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1. 이혼을 하려면 일단 (10)
두레 사람들이 나간 지 오래 되어서 마리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짓는 연기가 아침에 나지 않았으니 병영에 가야했다. 문가에서 소리가 나자 마리한은 멈췄다. 손님들이 마당을 뜨지 않았다. 손님들이 마당을 떠날 때까지 형산은 문 앞에서 기다렸다.
두레에서 논의할 사항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더니 두레 간부들은 아슬라와 수리모가 만난다고 행도를 볶았다. 저들의 자식들도 궁 앞에서 혼인을 반대한다고 소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한숨을 삼키다가 형산은 마니가 높인 목소리를 들었다. 형산은 한번도 마니와 자신의 의견이 같다고 여기지 않아서 마니가 하는 말이 의문스러웠다.
마당에서 들리던 목소리들은 높아지다가 한순간에 수그러들었다. 경비를 서는 병사들은 본래 둘 중 한 명이 마리한에게 방문자를 알렸지만 연쇄살인범이 활동하면서 넷 중 둘이 마리한에게 손님이 왔음을 고하러 다녔다. 수리모를 집에서 태워왔던 병사들이 간부들을 지나 집무실 문을 열었다.
“조사관 화정이 마리한을 뵙고자 합니다.”
나정은 할아버지가 잡은 손을 빼냈다. 어차피 궁 안에 있으면 위험하지도 않고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 가는 길도 안전했다. 걱정은 병영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할 아빠한테나 할 걸 그랬다.
“가볼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나정이 병영으로 떠나자 수리모는 아슬라를 돌아보았다. 잠깐 끊겼어도 중요한 이야기는 마쳐야 했다.
“아슬라, 앞날을 위해서는…….”
“수리모, 잠시 수사를 도와주세요.”
할 말도 조금 있으면 마치련만 마리한이 직접 자신을 찾아와 부를 정도로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그러지도 못했다. 수리모는 공손하게 마리한과 동행한 조사관을 맞이했다. 아슬라는 화정을 바로 알아보았다. 화정이 눈짓하자 아슬라는 이해했다. 공무를 마친 후에 인사하러 가도 될 것이다.
마리한의 집무실에 들어서면서 화정은 진행된 수사 내용을 밝혀야 할지 고민했다. 마리한은 공사를 잘 구분했다. 어린 시절 돌봐준 이라도 궁 안 체제를 개편하면서 자리를 주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 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미리를 따라 조사관 일을 배우면서 화정은 자식이라서, 부모라서 사실을 숨기고 수사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을 봐왔다. 수리모는 마리한이 아기일 때부터 돌봤고 그 딸까지 키웠다. 방금 자신을 집무실로 데려다준 이들도 수리모를 알고 지냈을 테니 화정은 그들에게 수리모를 불러달라고 부탁하지 못했다.
병사들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했다간 밖에 있을 두레 간부들이 그들에게 안에서 들은 말을 캐물을 것이다. 형산은 병사들을 돌려보냈다.
“수사기록 때문에 오셨습니까? 저녁에 가려 했습니다.”
“책은 숨겨두었습니다. 참고인이 이곳에 있어서 왔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아슬란 사람들을 만날 줄 알았습니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직접 여쭤보고 기록하려 합니다.”
마리한은 이름을 언급하지 않아도 조사관이 찾았을 사람을 바로 알았다. 화정은 마리한이 아침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묻지 않자 안도했다. 오늘 아침에 벌어진 사건이 궁에는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사건은 보고하겠지만 그 전에 수리모를 만나 조사해야 했다.
손수 화정을 수리모에게 인도한 후 마리한은 남겨진 아슬라를 돌아보았다. 아슬라는 별채로 향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다가오는 두레 간부들을 보고서 아슬라는 마리한께 인사를 올렸다.
점심 때 마리한은 병영에 들렀다. 어떻게 연쇄살인범을 두려워하지 않고 밥을 해먹었는지 병사들은 먹은 것을 치우고 있었다. 부엌을 나서던 솔뫼는 나정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형산과 마주치고 당황했다.
“점심 차릴 시간이 됐네요. 금방 차릴게요.”
