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게이트3

[BDG3/할신+타니엘] 드루이드의 탄생

어린 할신과 타니엘의 이야기

* 할신의 유년시절을 상상해 써 보았습니다. 가족 설정 날조 주의!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다. 아직 에메랄드 숲에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고 내 오랜 벗이 그 너머로 사라지기 전의 이야기 말이다. 아직 그림자 저주가 할퀴지 않은 숲은 싱그러웠다. 울창한 초목 사이로 새와 짐승들이 지났고 또 그사이에는 날벌레와 풀벌레가 드나들었다. 강이 노래하고 바람이 춤추는 봄이 오노라면 어린 것들은 으레 다 자란 것들이 되었고, 그 다 자란 것들은 다시금 어린 것들을 낳았다. 햇볕이 비치면 초록으로 물드는 그 숲을, 나는 좋아했다.

많은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워하기는 하지만, 나 또한 작고 어리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보다 2.5피트는 작았던 그때의 할신은 여느 어린애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꼬마 할신은 호기심이 많았고 어떨 땐 반항적이었으며 때론 짓궂은 장난을 일삼았다. 지극히 평범했다는 소리다. 어린 나에게 좀 유별난 점이 있었다면, 글쎄, 그것은 아마 숲에 대한 각별한 애호가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에메랄드 숲에 사는 꼬마애들이라면 으레 그랬겠지만, 모두가 나무나 곰 따위와 기꺼이 벗하려 하거나, 개미의 발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것은 많은 드루이드가 공통으로 경험하는 어떤 특질이었다.

숲은 나의 놀이터였다. 다람쥐의 도토리 창고를 찾아내거나 거울 잉어들이 물속을 누비는 걸 구경하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일거리 중 하나였다. 봄에는 아버질 따라 약초와 버섯을 캤고, 여름에는 수박이나 오이, 가지 따위를 땄다. 가을이 되면 숲은 한층 더 풍요로워져서 산딸기, 사과 같은 것들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그때는 가을꽃도 만발하고, 꿀이 농익었다. 아버지가 석청을 따올 때면 어김없이 식탁에는 꿀 케이크가 올랐다. 그 시기에만 먹을 수 있는 별미를 나는 좋아해 마지않았다. 겨울이 되면 숲은 흰 눈으로 뒤덮였다. 사슴들은 풀 대신 나무껍질을 씹었고, 식탁에는 뿌리채소 수프나 마른 빵 따위가 자주 보였다. 땔감으로 쓸 마른 나뭇가지를 골라 줍느라 손이 빨갛게 곱아들어 가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게 말하면 겨울이 썩 재미없고 심심해 보였겠지만 하얗게 옷 갈아입은 토끼와 시합하거나 그 대단한 눈발에도 우뚝 솟은 전나무들을 사이를 누비는 것은 그 자체로 재미있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숲 그 자체가 나의 집이요, 벗이었는데.

그러나 숲에서 나고 자란 아이라고 해서 숲의 모든 것을 허락받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아이가 그러하듯 나는 내게 허용된 것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금지당했다. 가령 아버지는 내가 깊은 숲으로 들어가거나 동굴곰이나 올빼미 곰, 늑대 같은 맹수들을 관찰하는 것을 금했다. 당신께서는 알고 계셨다. 자연은 다정한 만큼 냉혹하다는 것을. 숲에는 언제나 두 얼굴이 있었고 자연 속에 터 잡고 그의 부산물로써 살아가는 드루이드들에게도 그랬다. 아버지가 그토록 유난스럽게 단속하신 데에는 아마 내가 일족의 마지막 아이라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유난스러운 염려 탓일까. 나는 또래보다 드루이드 마법을 더 늦게 배웠다. 자연의 힘과 가호가 중요한 드루이드 마법을 배우려면 필연적으로 위대한 자연의 한복판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숲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드루이드들의 통과의례는 좀 더 ‘전통적이고’ ‘엄격한’ 구석이 있었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잠재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 마음을 잘 몰랐다.

