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랑자하] 설원(웹공개분)

2023.4. 발행

“나는 만장애로 간다.”

창백하게 질린 몽랑을 등에 업은 이자하의 말에 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양가의 복수인걸까. 아니면 선대와 마찬가지로 극음의 기운을 얻으려 하는 것인가. 몇 가지 가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으나 아마도 답은 범인의 뒤를 쫓는 검마와 귀마가 들고 올 터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으니 생각을 비워야 했다.

이자하의 신형이 만월을 등지고 솟아올랐다. 무거운 심상과는 별개로 가벼운, 그러나 평소보다는 무게가 실린 움직임이었다. 타인의 체온이 더해져야 할 등줄기에는 외려 찬 기운이 맴돌아서 이자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 등에 업힌 이는 덩치만 컸지 머리나 주둥이가 단순한 것이 어린 애와 별 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얼음장 같이 식은 주제에 녀석은 아이처럼 온기를 찾아 팔다리를 감아들었다. 그 꼴이 우스워서 이자하는 되는대로 지껄이면서 염계의 기운을 몸에 둘렀다.

“조금만 버텨라, 똥싸개야. 그러고 보니 배때기가 차가운데 설마 지리는 건 아니겠지. 다 컸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도록.”

그러나 평소처럼 대거리하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서늘한 침묵이 그를 휩싸고 돌았다. 불온한 고요에 잠식되지 않도록, 이자하는 무공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평소 자신이 두주불사에 계략과 심리전에 능하며 미인계도 일절 통하지 않는 다재다능한 고수이지만 특히나 경공이 뛰어나다고 혼자서만 생각해왔으므로, 이번에는 경공에 더욱 집중했다. 혹자는 경공이 일종의 달음박질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는 보법이나 신법이라면 모를까, 경공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발상이다. 애초에 경공은 경신공. 즉, 몸을 가볍게 하는 무예이다. 몸이 가벼우면 몸짓에 힘을 허투루 들이지 않아도 된다. 이에 보법을 더하면 적은 힘으로 더 멀리, 더 높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똥싸개의 무공을 가늠하면, 경공은 별 볼일 없으나 체술이나 보법과 신법이 봐줄만 했기에 어느 정도 버텨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경공의 경지를 올려야 할 시점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번에는 색마도 정신을 차렸을 거다. 경공이 조금만 더 발전했더라면 이렇게 형편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꼭 이렇게 처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지. 분명 입 밖으로도 내었던 듯한데, 여태 아무 말이 없다. 이제는 숨소리마저 서늘한 것이 선뜩하여 이자하는 염계의 기운에 더욱 힘을 실었다. 어린 애처럼 매달린 이에게 그가 달래듯 말했다.

“참아라. 만장애에 가면 괜찮아질 거다. 물고기를 잔뜩 잡아다 먹여주마. 내가 요리에 뜻이 없긴 하나 계두국수보단 맛이 좋을 테니. 그러니 만장애로 가자.”

흐린 신음을 대답으로 삼고선 그는 구름을 뚫을 기세로 높이 솟구쳤다. 몸을 어찌 가볍게 할 수 있던 말인가. 명줄이 끊긴 게 아니고서야 혼백에 거추장스럽게 매달린 육신을 떼어낼 방도가 없다. 다만 무게란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때에는 그 존재조차 모를 만치 가볍다가도 다른 때에는 육신을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해진다. 마음의 무게를 다스리고, 그 원리를 육체에 적용한다. 경공의 묘리는 이토록 단순하면서도 광오하다.

그는 등에 진 이를 생각했다. 이 똥싸개 놈은 마음을 다스리기는 커녕 이리 저리 휘둘리기나 하고 있으니 이래서야 경공이 발전할 일이 요원했다.

“한심한 놈.”

이자하의 입새로 다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였다가 천금처럼 무겁게 하길 자유자재로 하여도 갈 길이 아직 멀기 때문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도 경공에 뛰어나긴 하나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준은 못 되었다. 그러니 염계를 둘렀음에도 두 사람 분에 한참 못 미치는 온기 따위에 신경이 쓰이고야 마는 것이다. 보법이 흔들리지 않도록 집중하는 이자하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만장애가 이리도 멀었던가.

