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랑자하] 미치려거든 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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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몽가의 차남, 몽랑. 최근 그의 심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미치겠네.”
몽랑은 오늘도 새벽부터 혼자 대가리를 박으며 한숨을 푹 내쉬고 있었다. 누구 말마따나 기생 오라비처럼 생긴 얼굴은 잔뜩 찌푸렸어도 사연있는 미남처럼 보여서 오히려 좋다. 물론 그 장소가 뒷간 앞이라면 느낌이 상당히 달라지곤 하지만. 예상대로 그 꼴을 한심하게 바라본 이자하가 혀를 찼다.
“미친지가 언젠데 이제와 그러지? 색마.”
“미친 걸로는 너만 하겠냐? 광마 새끼야.”
순식간에 쓸데없이 뒷간 앞에서 분위기 잡는 광인으로 격하된 색마가 분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자하는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몽랑에게 들이밀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뒷간에 다녀왔는데도 그 앞에서 똥 마려운 개새끼 같은 꼴을 하고 있는게 너다, 똥싸개. 뭐가 문제지? 이번엔 똥이 안 나와서 그런가? 시도때도 없이 똥개 마냥 싸지르더니 이젠 안 나오나? 사내 새끼가 참으로 변덕스럽군. 싸든지 참든지 하나만 하도록.”
그러자 가뜩이나 심란하던 색마의 인상이 한층 더 구겨졌다.
“닥쳐라, 제발. 똥 이야기 좀 그만해. 너는 나랑 할 말이 그거 말고는 없냐?"
그러거나 말거나 이자하는 임자 만났다는 듯 아침부터 혓바닥을 부지런히 놀렸다.
"그럼 똥싸개와 똥 말고 무엇을 논한단 말이냐? 똥을 싸고도 똥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내, 그것이 너다. 아니면 혹시……? 없었나? 못 닦았나? 묻어있나? 그러고보니 어쩐지 구린내가 나는 듯한데. 이게 똥간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설마? 역시 백응지의 똥싸개. 싸지르는 걸로는 과연 천하제일인이라 할 수 있겠군."
"아니다!"
몽랑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서 가만히 있다간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다 급기야 주화입마에 빠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하여 색마, 아니 몽랑은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 제 방으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이자하는 검지를 관자놀이 근처에서 빙빙 돌리는 걸 잊지 않았다. 물론 정신 나간 똥싸개 새끼라는 말도 덧붙였다.
빌어먹을 촌뜨기 새끼.
방에 처박힌 몽랑은 입 밖으로 내뱉은 제 말을 행여나 듣고선 이자하가 또 쫓아올까봐 이불을 뒤집어 썼다. 저 새끼랑 있으면 혼이 나가는 것 같다. 저 새끼는 왜 나만 보면 못 괴롭혀서 안달일까.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다가 같은 질문을 제 사부에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부님, 자하는 왜 저만 보면 못 괴롭혀서 야단일까요. 그때 사부께서 무어라 하셨지……. 나도 놀리고 싶은 걸 참고 있다고 하셨다, 제기랄. 괜히 더 열이 뻗쳐서 몽랑은 이불을 홱 팽개치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셋째 놈을 당장이라도 줘 패고 싶은데, 그랬다간 처맞을 확률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그 촌뜨기 새끼는 비무를 하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는게 특기였다. 어쩌면 주먹으로 패서 죽인 새끼들보다 말로 패서 죽인 새끼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냥 빙공으로 주둥이부터 얼려?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하필 녀석이 그걸 녹이는 무공을 사용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럼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자. 제 인생에 찾아온 재앙같은 놈을 떠올리면서 몽랑이 생각나는대로 중얼거렸다.
“저 새끼를 어떻게 자빠뜨리지?”
그러자 머리 위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확인하지 않아도 소리의 주인을 알 듯하여 몽랑은 황급히 일어나 자세를 바로했다. 사부님 오셨습니까, 라고 미처 인사를 하기도 전에 검마가 익숙한 눈빛으로 몽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자주 보던 한심한 눈빛이었다.
“……제자야. 네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만, 셋째는 과하구나.”
제가 무공으로 그렇게까지 밀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던 몽랑은, 사부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펄쩍 뛰었다.
“사부님, 오해입니다.”
그러나 검마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하다 못해 얼어붙을만큼 차가웠다. 입이 방정이다. 몽랑은 제 주둥이를 찰싹 때리고 싶어졌다. 아니, 때려 눕히고 싶다는 말이 왜 그렇게 나와?
