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
아줄 아셴그로토 드림
* 23년도 아줄 생일 기념 연성. 선배 생일 축하해요 사랑해요 하트하트.
“아이렌, 너 아줄 선배한테 뭘 선물로 준 거야?”
2월 24일 오전.
1교시가 끝나자마자 1학년 A반 교실로 찾아온 멜로드는, 다짜고짜 감독생을 불러내 물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그거라니. 무슨 일 있어?”
“아니, 무슨 일이 있다고 하기보단 말이지…….”
대충 얼버무리고 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으리라. 이렇게 뜬금없이 찾아와 무언가를 묻는다는 건 명확하게 무슨 일이 있어 그렇다는 걸 말이다. 게다가 다른 이들보다 눈치가 빠른 아이렌이라면, 이 어정쩡한 대답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겠나. 그렇지만 멜로드가 속시원하게 자세한 상황을 말할 수 없는 건, 그 조차도 제가 본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선배, 오늘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였지.’
아침 일찍 아이렌이 기숙사까지 찾아와 선물을 전해주고 갔다고 해서 기분이 좋지 않을까 했는데, 대체 무슨 이유인지 아줄은 등교하는 내내 심란해하고 있었다. 표정을 잘 감추는 편인 아줄이 그렇게 티가 날 정도로 기분이 저조해 보인다면, 역시 아침에 만났던 이에게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멜로드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독촉하는 아이렌에게 평소보다 더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러 왔지.”
“나 거짓말 싫어하는 거 알지, 멜로드?”
“아하하.”
그래. 알다마다. 눈앞의 이 소녀는 설령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거짓말보다는 진실을 알려주길 바라는 사람이지 않나.
그렇다고 제가 본 걸 그대로 말할 순 없었던 멜로드는,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상황을 설명했다.
“그냥 아줄 선배 반응이 좀 특이해서, 뭘 줬나 궁금했지.”
“그래? 혹시 선배가 마음에 안 들어 한 거야?”
“으음, 실망한 건 아닌 듯하셨는데…….”
제가 아는 아줄이라면 단순히 선물한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도, 아이렌이 준 거라면 그것만으로 좋아했으리라. 좋아하는 사람이 준 선물이라면 그게 싸구려 열쇠고리라도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게 사랑 아니던가. 아줄은 로맨틱하다는 말과 가까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파고드는 아이렌의 낭만적인 구석에 동요되곤 했으니까.
그러니 선물이 마음에 든 건 아닐 테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인 걸까?
저 자신도 모르는 걸 대답할 수 없는 멜로드가 말을 잇지 못하자, 아이렌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까딱였다.
“어째 말을 흐리는 걸 보니, 뭔가 내게 말하기 곤란한 게 있나 보네?”
바로 그거다. 사실 솔직하게 말해도 별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멜로드가 이렇게 말하기 곤란해하는 건 다 아이렌의 성향 때문이었으니까. 남을 챙길 때만 행동이 재빨라지는 제 친구니까, 혹 아줄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수업까지 내팽개치고 상대를 찾아가면 곤란하지 않나.
멜로드가 침묵으로 긍정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던 아이렌은, 한숨을 푹 내쉬고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쉬는 시간은 아직 조금 남았지만, 꾸물거릴 여유는 없었다.
“뭐. 굳이 심문하듯 캐낼 생각은 없으니 원하는 대답이나 해줄게. 백화점 상품권으로 드렸어.”
“……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아이렌과 달리, 대꾸를 들은 멜로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안 그래도 흰 멜로드의 피부가 더 창백해지는 꼴을 본 아이렌은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래?”
“그것만 줬어? 정말로?”
“응. 실용성 있고 괜찮지 않나? 금액은 좀 아쉬울 수 있지만, 뭐든 필요한 걸 살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니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계셨던 거구나!’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삼킨 그는 내장까지 토해낼 기세로 한숨을 내뱉었다.
아이렌의 말대로, 상품권 자체는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다. 실용성도 있고, 돈으로 바로 환산할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로맨틱한 관계에 줄 생일선물로 적당하냐’라는 것이었다.
단번에 원인을 알아낸 멜로드가 한탄하고 있을 무렵, 진실을 모르는 아이렌은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멜로드는 뭘 준비했어?”