쾌당에 속하던 광마 시절보다도 경지가 몇 단계나 올랐음에도 이 순간만큼은 몸뚱아리가 거추장스러우리만치 무겁고 느려 터져서 속이 끓었다. 경공의 기본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하나, 애초에 가능했다면 그는 진즉 금구의 경지에 달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생의 이자하는 강철의 거북이가 되지 못한 대신 광마가 되었던 경력이 있다. 그러니 초조한 마음도 모르고 점차 늘어지는 숨소리에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하여 이자하는 그만 역정을 내었다.

“야 이 새끼야, 이 멍청한 놈아. 누구는 똥줄이 타게 뛰고 있는데 태평하게 쳐 자고 있냐. 때려눕히기 전에 눈을 떠라.”

그러나 업힌 이는 말이 없었다. 이자하는 한숨을 쉬었다. 땅거미는 진작에 내려앉았으나 희한하게도 세상이 온통 시뻘겋다. 눈깔은 멀쩡한데 이상하게도 시야가 아찔하여 이자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벌……. 나 누구랑 얘기 하니?”

대답 대신 돌아오는 건, 나뭇잎을 모조리 떨궈내서 앙상한 꼴만 남은 겨울 나뭇가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저를 스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나 옷깃 따위가 나부끼는 소리, 발밑에서 차갑게 얼어붙은 자갈이 튀기는 소리, 소리, 소리. 그러니까 죄다 죽은 것들이 내는 비명이었다. 그건 이자하에게, 아니 광마에게 익숙한 소음이었다. 모근이 바짝 서고 단전이 제멋대로 뒤엉키는 감각에 이자하는 입술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 말했다.

“똥싸개야. 날도 추운데 왜 꽁꽁 얼어서 지랄이야? 응? 말을 해봐라. 이젠 주둥이까지 얼어붙었냐?”

거칠게 내뱉는 이자하의 입에서 허연 기운이 제멋대로 흩어졌다. 그리고 또 다시 흩어지고, 다시금 흩어졌다. 허나 기감을 높여 보아도 등에 업힌 이에게서는 도무지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여 그는 달빛을 등에 업고는 재차 하문했다.

“야 이 새끼야. ……죽었냐?”

만월을 등진 이의 낯빛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서늘한 바람이 머릿결을 스치고 지나갔다. 세상이 서서히 느려지고, 멈추었다가, 역행한다. 정신이 아득한 와중에 똥싸개의 빈정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개새끼야. 죽긴 누가 죽어?”

이자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목소리가. 그는 조금 더 생각하고는 알았다는 듯 박수를 쳤다.

“아, 이건 내 목소리구나.”

이자하는 웃었다. 희게 이를 드러내고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다가 곧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등짝이 서늘한데, 내가 뭘 지고 가는 거지? 아하. 송장이구나. 그런데 이걸 내가 왜?”

고개를 갸웃거리던 광마는 짊어지고 있던 것을 차가운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보다 체격이 크고 근육이 다부진 것에 잠시 감탄을 했다. 게다가 낯짝이 반반하기까지 하니 갑자기 분노가 일어서 송장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눈썹까지 단정하게 정리한 꼴이 더더욱 재수 없게 느껴지는 가운데, 이 재수 없음과 짜증남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져서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낯짝인데.”

광마가 턱을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낯짝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그래. 딱 색마 같은 느낌인데. 그제야 광마는 알았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아하, 좌사로구나. 그런데 왜 이리 젊어지셨소? 끝내주는 영약을 처 드신 모양이군. 거 좀 나눠 먹읍시다. 그런데 왜 영약을 처먹고도 송장이 되었소?”

반로회동이라도 한 모양인지 아무리 보아도 약관을 갓 넘긴 듯한 얼굴을 보며 광마가 물었다. 당연하게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참을 멀거니 바라보던 광마는 신기한 듯이 좌사의 뽀얀 뺨을 만져보기도 하고, 윤기 나는 터럭을 매만지기도 했다. 반로회동 씩이나 했는데 자빠진 걸 보면 대단한 고수라도 만난 모양이지, 하고 중얼거리던 광마는 이내 싫증이 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좌사의 송장을 가져갈 필요는 없지.”

