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지 않은 감시자가 있는 데이트 현장
쟈밀 바이퍼 드림
“선배, 어때요? 괜찮아요?”
쟈밀은 입안에 퍼지는 부드러운 단맛에 따뜻한 한숨을 내뱉었다. 원래 어느 정도 손재주가 있기 때문인지, 아이렌이 만든 에그노그는 제법 맛이 괜찮았다.
이 정도면 카페에서 파는 것보단 못할지 몰라도,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몇 번 입맛을 다신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맛있네.”
“정말요? 뭐 더 고칠 점은 없어요?”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해? 맛있어.”
개선점이 아예 없진 않지. 하지만 어디 팔 게 아니라면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나.
홀짝거리며 에그노그를 마시던 그는 아이렌의 뒤쪽에 보이는 선반을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자신은 그저 선반을 설치하는 걸 도와주러 온 것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점심도 대접받고 게임도 한 판 한 후 나란히 앉아 담요까지 덮은 채 에그노그를 마시고 있다니. 물론 할 일만 하고 곧바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건 너무 본격적으로 눌러 앉아버리지 않았나.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선배.”
“뭘 이 정도로. 크게 힘든 일도 아니니까.”
“그래도 시간 내서 도와주러 오신 거잖아요. 저 혼자 했으면 분명 시간이 더 걸렸을 테니까요.”
“모르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못 본 척할 수는 없으니까.”
아이렌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저렇게 작지도 않은 선반을 마법도 못 쓰는 미성년자 여자애 혼자 설치하는 건 좀 힘들지 않겠나. 쟈밀은 오히려 우연히라도 아이렌의 주말 일정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웬만하면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혹시나 못질하다가 실수하기라도 해 다치면 몸이 다 나을 때까지 신경 쓰였을 테니 말이다.
묘하게 중독되는 단맛에 혀가 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액체를 홀짝이던 쟈밀은, 이내 자신을 빤히 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래?”
“아니, 이렇게 있으니까 꼭 부부 같다 싶어서요.”
“쿨럭!”
아뿔싸. 너무 놀라서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그래도 에그노그가 아주 뜨거운 상태가 아니고, 조금씩 마시던 중이라 큰 타격이 없는 건 다행일까. 쟈밀은 기침하느라 입가에 묻은 액체를 손등으로 훔쳤다.
“선배, 괜찮으세요?”
“……아마도.”
‘으음.’ 아이렌은 잠깐 고민하더니 휴지와 물티슈를 가져다주었다. 보아하니, 쟈밀이 걱정되는 것과는 별개로 딱히 제 발언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듯했다.
쟈밀은 입가와 손을 깨끗이 닦고 느리게 심호흡하였다.
부부라니.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한 걸까. 아니, 사실 영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안일을 도와주고 함께 식사하고 휴식 시간까지 붙어있다니. 누가 봐도 신혼부부의 일상 같지 않은가.
사실 자신도 아까 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설레발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싶어서 애써 외면했는데, 설마 상대방의 입으로 같은 말을 듣게 될 줄이야.
희미하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낀 쟈밀은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버렸다.
“그림은 언제 온다고?”
“저녁때 즈음 되어야 올 거예요. 아마 지금은 에이스랑 듀스랑 신나게 놀고 있을걸요.”
그럼 그때까지는 있어도 되는 건가. 단둘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소란스러운 그림이 끼어있다면 느긋하게 있을 순 없을 테니까.
쟈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아이렌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저녁도 드시고 갈래요?”
“됐어.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돼.”
“보답 때문에 그러는 거 아녜요. 이왕 둘만 있는 거, 더 놀고 가시란 거죠.”
그건 참으로 거절하기 힘든 이유다. 언제나 주변에 사람이 북적거리는 감독생과 단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쟈밀은 차마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지 못하고 상대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둘만 있어?”
“네.”
“아닌 거 같은데.”
“예?”
쟈밀은 슬쩍 검지를 세워 출입문 너머를 가리켰다. 살짝 열린 방문 너머로 보이는 건, 자신들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하는 고물 기숙사의 고스트들이었다.
‘이런, 우후후.’ 훔쳐보는 걸 들킨 고스트들은 소리 죽여 웃으며 자리를 떠버렸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보던 아이렌은 민망해하며 한숨 쉬었다.
“어휴, 다들 못 말린다니까. 뭐 볼 게 있다고.”
아니, 제가 고스트라도 훔쳐볼 것 같은데. 눈앞에 데이트하는 남녀가 있는데, 죽고나서 할 것도 별로 없는 고스트들 눈에는 얼마나 재미있겠나.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대로 구경거리가 될 생각은 없다. 쟈밀은 마법을 이용해 살짝 열린 문을 앉은 채 닫아버렸다.
그렇게 이번에야말로 둘만 남게 되자, 아이렌이 침묵을 못 이기고 먼저 말을 걸었다.
“맞다, 전에 그 밴드 말이에요. 이번에 신곡이 나왔는데 같이 들어볼래요?”
“같이 공연 보러 갔던 그 밴드?”
“네. 꽤 흥미를 보이셨던 것 같아서요. 혹시 괜찮으면, 어떠세요?”
제가 심심할까 봐 이것저것 해보려는 건가. 노력은 가상하지만, 자신은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그러도록 할까.”
그래도 이왕 권해줬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아, 꼭 사냥에 성공한 들짐승같이 의기양양한 미소다. 히죽 웃으며 음악 어플을 켜 노래를 검색하는 아이렌의 모습을 그렇게밖에 평가할 수 없는 쟈밀은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웃어?”
