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마광마] 접화(接花)
포타 백업
* 고어, 사망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자하는 홀로 절벽에 서 있었다. 높게 떠오른 태양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파아란 바다는 끝을 모를 듯 광활했다. 반짝이는 윤슬 아래로는 이따금 어떤 그림자 같은 것이 헤엄치기도 했다. 대붕이라 하기에는 고작 잉어 정도의 크기였다. 발밑으로는 철썩 철썩 처얼썩 파도가 부서지고 밀려오길 또 반복했다. 파도가 깎아낸 절벽을 타고 오른 바닷 바람에 낡은 장삼이 요란하게 나부꼈다. 파도와 광풍이 뒤섞여 내는 굉음에 귓가가 소란했다. 소금기가 엉긴 머리카락이 얼굴에 제멋대로 들러붙었으나 이자하는 가만히 서있었다.
푸르게 빛나는 거대한 유체로부터 태어난 불덩이가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향했다. 두 눈이 태양처럼 불타던 남자도 서쪽으로 돌아갔기에 이자하는 태양을 등진 석상처럼 바다만을 보았다. 마침내 추락하는 태양을 대지가 삼키자, 지평선으로부터 퍼지는 붉은 노을이 핏물처럼 서서히 그의 발 밑까지 스몄다. 태양이 길게 흘려내는 혈흔을 지그시 밞으며 이자하는 그제야 바다로부터 시선을 떼어냈다. 달조차 겁을 집어먹고 숨어버린 시커먼 밤이었다.
커다란 물고기는 없었다. 동행도 없다. 광승은 저 멀리 서장으로 돌아갔으나 저는 그 어디든 돌아갈 곳이 없었다. 점소이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었지만 광인에게는 돌아갈 데가 없었다. 광승에게는 기다리는 이가 있지만, 광인을 기다리는 이는 없었다. 그를 이끌던 스승이 떠났기 때문에 이자하에게는 이끌어 줄 이가 더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운명에 이끌리듯이 강호로 돌아갔다. 따를 이는 없으나 죽여야 할 놈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발이 닿는 대로 걸으며 죽일 만한 놈을 죽였다. 그건 나쁘지 않았다. 한 놈을 죽이면 더 죽일 만한 놈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 놈을 죽이면 또 죽여야 할 놈이 나타났다. 죽여 마땅한 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방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자하는 신나게 죽였다. 죽이다 도망가고, 도망가다 죽였다. 도망가면서 똥도 싸고 밥도 먹은 다음에 쫓아가서 죽였다. 잠은 잘 못 잤다. 대신 시간이 날 때마다 운기조식을 했다. 죽일 놈들이 언제 찾아올 지도 모르는 와중에 그러고 있다 보면 기혈이 뒤틀리곤 했다. 그러면 뒤틀린대로 또 죽였다. 어떤 날은 밥을 먹다가도 죽였다. 술을 마시다가도 술병을 깨서 죽였다. 아직 똥을 싸면서 죽여본 적은 없다. 그 정도의 경지에 있는 놈이라면 별로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대신에,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휘두르는 미친 원숭이 답게 그는 죽이면서도 금구소요공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면 다음 번엔 조금 더 잘 죽일 수 있었다. 똥을 싸면서 죽일 수는 없지만 무학을 고민할 수는 있었다. 그러면 똥도 더 잘 나오고 죽일 놈들도 더 개운하게 죽일 수 있다. 머리 끈부터 신발까지 뜨끈한 피로 흠뻑 젖도록 두들겨 패고 나면 옷은 넝마가 되어있었다. 누가 보아도 광인의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이제 잘 싸우는 닭이 되었으니까.
"싸움 닭이면서 미친 원숭이인 사내, 그것이 나다."
"나다……."
"다……."
"……."
" …."
메아리마저 바람결을 타고 흩어져서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진다.
대붕은 없었다. 그쯤에서 이자하는 해안선을 따라 걷기를 그만 두었다. 대붕은 없다. 절강의 바다에는 광승이 없고, 대붕도 없다. 광승은 대붕을 찾아 떠난 것일까?