몸을 일으키자 눈에 들어온 밤하늘이 새삼스레 광막하였다. 그리하여 한가로이 달빛을 바라보던 광마는 문득 생각했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었더라? 가야할 곳이 있었는데. 그와 동시에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가야할 곳이라니? 퍽 이상한 말이었다. 왜냐하면 객잔이 불탄 순간부터 그는 가야할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마치 그런 장소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광마는 어떤 단어를 떠올렸다. 만장애. 그래, 만장애. 거기는 왜? 광마는 중얼거렸다.

“좌사, 만장애, 좌사, 만장애, 좌사, 만장애. 좌사…… 아 그렇지.”

광마가 박수를 치고는 좌사를 가리켰다.

“내가 저 색마 놈의 천라지망에 쫓겨서 만장애에서……!”

사색이 된 이자하가 황급히 몽랑을 끌어안았다. 다행히 미약한 숨결이 간신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광증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아니다. 그는 손을 들어 제 뺨을 갈기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누구인가.”

이자하라는 자는 점소이 시절부터 대체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라고 여겨왔으나, 때로는 과대평가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만장애에 닿을 때까지 이놈이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대해 정정하기로 했다. 버티지 못하는 쪽은 몽랑이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다시금 끓어오르는 광증에 그는 다시 한 번 제 뺨을 후려쳤다. 한심하군. 맞다. 심마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자하는 상황이 이 지경이 된 원인을 정리하기로 했다. 자신은 본디 근본적인 것에 집중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자, 생각을 해보자고. 이놈이 왜 이 꼴이 되었나.”

답은 쉬웠다. 사내의 몸으로 빙공을 무리하게 사용한 탓이다. 그렇다면 왜 빙공을 무리하게 사용했는가? 아직은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거나, 방심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시간을 돌릴 수는 없으니 이미 몸에 든 한독을 내보내는 방법을 써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독을 몰아낼 수 있는가?

이 부분에서 이자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처음 생각한 방법은 만장애의 영물을 삼키는 것이다. 그러나 만장애까지 갈 수가 없다면 다른 방법은 무엇이 있는가. 이미 몽랑이 사용했던 방법이 있다. 물론 그 방법이라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여인을 품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검마와 같은 고수의 도움을 받는 쪽이다. 그리고 여기엔 품을 여인도 없고, 이놈을 죽이면 죽였지 죄 없는 여인이 그런 짓을 당하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그러니 실은, 방법은 오로지 하나 뿐이다.

이자하는 몽랑을 등에서 내려 바로 눕히고는 그 위로 손을 뻗었다가 잠시 멈추었다. 양기를 불어넣어야 할까. 어쩌면 음기를 채워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검마에게 물어봐 둘 걸 그랬나? 모르겠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다만 평소 두주불사에 계략과 심리전에 능하며 미인계도 일절 통하지 않는 다재다능한 고수이지만 특히나 경공이 뛰어날 뿐 아니라 이제는 막대한 내공에 음양의 기운을 두루 갖추기까지 했다고 혼자서만 생각해왔으므로, 이자하는 다시 한 번 뺨을 후려쳤다. 사실 검마가 어떻게 한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꺼림칙한 점은 그때의 검마는 진기마저 손상을 입었다는 거다. 

이자하는 가만히 눈을 들어 몽랑의 낯짝을 헤아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역시 오성에 있어서는 검마보다는 자신이 한 수 위라고. ……두 수 일지도 모른다고 혼자서만 생각해본다. 그러니 나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놈도 가능한가?

손끝에 닿는 촉감이 지나치게 차가워서 이자하는 한숨을 쉬었다. 기운을 불어넣어본들 받아들이는 이가 갈무리하지 못하면 외려 두 사람이 모두 위험해진다. 스스로가 강호의 지략가라고도 혼자서만 생각해왔으므로, 그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걷어내보기로 한다. 제 실력이 검마보다 몇 수 아래라 한들 상관없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뭐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또한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오성이라면 이 똥싸개 놈도 자신을 뒤이을 천재라고 할 만하다. 그러니 그는 몽랑을 믿어보기로 했다. 사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놈을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왜냐하면 과거로 돌아온 뒤로 그는 줄곧 색마 놈을 죽도록 패서 노예로 부려먹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멋대로 죽게 놔 둘 수는 없지.