“나는 고급 안경 닦이. 우리 형이 그러는데, 안경 닦이도 그냥 안경원에서 주는 거랑 고급 제품은 차이가 크다고 해서.”
“오, 좋다 그거. 역시 멜로드는 센스가 있네.”
칭찬은 고맙지만, 지금은 이런 대화를 할 때가 아니다.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사감과 감독생의 로맨스 앞에서 어질어질해진 그는 핑계 없는 무덤은 없음을 알기에, 우선 이유를 묻기로 했다.
“아이렌은 왜 상품권을 준 거야?”
“그거야 아줄 선배는 물건 고르는 눈이 까다로우니 아무거나 선물해 드리기가 좀 그렇고, 필요한 건 본인 손으로 구하실 분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돈도 도움도 안 되는 걸 주는 건 좀…….”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는 모두 타당했다. 다만 멜로드는 상대가 무언가 하나 아주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사람은 만능이 아니구나.’
아이렌은 타인을 잘 파악하고, 눈치도 빠르다. 특유의 예민한 기질로 제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의 내면을 읽어내는 이 소녀에게 누군가에 대해 파악하고 거기 맞춰 행동하는 건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파악에는 정작 관찰자 저 자신에 대한 정보가 빠져있다는 거였다.
아줄이라면 분명 감성이나 외견에 치중한 선물보다는 실용성 있는 선물을 좋아할 거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직접 얻어낼 거란 점과 비즈니스가 대상이 아닌 것에 관심이 없다는 예측도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지, 선물해 주는 상대가 아이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는가.
아이렌은 다른 이의 생일엔 늘 상대가 좋아할 만한 물건을 세심하게 골라 준비해 주었다. 정성을 담은 선물 선택은 대부분 성공했고, 멜로드 또한 그러했지. 그걸 본 아줄은 분명 이리 생각했을 것이다. ‘아, 과연 아이렌 씨는 내 생일엔 어떤 걸 준비해 줄까?’라고 말이다!
그런데 정작 돌아온 게 고작 상품권이다?
그게 아무리 배려 끝에 나온 행동이라도 서운할 수밖에 없을 거다. 심지어 상대가 악의가 없는 걸 아니, 대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게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등교한 거겠지. 좋아하는 여자의 호의에 짜증을 내는 건 추잡한 남자들이나 하는 행동 아니던가.
“아이렌, 그러지 말고 손편지라도 하나 써주는 게 어때?”
보다 못한 멜로드는 그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다.
“갑자기?”
“아니, 그래도 상품권만 하나 달랑 주기에는 좀 정 없지 않아?”
“아줄 선배가 그런 걸 신경 쓸 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어쩌면 아이렌은 아줄은 돈이랑 사업밖에 모르는 남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아니다, 그랬다면 매일 모스트로 라운지에 가 비싼 메뉴들을 사주고 있겠지. 세심하게 아줄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리는 없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멜로드는 애써 마른세수로 입을 문지르며 물었다.
“혹시 아직도 옛날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건 아니지, 아이렌?”
“옛날 일? 아, 그 거래? 전혀!”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속으로 외친 그의 머릿속에, 기말 테스트 이후 아줄이 했던 각종 술수가 스쳐 지나갔다.
‘뭐, 이게 다 선배의 업보이긴 하지.’
솔직히 그 정도로 집요하게 당했으면, 결과적으로 계약이 잘 마무리되었다 해도 상대를 미워할 법도 한데. 아이렌은 오히려 그날 이후 아줄에게 정을 붙이고, 미워하던 마음도 싹 가라앉히고 말았지. 물론 아줄도 태도에 변화가 찾아와, 갑자기 온화하게 변한 아이렌에게 마구 휘둘리게 되었고 말이다.
대체 마법사도 아닌 이 여자애가 무슨 술수를 부려 제 사감을 구워삶은 건진 모르겠으나……. 원래 뭐든 길들였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멜로드는 제 친우에게 그 책임을 묻기로 했다.
“사실 선배가 좀 아쉬워했어. 네가 준 선물인 게 별로 티가 안 난다고.”
“세상에, 그런 거였어?”