"그렇다면 여기 대붕 만한 물고기가 있소. 보시오."
그리 말하던 이자하는 제가 발견한 것이 방금 전 죽인 놈의 썩은 물고기 같은 눈깔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바다는 원래 이렇게 붉은 빛깔도 아니었던 듯하다. 본디 어떤 빛깔이었더라? 이제는 익숙해진 두통 속에서 이자하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허나,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떠오르는 것이라곤 그저 시끄럽고, 소란하고, 소금기에 끈적거리는 감각과 지독한 외로움 뿐이었다. 머리통이 바스러질 것만 같은 통증 때문에 결국 그는 여기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똥 싸면서 죽이는 것보단 자면서 죽이는 게 더 쉬웠다. 맞다, 그는 자면서도 죽일 수 있는 사내였다.
반복되는 살육의 나날 속에서 때로는 그도 이렇듯 깜박 눈을 붙일 때가 있었다. 꿈인지 심마인지 모를 곳에서는 죽였던 놈들이 다시 나타났다. 한 놈씩 나타날 때도 있고, 떼거지로 몰려들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 놈들에게 머리채를 붙잡혀서 바다에 끌려 들어갈 때도 있었고, 설원에서 발가 벗겨진 채로 둘러싸여 유린 당할 때도 있었다. 업보라고 받아 들이기엔 기분이 엿같았기 때문에 이자하는 기어코 또 다시 죽였다. 애초에 죽일만 했으니까 죽였을 것이다. 그는 무기도 없으면서 맨 손으로 사지를 찢어 발기면서 악귀처럼 죽였다. 죽이고 또 죽였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광승이 나타나서 이제 너도 죽일 놈이라며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휘둘렸다. 스승을 만난 이자하가 피에 흠뻑 젖은 얼굴로 하얗게 웃었다.
"이제야 오셨소?"
잠에서 깨자마자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노려본 이자하는 저걸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혹시 마기(魔器)인가?"
생각해보니 광승이 저에게 좋은 걸 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저를 두고 서장으로 돌아가는 길이지 않나. 말도 더럽게 안 듣는 놈일랑 내버려두고 가족 같은 이들이 있는 곳으로. 그런 곳에 마기를 들고 갈 수는 없으니 어디 한 번 엿이나 먹으라면서 제게 넘긴 걸지도 모른다. 이자하는 박수를 쳤다.
"그렇군, 역시 마기였어."
입으로 중얼거리고는 고개도 두어 번 주억거렸다. 분명 그렇다. 이자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마기도 보통 마기가 아닌 모양인지, 그 단단하다는 무기들과 맞대어 휘둘러도 도무지 부러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버렸다간 화를 입을지도 모르니 결국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걸 지니고 있으니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기를 넘긴 광마는 잡부밀교의 대종사가 되어 서장으로 돌아갔고, 마기를 넘겨받은 점소이는 다음 대의 광마가 되어 강호로 돌아왔다.
광마가 된 이자하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늘 그렇듯이, 눈꺼풀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에서 객잔이 불 붙는다. 그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들어 불타는 객잔을 향해 뻗었다. 그 끝에 불길이 옮겨 붙자, 봉화처럼 타오르는 무기를 크게 휘둘렀다. 봉의 궤적을 따라 붉게 빛나는 고리가 허공에 그어진다. 광마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발차기를 하며 휘두르고, 펄쩍 뛰어오르면서 휘두르고, 몸을 빙그르 돌리면서 휘둘렀다. 빛이라곤 타오르는 불길 뿐인 세상에서 그는 한바탕 신명나게 불놀이를 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희미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불이야!
광마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했다.
"아니야, 불놀이야."
시커먼 어둠을 모조리 살라버릴 기세로 그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제멋대로 휘둘렀다. 머리카락이 불길에 닿고 옷자락이 타들어가도 그는 망나니가 칼춤 추듯이 불을 휘둘렀다. 기어코 터럭이 타들어가고 거죽이 녹아내리는 악취가 들끓었다.
그때, 불길 속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 그대는 무엇의 복수를 하고 있는가.