“사내새끼가. 다 컸으면 앞가림은 알아서 해라.”

이자하는 손바닥에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철딱서니 없는 놈이 저가 돌아올 길은 알아보길 바라면서.

*

태양이라는 놈도 겨울 만큼은 게으르기 이를 데 없었다. 늦게 떠오른 주제에 일찍 저물어버리니 말이다. 허옇게 흘러나오는 한숨에 조소를 덧씌운다. 겨울이 끝나지 않았기에 몽연은 줄곧 어둠 속을 홀로 걸었다. 어슴푸레한 어둠이 드리운 설원에는 소나무도 있고 꽃나무도 있고 각종 과실나무도 있었다. 처음 보는 나무도 있고. 다만 그 형태가 기묘해서일까, 어쩐지 황량한 분위기에 몽연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수목은 대체로 그와 높이가 비슷한 편이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형상에 가까웠다. 그 기괴한 나무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백응지의 번화가였다. 

몽연은 그제야 나무를 자세히 살폈다. 나무 중에는 종종 들르곤 하던 기루의 주인도 있고, 제 집에서 거둔 시종도 있고, 언젠가 품에 안았던 여인도 있었다. 허나 몽연에게는 그저 모두 얼어죽은 나무일 뿐으로, 그를 둘러싼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나무가 아니래도 어떠한가. 그들은 제 주위에 살아있으되, 제 삶에서 생동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스쳐 지나는 수목보다 오히려 못하였다.

몽연은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열이라고는 제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뿐, 그 어떤 온기도 오가지 않아 얼어붙은 숲은 몽연(蒙然)하였다. 이건 대체 무슨 저주일까. 그는 팔로 제 몸을 감싸 안았다.

추웠다. 추워도 너무 춥다. 한독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했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아는 고통이기에 더욱 두려울 때도 있다. 하여 몽연은 온기를 찾아 정처없이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일전에 품었던 여인은 그에게 온기를 주었던가. 아니, 그건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한 번 맛본 옅은 온기는 오히려 그를 갈급하게 했다.

욕망. 그건 자신을 움직이는 동인(動因)이자 본능이기도 했다. 지독한 갈증 같은 욕망에 그는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온기를 마시려는 욕망, 그리하여 이 춥고 외로운 곳에서 벗어나고픈 욕망. 어쩌면 원죄처럼 지니고 태어났을지도 모를 욕망 앞에서 그는 갈 길을 잃었다. 사실 어디든 상관없었다. 뭐라도 좋았다. 그저 따뜻한 것이 필요했다.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귀처럼 바닥에 뒹굴어도 괜찮았다.

한참을 어둠 속에서 맴돌던 몽연은 마침내 되는대로 주저 앉았다.너무나도 춥고, 어둡고, 쓸쓸하고, 외로웠다. 몸을 웅크린 채로 무릎을 감쌌다. 빽빽히 둘러싼 나무들이 그를 조롱하듯 내려보았다. 어딘가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이렇게 죽을 것이다. 수많은 이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고독하게 미쳐 죽어갈 것이다.

몽연은 그말을 인정하면서도 입으로는 애써 부정했다.

“아니야.”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기가 거세게 일었다. 자신을 집어삼킬 기세로 밀려오는 한기에 휩싸여서 몽랑은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난 혼자가 아니야.”

눈보라가 잎새를 스치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게 마치 귀신들이 낄낄대는 것처럼 들렸다. 넌 혼자라고, 누구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너 또한 아무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고. 그저 백응지의 망나니이자 풍운 몽가의 문제아로 배척당할 뿐이라고.

결국 몽연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지려는 찰나였다. 지평선 너머로 어스름한 빛이 드러났다. 아마도 낮이었다면 보이지도 않을 미명으로, 광막한 어둠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섬광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차마 희게 빛나지도 못하는 자색의 일렁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가슴께가 일렁였다. 그래서 몽연은 가슴에 손을 얹고 물끄러미 그 빛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덧없이 사그라들 줄 알았던 미약한 빛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확장하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창공을 자색으로 물들였다.