“아직 속이 든든하니 천천히 차리세요.”
“엄마, 그거 할아버지 선물 아니에요?”
“아슬라님께서 부탁하셨어. 할아버지 드리래.”
“아까 할아버지가 양들이랑 나한테 나눠주셨는데 맛있었어요.”
“뭐가 들어 있나요?”
솔뫼는 딸과 양이 동시에 만족할 먹거리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말린 과일하고 찹쌀부각하고. 다른 것도 있어요.”
“누룽지가 있는 것 같더라.”
“하슬란 어르신들께서 누룽지를 좋아하시나봐요. 매번 누룽지를 주시네요.”
“찹쌀부각은 좋아하신 지 얼마 안 되었나봐요.”
“그러게요. 나정이 돌에 궁에 찹쌀부각이 들어왔으니.”
“엄마 생일마다 보냈다던데? 아까 아슬라님께 들었어.”
형산과 솔뫼는 동시에 딸을 돌아보았다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후로 엄마와 아빠가 지키는 침묵이 너무 무거워서 나정은 벗어나고 싶었다.
“할아버지 벌써 가셨어요?”
궁을 나와서 학교 앞을 지나면 의로운 양 석상이 나왔다. 이곳에서부터 아슬라는 수레를 세워가며 간부들을 내려주었다. 마니와 자신만 남자 아슬라는 속도를 최대한 줄였다. 손님들만이 아니라 양들도 덩달아 신경이 곤두서서 긴장을 다스려야 했다.
하슬라 저택 가는 길을 지나치고 마니는 조카가 고대하던 일을 떠올렸다.
“슬아야, 우리 아슬란에 들러야지.”
“수리모한테 들었어요. 내일부터 손님을 맞으신대요.”
“가면 준비부터 해야겠다.”
하도 두레 간부들한테 시달려서 마니는 기운이 없었다. 이미 수리모가 거부했다지만 가족들조차 반대하지 않는 사람을 저들이 뭐라고 파토놓으려는지. 아슬라가 수리모 사촌형한테 듣고 오기 전까지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혼인을 반대하던 사람조차 넋이 빠졌다.
수리모가 나정과 나누던 대화를 떠올리자 아슬라는 수리모에게 준 선물이 떠올랐다.
“준비해간 선물을 수리모가 반겼어요.”
“그럼 좋지.”
“마리한네 따님께서도 맛있어 하셨어요. 생일에만 먹을 수 있던 거라고 좋아하셨어요.”
“그 댁에선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마리한께서 어릴 때도 보냈는데 아무 말씀 없으셔서.”
주요 용의자는 마리한께 병사를 요청해 구속해야 하지만 그러려면 새로 발생한 사건을 보고드려야 했다. 화정은 아직 연쇄살인범의 새로운 피해자를 밝힐 수 없었다. 방금 전 아슬라를 마주쳤을 때도 최대한 말을 아끼느라 눈으로만 인사했다. 혼담이 오갔으니 아슬라도 수리모와 남이라고 할 수 없다.
수리모는 필사하던 종이를 치우고 조사관이 쓸 자리를 만들었다. 책상 앞에 손님용 의자를 가져다놓고 수리모는 화정 맞은편에 앉았다. 간메를 배웅한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다가 수리모는 의아했다.
“오늘 아침에 수레를 타고 어디에 다녀오셨습니까?”
“그날 저녁 일을 말씀드려야 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여쭙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아침에는 별일이 없었다. 사촌형이 외출중이어서 궁에서 보낸 수레를 누나가 맞이했다. 평소 출근하듯이 짐을 챙겨서 수레에 오르자 얼마 후 궁에 도착했다.
화정은 말하는 수리모의 표정을 관찰하다가 물었다.
“가는 도중에 멈춘 곳이 있습니까?”
“의원에 잠시 들렀습니다.”
“어느 의원이었습니까?”