“응. 아무래도 좀 무난한 선물이잖아? 실용적이긴 하지만 누가 누구에게든 줄 수 있는 선물이니까. 그러니 편지라도 써 드리는 건 어떨까 하는데. 어때?”
이렇게 까지 말한다면 거절할 수 없을 거다. 멜로드는 그리 생각했고, 그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잠깐 고민한 아이렌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좋아하실지 아닐지 자신은 없지만 일단 써볼까.”
“잘 생각했어. 꼭 그렇게 해줘라, 응?”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아줄 선배를 신경 쓰는 거야? 누가 보면 네가 선배 동생인 줄 알겠어.”
“어? 그거야 나는 상냥한 후배니까, 하하.”
사실 아줄의 기분이 안 좋으면 기숙사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나빠지니, 그게 싫어서 해결하려는 것뿐이지만. 그런 건 굳이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멜로드는 제 의도는 싹 감춘 채, 다음 수업 준비를 하러 떠났다.
A반 교실로 돌아가는 아이렌은 여전히 제 결정에 확신이 없는지, 침음을 흘리며 허공만 바라보았다.
방과 후. 2학년 C반에서 나오던 아줄은 생일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후우.”
땅이 꺼지게 한숨 쉬는 그는 여기저기서 받은 선물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 취향에 맞거나, 혹은 선물한 이의 취향에 맞는 다양한 선물들에는 모두 그 나름의 특색이 있었다.
어떤 것들은 마음에 들고, 어떤 것들은 별로이긴 해도 선물해 준 이의 성의를 생각하면 굳이 기분 나쁠 이유는 없다 싶은 선물이다.
‘그래. 보통 선물이란 이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하며 기숙사로 가려는 순간.
“아줄 선배. 여기 계셨네요?”
“음? ……아!”
아줄은 제 고민의 원흉이, 살가운 얼굴로 다가오는 걸 발견하고 말았다.
제 마음을 감추는 일에는 제법 능숙한 그는 작게 심호흡하더니, 잘 꾸며낸 미소로 상대를 맞이해 주었다.
“아이렌 씨, 무슨 일이십니까?”
“이거, 받아주세요.”
수줍어하며 다가온 아이렌이 내민 것은 작은 편지 봉투였다.
차분한 남색 바탕에 작은 흰색 물방울무늬가 인상적인 봉투는 대체 뭐가 든 것인지, 제법 두툼했다.
“이건?”
“별건 아니고, 편지예요.”
“편지? ……그러니까, 아이렌 씨가 직접 쓴 편지 말입니까?”
“예.”
특별한 이가 특별한 날에 써준 손편지. 그런 걸 싫어할 이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조금 신경 쓰이는 건, 받아 든 봉투의 두툼함이었다.
‘뭔가, 부피가…….’
편지 봉투 크기를 보아하니 편지지 자체가 작은 모양이었지만, 대체 몇 장이나 썼기에 봉투가 이리도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걸까.
대체 상대가 어떤 말을 써두었을지 기대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한 그는 편지 봉투를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바쁘시지 않다면, 파티장에 오셔서 즐기고 가셨으면 하는데, 어떠십니까?”
“좋아요. 그러면 동아리 일만 마무리하고 곧바로 갈게요.”
“좋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이렌 씨.”
아이렌은 약속은 꼭 지키고 싶어 하니, 이렇게 당부해 두었다면 반드시 올 거다.
아줄은 흡족한 미소로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아이렌에게 손을 흔들어 주다가,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비어있는 교실로 들어가 편지 봉투를 꺼냈다.
‘갑자기 편지라니. 아까 선물을 줄 때 함께 줬다면 될 텐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그는 분명 기뻐하고 있었다. 제가 알기로 제이드와 플로이드조차 생일에 아이렌의 손편지를 받은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 설마 제가 제일 먼저 편지를 받게 될 줄이야.
귀까지 쑥 올라간 입꼬리를 감출 생각도 없는 그는 입구를 봉인하고 있는 스티커를 떼어내고 내용물을 꺼냈다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
안에 들어있는 편지지는 총 세 장. 거기에 편지지와는 다른 색의 종이가 서너 장 정도 더 들어있다.