또래 애들보다 키가 두 뼘은 컸지만 그래도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열 살이 좀 넘었을 때니, 그때의 할신은 갓 태어난 새끼사슴만큼 어수룩하고 무모했을 것이다. 아버님 말씀을 지독하게도 안 들었다는 소리다.

몇 안 되는 친구들이 하나둘 드루이드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자 나는 조바심이 났다. 내 아버지 소맷자락을 붙잡고 조르고 따지고 화를 내기까지 했지만, 당신께서는 안된다는 말만을 지빠귀처럼 반복하실 뿐이었다. 아버지는 두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 10년이란 짧은 생을 살면서 나는 그가 얼마나 단호한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상식적이고 어른스러운 우드 엘프였다면 아마 단념했겠지만… 글쎄, 앞서 말하지 않았나. 나는 참 말썽꾼이었다고.

나는 아버지의 서재에 숨어들어 드루이드 비술서를 하나 훔쳤다. 숨겨두었던 석청으로 파수꾼 곰을 홀리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웠다. 겨울용 로브 아래에 그 책을 숨기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드루이드 의식이 벌어지는 곳이 어디인지는 익히 들어서 알았고, 내가 깊은 숲으로 가는 것이 처음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보란 듯이 근사한 곰으로 변신해 보일 거라고, 그래서 내가 이 숲에 얼마나 어울리는 드루이드인지를 증명하겠다고, 그런 풋내기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자, 그래서 어린 할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리석은 자의 말로는 뻔하다. 내 치기 어린 도전은 보기 좋게 망했다. 

깊은 숲까지 들어가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비술서를 읽는 것도, 그 비술서에 깃든 어떤 마법적인 흐름에 내 몸을 맡기는 것 역시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그건 내가 에메랄드 숲에서 노닐 때 항상 하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바누스의 가호가 온몸을 휘감았고, 피부 위로 짧은 갈색 털이 자랐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 역시 돋았다. 10년 치의 성장통을 한꺼번에 겪는 것 같은 격통이 온몸을 훑고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한 마리의 새끼 곰이 되어 있었다.

내가 해냈어!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 단계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다던 아버지의 말과는 달리 당당하게 변신에 성공한 것이 자랑스러웠다. 당신께 증명하고 싶었다. 봐요, 나도 이만큼 할 수 있잖아요. 하고 말이다. 이게 뭐가 망했냐고? 이다음을 들으면 이 계획이 아주 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풋내기 드루이드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다른 종으로 변할 때 그가 겪을 변화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겉모습만 달라질 뿐일 거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자연적 영혼과 하나가 되는 것은 그보다 좀 더 복잡한 일이다. 당신의 둘러싼 모든 감각이 전복된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의 무지개가 일곱 가지 빛깔이 아니라 서너 가지 색으로 바뀐다든가, 당신의 귀가 지금껏 듣지 못한 아주 높고 쨍한 소리를 듣고, 당신의 코가 여태껏 알지 못하던 전혀 새로운 종류의 향취에 노출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상상한 것 이상의 감각이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고, 그 낯선 감각들의 과잉이 당신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모한 변신을 감행한 어린 우드 엘프에게 닥친 일이었다.

어지러웠다. 바람이 불면 온 털이 그것을 알았고, 아득하게 먼 곳으로부터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다. 풀벌레들은 가지각색으로 떠들어댔다. 소리로, 냄새로, 때때로 번쩍이고 번뜩이면서. 나는 그제야 내가 모르던 자연의 다른 면을 맞닥뜨린 것이다. 그건 이를테면 새로운 종으로써의 ‘탄생’이었다. 아기는 새로운 세계의 낯섦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나 역시 그랬다. 어린 동굴곰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막연한 공포의 대상을 피해 달아났다. 무작정 달려 나갔다.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숲에는 밤이 왔다.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숲에 머물렀던 건 처음이었다. 세 아름은 되는 나무 둥치의 구멍에 몸을 숨긴 채 발발 떨고 있노라면 올빼미 곰의 발소리가 울렸고, 늑대 무리가 목놓아 울었다. 