그것 참 병신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광마는 춤을 멈추지 않았다. 모조리 다 태워버릴 것이다. 광마는 이제 무기를 휘두를 손가락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상관없었다. 제 몸이 불덩이가 되었으니 그는 불타는 몸을 무기 삼아 이리저리 휘둘렀다.
- 그대는 무엇의 복수를 하고 있는가.
또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광마가 낄낄거리며 답했다.
"점소이의 복수."
타닥타닥 객잔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자글자글 피부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광마는 녹아내리는 입술을 열어 이를 허옇게 드러내며 웃었다.
"점소이의 복수, 일하는 자들의 복수, 밑바닥 인생들의 복수."
녹아내린 피부가 광마의 자취를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제 광마는 죽였던 놈들을 쫓아 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왁! 이미 뒈진 놈들이라 그런지 죄다 몰골이 형편 없었다. 배가 뚫려 내장이 흘러다니는 놈, 상반신이 비스듬히 잘려서 아랫도리만 돌아다니는 놈, 몸이 좌우로 절단 나서 외 다리로 뛰어다니는 놈. 저처럼 대가리에 불이 붙은 놈…….
"이런."
광마는 손가락의 흔적만 남은 팔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행히 아직 터럭이 남아 있었다.
"홀라당 불탄 대머리, 그것은 내가 아니다."
- 만약에……, 만약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광마는 외다리로 뛰어다니는 놈을 태워 죽이고 있었다.
- 어떤 의원이, 흑도의 원한을 입어 멸문을 당했다면.
광마는 그것 참 흔한 사연이라고 생각했다. 아랫도리만 덜렁거리는 놈을 짓밟은 다음, 내장 흘리는 놈을 으깨면서 그가 답했다.
"그러면 의원의 복수도 추가해야지."
발 밑에 부서져있는 몸뚱아리를 불쏘시개 삼을 요량으로 불타는 객잔을 향해 걷어차자, 이미 뼈대만 남은 건물이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 그대가 은혜를 입은 적이 없는데도?
이거야 말로 정말 병신 같은 질문이었다. 광마는 낄낄거리다가 자신에게 아직 주둥아리가 남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의원이면 누군가를 살렸겠지. 그것이면 충분하고도 남소."
불 붙은 재가 꽃처럼 흩날렸다. 이윽고 목소리가 웃었다. 정확히 말하면 웃음 소리인지 울음 소리인지 모를 기묘한 소리를 내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광마도 웃었다. 미쳐버린 두 사내의 웃음이 재를 뒤집어 쓴 어둠 속에서 뒤엉켰다.
*
“너는 세상의 온갖 독을 연구했다지.”
그러자 탁자에 마주 앉은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광마의 얼굴이 훅 가까워 지는 것이 호기심이 동한 모양새이다.
“그 중에 가장 지독한 건 어떤 놈인가?”
독마는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두 개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 너머로 무언가가 늘 타오르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여 독마는 묵묵히 두 개의 잔에 차례로 술을 따랐다. 그 무언의 답변에 광마가 낄낄거리며 잔을 비웠다.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해서 해질 무렵 미친 듯이 노래 부르며 돌아왔네.”
흥이 돋는지 탁자를 두드리면서 광마는 계속 노래를 불렀다.
“선계에는 속물이 너무 많기에 유희하며 인간 세상에 머물고 있지.”
서너 번 더 반복하면서 어깨를 들썩이던 광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인도 속세로 떨어뜨리니 과연 최상의 독이라 할 수 있겠군.”
그러면서 술병을 들고 독마의 잔을 채워주었다.
“독마에게 독을 권하는 사내, 그것이 나다.”
광마는 낄낄거리며 독마의 잔에 제 것을 소리나게 맞대고는 한 입에 털어넣었다. 반쯤 찢겨진 소매가 너덜거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독마도 이내 제 잔을 비웠다. 속에 품은 강침은 잘 갈무리 했는데도 가슴께가 공연히 따끔거렸다. 광마와의 대작은 주로 이런 식이었다. 어느 날 광마가 불쑥 찾아와서는 대뜸 술을 권하나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은 대체로 없었다. 술 상대 중 하나는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불가능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할 말이 별로 없는 데다가 인간을 혐오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익은 매실주를 비우면서 독마는 최상의 독에 대해 생각했다. 달고도 쓴 것, 향긋하면서도 여운을 지독하게 남기는 것. 그 어떤 고독보다 강하면서도 바람처럼 부질없는 것. 바다처럼 깊으면서 신기루처럼 덧없는 것.
