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

여정

가내더지와 자헤이라 중심, NCP

창고 by 롣

읽으면 좋은 전편

바알스폰은 나흘째 되는 날 밤 자헤이라의 현관 앞에 나타났다. 

온몸에 재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매캐한 연기와 화약 냄새를 휘감은 채였다. 입고 있는 옷은 시커먼 기름과 알 수 없는 검붉은 액체에 찌들어 본래 색을 알아보기가 어려웠고 신발은 어쨌는지 한쪽 발이 맨발이었다.

“이 시간에 갈 데가 없어서.”

도시를 구한 영웅이라기엔 지나치게 꼴이 처량하다. 자헤이라는 혀를 차며 그를 집 안으로 들인 뒤 그대로 수건을 두 장 쥐여주고 욕실로 밀어 넣었다. 현재 엘레라신의 집은 가정집보다는 하퍼 작전 본부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지저분한 드래곤본 하나를 씻기고 재울 공간 정도는 남아있다. 

“깨끗해지기 전까지 나올 생각 하지 마. 조드! 저 녀석한테 입을 것 좀 빌려줘라. 네 옷이면 맞겠지.”

임무 하달을 마친 뒤 자헤이라는 허브차 두 잔을 준비하고 보고를 기다렸다. 얼마 뒤 한결 말끔해진 D가 절뚝거리면서 계단을 내려왔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의자에 풀썩 주저앉는 모양을 보니 발목을 다친 듯했다. 기름과 먼지를 씻어낸 손은 찢어지고 짓물러 너덜거리고 눈 위에 난 상처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으므로 자헤이라는 한숨을 쉬며 찬장에서 회복 물약을 찾았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온 거야?”

“청소.”

“건물 잔해라도 치웠어?”

“비슷해요.”

D는 순순히 물약을 받아 들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자헤이라는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바알스폰을 관찰했다. 부상을 입긴 했지만 타박상 정도고, 다소 피곤해 보이는 것을 빼면 눈에 띄는 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거대한 뇌의 사체와 함께 바다에 처박혔던 게 불과 나흘 전 일이니 피곤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딜 갔었어? 말도 없이.”

엘프의 노래에서 간소한 축하 파티를 마친 다음 날 D는 혼자 자취를 감췄다. ‘곧 돌아올게’. 단 두 마디를 휘갈겨 쓴 냅킨 하나만 남긴 채였다. 그리고 그런 문장을 전한 이들이 흔히 그렇듯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멋대로 자리를 비운 와중에도 각종 사건사고를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레이븐가드 대공부터 뒷골목의 시시한 협잡꾼까지 모두가 ‘발더스 게이트의 새 영웅’ 을 찾고 있는데 당사자가 증발해 버렸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소란이 끊이지 않았고,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동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뒷수습을 떠맡아야 했다.  

다들 끔찍한 소통 능력을 지닌 그들의 리더를 저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염려했다. 지난 몇 주간 이 녀석을 곁에서 지켜봤던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D는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답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자헤이라는 한숨을 쉬었다. 

“사고만 안 쳤으면 됐다.”

“…….”

“뭐?”

말없이 자헤이라를 쳐다보던 바알스폰이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다른 사람들은?”

“게일은 워터딥으로 돌아갔지. 섀도하트도 떠났고. 민스크만 남아 있어. 아, 아스타리온도.”

“…왔었어?”

“아니. 민스크.”

“아.”

“그 레인저는 항상 그런 데서 운이 좋지. 나중에 어디서 봤는지 위치라도 물어봐라. 만나서 아주 행복해했다는데, 말한 사람이 민스크니.”

“잘 지내나 보네.”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냐?”

“하지만 민스크니까.”

“하. 보기보다 머리를 많이 다쳤나 보군. 물약 좀 더 마셔라.”

영양가 없는 말을 주고 받는 것은 쉬웠다. D는 실없는 농담으로 원치 않는 대화 주제를 능숙하게 회피했고 자헤이라는 잠시 그에 어울려주었다. 