수리모는 방문한 의원을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조카인 솔뫼는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신장도 마찬가지여서 주기적으로 비뇨기과 전문의를 방문해 신장에 좋은 약재를 타왔다. 마침 개업하고 일이 적을 때라 의사는 솔뫼가 가볍게 앓을 때마다 약을 처방해주었다. 이맘때면 먹던 약이 떨어질 터라 수리모는 궁에 들어가는 김에 솔뫼에게 달여줄 약을 타왔다. 신장에 지장이 있어서 비뇨기과에서 약을 받아와도 이상한 생각을 품고 조카를 긁어대는 사람들을 겪고 나서는 수리모가 약을 타왔다.
화정은 지도를 꺼내서 펼쳤다. 사브랑 대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 중에서 화정은 한 곳을 가리켰다. 조사관은 마리한께 보고할 테니 다른 곳에는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수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곳이 맞습니다.”
진술서가 마를 동안 화정은 지도를 챙겼다. 수리모가 일어나서 짐을 챙기자 화정은 만류했다.
“잠시 만나고 올 사람이 있습니다. 서기께서는 마리한 부군 곁에 머물러주십시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수리모와 말을 맞출 경우를 대비해서 경비병들은 따로 만나야 했다. 진술서가 마르자 화정은 진술서를 접어서 챙겨넣었다. 당장은 수리모 앞에서 수사 기록을 잘 챙겨야했다.
궁 안에서 증거물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화정은 가장 먼저 연쇄살인범의 특징에 부합하는 사람을 찾았다. 병영에는 40년 전에 태어났던 사람이 적었고 있어도 당시에는 유아였다. 미리는 연쇄살인범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연쇄살인범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감추는 데 능숙하면 이제껏 밝혀지지 못해도 납득할 수 있다.
궁에 방문하기 전에 화정은 연쇄살인범에 관련된 미리의 기록을 천으로 싸서 조사관실 중정에 묻어두고 나왔다. 묻어두기 전에 화정은 미리가 사건을 수사하면서 만나려고 적어둔 참고인들을 훑었다. 사브랑에서 살인이 집중적으로 벌어지기 전에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마다 등장하는 똑같은 순례객들이 있었다. 사브랑에 적을 둔 한 사람만 미리가 연속해서 만나지 못했다. 의사가 만난 마지막 고객도 같은 사람이었다.
샤로에서 유일한 남성 비뇨기과 전문의는 아침 일찍 수레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이야 당연히 없을 테고 방문객은 뻔했다.
연쇄살인범은 샤로에서 남성 비뇨기과 수련의를 줄여버린 원인이기도 했다. 일단 대상 환자 수가 줄자 수련의들은 줄줄이 전과했다. 그때 남았던 한 명이 지금 유일한 전문의였다. 환자들은 취약한 환경에서 혹시나 연쇄살인범일지도 모르는 의사와 만나길 두려워했다. 개업한 후에는 배앓이나 농기구에 베이고 찍힌 사람들을 치료하며 근근이 입에 풀칠했다가 아슬란네 아들의 주치의처럼 지냈다. 어떤 해는 아슬란 저택에서 잔 날이 한 해 절반은 넘었다. 연쇄살인범이 언급되지 않을 무렵에는 샤로 전역에서 남성들이 비뇨기과 문제로 방문하는 곳이라 지낼 만 했다. 잠옷 위에 외투만 걸치고 의사는 손님을 맞았다.
“덕우 자네 집부터 들르지 않고 바로 왔나?”
덕우를 오래 알고 지낸 의사는 순찰대가 갈 곳을 듣자 부탁을 했다. 주요 고객을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일이었다. 눈밭에는 작물이 자라지 못하지만 희귀하게 자라는 나무들이 있다고 배웠다. 그곳에서 자라는 새빨간 열매가 신장에 아주 좋다고 기록에 쓰여 있다. 필사한 지 오래라 의사는 그림을 따라 그리는 데 애를 먹었다. 넌출월귤을 정성들여 그린 의사는 덕우에게 비슷한 것이라도 좋으니 열매와 가지를 가져와달라고 청했다.
아쉽지만 손님은 덕우가 아니었다. 의사는 외투 바깥으로 나오는 잠옷자락을 감췄다. 주요 고객을 데리고 의원에 자주 방문하던 분이었다. 이런 차림으로 맞이하기는 곤란할 정도로 의사의 가계에 영향을 미치는 분이었다.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려고 의사는 장부에 방문자의 집안을 휘갈기고 곧바로 뒤돌아 약재 서랍을 열었다.