이대로 죽는가 보다.

나는 생각했다. 다시 사람으로 변하고 싶었지만 비술서는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나는 곰으로 변신하는 방법은 알았지만 사람으로 되돌아오는 법은 몰랐다. 아버지 말을 들을 걸,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새끼 곰의 털가죽은 생각보다 연약했다. 굴속으로 드는 겨울바람은 시렸고 자꾸만 눈물이 흐르는 탓에 축축하게 젖은 콧잔등이 얼얼했다. 코가 축축하다는 건 그럴 때 정말 불편했다. 이대로 얼어 죽는 걸까? 내가 죽으면 나는 다시 사람이 될까? 죽으면, 아버지는 아주 혼자가 될 텐데… … 온갖 생각이 떠올랐고, 그날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하고 끔찍한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확신 같은 것마저 들었다.

마침내 내게 닥친 시련과 시린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안녕?”

짧은 인사말에는 안온과 다정이 있었다. 내가 너무 놀란 나머지 펄쩍 뛰어오르자, 목소리의 주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 너를 해치지 않을 거야.”

그가 손을 내밀었다. 겨울이 다 되었는데도 그에게서는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초목과 흙과 강에서 으레 느끼던 아늑함이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면 눈앞에는 내 또래의 어린 소년이 보였다. 티플링이 아니었는데도 머리에 사슴뿔 같은 것이 나고, 한쪽 뺨은 나무껍질같이 거칠어 보이는 그 소년은 잔잔한 물처럼 평온하고 태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 이 소년이 바로 우리가 아는 그 타니엘이다.

“나는 여기 살아, 너는?”

그가 물었다. 나는 에메랄드 숲 동쪽 마을에서 왔노라 말했다. 동굴곰으로써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발음이 어눌하기 짝이 없었는데, 타니엘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새끼 곰의 웅얼거림에 귀 기울였다.

“그렇구나, 동굴곰으로 변신하는 것이 장기인 우드 엘프 하나를 알아. 그게 네 아버지니?”

“웅.”

“잘 됐다, 내가 그쪽으로 가는 길을 알거든. 괜찮으면 나와 같이 가 주겠어? 그러잖아도 숲 저편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나와 말동무라도 하면서 가자.”

타니엘은 다정함을 숨기지 않았다. 쭈뼛거리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가 마침내 굴 밖으로 나서기를 결심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우리는 함께 마을로 향했다. 어린아이와 새끼 곰이 함께 길을 가는 것을 구경하는 짐승들 몇몇이 있긴 했지만, 우리는 안전했다. 타니엘이 가진 경이로운 힘이 우리를 보호했으니까.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 마을 어귀에 횃불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그 곰이 당신의 어린 아들임을 바로 알아챈 아버지가 두 팔을 벌렸고 나는 온몸으로 당신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어린 탕자가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아버지 품에 안겨 재회의 기쁨을 누리고 있노라면 멀지 않은 거리에서 타니엘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이내 숲으로 돌아갔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내게 드루이드 수업을 듣는 걸 허락했다. 아버지의 엄중한 감시하에 있겠다는 약속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그랬다. 나는 내가 몇 단계나 뛰어넘은 많은 공부를 하느라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잠시 숨 돌리며 쉴 때는 숲으로 갔다. 그런 때면 새로 사귄 친구가 나를 마중 나왔고, 그 숲 내음 나는 벗에게서 나는 숲의 많은 것들을 배웠다. 타니엘은 오래도록 나와 함께였다. 내 드루이드로서의 삶이 시작되던 가장 첫 순간에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우리 일족의 마지막 남은 자손이 되고, 대 드루이드로서 외로이 드루이드 집단을 이끌어야 했을 때도, 언제나. 그는 나의 스승이요, 벗이었고, 내 집 그 자체였다. 그림자 저주로부터 그를 되찾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평생토록 나와 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린 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그를 구했다. 타니엘은 우리 곁에 있다. 숲은 다시금 싱그러울 것이다. 나의 어느 시작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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