이렇게 내용물이 많이 들어있다니. 이래서야 편지 봉투가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우선 편지지 외의 종이들을 펴보았다. 공책의 낱장으로 보이는 그 종이들에는, 읽어본 적 없는 시들이 잔뜩 쓰여있었다.
‘혹시 아침까지 이것들을 다 쓰지 못해서 선물부터 준 건가?’
편지에 시까지 쓰려면 분명 시간이 걸릴 테니, 선물부터 전달했을 수도 있다. 사실 이왕 늦을 거라면 그냥 같이 주는 게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아줄로선 지금 이 상황을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시는 나중에 천천히 음미하기로 한 그는 우선 편지 외의 종이는 다시 봉투에 넣어두고, 마른침을 삼키며 편지지를 펼쳐보았다.
아줄 선배에게.
선배, 생일 축하드려요. 편지를 늦게 전해드리게 되어 죄송해요. 선물이랑 같이 드렸어야 하는데, 제가 섬세하지 못했네요. 부디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오늘은 대부분의 삶을 바닷속에서 살아오신 선배가 육지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생일이겠네요. 작년에는 제가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축하해 드릴 수 없었지만, 올해는 이렇게 축하해 드릴 수 있게 되어서 정말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선배의 존재를 알게 되고, 선배와 가까워지고, 이렇게 축하 인사를 건네게 될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까요? 만약 제가 선배가 졸업한 후나 입학 전에 이 세계에 오거나,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거나 하면 저흰 평생 서로의 존재도 모르고 살았을 테니까요.
저희가 비록 이렇게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저는 선배랑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어서 참 좋아요. 낯부끄러운 소리이긴 하지만, 선배는 아름다운 사람이잖아요. 언제나 건설적인 노력을 하고, 자신을 완벽한 형태로 가꾸는 건 힘든 일이지요. 누구나 목표를 세울 수는 있지만 그걸 달성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비법은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실천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한 건데, 선배는 제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이뤄내는 사람이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방법이 조금 치사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정말 나쁜 짓은 안 하니까 말이죠.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요? 사람이 좀 치사할 수도 있죠. 저도 꽤 치사한 사람이니까 말이죠.
선배의 옆에 있으면 저도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 제가 말한 적 있던가요?
빈말이 아녜요. 선배는 늘 제게 의욕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느끼는 거겠죠. 마치 달이 태양의 빛을 반사해 빛날 수 있는 것처럼, 저도 선배 옆에 있으면 에너지를 얻곤 하니까요.
그래서 저도 선배에게 뭔가 조금이라도 유익함을 드리고 싶은데, 아시다시피 저는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이라서요. 있는 거라곤 이 몸뚱이에 영혼, 말 안 듣는 마수 파트너와 어쩐지 미덥지 못한 ‘상냥한’ 보호자뿐이죠. 마법도 못 쓰고 연고도 없는 제가 선배에게 해드릴 수 있는 건 많지 않죠. 그런데도 선배가 저를 곁에 두시는 건 제게서 무언가 가치를 느끼거나, 적어도 해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저를 예쁘게 봐주시는 점,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야 괜찮다지만 선배는 제가 껄끄러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저희가 워낙 요란하게 싸웠으니까요.
저는 언제나 선배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도, 앞으로도, 선배가 고난과 역경을 만나는 것까지 막을 순 없겠지만 그 모든 것을 현명하게 이겨내고 지워지지 않는 흉터는 생기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사람은 넘어지고 일어나는 걸 반복하며 성장하지만, 어떤 상처는 때론 흉터가 되어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어떤 사고는 절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부상을 남기기도 하잖아요. 저는 선배가 오래 아플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름답고 숭고한 선배가 파도에 휩쓸리는 일은 있어도, 암초에 부딪혀 다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마법사가 아닌 제가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며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격언뿐이지만, 제 나름의 최선의 노력이니 부디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한 번 생일 축하드려요, 아줄 선배.
언제든 제가 선배에게 필요할 때면, 망설이지 말고 찾아주세요.
아이렌이.
그날 저녁. 아이렌은 해가 막 졌을 즈음에야 옥타비넬 기숙사에 나타났다.
“아, 왔다! 아기새우야, 어서 와~!”
