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준

싸라기눈

대학생 지상고, 쟁준, 준짝쟁

오른쪽 준수 by 오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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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유, 주말에 갈 거지?

전화를 받자마자 준수가 이렇게 물어왔다. 재유는 몇 초 고민하는 듯 신음하더니,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준수가 그래, 그때 봐. 하고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옛 지상고 농구부원들이 모두 모이는 술자리였다.

 


싸라기눈

W. 오준


날이 좀 풀리나 했더니, 귀신같이 다시 추워진 공기에 준수가 몸을 떨었다. 평소 날씨를 생각하고 코트를 입고 나온 것이 패착이었다. 다행인 점은 약속 장소인 고깃집이 걸어서 십 분 거리라는 점일까. 준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준수. 이제 오나.”

도착한 가게 앞엔 재유가 서 있었다. 재유도 이제 막 도착했는지, 막 가게 문을 열려고 하던 참이었다. 일찍 왔네. 준수가 손을 흔들며 재유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도착한 다은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아, 오셨어요?”

핸드폰을 하던 다은이 일어나 인사했다.

“어어, 그래. 오랜만이다. 다른 아들은?”

“아직요. 좀 있으면 올 것 같아요.”

다은이 단체 채팅방 화면을 좌우로 흔들었다. 곧 도착한다는 상호와 희찬, 그리고 태성의 메시지가 보였다.

“감독님은 말씀 없으셔?”

“그때 오신다고는 했는데... 지금 확인 안 한 한 명 감독님인 것 같거든요.”

“바쁘신가. 알아서 오시겠지, 뭐.”

준수가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이 오기 전 미리 주문을 해놓았는지, 얼마 안 있어 삼겹살 십 인분이 테이블 위에 올랐다. 일단 먹고, 오면 더 시켜요. 다은이 그렇게 말하며 준수의 손에 들린 집게를 빼앗았다.

 


“햄들! 저희 왔어요!”

고깃집 문을 열며 희찬이 들어왔고, 그 뒤를 상호와 태성이 따랐다. 벌써 먹고 있냐며 투덜대는 태성의 입에 다은이 크게 싼 쌈을 처박아 입을 막았다. 삼겹살 십 인분과 소주 여섯 병을 더 시켰고, 두 테이블로 시작했던 자리는 세 테이블로 늘어났다. 고기를 둘 곳이 없어서였다.

불판을 두 번째 갈 때쯤이었다. 현성으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왔다. 내용은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급한 일이 생겨 못 온다는 거였다.

“감독님 저희 밥값 내주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겠죠?”

상호가 삼겹살 세 점을 한 번에 집어먹으며 그렇게 말했다. 준수가 소주잔을 들어 삼키며 핀잔을 줬다. 에이, 장난이에요, 장난. 상호가 변명하며 이번엔 삼겹살 네 점을 집었다. 그러나 이번엔 입에 넣지 못했다. 한 번에 한 점씩 먹으라며 태성이 뒤통수를 갈겼기 때문이다.

“아! 말로 해요, 말로!”

“말로 하면 듣나? 어디서 버릇없는 행동이고?”

“들을걸요. 아마도.”

상호가 뒤통수를 문지르며 고기 두 점을 다시 돌려놓았다. 이번엔 준수에게 더럽다며 욕을 들어먹었다.

 


“더 마실 거야?”

준수의 물음에 재유가 테이블 위 소주병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열네 병. 슬슬 그만 마셔도 될 것 같은데.”

“그래 그럼. 이거 막병으로 한다?”

준수가 딱 석 잔 어치가 남은 소주병을 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막내랍시고 주는 잔을 다 받아마신 상호는 이미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에 들었다. 그 옆에서 희찬이 상호를 붙잡고 주정을 부리고 있었고, 태성은 알딸딸한 머리를 흔들며 술에서 깨려 노력했다. 다은은 비교적 멀쩡했고, 준수와 재유는 딱 기분 좋은 정도였다. 준수가 불판에 올라가는 마지막 고깃덩이를 보며 말했다.

“그거만 먹고 일어나자.”

“네.”