“이번엔 누굴 죽일 셈이지.”
광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멋대로 엉킨 터럭에서는 여전히 누군가의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죽여야 할 놈이 있으면 죽일 뿐인데.”
“그렇겠지.”
죽여야 할 놈 중에는 제 이름도 있느냐고, 그렇게 묻는 대신 독마는 술잔에 담긴 달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그 안에 붉은 꽃잎이 떨어져 내렸다.
사랑하는 이를 모두 잃고 악귀가 된 사내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모용백이라면 복수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독마는 무엇이라 답해야 할까.
가만히 눈을 감으면 세상에는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러면 그는 하릴없이 빗물처럼 흐르는 슬픔에 흠뻑 잠겨 한 없이 가라앉았다. 숨이 잠겨 죽을 즈음, 그를 살린 것은 분노였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 삶의 목적은 복수 뿐, 다른 답은 없었다. 대나찰, 십이신장, 그리고……. 분노라는 극독에 중독되어 떠돌던 악귀는 먹이를 찾아 헤매고 또 헤맸다. 그리하여 마침내 복수할 대상이 남지 않게 되자, 독마는 제가 선 곳이 지옥도임을 알았다. 기나긴 장마 속에서 숨이 막히도록 가라앉아도 그를 건져낼 복수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이도, 복수할 이도 모두 잃은 악귀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답을 잃은 채 심연을 헤매던 독마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복수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때부터 독마는 그가 죽였던 자들과 조금이라도 연결고리가 있는 이들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 자라면 복수하러 오지 않을까. 오늘 밤에 오지 않을까, 아니면 내일 동이 틀 즈음에 급습을 할까. 그렇게 기다리다보면 독마는 하루를 살아남았다.
그가 익힌 무공이 이화접목(移花接木) 신공인 탓일까. 상대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 방향을 틀어 해치웠듯이 독마가 죽인 자들의 운명이 오히려 저를 살리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고. 독초를 다듬으면서 독마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마치 모용백이 살린 자들의 운명이 모용의가를 몰살하는 것으로 돌아왔 듯이.
또 다시 하루를 살아남은 복수 중독자가 광마라는 별호를 가진 이에게 흥미를 보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독마에게 복수를 하러 올만한 인물 중 하나를 광마가 이미 죽였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독마는 광마가 궁금했다. 대체 뭐하는 놈일지. 어쩌면 이 자도 저에게 복수를 하러 오지 않을지. 다행히 광마는 무림공적에 오를 정도로 악명이 높아서 그 행적에 대해서도 금새 알 수 있었다. 성격이 지랄맞다는 것도, 수틀리면 흑도고 백도고 따지지 않고 죽이고 본다는 것도, 그 손에 죽은 자들이 누구인지도.
두 손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독마에게는 시간이 충분히 많았다. 그리하여 또 하루를 살아남은 독마는 이번엔 광마의 손에 죽은 자들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는 동안 하루를 살아남고, 또 살아남고, 또 살아남았다. 그러던 중 광마가 마침 남화 지방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독마는 강침을 챙겨서 길을 나섰다.
왜 찾아갔을까.
세상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에 엉망으로 찢긴 우산을 들고선 독마는 생각했다. 투명하게 빛나던 빗물이 죽어가는 사내를 적시고서 붉게 변하여 땅 바닥으로 흘렀다. 독마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나는 왜, 이 자를 찾아 온 걸까. 입김이 피어오를 때까지 독마는 그저 가만히 광마를 내려다보았다. 광인이 거기에 있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곧 죽거나, 그렇지 않아도 완전히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다만 주화입마에 들었음에도 살기 가득한 눈 안에서는 무언가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독마는 언젠가 이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거울 속에서 불타는 눈을 보았을 때 그는 모용백이라는 이름을 버렸다. 그래서 독마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의 복수를 하고 있느냐고.