“그거 찾으러 오셨죠? 금방 담아드리겠습니다.”
의사는 벽면 하나를 채우는 약재서랍 위로 무너졌다.
사브랑 사람들이 아침식사를 마쳤을 무렵에 의원에 들어온 한 가족이 최초로 신고했다. 연쇄살인범이 나타날까봐 의원에 방문하지 못하던 남편이 열이 끓는 바람에 그 아내와 동생은 남성을 앞뒤로 둘러싸고 의원을 방문했다. 파편으로 가득한 현장에 들어서자 앞서 가던 아내는 곧바로 남편과 그 동생을 내보냈다.
보존된 현장으로 들어온 직후 조사관은 증거물이 없는 곳에 발판을 놓으며 전진했다. 책상에 다가갈 때까지는 발판을 놓기가 쉬웠다. 하지만 책상 뒤와 벽을 가득 채운 서랍은 피와 파편으로 가득했다.
서랍 하나가 튀어 나와 있었다. 안에 든 약재는 사용하기 힘들겠지만 범인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아 내용물을 확인해야 했다. 혈액이 튄 방향과 형태를 기록하기 전에는 벽과 책상 사이를 디딜 수 없었다. 화정은 의원의 책상을 딛고 서랍에 다가갔다. 벽에 남은 흔적을 피하느라 조사관은 벽을 짚지도 못하고 몸을 기울여 서랍 안을 들여다보았다.
산수유였다. 화정도 수영에서 조사관 수련생 선발 시험에 지원하느라 오래 앉아있을 때 먹었다. 비뇨기과의가 흔히 처방할 약이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연쇄살인범은 샤로 남성 평균키에 오른손잡이였다. 이러면 안 찾느니만 못했다. 모두 흔해서 특징이랄 수도 없었다.
벽면 위쪽에 튄 핏자국을 봐서 의사가 뒤돌아선 상태에서 후두부를 최초로 타격한 것으로 보였다. 전과 같이 삽의 넓은 면으로 피해자를 가격하고 삽의 가장자리로 찍은 흔적이 남았다. 동일범 같지만 이번에는 목에 상처가 없었다. 아슬란네 간메를 보면서 살인범이 주저했거나 체력이 예전보다 떨어졌을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이번 사건은 미리가 일지에 기록한 사건들과 비슷했다. 뒷머리가 완전히 함몰된 의사는 잠옷 위에 외투를 입은 채 손님을 맞았다. 요즘 같은 때에 의사가 안심하고 뒤돌아섰다면 잘 아는 사람이거나 안심할 만한 사람일 것이다. 펼쳐진 장부 위에 튄 피를 따라 가다가 조사관은 장부 맨 끝에 적힌 집안을 찾았다. 혈흔을 기록하기 전에 조사관은 현장 바깥에서 대기하던 증인을 찾았다.
연쇄살인범이 벌인 다른 사건들처럼 이번에도 현장에서 연쇄살인범의 범행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최초신고자는 의사 외에 다른 사람을 의원 안에서 보지 못했다. 의원에 들어오기 직전은 기억했다.
“의원 앞에 세워둔 수레가 출발했어요. 그러고 들어왔죠.”
“어느 방향으로 갔습니까?”
“석상쪽으로요.”
의원에서 의로운 양 석상 방향으로는 학교와 조사관실, 궁밖에 없었다. 의사는 벌이가 괜찮아지고는 목이 좋은 곳으로 옮긴 의원에서 주로 지냈다. 학교와 궁을 수사대상으로 기록한 후 조사관은 질문했다.
“누가 타고 있었습니까?”
“머리가 하얗고 남자였어요. 아, 옷이 개나리색이었어요.”
샤로 사람들 대부분은 흙이나 재, 돌같은 색으로 천을 물들여 입었다. 단풍이나 꽃에서 볼 수 있는 빛깔로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아슬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밖에 없었다. 아슬란 집안 남성이 방문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화정은 증인을 돌려보냈다.