지난 몇 주간 눈앞의 바알스폰은 주어진 오직 하나의 결말을 위해 제게 남은 삶을 깎고 내려쳐 재단했다. D가 동의 없이 베푼 폭력적인 배려로 인해 대뜸 그의 삶에서 잘려 나가게 된 동료들은 저마다 혼란스러워하거나 화를 내거나 나름대로 그를 설득하려 들었지만,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준비를 마친 그가 제 발로 제단-도살장-무덤-집으로 향할 때 유일하게 정식으로 초대받은 사람은 자헤이라 뿐이었다. D가 직접 고른 유언 집행자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유언장도 장례식도 필요 없었다. D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다만 지치고 피로한 낯으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냥 쉬고 싶어…. 죽음은 정말 평화로웠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자헤이라는 결정했다. 저 녀석이 먼저 멋대로 유언 집행자의 역할을 떠맡겼으니, 유언장이 무효가 된 지금은 자신이 멋대로 굴 차례라고. 

우선은 대화 주제부터 바꿔야겠지.

“그래서, 앞으론 뭘 할 생각이냐?”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잠깐 멈췄다. 자헤이라는 팔짱을 꼈다. 침묵.

“…몰라.”

D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롯이 혼자가 되고자 했다면 그대로 영영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알스폰은 제 발로 엘레라신의 집을 찾아왔다. 일종의 항복 선언인 셈이다. 혹은 구조 신호거나.

그렇다 해도, D가 하나뿐인 혈육을 죽이고, 친히 강림한 아버지의 면전에서 그를 거역하고, 그 대가로 온 몸의 피를 빼앗겨 살해 당했다가, 기적처럼 부활한 다음 전 동업자인 베인 교단 교주, 새 동업자인 일리시드, 왕관 쓴 거대한 뇌까지 전부 처치하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이 주 정도다. 고작 리더 자리도 불편해했던 녀석이 도시의 영웅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달게 됐으니, 거기에 벌써 다른 의무까지 들이밀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자헤이라는 임시로 적당히 포장한 것을 내밀었다. 

“할 일 없으면 여기 머물면서 일 좀 도와. 안 그래도 손이 부족하니까.”

지금은 있어야 할 곳 보다는 있어도 되는 곳이 더 낫겠지. 애꿎은 티스푼으로 찻잔만 휘적거리던 D가 고개를 들었다.

“건축 쪽은 잘 모르는데.”

“아직 그쪽은 시작도 안 했어. 외곽 도시에 아직 정신 나간 절대자 추종자랑 덜 죽은 마인드 플레이어들이 돌아다닌다. 네가 맡아준다면 믿을 만하지.”

한참 조용하던 D는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자헤이라는 그의 손에서 공연히 혹사당하고 있는 티스푼을 빼앗은 뒤 어깨를 떠밀었다.

“그럼 이만 올라가서 자라. 내일부터 할 일이 많을 테니.“




자헤이라는 노회한 전략가였으므로, D와 함께 마인드 플레이어의 엉덩이를 걷어차 줄 파트너로는 민스크를 골랐고 엘레라신의 집의 꼬맹이들에겐 ‘매일 저녁 바알스폰을 가장 귀찮게 한 사람에게 쿠키 하나를 포상 지급한다’ 는 기밀 명령을 내렸다. 사랑받는 햄스터와 그의 레인저에, 활력 넘치는 어린 애 세 명과 종일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어떤 형이상학적 문제도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한 달이 지나자 도시 근방에서 마인드 플레이어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피그의 목검술 실력은 더욱 늘었으며, 제셈은 ‘복실 경’ 과 총 13번의 무도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바알스폰은 테이트가 제 꼬리에 걸려 넘어진 뒤로 병든 닭처럼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잠드는 고약한 버릇을 고쳤고 조드가 맡긴 화분을 열흘 만에 죽여 라이언에게서 ‘이 집에서 가장 형편 없는 가드너’ 의 자리를 건 도전장을 받았다. 제법 괜찮은 성과였다. 