“제가 미쳤습니까? 그 촌뜨기를 왜……. 정말입니다.”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검마를 바라보았지만 그간의 행적 탓인지 역시나 믿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환장하겠네. 곱게 정돈했던 머리를 쥐어 뜯으며 괴로워하던 몽랑이 문득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나저나 사부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그제야 몽랑은 황망한 와중에 자신이 검마의 방으로 잘못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셋째가 놀리기에 정신이 혼미해진 터라, 방을 착각한 모양입니다."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있는 몽랑을 마주보듯이 자리를 잡은 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지금까지는 농이었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찬찬히 제자의 안색과 기도를 살폈다.
“그래 그런 것 같군."
그러고는 세상 심각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물었다.
"제자야,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혼이 나갔는지 들어나 보자.”
그말에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떨구고 있던 몽랑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심연의 한 조각을 새겨넣은 듯한 검마의 눈을 마주하자, 푸른 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곧 이리저리 흔들렸다. 몽랑은 자신이 명쾌한 말도 이상하게 만들고 만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한데 지금 할 말은 스스로도 어떻게 운을 떼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물론 제가 어떻게 말하든 사부는 귀담아 듣겠지만 그렇기에 어쩐지 더욱 입에 담기 어려웠다. 하물며 이런 괴상한 오해까지 받고 있는 마당에……. 잠시 더 고민하던 몽랑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언가 고하려 하지 않았나?”
“아닙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물리려는 제자를 향해 검마가 나직이 말했다.
"셋째의 성질이 보통은 아니나 사려깊고 정이 많으니 네 마음이 흐를 만하다."
이쯤되니 몽랑은 사부가 저를 놀리는 것인지 진담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셋째라면 눈치 빠르게 알아챘을텐데. 아닌가, 그놈은 누가 뭐라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편이지. 그리고 높은 확률로 헛소리일 것이다. 그 짧은 새에 또 셋째를 떠올렸다는 사실에 몽랑은 옅은 자괴감을 느꼈다. 그래서 사부에게 나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제자가 어정쩡한 자세로 변명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눈치가 빠르고 속을 감추는데에도 능숙하니 그 마음을 얻기가 쉽지 않겠지."
부정해봐야 도통 믿어주질 않으니 몽랑은 그냥 포기하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야 검마의 잔소리가 빨리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랑은 다시 사부를 마주하고 자리를 잡고 앉아 제 무릎만 지그시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이게 다 그 촌뜨기 때문이다. 참으로 언젠가 날을 잡아서 반드시 자빠……, 아니 때려 눕히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몽랑은 이를 갈았다.
"그에 반해 너는 눈치도 없고 행실도 가벼우니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제 행실이 가벼운 건 알고 있습니다만, 눈치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냐?"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제자의 불퉁한 말을 헤아리듯 뜸을 들인 검마가 부드럽게 비수를 꽂았다.
"그러면 이제 네 가벼운 행실의 대가를 치러야 하겠구나. 이만 나가보거라, 제자야."
단호한 축객령에 더 변명할 틈도 없이 몽랑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뒤돌아서는 어깨는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사부는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고, 둘째에게 상의해봤자 놀림이나 당할 게 뻔했다. 당연하지만 셋째와는 절대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심마의 원인이 바로 그 촌뜨기 새끼이기 때문이다.
"나 누구랑 얘기해야 하니?"
답답해 내뱉은 말이 또 셋째가 종종 하던 것을 닮아있다는 걸 깨닫고 몽랑은 또 머리를 쥐어 뜯었다. 그러다 속이 타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답답해 죽겠는데 말할 곳이 없어서 몽랑은 무척 외로웠다. 그러다가 새삼스럽게도 이런 기분이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놀랐다. 빙공과 함께 일생을 함께할 줄 알았던 고독은 아마도 셋째를 알게 된 후로 제법 옅어진 모양이었다. 역시, 아무래도 자신은 이자하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은 듯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이나 하지.
몽랑은 또 다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사부에게 털어놓을까 싶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시도 때도 없이 촌뜨기의 그 얄미운 낯짝이 떠오른단 소리를 했다간 오해만 굳어질 뿐이니까. 그럼 어디 가까운 대나무 숲이라도 없을까? 남모르는 곳에서 소리라도 질러야 속이 개운할 것 같았다. 아예 확실하게 만장애라도 갈까 하며 되는대로 생각했다가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만장애의 가장 밑바닥에서 촌뜨기 개새끼를 외치는 자신의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이자하를 떠올려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병신 같은 상상이나 하다니. 몽랑은 제 뺨을 후려치려다가 이 또한 셋째가 자주 하던 미친 짓거리 중 하나란 생각에 손을 멈추었다.