오면서 학교에 미리 알려둔 덕에 범죄 현장을 그림으로 남겨줄 화공이 일찍 도착했다. 화공에게 현장을 맡기고 화정은 일지를 기록할 종이를 가지러 조사관실로 향했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사람 중에는 점심 때 퇴근하는 이들도 있었다. 강의 하나를 맡은 교사가 출근하다가 범인을 봤을 수도 있다.
조사관실 앞에 대어진 수레를 보고 화정은 의아했다. 나이 들어서 색이 바랜 것도 아니고 양털이 희었다. 검붉은 외투를 입은 사람은 수레에서 내려서 조사관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전에 아슬란 저택에서 뵈었지요.”
그제야 화정은 자신이 검시하고 돌려보낸 고인과 닮은 얼굴을 알아보았다. 한동안 본 얼굴이 그뿐이었음에도 조사관은 이 남자를 보고도 돌아가신 분과 연결하지 못했다. 사촌형은 수레에서 책을 하나 꺼내어 내밀었다.
“간메를 해친 자를 잡으려고 애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수사에 도움을 드리려고 집안사람들이 모여서 그날 저녁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모두 기록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사에는 참고하지 않을 것이다. 미리 곁에서 보고 배울 동안 화정은 수사관이 개입하지 않고 증언을 기록할 때 일의 순서나 시간, 장소 등 중요한 정보를 잘못 기록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현장을 보려고 아슬란 저택을 올라가면서 화정은 떨어진 집들을 살폈다. 각자 집에서 지낸다면 아슬란 사람들은 현장에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사람이 따로 없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 증인이 현장 주변에서 목격한 사람은 아슬란 사람일 수 있었다.
오늘 아침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화정은 장례가 끝나면 아슬란 저택에 방문해 사건 경위를 조사하려 했다. 밖에 나온 아슬란 사람을 만난 김에 화정은 몇 시간 전 벌어진 사건을 얼마나 아는지 알아보려 했다.
“이른 시간에 나오셨는데 식사는 하셨습니까?”
“오늘은 학교에 들르느라 일찍 먹고 나왔습니다.”
“학교에는 무슨 일로 가셨습니까?”
“새학기에 회계 선생님이 필요한지 알아보러 갔습니다. 집안에서 회계를 배워서요.”
아슬란이 회계로 유명해서 마니가 두레 행도를 맡기 전에는 지금 집주인의 아버지가 행도를 맡았다. 당시 유사를 없애면서 회계 지식이 있는 행도가 필요했다고 화정도 들었다. 사촌형은 말을 이었다.
“새싹반 선생님을 뵌 뒤에 수위선생님께 들러서 수레 좀 봐달라고 부탁드렸으니 기억하실 겁니다.”
“그렇습니까. 혹시 아침에 다른 수레를 보셨습니까?”
“궁에 들어가는 수레는 봤습니다.”
“아슬란 저택에서 나온 수레였습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외양간 열쇠는 제가 지니고 다닙니다. 지금도요.”
화정은 아슬란 집주인의 사촌동생이라는 사람이 보여주는 열쇠를 보고 궁금했다. 열쇠가 없다면 가족들이 양들을 보살필 때 어떻게 외양간에 들어갈지. 사촌형은 주머니에 열쇠를 넣고 입구를 여몄다. 수레에 오르면서 사촌형은 조사관에게 인사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사건에 도움 될 일이면 무슨 일이든 오겠으니 불러주십시오.”
학교 외양간에 수레를 세우고 화정은 새싹반부터 찾았다. 교실은 조용했다. 기능직 선생님부터 만나보려고 수위실에 방문한 화정은 만날 참고인들을 이곳에서 모두 찾았다. 연쇄살인범이 활동한 후로 학교에서 숙식하는 남자들은 모두 수위실에서 지내는지 이불이며 옷가지가 그득했다. 화정은 아직 풀지도 않은 짐 위에 놓인 가위를 보고 의아했다.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이 방에는 베개며 신이며 사람까지 3명인데 가위는 5개나 있었다. 쇠를 벼리기도 힘든데 가위가 그만큼 필요한 일이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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