이 주가 더 지나자 D는 자헤이라의 서재에 나타나 도시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여기서 내가 할 일은 거의 끝난 것 같으니까. 알다시피 뭔가 만드는 일엔 재능이 없어서.”

캔들킵으로 가겠다고 했다. 정말 그 고루한 도서관에 처박히고 싶은 건지, 단순히 이 정신 사나운 집구석에서 도망치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상한 얼굴이 처음 만났을 때와 크게 다를 바 없어서 자헤이라는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돌아오는 길 정도는 알고 있겠지. 

다음 날엔 간만에 서재를 떠나 정예 하퍼 단원들을 이끌고 냄새 나는 지하 수도로 향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마주했다.

“허.”

바알 신전은 이미 비어 있었다.

드넓은 지하 공간은 무너진 석재 구조물과 희게 바랜 잿더미만 묘비처럼 남아 있을 뿐 한없이 고요했다. 피로 물든 제단도, 자식들이 바치던 제물을 내려다보던 바알의 눈도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유령처럼 그곳을 배회하던 광신도들도 토막 난 채 전시되어 있던 수십 구의 시신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미 기름과 화약을 써서 모든 것을 불사른 뒤였다. 어떤 흔적도 남지 않도록 세심하고 철저하게. 

혼자서 화약을 수십 통은 옮겼을 것이다. 자헤이라는 짓무르고 갈라져 있던 손을 떠올렸다. 미련한 녀석.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고집 세고, 제멋대로에 건방진 골칫거리 같으니.

그러나 그런 놈이기에 그날 엘레라신의 집 안에 들이게 된 것이기도 하다. 자헤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받아볼 전언에 겨우 일곱 단어를 썼던 늙은 하퍼와 세상을 구한 다음날 동료들에게 냅킨 한 장만 남기고 사라지는 바알스폰이 주고받을 말이라 봐야 뻔했기 때문이다. 대신 자헤이라는 다시 만났을 때 할 말을 생각했다.



* * *



재회는 5개월 뒤였다.

행선지는 라쉐멘으로 정해졌다. 소식을 전하자 민스크는 즐거워하며 가지고 온 하플링을 거꾸로 쥐고 흔들었다. “해피! 고향에 가야 하니 이번만은 놓아주마. 하지만 다음 번에도 있지 말아야 할 곳에 기어들어 가 있으면 그땐 엉덩이를 사정없이 걷어차 주겠다!” 포도를 집어 먹으며 그 꼴을 구경하던 D가 고개를 돌렸다.

“저런 흥미진진한 광경을 매일 볼 수 있다니, 킨이 정말 행복해했겠어.”

“아주 눈물이 다 난다더라. 전부 누구 덕분이지.”

길드에 ‘잘 모르겠으면 부를 믿어라’ 따위의 행동 강령을 전파한 장본인인 바알스폰은 뻔뻔한 얼굴로 마지막 말을 무시했다. 자헤이라는 의자에 기대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행을 떠나기에 좋은 날씨다.

“제법 긴 여정이 되겠어.”

의자 옆에 놓인 배낭을 살피던 D가 고개를 이쪽으로 기울였다. 

“라쉐멘은 춥다고 들었는데.”

“그래. 가는 길도 험난하고.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다.”

드래곤본이 손을 휘저어 제 흰 비늘을 가리켰다. 자헤이라는 코웃음을 쳤다.

“라쉐멘의 추위를 얕보지 마라.”

“글쎄. 나이 든 고위 하퍼랑 화이트 드래곤본이면 전자를 걱정하는 게 맞지 않나?”

“이 자식이.”

바알스폰은 비교적 잘 지낸 것 같았다. 그림자처럼 늘 붙어 있던 피비린내 대신 낡은 종이와 풀 냄새가 났고, 허공을 보며 하염없이 앉아 있는 시간이 줄었다. 대신 옛 동료들 사이에 섞여 근황을 나누고 농담을 주고받고, 스크래치를 위해 빈 영체 분광기를 집어 던지고, 페이룬을 방랑하겠다는 자헤이라에게 동행 의사를 밝히며 웃었다.