술자리 내내 준수에게서 집게를 사수한 다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게 내심 언짢은 준수였지만, 억지로 집게를 들려 하진 않았다. 어차피 얼마 못 가 다시 뺏길 게 분명했다. 지상고등학교 농구부는 준수가 고기 집게를 들 때 가장 단합이 잘 됐다.

“자.”

준수가 재유와 다은의 잔에 차례대로 소주를 따랐다. 준수의 잔을 채워준 건 다은이였다. 준수가 공손한 태도로 소주를 따르는 다은을 보며 물었다.

“새 부원 몇 명 들어왔다 그랬지?”

“어, 저희 졸업할 땐 여섯 명이요.”

“와. 많이 들어왔네.”

신입 여섯 명이라니. 새삼 자신들이 얼마나 힘든 날을 견뎠는지 다시 깨닫는 시간이었다. 짠하고 잔이 부딪쳤다. 세 사람 모두 원샷이었다.

“다음 주장은? 걘가? 민철이?”

“저도 민철이가 할 줄 알았는데... 우영이가 하더라고요.”

“민철이가 싹싹하긴 한데... 리더십은 우영이 갸가 있긴 했지.”

우영이가 할 만도 하다. 재유가 중얼거리며 고기를 한 점 집어먹었다.

“어떻게 알아?”

“전에 본 적 있다이가. 학교 찾아갔을 때. 우영이랑 민철이랑 둘 다 인사했는데. 니 설마 기억 안 나나?”

“아니, 그땐 잠깐이었잖아.”

준수가 억울한 듯 덧붙이자, 재유가 킥킥 웃으며 준수의 접시에 고기를 한 점 올렸다. 내가 알아서 먹을게. 툴툴대는 준수를 보고는 더 웃었다.

 


“잘 들어가고. 연락해리.”

계산은 우선 준수 카드로 했다. 다은이 상호를 업고, 태성과 희찬이 서로를 부축하며 길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준수가 알기로 재유의 자취방도 저쪽이었다. 그러나, 재유는 가지 않고 준수의 옆에 서 있었다.

“재유. 안 가?”

“어어, 가야지. 근데 뭐, 빨리 들어가서 할 것도 없고.”

재유가 준수를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산책 좀 하려 하는데. 같이 할기가?”

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계산은 내일 아침에 해도 되니까, 뭐.

“근데 너 집 나랑 반대쪽 아냐?”

“맞긴 한데... 뭐, 준수 니가 데려다줄 건데 걱정될 게 있나.”

“어?”

자기도 모르는 새 정해진 것에 준수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재유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와, 니는 그런 표정을 지어도 참 잘생겼네. 하고 볼을 쿡 찔렀다. 아! 재유! 준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야. 나 근데 진짜 김우영 걔 까먹은 거 아냐.”

“어어.”

“그냥 그때 잠깐 본 건데 리더십 좋고 이런 걸 어떻게 알았냐 물어본 거지.”

“안다. 내도 그냥 예상한 거지, 뭐. 그때 다른 애들 통솔해서 인사시킨 게 우영이었으니까.”

“사소한 거 되게 잘 기억하네.”

“내 기억력 얕보면 섭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애들은 애처럼 보인다거나, 민증 검사를 안 한 게 이해가 안 된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재유는 그런 준수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걸었다. 한 번 입이 트이니 줄줄 이야기를 늘어놓던 준수가 졸업식 얘기를 막 꺼냈을 무렵, 작은 알갱이가 툭 하고 팔에 닿았다.

“아, 우산 없는데.”

싸라기눈이었다. 준수가 제 머리를 손으로 가리며 투덜거렸다. 우산이 없는 건 재유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다행인 점은 그 정도가 심하지 않다는 거였다.

“니 안 춥나? 인제 보니 옷이 코트네.”

“날씨가 이럴 줄 몰랐지. 존X 추워.”

“우짜노... ...야, 준수. 저기 니 집 맞나?”

재유가 가리킨 곳에 준수의 자취방 건물이 보였다. 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유가 냅다 준수를 끌고 건물로 향했다.

“뭐해?”

“눈이 오는데 산책을 더 할 순 없고. 더 심해지기 전에 빨리 들어가는 게 안 낫겠나.”

“너 집은?”

“내 신세 좀 지께. 설마 이 날씨에 내를 내칠기가. 매정하게.”