이러다 홧병으로 죽는 게 아닐까? 매실차는 맹주께서 자주 마시는 걸 볼 때 효과가 전혀 없을 듯했다. 약효가 있다면 진작에 홧병이 낫고도 남았을 테니까. 역시 모용 선생을 찾아가는 게 나을까 생각하려니 이번엔 서로 마주 앉아 시시덕거리는 두 놈이 떠올라 몽랑은 이마를 때렸다. 자하는 선생만 보면 뭐가 좋다고 처 웃기나 하고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었다. 몽랑은 이를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제 사부를 비롯한 고수들이 모용백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셋째가 오대악인 후보로 점찍었다는 말에 둘째도 딱히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솔직히, 몽랑은 모용백에게는 도통 좋은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이자하가 저에게는 잘 털어놓지 않는 속내를 그에겐 잘도 내보인다는 게 영 못 마땅했다. 게다가 남들에겐 친절한 모용백이 저를 치료할 때만 어린애 다루듯 한다는 점도 상당히 불편했다. 불편하다못해 불쾌했다. 그것도 상당히, 매우, 몹시, 대단히, 아무튼.
앓느니 죽지. 그리하여 차라리 몽랑은 이자하를 만나기 전의 자신에 대해 떠올리기로 했다. 이렇게 답답한 날이면 내가 어떻게 했더라.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백응지의 가로수 번화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술(戌) 시는 술을 마시는 시간이지. 잔이 채워지는 걸보며 몽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놈에게 끌려다니느라 격조했어도 번화가에는 여전히 저를 알아보는 이가 많았다. 왜 이렇게 오랜만이냐며 반기는 시선들이 저를 위아래로 훑는 것에 몽랑은 공연히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다 그 시선에 의아함과 조롱이 절반쯤 섞였다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채고는 순간 아차 싶었다. 셋째랑 같이 다녔더니 유행하는 옷차림은 무슨, 개방 거지 꼴을 간신히 면하기에 급급했다. 싸움 말고는 잘 하는게 하나도 없는 새끼. 촌뜨기 녀석. 기어코 또다시 녀석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그는 우선 의복부터 새로 사입기로 했다. 근래에 인기가 좋다는 얇은 장삼에 접선과 향낭까지 갖추고 나니 이제야 조금 예전의 몽랑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새로 산 끈으로 머리를 손질하면서 그는 익숙한 방향으로 향했다. 촌뜨기 새끼랑 어울려 다니면서 유일하게 좋은 점은 수중에 돈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전낭이 여전히 두둑함에 뿌듯해하며 이내 금화루로 향했다. 거기서 한껏 방탕하게 즐길 작정이었다.
금화루에 들어서자 평소 즐겨 앉던 자리로 안내한 기녀가 무엇을 주문할지 물었다. 저도 모르게 두강주에 탕초리척이라고 말하려던 몽랑은 헛기침을 하고는 가장 비싼 것으로 주문했다. 역시 몽 공자라는 입에 발린 소리와 함께 술과 안주보다 사람이 먼저 내어졌다. 들어올 때는 혼자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좌우에 한껏 치장한 여인들이 앉아 있었다. 분내, 좋지. 놀 줄도 모르는 사내 새끼들이랑 어울리면서 땀내나 맡다보니 분내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가, 술이 아니라 분내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오히려 좋아. 몽랑은 여인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갖춰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헷갈리는 복장을 보니 새로 들어온 창기들인지도 모른다. 일양현에는 그 작은 촌구석에 기루가 셋이나 있지만 죄다 예기 뿐이라 옷을 겹겹히 껴입고 있었다. 그나마 시선을 둘까 치면 광마 새끼가 뺨을 후려치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하여 오랜만에 여인과 살갖을 맞대니 몽랑은 조금 설레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역시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지. 셋째는 너무 재미없게 사는 것 같았다. 한창 좋을 나이에 이상한 데에 미쳐가지고 지랄 염병을 하면서 돌아다니기만 하고 말이야. 몽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이자하가 바보같았다. 제법 쓸만한 얼굴을 한 주제에 왜 그렇게 사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여인을 품어보지도 못했다니. 게다가 심각한 얼굴로 진정한 사랑 어쩌구 운운하던 것이 떠오르자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양 팔에 끌어안고 있던 기녀들도 뭐가 좋은지 까르르 웃는다. 촌뜨기 새끼가 사랑을 뭘 안다고. 몽랑이 기녀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게 사랑이지. 몽랑은 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이 나을까. 얼굴은 왼쪽이 취향인데 몸매는 오른쪽이 나았다. 아니다, 모처럼이니까 둘을 한꺼번에? 아마 제 머릿 속을 읽었다면 자하가 죽도록 팼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그는 다시 술을 마셨다. 여인들과 함께 비싼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딴 촌뜨기 생각이 날 게 뭐람.