“역시 그 밴드 좋죠? 전곡이 마음에 들 수는 없더라도, 몇 곡 정도는 마음에 드시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만약 이데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지금 아이렌의 언행을 보고 ‘영업에 성공한 오타쿠의 얼굴이다’라고 말했겠지만, 그런 쪽 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쟈밀의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상대의 뿌듯함을 다른 의도로 해석한 그는 제 팔을 교체시켜 팔짱을 끼고 답했다.
“전반적으로 꽤 좋았어. 요즘도 자주 듣고 있고.”
“그래요?”
“하지만 노래를 들을 거면 혼자 조용히 들으면 되는 거지, 굳이 같이 들을 필요는 없지.”
“예?”
아이렌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열심히 움직이던 손가락도 멈춘 채 눈만 깜빡인다. 그 행동을 모른 체라고 생각하는지, 쟈밀은 구체적으로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러니까, ‘노래 들으려고 남는 건 아니다’라는 거야. 뭘 의기양양한 표정 짓는 거야?”
“예?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아, 그래?”
“그럼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걸 선배도 좋아해 주니 기쁜 거죠.”
과연 정말 그것뿐일까. 쟈밀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굳이 가타부타 진실 공방을 벌이진 않았다.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잔뜩 있었으니까.
예를 들어, 어느새 몰래 다시 돌아온 방해꾼들이라던가 말이다.
“거기. 아예 그냥 들어와서 구경하지, 그래?”
물리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고스트들은 이젠 아예 닫힌 문 너머로 얼굴만 내밀어 둘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크~!’ 훔쳐보는 걸 들켰음에도 장난스러운 감탄사만 내뱉으며 도망가는 세 유령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부리나케 도망치는 고스트들을 본 아이렌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죄송해요.”
“네가 죄송해야 할 일은 아니지.”
“제 잘못 맞죠. 그림이 아니라 쟤들도 쫓아냈어야 하는데, 제가 물렀네요. 이래서야 부모님 있는 집에서 집 데이트하는 꼴이랑 뭐가 달라요?”
이건 굳이 따지자면, 부모님이 아니라 나이 어린 형제에게 방해받는 느낌에 가깝지 않을까. 아니, 방해받는다는 점에만 초점을 둔다면 그게 그거일지도 모르겠다.
쟈밀이 좀 더 적당한 표현을 찾는 동안, 뭘 그리 고민하는 건지 한참 말이 없던 아이렌은 돌연 파격적인 제안을 해왔다.
“아예 보고 있기엔 민망하게 만들까요?”
“뭐?”
“원래 강제로 쫓아내는 것보다는 자발적으로 도망치게 하는 게 효과적이잖아요?”
어떻게 도망치게 할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쟈밀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제 옆에 바짝 붙은 몸의 체온을 선명하게 의식하게 된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가장 중요한 말만 딱 골라 내뱉었다.
“만약 도망가지 않는다면?”
“……그렇게까지 뻔뻔한 친구들 아녜요, 우리 고스트들.”
“확신은 못 하는 거잖아?”
아이렌은 정답이라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억지로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그래도 낙관적인 태도라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쟈밀은 잠깐 고민하더니, 갑자기 아이렌을 번쩍 들어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선배?”
자세를 바로잡고 한쪽 팔로 아이렌의 허리를 감싸 안은 그는 자신을 부르는 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스마트폰 쪽으로 눈짓했다.
“틀어 봐. 노래.”
그렇게 꽉 끌어안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이 품에서 나갈 수가 없다. 아이렌은 무표정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쟈밀이 귀여워 쑥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시키는 대로 준비한 노래를 튼 아이렌은 가만히 노래를 같이 듣다가, 간주가 나올 때 살짝 속삭였다.
“그냥 그림 보고 오지 말라고 할까요?”
이러다가 나중엔 자고 가라고 하겠다.
쟈밀은 ‘그럴까’라고 반사적으로 답하려다가, 겨우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집 데이트가 하고 싶은 거라면, 다음에 그냥 우리 집에 놀러 와.”
“……선배 집이요?”
“그래.”
“그건 집 데이트가 아니라 상견례 아녜요?”
장난스럽게 묻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건 진담 반 장난 반으로 꺼낸 말인 모양이다.
이제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아이렌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된 쟈밀은 가벼운 말투로 대꾸해 주었다.
“늘 생각하는데, 넌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냐.”
“학생이 이렇게 똑똑한데 진도가 느리면 오히려 손해 아녜요?”
“……말이나 못 하면.”
정말 아이렌을 집에 데려가면 어떻게 될까. 나쥬마는 또 놀러 왔냐며 기뻐한 뒤 자신을 잔뜩 놀릴 테고, 부모님은……. 솔직히 반응이 잘 예상되지 않는다. 손님이니 잘 대해주긴 하겠지만, 일반적인 손님은 아니니 말이다.
어떤 사람인지 잘 관찰하면서도,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할까? 아니면 ‘이렇게 무르게 생겨서 바이퍼 가에 시집와도 되겠냐’라고 생각하려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꼭 말해주리라. 당신들의 며느리가 될지 아닐지 모를 이 여자애는 비뚤어진 개구쟁이들이 한 트럭 있는 이곳에서도 가해자가 되면 몰라도 피해자는 되지 않으려는 무시무시한 여자라고.
“노래 좋죠?”
“어.”
사실 미래의 상견례를 생각하느라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멜로디는 좋은 거 같다.
쟈밀은 나중에 돌아가서 다시 노래를 들어보기 위해 어플에 뜬 곡명을 외워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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