깊은 상념에 빠진 독마는 저도 모르게 품을 매만졌다. 그때 손에 들었던 강침이 아직도 제 품에 있었다. 문득 눈을 들어보니 술에 취한 광마가 알아듣지 못할 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지런히 잔을 비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뭘 하냐는 듯이 그가 제 앞에 든 잔에 눈짓했다. 잠시 고민하던 독마는 강침을 꺼내드는 대신, 죄업을 손에 담고는 물었다.
“그때 자네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잔에 든 달이 밝아서 독마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광마가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지.”
“옳다.”
독마는 잔을 비웠다. 그는 이미 수도 없이 돌이켰다. 그 날 대나찰을 살리지 않았더라면. 그 전에 십이신장을 치료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금산상단과 연을 잇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어쩌면 그때라도……. 그런다고 가슴 속에 내리는 비가 그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후회와 절망이 더욱 거센 빗줄기로 내렸다.
독마의 잔에 술을 채우며 광마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으니, 가끔 공연한 생각을 하곤 하지. 예를 들면…….”
광마가 제 잔을 단번에 비우고는 곧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만약 어떤 기연이 일어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재촉하는 눈짓에 독마도 잔을 비웠다. 그러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광마가 또 다시 술병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 날이 오면,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지. 물론 나는 말이 계속 바뀌지만, 내뱉은 말은 지키는 사내다.”
어디선가 불어온 미풍에 실려온 꽃잎이 술잔에 들러붙었다.
“그때는 너도 독마라는 별호를 버리고 살아가도록.”
잔에 술을 채우니 두둥실 떠오른 꽃잎이 술잔 안에서 소용돌이 친다. 너울거리는 심사를 헤아려보고 있는데, 광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그러고보니 여태 통성명을 못했군.”
제멋대로 술잔 속을 노니는 붉은 꽃잎이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독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용백.”
“모용 씨라, 흔치 않은데. 게다가 백(白)이라면 지나치게 의원같은 이름이야.”
모용, 백. 모용, 백. 모용, 모용, 모용, 백. 그렇게 몇 번을 중얼거리더니 광마는 다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듣기 좋은 저음에 귀를 기울이며 독마는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반 시진 즈음 지나자 어스름하게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독마는 낮을 거닐 수 없었기에 광마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디로 향할 셈인가.”
그 말에 광마가 쓸데 없는 걸 묻는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때려죽일 놈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야지.”
그러자 독마가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광마와 눈을 마주쳤다. 밤새 술을 들이키던 이의 눈빛은 어느새 다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불은 탈 것이 있어야만 태울 수 있다. 그럼, 모조리 다 태우고 난 후에 저 불은 어떻게 될까.
복수의 불꽃이 사그라들자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남자가 광마에게 물었다.
“모두 다 때려 죽이고 나면?”
광마는 잠시 턱을 두드리면서 고민하다가 답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 때려 죽일 놈들은 넘쳐나니 부지런히 죽여도 오히려 시간이 부족하지 않나? 그러니 생각할 필요가 없지. 게다가 어차피 나는 돌아갈 곳이 없어. 오래 전에 집이 불타 없어졌거든.”
“잘 모르겠군. 나는 집은 있으나 머무를 사람이 모두 죽어 없어졌으니까.”
“그것 참 꿈자리가 사나운 집이네.”
“그런 편이지.”
광마가 소리내어 웃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대로 별 다른 인사도 없이 대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라도 심으면 어떤가? 기왕이면 꽃도 피고 과실도 열리는 것으로. 꽃이 필 때는 나비가 찾아 들고 과실이 열리면 청설모라도 찾아올 테니.”
“고려해보지.”
광마가 떠나고 술자리를 정리하던 독마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텅 빈 모용의가는 그야말로 폐가와 다름없었다. 깨끗이 씻은 술잔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탁자까지 깔끔하게 닦은 후, 독마는 오랜만에 잠을 청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이었다.