그러니까, 새벽이 오고 있었다. 그제야 몽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색의 미명이 그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보다 먼저 일어나 어둠을 살라내는 새벽을 향해 몽연은 달리기 시작했다. 맞다, 그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

“뭘 어떻게 하냐는 거지?”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자하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잉어 한 마리를 길쭉한 나뭇가지에 꽂았다. 그걸 지켜보는 몽랑의 눈빛은 불안하기만 했다. 비늘이라도 긁어내야지 싶은데. 그러다 하릴없이 웃었다. 셋째에게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소문처럼 국수를 시원하게 말아먹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한독이 풀리지 않은 몸으로 입을 놀렸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가 없기에 그저 한숨을 쉬면서 이자하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 미친놈의 행동은 예상하기 어려우니까. 이럴 때는 자극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힐끔거리며 지켜보자니 광마 새끼의 시선은 잉어 눈깔로 향해 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상하게 속이 뜨끔했다. 그런 행동이 저에게 앞뒤 잘라먹지 말고 똑바로 말하라는 뜻인 듯도 하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똥싸개는 결국 셋째에게 고쳐 물었다.

“네가 나라면 어찌하겠냐는 거야.”

잉어 꼬치를 하나 더 만들면서 이자하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걸 알았으면 내가 네 무공을 달라고 했겠냐, 이 멍청한 놈아.”

그러면서 돌무더기로 적당히 만든 화로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몽랑은 셋쨰의 손끝에서 태어난 작은 불씨가 거기로 옮겨붙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럴 땐 그냥 입을 딱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대체로 자신이 입을 열면 주변인들이 한숨을 쉬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른 나뭇가지들이 뒤척이면서 자작거리는 소리를 낼 때까지도 원하는 답이 오지 않자 결국 몽랑은 입을 열었다.

“계속 모른 척 할 셈이냐? 너도 이젠 빙공을 쓰니 알 거 아냐.”

나뭇가지로 불씨를 뒤적이는 얼굴이 제법 진지하길래 이자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모닥불의 붉은 열기를 머금은 채로 색마가 저를 보고 있었다. 그건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전생 무림공적 둘이서 한가롭게 물고기나 뜯고 있다니. 게다가 사실 이놈은 전생의 원수가 아닌가? 어쨌든 만장애에 뛰어드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으니 말이다. 원한을 잊지 않는 사내, 그것이 나다. 그래서 이 멍청한 똥싸개 놈도 제대로 살게 해주겠다고 개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으니 색마 놈의 눈빛이 점점 이상해진다. 또 한심한 소리나 싸지르기 전에 이쯤에서 정리를 해주는 게 좋을 듯 싶다. 고민 끝.

“똥싸개야. 네게 빙공을 알려준 게 누구냐.”

“몰라서 물어?”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다니. 그렇다면 나도 별 수 없지.”

그러자 몽랑의 입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어머니.”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묻잖아. 설마, 내가 고아라서 그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걸 참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한 음성에 몽랑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하더니 이내 시무룩한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원래 내게 옥화빙공을 가르쳐주지 않으려고 하셨어. 옥화궁에서도 나름대로 한독에 관해 연구를 했을 거 아냐. 그런데도 비책이 없다고 하셨으니, 답은 하나지. 애초에 사내에게 맞지 않는 무공이다.”

“그런 것치고는 이복누이를 그렇게 두고도 너 같은 똥싸개에게 잘도 빙공을 전수하셨군.”

“몰라서 물어? 그래야만 풍운몽가가 나를 보호할테니까.”

“응, 대신에 주화입마 어서 오고.”

이자하는 잉어를 크게 한 입 물어뜯어서 꼼꼼하게 씹어 삼킨 후에야 덧붙였다.

“똥싸개야, 네가 백도의 공자답게 살았으면 가문이 아니라 빙공 때문에 먼저 뒈졌을 거다.”

똥싸개 운운하는 것에 몽랑이 발끈했다.

“그땐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셨겠지, 이 새끼야! 내가 지금 그걸 따지자는 게 아니잖아.”

“너야말로 따지지 말고 일단 잉어나 처먹도록.”

몽랑은 무어라 대거리를 하려고 했으나 몸이 아직 으슬으슬했기 때문에 잠자코 이자하가 건네는 잉어를 받았다. 차성태에게 들은 계두 국수 일화가 떠올라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막상 한 입 물으니, 완전히 익은 비늘이 바삭한 게 오히려 좋았다.