이 특별할 것 없는 작은 평화를 위해 우연히 운명을 같이 하게 된 올챙이-절대자 원정대 아홉 명과 두 마리, 엘레라신의 집의 식구 전체, 재수 없는 햄스터 하나, 죽은 화분, 그리고 크고 작은 기적 서너 개가 필요했다. 바알스폰의 삶이란 본래 그렇게 불공평하고 수고스럽다. 

그래도 역시 얌전히 유언을 받아적는 쪽보다는 멋대로 품을 들여 삶을 안겨주는 쪽이 보다 제 적성에 맞는 것 같다고 자헤이라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거.”

“음?”

“선물.”

이번에 내민 것은 종이와 끈으로 어설프게나마 포장이 되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D는 다른 말을 덧붙이는 대신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자헤이라는 한번 눈썹을 치켜올려 준 뒤 끈의 매듭을 풀었다.

목도리였다.

밤의 숲처럼 짙은 녹색의 털실로 짜인 목도리는 단순한 무늬가 들어가 있을 뿐 전혀 화려하지 않았지만 가볍고 부드러웠다. 넉넉하지만 다루기 버겁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길이에, 한쪽 끝에는 작은 나뭇잎 모양의 은빛 핀이 고정되어 있었고, 익숙한 허브 향초 냄새가 풍겼다. 자연스럽게 엘프의 노래에서 다 함께 뜨개바늘을 손에 쥔 채 보내던 밤들이 떠올랐다. 벽난로의 온기와 데운 우유, 가벼운 웃음소리. 

불행하게도 아직 서재의 책상 서랍 구석에 눌러 앉아 있는 끔찍한 노란색 털모자.

자헤이라는 헛기침을 했다.

“제법 실력이 늘었구나.”

“시간이 많았거든.”

D가 미소를 지었다. 

“써 달라는 말 안 하겠다고 한 건 아는데, 이건 모자도 아니고, 게다가 초록색이고. 어때요?”

참 잘도 저런 말을 지껄인단 말이지. 춥지 않은 밤이었지만 자헤이라는 목도리를 펼쳐 어깨를 덮었다. 포근했다. 

저주받은 땅에서, 바라 마지않던 빛은 흰 드래곤본 바알스폰이라는 황당한 형태로 자헤이라에게 들이닥쳤다. 유일한 희망이랍시고 있는 것이 더없이 불안정하고 위태로웠으므로 늙은 하퍼는 어떻게든 불씨를 지키고자 애를 썼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저 자신을 거창한 불쏘시개로 쓰는 걸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꼴이 되었다. 그러니 완전 연소한 바알스폰이 새로 받은 삶은 자헤이라에게도 기회였던 셈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작전을 훌륭히 성공했으니 자축을 하고 싶었다. 자헤이라는 D를 향해 두 팔을 펼쳤다. 

짧은 순간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눈동자에 수많은 것이 스쳐 지나간다 — 굳이 분석해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고, 상대 역시 그렇게 했으므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한참 키가 큰 주제에 D는 자헤이라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품 안의 드래곤본은 목도리보다도 더 따뜻하고, 오래된 종이와 옅은 허브의 냄새가 났다. 자헤이라는 나직하게 말했다.

“다음부터 집 청소 할 때는 미련하게 혼자 가지 말고 말 좀 해라.”

잠깐의 정적. 이내 귓가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자꾸 그렇게 멋대로 불 속으로 뛰어들면 그대로 두고 갈 거다.”

“하지만 갔다가 다시 올 거잖아.”

제법 확신에 찬 어조였다. 자헤이라는 코웃음을 쳤다.

“자신감이 지나치구나.”

“그럼 왜 나 없을 때 굳이 신전에 가보신 건데요?”

건방진 녀석.

두 사람은 천천히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마주 선 채 한동안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 모자는 이제 태워도 되냐?”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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