하루를 꼬박 잠으로 보낸 독마는 이른 새벽에 산을 올랐다. 다만 독초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꽃도 캐고 매실도 따올 생각이었다. 정원에서 말라 비틀어진 고목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매화목을 심었다. 집안 곳곳에 남은 혈흔을 지워내지는 못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그럭저럭 봐줄만 했다. 계절에 맞는 꽃을 구해다가 심고 잡초를 뽑고 거미줄을 걷어내다보니 시간이 빨리도 흘렀다.
정원의 구성이 몇 번인가 바뀌었을 즈음, 낙엽을 빗자루로 쓸어내면서 독마는 잠시 대문을 바라보았다. 광마는 돌아갈 곳이 없다고 했고, 독마에게는 돌아올 이가 없었다. 허나 미친 놈도 때로는 고단하여 어쩌면 그만 두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 혹은 진작 지쳤으나 한 몸 뉘어 쉴 곳이 없어 멈추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독마는 정원을 말끔히 손질했다.
저 문을 열고 들어올 이가 꽃을 안주 삼아 매실주를 마시면 좋을 것이다. 그러다 얼큰하게 취하면 또 이름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춤이라도 출지 모르겠다. 그러자 얼굴이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아마 면경을 들여다 보면 몹시 우스운 꼴을 한 자신을 보게될 듯하다. 어쩌면 혹자는 이 괴상한 표정을 실소라고 부를지도 모르지. 독마는 스스로를 말라 비틀어진 고목이라 여겼으나, 아무래도 광마는 죽어가는 나무에 매화를 꺾꽂이한 모양이다. 정말이지 새삼스럽게도, 광마는 미친 놈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저 또한 광인이었다.
*
매화가 흐드러지던 어느 날에 독마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았다. 자줏빛 노을이 홍매화와 어우러져 제법 장관이었다. 광마가 마교의 천라지망에 쫓겨 만장애에서 생을 마쳤다던 소식을 들었을 때도 독마의 매실주는 익어가고 있었다. 독마는 탁자에 잔을 두 개 올리고, 매실주를 그 안에 하나씩 채웠다.
“광마, 자네가 알고 있을진 모르겠네만. 이 향긋한 매실에도 그 내밀한 씨앗의 껍질에는 독이 있다네.”
독마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고는 마치 대작하듯이 앞으로 내밀었다.
“기억하나? 일전에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독이 무엇인지 자네가 물었지. 그때 나는 분명 답을 주었건만.”
단번에 비워진 잔이 위태롭게 탁자를 향해 추락했다.
“자네가 죽여야 할 놈 중에는 이 독마도 있던 모양이야.”
독마는 마주 놓인 잔을 들어 이번에도 단숨에 들이켰다.
“네가 내게 준 것이 바로 그 독일세.”
먼저 놓였던 잔 위로 새로이 비워진 잔이 추락한다.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산산히 부서지는 잔을 바라보던 독마가 자조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받아 마셨다네. 그것도, 흠뻑 취할 지경으로.”
독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는 만월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으나, 빌어야 할 소원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장마가 쉴새 없이 그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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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무림맹에서는 어부지리로 무림 공적을 셋이나 제거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광마는 마교에게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내이다. 허나 독마가 색마와 동귀어진 할 것은 저 무림맹의 대군사조차 예측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무림맹주 임소백은 매실차를 마시며 악인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번 생에서 죄업을 많이 쌓았으니 다음 생에서는 홧병에나 시달리면서 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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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자하가 부른 노래는 김가기가 지은 失題의 구절을 차용한 것입니다.
* 삶의 의미를 잃은 독마에게 광마가 삶의 의미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에서 갈겨 봤습니다... 모용백의 무공이 이화접목인 거 넘 좋지 않나요... 다른 나무 가지를 잘라다가 꺾꽂이 한다는 의미인 게 넘 찰떡인 부분...
* 결말을 처음에는 매화에 목을 메는 독마로 정했는데 생각해보니 독마의 생의 목적이 복수였다는 걸 생각하면 역시 광마에 대해서도 복수를 하지 않았을까 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색마 미안... 그러고보니 너희 셋 지독하게 얽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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