업고도 만장애를 오를 수 있다."

삼재를 업고 만장애를 오르다니 정말 경공에 미친 놈이나 할 법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던 문주는, 자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다만 삼재를 업고 경공을 펼친 것은 같으나 만장애 대신 한 번은 앞서 가는 자를 뒤쫓았고, 다음에는 바로 지금 눈 앞에 있는 미친놈에게 쫓기고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그 중 전자를 떠올리며 문주는 고개를 저었다.

"경험자의 입장으로 볼 때 선배도 쉽지 않을 걸."

그러자 백의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선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문주, 천하제일인이 되었다고 오만해졌나? 그래도 경공으로 나를 넘어서는 것은 아직 무리야."

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거 알아?"

"뭘."

"내 빡빡이 사제에게 들으니 동방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하더군."

호기심이 발동한 백의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가까이 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그러면서 단숨에 남은 술을 비운 문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살펴가시오."

"갑자기?"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하오문주이긴 하지만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어난 순간, 백의는 급히 몸을 굽혔으나 너무 늦은 행동이었다. 산짐승이 기척을 죽여 사냥감에게 다가가듯 백의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한 천악이 뒤에서 달려들어서 백의를 짓눌렀다. 정확히 말하면 두 팔로 백의의 목을 휘감고 등에 제 무게를 쏟아내는 형세였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천악이 백의의 등에 업혔다. 백의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네, 미쳤나?"

천악이 크게 웃더니 아예 두 다리를 백의의 몸통에 감아올렸다. 백의는 그를 떨쳐내려고 애쎴지만 상대는 은퇴했어도 삼재였다. 벗어나려 하면 할 수록 사지를 더욱 강하게 옥죄는 탓에 몸이 터질 듯했다.

"백가야, 네 수준으로는 무리다."

결국 포기한 백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보게, 대체 뭘 하자는 거지?"

천악이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만장애에는 볼 일이 없으니 산장으로 가자."

백의는 이 호랑이 같은 놈을 떼어낼 수 있는 방도를 재빨리 모색해보았다.

"육합은 어쩌고?"

천악은 무슨 의도인지 간파했다는 듯이 몸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애초에 길게 나눌 말은 없었다. 성취를 확인하면 그만이었지. 그러니 얍삽하게 머리 굴리지 말고 어서 발을 놀리도록 해라. 아니면 이대로 외공 수련을 할 셈이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은 백의가 경공을 펼쳤다.

순식간에 자하객잔이 멀어지고 인적이 드문 산길이 이어졌다. 차라리 녹림이라도 나타나면 그놈들을 찢어 죽이느라 이 놈을 떨쳐낼 수 있으련만, 이 정도로 경공을 펼치고 있으니 감히 접근하지 못할 터였다.

"백가야, 네가 잡 생각을 하는구나."

백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천악이 천근추로 중량을 늘렸기 때문이다.

"무슨 짓이냐?"

"육합이 천악하중량고의 복수를 해주길 바랄 것 같아서."

"뭐 이 개새끼야?

"아님 말고."

백의가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이래서 문주와 어울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불만인 듯 천악이 더욱 중량을 늘려서, 백의는 욕설을 내뱉으며 속도를 높였다. 오늘따라 환하게 길을 밝히는 달이 얄미워보이기까지 했다.

"천하오절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이제 저 문주가 천하제일인이 되었으니, 천하오절이 되려면 삼재의 바로 아랫줄이 되어야 해."

"필요없다."

"왜? 천하오절은 자신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착각하나본데, 경공도 이미 문주가 네놈보다 나을 것이다."

"그건 좀 기분이 나쁘군."

"좋은 마음가짐이다."

그러면서 백의를 더욱 짓눌렀다. 이러다간 허리가 부러질 것만 같았으나 천악도 천근추를 지속한 지 꽤 오래되었으니 슬슬 거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백의는 이를 악물었다. 상당한 거리를 순식간에 달렸으니 과연 먼 길을 빠르게 가는 데에는 동행이 있으면 된다는 선인의 말이 떠올리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반 시진 후, 백의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이겼다."