이자하는 몽랑이 잉어 한 마리를 해치울 때까지 내내 모닥불이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오르는 것은 불꽃일진대 어째서일까. 그 불꽃이 저 광마 새끼의 눈 속에도 들어있는 것만 같아. 몽랑은 미친놈의 눈깔이 어쩐지 신경이 쓰여 힐끔거리다가, 눈치 보지 말고 곱게 처먹으라는 강렬한 눈빛에 씹는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잉어를 뜯으면서 몽랑은 이자하의 말을 곱씹었다. 저 새끼가 미친놈 같아도, 아니 단단히 미친놈이 맞긴 하지만 무공에 대해서는 확실히 가장 믿을만한 녀석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스스로도 가끔 생각하긴 했다. 어머니께서 과연 이렇게라도 살아남길 바라셨을까, 하고 말이다. 빙공을 전수하면 장성한 자식이 주화입마를 오가며 살아갈 것을 어머니께서 예상하지 못 하셨을 리는 없다. 자신이 옥화빙공을 전수 받지 않았어도 애초에 그 대단하신 풍운 몽가라는 가문이 백도에 속하긴 했다. 그말은, 보는 눈이 있으니 적당히 기회를 봐서 내치면 내쳤지 대놓고 목숨을 위협하진 않았을 거란 의미다. 그런데도 굳이 빙공을 전수하셨다면 분명 대책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자신이 부족해서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그래서 한때는 한기를 이겨낼 수 있는 방안을 나름대로 연구했다. 그러던 와중에 오히려 주화입마에 들 뻔하여 포기했지만. 몽랑이 마침내 대가리와 뼈다귀만 남은 잉어를 불속에 집어던지자 이자하가 나뭇가지로 불길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어릴 때야 어쩔 수 없었다 치자. 그럼 이제 다 컸으니 다른 무공을 배우면 될 일 아니냐? 네가 하는 꼴을 보니 양기가 끓어 넘치는 게 극양의 무공을 배우기 딱 인데, 색마. 설마 맏형에게 배운 게 빙공은 아닐 테지.”

똥싸개는 모르겠지만, 회귀 전의 이자하는 만장애까지 몰리고 나서야 색마가 빙공을 쓴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말인즉슨, 빙공을 쓰지 않아도 색마는 마교의 광명좌사 자리가 과분하지 않은 고수였다는 뜻이다. 옥화궁의 후손이라는 걸 교주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도 없으니 빙공을 쓴다는 걸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좌사가 굳이 다른 무공을 익힐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 부분에 대해서 이전까지 무림 고수 이자하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빙공이 드물긴 하지만 수법이 드러나면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  감춘 거라고. 그런데 지금보니 아마도 한독을 경계한 듯하다. 이제와서 좌사에게 물어볼 수는 없으니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니면 말고.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전생 색마는 빙공 외의 무공도 뛰어났다는 게 핵심이라는 말씀.

그러나 몽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나는 빙공으로 대성할 셈이다.”

“빙공으로 무신의 경지에 오르겠다는 말이냐? 색마가 빙신(氷神)의 꿈을 꾸고 있다니 그것 참 놀랍군.”

“진심이니 놀리지 마라.”

잠시 후, 눈싸움에서도 진심인 남자, 그것이 나다……를 속으로 외친 이자하가 충혈된 눈을 글썽이며 말했다.

“여인을 품는 방법으로 음기를 채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일단 채음공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색마라면 모를까, 멀쩡한 인간이 쓸 방법은 아니지. 게다가 채음공으로 천하제일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까지 원한을 많이 쌓으면 교주가 아니고서야 살아남을 방도가 없어. 일단 내 독문 무공인 고자신공을 감당해야 할 테니 말이야. 알겠나? 용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무공이 발전할수록 한계가 명확하다는 뜻이지.”

“그걸 아니까 방도를 묻는 거잖아, 촌뜨기 자식아.”

마찬가지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왠지 고간을 방어하는 듯한 자세로 몽랑이 짜증난다는 듯 잉어를 뜯자, 이자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와서 다른 무공을 배우긴 싫고, 색공도 싫고. 어쩌잔 거냐? 다른 방법은 없다. 빙공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네놈의 장래는 오로지 천하제일 색마다.”