그가 언제 오는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플로이드는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나 아이렌에게 달려갔다. 자신에게 안겨드는 커다란 곰치를 웃으며 마주 안아준 아이렌은 그렇게 플로이드랑 딱 붙은 채 눈인사를 건네는 제이드에게로 다가갔다.
“제가 너무 늦었을까요? 최대한 빨리 온 건데…….”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북적이지 않을 때 와서 다행이지요.”
반갑게 손님을 맞이한 제이드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저 멀리, 기숙사생들과 이야기 중인 아줄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선배, 잠깐만요.’ 양해를 구하고 플로이드의 품에서 빠져나온 아이렌은 대화가 끝날 즈음 슬쩍 오늘의 주인공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 다시 한번 생일 축하드려요.”
그제야 아이렌의 방문을 눈치챈 아줄은 환하게 웃으며 서로 마주 볼 수 있도록 몸을 돌렸다.
“오셨습니까? 아이렌 씨.”
“많이 기다리셨어요? 버스데이 로드 비행은 조금 뒤 인터뷰 후에 하실 거라고 들었는데,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아이렌의 말은 사실인지, 그는 옆구리에 ‘대본집’이라고 적힌 공책이 끼고 있었다. 반투명한 표지 덕에 아줄은 그 공책 내지가 제 편지 안에 넣어 둔 시를 적어둔 종이와 같다는 걸 눈치채고,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거기 적힌 시들은 모두 읽어보고 나서 제가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아마 아이렌은 모를 테다. 단순한 사랑 시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깊은 구석이 있는 그 시들은 자작시는 아닌지 작가로 추정되는 이름이 적혀있었지만, 아줄은 그게 창작품이 아니라는 점에 불평하지 않았다. ‘자신만을 위해’ 이런저런 시집을 뒤져 필사한 시라니. 그걸 어떻게 싫어하겠나.
어쩐지 가슴이 벅차오른 그는 아이렌의 오른손을 가볍게 마주 쥐었다.
“아줄 선배?”
“감사합니다, 아이렌 씨.”
“예? 갑자기?”
“갑자기가 아닙니다. 근사한 생일선물을 받았으면, 응당 그에 맞는 인사를 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생일선물은 상품권이 아니라 편지지라는 건, 아마 상대도 알 것이다. 아줄은 그리 믿고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아이렌 씨. 편지의 내용 말입니다만.”
‘언제든 제가 선배에게 필요할 때면, 망설이지 말고 찾아주세요.’
그 말이 정말 진심이라면.
“저, 필요한 게 있습니다.”
“그래요? 뭘까요? 제 선에서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라도 좋으니, 편히 말해주세요.”
자신을 배려해주기 위해 그리 말해주는 건 고맙지만, 막상 목소리를 내어 말하려니 부끄러움에 입 안이 화끈거린다. 머릿속에 이미 완성되어있는 문장에 벌써 민망함을 느끼고 있는 아줄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볼 수 있는 곳에 계속 있어 주세요.”
제법 비장하게 부탁한 그와 달리, 아이렌은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여상히 되물었다.
“그게 다인가요?”
“예.”
“그건 굳이 부탁하시지 않으셔도…….”
“아니, 그게 아닙니다.”
이 부탁은 일시적인 게 아니다. 둘 다 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나이가 들어 피부에 주름이 생기고 거동이 불편해질 정도로 노화가 진행될 즈음에도, 그때까지도 함께 있어달라는 엄청난 요구였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자세히 풀어 말하기엔, 아줄은 지나치게 이성적이었다.
그래. 애초에 아줄은 감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아이렌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정함을 베풀어주는 사람. 제가 말하지도 않은 것들을 알아채고, 제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자신을 보듬는 사람. 자기 자신의 가치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오직 상대의 소중함만을 속삭이는. 자신과는 꽤 다르기에 제가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늘 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자극하는.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가 없는, 그런 아이렌이니까.
“앞으로도 계속,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제가 행복할 수 있게.”
제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저 상대가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는 걸, 알아주면 좋을 텐데.
하고 싶은 말을 논리적으로 내뱉기보다는 적당히 감추는 걸 선택한 그가, 맞잡은 손을 제 뜨거운 뺨에 가져가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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