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는 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인이 몽랑의 손을 은근하게 이끌었다. 명백한 함의를 담은 손길이 본래라면 기꺼웠을텐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술맛이 확 떨어졌다. 머릿 속에서 이자하의 목소리가 울렸다. 진정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때 자신은 의자에서 떨어질 만큼 크게 웃었는데. 확 끼쳐오는 분내가 역해 몽랑은 스스로도 놀랐다. 내가 왜 이러지? 진정한 사랑은……. 머릿 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그는 닥치라고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역정을 내자 놀랐는지 기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잠시 숨을 고르던 몽랑은 마른 세수를 했다. 아무래도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보다. 그는 붙잡는 손을 떼어내듯 떨쳐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이미 축시를 넘긴 모양이다. 번화가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갈 지' 자를 그렸다. 몽랑은 술기운을 뿜어내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응지에서 가장 비싸다는 금화루에서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나왔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마 셋째가 알았다면 색마가 드디어 탈마한 모양이라며 광인 특유의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서는 박수를 쳐줄 것이다. ……또 그 새끼 생각이나 처 하고 있다니. 사부의 말이 떠올랐다. 자하에게 마음이 흐를 만하다고. 몽랑이 중얼거렸다.
사부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술이 아직 덜 깬 걸까. 그는 어두운 밤길에서 혼자 하소연했다.
억울합니다, 저는 정말로 자하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숨이 밤 공기를 따라 흘렀다. 다시 생각해도 억울했다. 눈만 감으면 그 얄미운 얼굴이 떠오르는 건 맞다. 허나 같은 사내 새끼를 상대로 연심은 무슨 연심이란 말인가. 오히려 그간 이 정도로 당했으면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는 게 맞는 거 아냐? 이게 맞잖아? 그러나 억울함을 들어줄 이가 없었다. 하여 열이 오르는 속을 달랠 겸 몽랑은 경공을 펼치면서 어떻게 해야 셋째를 자빠, 아니 때려 눕힐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몽랑은 깊이 후회했다. 술김에 경공이라니, 제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결국 그는 자하 객잔에 도착하자마자 뒷간에 가서 속을 있는대로 게워내고 말았다. 비틀거리며 뒷간에서 나온 몽랑은 방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달이 지나치게 밝았기 때문이다. 창틈으로 넘어오는 달빛을 맞으며 잠들었다간 미친 놈이 날뛰는 꿈이나 꿀 것 같았다. 그는 얼마 전에 비슷한 꿈을 꾸었는데, 꿈자리가 뒤숭숭한 걸로 모자라서 빌어먹게도 이부자리까지 뒤숭숭해졌다. 그래서 이불을 들고 몰래 개울가로 가려던 걸 하필 셋째한테 딱 걸렸는데. 여기까지 생각한 몽랑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춘약 먹고 잤어? 야한 꿈 꿨나보네. 그때 빙글빙글 비웃는 얼굴을 보며 몽랑은 진심으로 이자하를 줘패고 싶었다. 문제의 꿈에서도 이자하는 저를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제기랄. 다시금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을 털어내기 위해 몽랑은 아까 하던 고민을 마저 하기로 했다. 결론은 그렇다. 역시 그놈을 자빠, 아니 때려눕혀야 해결될 일이다. 한껏 줘패고 나면 이 심마를 털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몽랑은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지붕 위에 훌쩍 뛰어올라 적당히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줘 패면 된다. 이대로는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패버리자. 마음을 정한 몽랑의 마음은 한층 더 심란해지고 말았다. 이 해결책에는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일월광천을 휘두르는 미친 놈을 때려눕힐 방도가 없다는 거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렇다고 때려눕힐 수 있을 때를 기다리며 내버려두자니 시도때도 없이 생각이 나서 딱 돌아버리기 직전이라는 점이다. 특히나,
“왜 뒷간만 가면 꼭 그 낯짝이 생각나냐고.”
아무래도 인상적인 첫 만남 때문일까? 물론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때 적절한 시기에 뒷간에 가지 못한 게 한이 될 만도 했다. 동그랗게 뜬 달마저 저를 똥싸개라 놀리는 것 같아 몽랑은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취향인가? 더러운 색마같으니.”
“아이, 깜짝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다가 지붕으로 떨어질 뻔한 그를 이자하가 한심하다는 듯 붙들어준 다음, 불결하다는 듯이 손을 털었다.