떼쓰는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몽랑이 잉어를 꽂아 넣었던 나뭇가지를 이자하에게 집어 던졌다.

“개새끼야, 넌 내가 애 새끼로 보이냐?”

나뭇가지를 쉽게 낚아챈 이자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몽랑의 뺨을 후려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해서 어리둥절하는 바람에 몇 대를 더 맞고서야 몽랑은 간신히 그를 뿌리쳤다.

“왜 때려? 개새끼야!”

“그냥 때리고 싶게 생겼다.”

“이거 진짜 미친 새끼네? 그럼 너도 처맞아라!”

그러나 아직 한독의 여파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몽랑은 잠시 후 흙투성이가 된 옷을 털어낼 수밖에 없었다. 엉망이 된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자하가 다시 모닥불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쉽게 강해지고 싶으면 지금껏 그랬듯 색마로 살면 될 거 아냐. 뭘 고민하지?”

제 손바닥에서 떨어져 나온 곱슬한 머리카락이 지글대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걸 보던 몽랑이 답했다.

“그렇게 살면 정말로 사부님을 뵐 면목이 없어. 그렇다고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빙공을 버리고 싶지도 않다. 사부님께서도 나는 빙공을 계속 익히라고 하셨는데, 너와는 달리 사부님은 허투루 말씀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렇지, 너와는 다르지.”

고개를 끄덕이는 이자하를 노려보면서 몽랑이 툴툴거렸다.

“그러니까 방법이나 빨리 말해, 개새끼야.”

이자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뭐 물에 빠진 걸 건져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네. 아무튼 나도 모른다. 나는 빙공보다 극양 계열의 무공을 먼저 익혔던 터라 너와는 달라. 한독에 시달릴 이유도 없지.”

눈에 띄게 실망하는 몽랑을 보면서 이자하가 덧붙였다.

“그러나 내가 익힌 빙공도 마공을 익힌 여인이 만든 것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니 만약 내가 너처럼 빙공을 먼저 익혀야만 했다면 마찬가지로 한독에 대해 고민했을 테지.”

“길게 설명하지 마라.”

“나라면 한독이 찾아올 때 너처럼 색마 짓으로 음기를 흡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빙공을 펼칠 때에 양기를 발산했을거란 뜻이다.”

“그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그 말에 이자하가 한숨을 쉬더니 꼬챙으로 몽랑을 가리켰다.

“너 같은 똥싸개가 뭘 알겠냐? 여인이 한랭한 내공을 펼치려면 음기를 끌어올려 사용하면 된다. 그러나 너는 사내라서 애초에 음의 기운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가뜩이나 없는 걸 내보내기까지 하니 신체가 더욱 음기를 갈구하게 되는 거야.”

“그걸 누가 몰라?”

색마가 진지하게 경청할 자세를 갖추는 걸 확인한 이자하는 꼬챙이에 두르던 절기를 거두고 이어서 설명했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니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음양의 묘리는 일월과 크게 다르지 않아. 해를 몰아낸 곳에 달이 찾아오고, 달이 물러간 곳에 해가 떠오르지. 음과 양, 색과 공도 마찬가지야. 이해했나? 음, 이해를 못 했군. 확인.”

몽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자하가 다시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모닥불을 살려낸 후에야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그러니까 뭐야. 신체에서 양기를 발산해서 완전히 비워내면 음의 상태가 된다고?”

이자하가 눈을 크게 뜨고는 박수쳤다.

“생각했던 것보단 덜 멍청하군, 똥싸개. 그 말이 맞다. 양기를 방출해서 신체를 음으로 만들어 빙공을 사용하고, 다시 그 양기를 거두어서 한기를 몰아내면 될 일이야. 그런데,”

“그런데 뭐? 왜 항상 말을 하다 말아?”

“닥쳐라, 그것이 나다.”

이자하는 자신이 잔월빙공에서 벗어나던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이 알고있는 빙공은 단 둘 뿐이었으나, 새삼스럽게도 둘 다 극도로 외로운 무공이었다.

“똥싸개, 너는 그러지 마라. 방법은 또 있으니까.”