하아, 준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재유는 웃고 있었다. 자기가 거절하지 못할 걸 알면서 괜히 물어보는 거였다. 역시 준수는 거절하지 못했다.

 


“건배.”

준수의 자취방, 재유는 들어오자마자 술을 찾았다. 아까 먹은 건 술이 아니었나 싶어 준수가 묻자, 재유는 오히려 더 뻔뻔하게 나왔다. 술 없으면 내가 사오께. 2차는 해야지. 결국 준수가 냉장고 구석에 있던 수입 맥주 네 캔을 꺼내왔다.

“이거 전에 본 거야. 딴 데 틀어.”

텔레비전이 화면이 휙휙 돌아갔다. 재유가 적당한 채널을 찾아 리모컨을 내려놓고는, 마찬가지로 준수네 집 주방을 뒤져 찾아낸 과자를 한 입 먹었다. 잠시 고요가 이어졌다. 정적을 깬 건 재유였다.

“...니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아 있나.”

“갑자기?”

준수도 과자를 하나 집어 먹었다.

“원래 술 마시면 이런 얘기도 해 줘야지. 아무튼, 그래서 있냐고.”

“있었겠어? 그땐 야, 대학 때문에 얼마나 심란했는데. 연애 같은 데 눈 돌아갈 시간도 없었어.”

“그래? 뭐, 그럴 것 같긴 했다.”

재유가 준수의 맥주캔에 제 것을 들이밀어 건배했다.

“재유, 넌?”

꿀꺽, 재유가 맥주를 크게 두 모금 마셨다. 캬- 하고 소리를 내는 게 꽤 아저씨 같아 준수가 웃음을 흘렸다.

“내는 있었다.”

“어? 정말?”

준수가 언제 웃었냐는 듯 화들짝 놀란 표정을 했다. 당연히 저와 같을 줄 알았다. 아니, 그럼 재유는 그 바쁜 와중에도 좋아하는 애 신경 쓸 정신이 있었단 말이야? 어쩐지 억울했다.

“누군데? 나도 아는 애야?”

“니? 니는 당연히 알지. 닌 모르면 안 된다.”

준수의 머리가 휭휭 돌아가기 시작했다. 재유와 자신이 동시에 아는 여자애라면... 몇 명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지만 그 모두에게서 딱히 그런 기류를 느낀 적은 없었다. 재유가 좋아했던 애라면 재유가 특별 대우라도 했어야 맞을 텐데. 적어도 준수의 기억엔 그런 애는 없었다.

“...모르겠는데. 말해주면 안 돼?”

“니 하는 거 보고.”
재유가 반쯤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표정을 보니 꽤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애인이 생겼다는 말은 들은 적 없으니 짝사랑으로 끝난 거겠지. 어쩐지 불쌍해서, 준수가 손을 들어 재유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텔레비전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집안, 재유가 먼저 잠든 준수를 힐긋 쳐다보았다. 텔레비전에서 큰 소리가 나자 준수가 팔을 움찔거렸고, 재유는 인상을 찌푸리며 텔레비전을 껐다. 그러자 또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재유가 두 모금 남은 맥주를 홀짝이며 제 짝사랑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쟤는 술에 취해 잠들어도 어떻게 잘생겼지. 분명한 건 이게 제 콩깍지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점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준수도 자기를 좋아해 주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고려 대상이 되었으면 했다. 그 바람은 준수가 제 짝으로 여학생들의 이름을 세 개째 말했을 때 사라졌다. 그래, 그럼 그렇지. 기대감 대신 체념이 쌓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버려야만 했다. 그때 버렸다면, 지금까지도 이렇게 좋아하진 않았을 텐데.

핸드폰을 켰다. 삼십 분쯤 전에 온, 잘 도착했다는 후배들의 메시지가 보였다. 재유는 상단에 고정해 둔 준수와의 채팅방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바보 같았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으니까. 뭘 더 하겠어. 재유가 채팅방을 꾹 눌렀다. ‘상단 고정 해제’ 버튼에 몇 번이고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결국 누르진 못했다.

에휴, 재유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저 멀리 두었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팔을 베고 누워 준수를 보았다. 아, 코가 꿰여도 단단히 꿰였구나.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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