“아이 깜짝이야는 무슨. 끔찍한 소리 나기 전에 꺼져라. 똥 냄새 난다.”
“안 난다, 씨발. 안 난다고!”
“그런 것치고는 콧구멍이 넓어진 걸보니 냄새를 확인하는 것인데. 똥싸개, 똥내, 똥 씹은 얼굴. 확인.”
“개새끼야!”
너는 나하고 할 말이 그런 것 밖에 없지. 목까지 치밀어 오른 말이 이상하게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씩씩거리는 몽랑을 보며 하찮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이자하가 옆에 드리운 매화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팔짱을 끼고 아예 드러 눕는 걸보니 한숨 잘 생각인 듯하다. 그 꼴을 바라보던 몽랑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자려면 곱게 들어가서 쳐 자라. 그러다 입 돌아간다.”
그러자 한 마디도 져주지 않는 놈이 내려다보더니 비웃듯이 받아쳤다.
“그러는 넌 싸려면 곱게 싸기만 해라. 뒷간에서 변태 짓 할 생각이나 하지 말고.”
“아 진짜 아니라니까 그러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다들 사람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는지 모르겠다. 몽랑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얼굴이 시뻘개졌다가 퍼렇게 질리기를 반복하기에 이자하로써는 저 새끼가 드디어 자하신공을 익혔나 의심할 지경이었다. 한참을 그러다 마침내 결론이 난 모양인지 몽랑이 김 빠진 얼굴로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됐다, 말을 말자. 무슨 말이 통해야 대화를 하지. 그래, 이 새끼야. 내가 색마다, 색마. 뒷간에서도 자빠뜨릴 생각으로 꽉 차있는 내가 색마다, 으흐흐…….”
"이거, 정말 미친 놈이네."
이자하가 소름이 끼친다는 듯 제 팔을 쓸면서 헛구역질을 했다. 그 꼴이 우스워서 색마는 일부러 음흉한 웃음 소리를 내었다. 흐흐흐흐……. 그러자 이자하가 질겁을 하며 슬금 슬금 뒤로 물러났다. 어쭈, 이것 봐라. 이자하가 혐오스럽다는 듯 얼굴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꺼져라, 미친 놈아. 이 새끼가 어쩐지 오래 참더니 드디어 돌아버렸나? 눈깔이 완전히 맛이 가버렸는데."
"흐흐흐. 그래, 돌았다. 미쳤다! 진정한 색마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법이지. 어쩔 테냐?"
술김에 완전히 재미가 들린 몽랑이 매화나무 위로 펄쩍 뛰어 올라 이자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뭇가지가 부러질 듯 위태로운 비명을 질렀다. 천하의 하오문주라도 예상치 못한 공격에 허를 찔린 듯 얼어붙었다가, 이내 몽랑을 확 밀쳐내며 인상을 썼다. 지붕 위로 떨어진 이를 내려다보며 이자하가 눈을 부라렸다.
"미친 놈은 매가 약인데……. 처 맞기 전에 적당히 해라."
"확인."
씨벌,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자하를 보며 몽랑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자하가 늘 헛소리만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는 힘없이 늘어진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분내 나는 여인을 끌어 안았을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명백한 사내의 몸이다. 동하기는 커녕 징그럽기만 해야 할텐데. 매화가 피는 계절도 아닌데 왠지 코끝에서 매화향이 감돌아 몽랑은 고개를 들어 이자하를 노려보았다. 당연하지만 날렵한 셋째의 허리에 향낭 따위는 달려있지 않았다. 몽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몇 번을 중얼거리더니 제 뺨을 후려쳤다. 주화입마에 빠진다면 전부 다 저 촌뜨기 때문이다.
"조용히 해라, 색마. 잠 잘거다. 방해하면 똥간에 담가 버리겠다."
너는 정말. 너 이 새끼, 나한테 할 말이 그 딴 거밖에 없지. 괜히 속이 끓어 짜증스럽게 이자하를 올려다 본 몽랑이 일순 숨을 멈추었다. 웬일로 촌뜨기 녀석이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하필 나뭇가지 사이로 비어져나온 달빛이 그 얼굴에 드리워지고, 사방에는 피지도 않은 매화향이 가득했다.
“정말 돌아버리겠네.”
홀린 듯이 멈춰있던 몽랑이 길게 탄식했다. 혼란스럽다. 분명히 저 새끼를 자빠뜨리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이젠 다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몽랑을 심마에 한없이 가까이 몰아붙이고 있는 장본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온화하게 말했다.
“똥싸개야. 적당히 미치도록.”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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