"무슨 헛소리지?"

"자네가 방심한 틈에 나는 낭떠러지로 향했네. 더 무거운 자네의 몸은 바닥에 충돌하여 박살이 났고, 자네가 충격을 흡수해 준 덕에 나는 무사히 살아 남아서 다시 절벽을 올랐다는 이야기지."

그말에 천악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뒤통수를 후려치자 백의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제서야  등짝에서 떨어진 천악이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널부러진 백의를 발로 툭 밀어서 뒤집었다. 의복과 머리카락이 온통 땀과 흙으로 엉망이 된 채로 백의는 한 동안 그렇게 누워있었다.

"또 얍삽하게 머리를 굴리는 군."

일어날 수 있는 걸 알고 있는데 왜 계속 드러누워 있느냐는 타박에도 백의는 길게 한숨을 내뱉고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던 천악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옷자락이 스치는 감각에 문득 백의는 문주가 한 말을 떠올렸다.

"자네는 그림을 왜 익히는 거지?"

그러자 천악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백가야, 머리를 맞았더니 드디어 정신이 나간게냐?"

"내가 시킨다고 들을 사내더냐?"

농을 던질 줄 알았던 천악은 말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새삼스럽게도 인적이 드문 길이었다. 나뭇잎 새를 바스락거리던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정도면 제법 잘 들어준 편이지."

그제야 백의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셨다. 문주를 만나고 온 탓인지 녀석이 했던 말이 자꾸만 마음에서 걸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그럼, 이제는 그만 둘 셈인가?"

내뱉으면서도 아차 싶었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천악이라면 큰 소리로 웃고는 후련한 얼굴로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백운산에 가둬두기만 한 것이 아니던가. 천악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백의는 천악을 붙잡아 둘 수 있는 수십가지의 계략을 떠올렸다. 이상하게도 서생들에게 애착을 갖는 성향을 이용해 서생들의 해결사라고 치켜세우며 그가 필요함을 강조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복수심을 이용하여 곁에 머무르도록 할 수도 있었다. 그 외에도 수십가지 방도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전부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 뿐이었다. 모두 천악이 이미 간파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백의는 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천악은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에 숨이 몇 번 흩어진 후에, 천악은 서서히 고개를 숙여 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달빛이 밝은데. 그럼에도 저를 내려다보는 천악의 얼굴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바람에 제멋대로 나부끼는 장삼이 퍽 원망스러웠다.

"백가야."

천악이 몸을 천천히 숙였다.

"그만 둔 지는 이미 한참 되었다."

사내는 손을 뻗었다. 굳은 살이 잔뜩 박힌 단단한 손이었다.

"나는 내가 하고싶은 대로 사는 사내다."

백의는 불현듯 자신이 왜 천악이 그림을 그렸으면 했는지를 떠올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매의 미소를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관해 아는 것도 많았고 더 알고 싶은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사매의 미소 만큼은 알지도, 알 수도 없었다. 허나, 알지 못했던 것은 그뿐이었던가. 백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냐."

백의를 일으키면서 천악이 말을 이었다.

"그래, 나는 훨씬 전부터 그렇게 살아왔다. 백가야, 네 놈은 어떻지?"

흙투성이가 된 장삼을 털어내면서 백의가 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런, 술은 내가 마셨는데 취하기는 자네가 취했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먼저 길을 나서는 백의를 뒤따라간 천악이 다시 재빨리 업혔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잔말말고 백운산으로 가자."

"미친 놈이."

투덜거리면서도 백의는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상념을 떨치는 데에는 경공이 도움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사매의 미소는 그릴 수 없어도 이놈의 웃는 낯짝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그는 왠지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새삼스럽게도 누군가를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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