“그러면 처음부터 좋은 방법부터 설명하면 될 거 아냐, 개새끼야. 하지마. 닥치라고 하지마. 그것이 나다, 이것도 하지마. 성질나니까.”

“확인.”

어쩌면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사실 강호인으로서는 이미 설명한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자하가 보기에 몽연이라는 자는, 혼자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되는 유형의 인간이다. 어느 누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저놈이 전생 색마가 된 배경을 보면 특히 그렇다. 광명좌사의 탄생은 결국 극도로 고립된 환경 속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던 인물인 검마마저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오문주 이자하는 몽랑이 조금 더 따뜻한 곳에서 살아가길 바랐다. 그러니 어쩌면 이게 더욱 적합한 생존방식일 터다. 하여 그는 손가락으로 몽랑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옆.”

“뭐야! 뭔데?”

화들짝 놀라서 옆을 바라본 몽랑은 암기 같은 게 날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짜증난 고양이처럼 이자하를 노려봤다.

“극음, 또는 극양의 기운을 가진 사람을 찾아서 옆에 둬. 쉽게 죽거나 배신하지 않을 사람으로. 다만 극음의 기운을 가진 사람이라면 네가 그 기운에 의존하거나 착취를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왠만하면 극양인 사람을 찾도록 해. 극양 계열의 무공을 사용하는 여인으로. 그러면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겠지.”

무슨 개소리냐고 물으려던 몽랑은 통천방에서 이자하가 설명했던 일월광천의 원리를 떠올렸다. 이론적으로, 일월광천은 두 사람이 쓸 수 있다고 했던가.

“여인은 믿을 수 없다. 극양 계열의 고수도 흔하지는 않아.”

고개를 젓는 몽랑을 이자하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사내 자식이라면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없는 건 피차 마찬가지야. 서책에 기록된 천하제일 배신자들이 모두 여인이었나? 저 백가 놈의 서고를 모조리 뒤져봐도 그럴 리가 없지.”

몽랑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 치자. 그 다음에는?”

“항상 같이 다녀야지.”

“항상…….”

그러더니 몽랑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모닥불이 꺼질 듯하기에, 이자하는 땔감을 조금 더 모아왔다. 불길이 일자, 몽랑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배신하지 않는 건 당연한데, 쉽게 죽지 않아야 한다는 건 뭐야?”

“맹주가 왜 가족을 만들지 않는 건데?”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몽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하는, 그 사람이 먼저 죽어버려서 남겨진 몽랑이 홀로 외롭게 살아가길 바라지 않는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절벽 위를 기웃거리던 달이 물결 위를 한참 노닐고 날 즈음에 몽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인이 아니면 어떻게 되는데?”

이자하는 한숨을 쉬었다.

“사내까지 취할 셈인지는 몰랐는데. 과연 색마로서의 오성만은 천하제일이군.”

“개새끼야. 농이 아니라니까. 그런 여인을 못 찾을 수도 있잖아?”

그러자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던 이자하가 답했다.

“별 수 있나, 어떻게든 살아야지.”

“이 새끼는 평소에는 쓸데없이 말이 많더니, 정작 필요한 말은 짧게 하네.”

이자하가 손을 홱 들어올리자 몽랑이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걸 또 한심한 눈으로 일별하고는 이자하가 설명했다.

“그 말 그대로야. 극양의 사내라면 네 한독은 몰아내 줄 수 있겠지만 네게 음기를 줄 수는 없겠지. 너도 마찬가지야. 그자에게 필요한 걸 완전히 채워줄 수는 없을거야.”

몽랑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지자 이자하가 혀를 찼다.

“뭐가 그렇게 심난해? 세상에 완벽한 관계는 없어. 그런 걸 바라서도 안 되지.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함께 살아가는 거야.”

못난 놈들끼리 아둥바둥 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우습고도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이자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은 살아가고 있다고. 그 마음을 언젠가는 이 똥싸개가 알아주었으면 한다는 게 하오문주의 심경이었다.

별을 헤아리다 흘긋 내려다보니 똥싸개 놈이 몽연한 낯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다. 새삼스럽게도 자신이 극음과 극양의 기운을 모두 지닌 사내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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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분량(10000자 가량)은 회지로 공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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