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록 제1권

第一章. 춘풍 도령 (01)

序文

바람 가는 길은 눈에 보이지 않고

구름 가는 길은 손에 닿지 않아도

풍운이 없다고 말할 이는 없으니,

이 책은 내 벗을 위해 쓰게 하노라.


第一章. 춘풍 도령

 

그 청년의 별명이 어찌하여 춘풍 도령인고, 하니

그의 용모가 아름다운 꽃과 같아

얼어붙은 송하松河를 녹이는 듯,

아직 피지 못한 꽃에 따스함을 불어넣는 듯

봄바람 같다 하여 사람들이 그를

“춘풍春風 도령”이라 부르더라.

 

 

 

 

 

 

 

*

 

온 사방에 불길이 치솟았다. 살을 에는 추운 날씨의 겨울. 그러나 성 안의 불꽃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기를 내뿜었다.

홍명학은 이를 악물었다. 첩자다. 내부에 첩자가 있지 않았더라면 성의 방위가 이렇게 쉽게 뚫릴 일도, 누군가 찻잔에 독을 탈 수 있을 리도 없었다. 한두 사람의 소행이 아닐 것이다. 그는 마음이 조급해져 말을 더 빠르게 몰았다.

“장군. 그러다 독이 더 빨리 퍼집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 가족들이 위험하다. 내가 가야 해.”

명학은 말을 마치자마자 울컥 올라오는 피를 토해내지 않고 다시 삼켰다. 이를 악물며 말을 달리는 장군의 옆에서, 소년은 입을 다물고 같이 말을 달렸다.

집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명학은 정신없이 짐을 챙기는 일꾼들과 겁에 질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안방 문을 열자 명학의 부인인 박옥영과 딸인 해주가 챙기던 짐을 내려놓았다. 해주는 울며 명학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아버지! 왜 이제야 오셨어요?”

“부인. 막내 아이는 어디 있소?”

“모르겠어요. 아까부터 보이질 않아요. 어떡해요, 우리 해영이…….”

“막내는 내가 찾을 터이니 두 사람은 이 아이와 함께 성 밖으로 피하시오.”

명학이 저를 밀어내자 해주는 떨어지기 싫다며 매달리다 그의 소매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 소매에 피가…….”

“여보…….”

“해주를 데리고 가시오. 성열아. 두 사람을 잘 부탁한다.”

명학이 방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장군.”

소년의 칼날이 명학을 베었다. 급소는 피했지만 이미 중독되어 몸의 움직임이 둔해진 데다가, 아예 작정하고 죽일 생각으로 휘두른 검이었기에 상처가 꽤 깊었다. 서늘한 푸른 빛을 내는 칼날을 타고 섬뜩하리만치 붉은 피가 똑똑 떨어졌다.

“장군!”

“아버지!”

옥영과 해주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검을 들고 있던 소년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걸 피하셨네요. 아무리 중독이 되었다 하더라도, 장군은 장군이시군요.”

“성열아, 네가 어찌!”

“지금에 와서 그런 게 중요하신가 봐요?”

소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다시금 제게 칼을 휘둘러오는 소년의 팔을, 명학이 붙들며 뒤에 있던 옥영에게 소리쳤다.

“가시오, 어서!”

옥영은 해주의 손을 잡고 달렸다.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지금 중요한 건 한 사람이라도 사는 일이었다. 그대로 그 방에 있으면 남편도, 나도, 그리고 내 사랑하는 아이들도 전부 죽고 말 터다. 옥영은 차오르는 눈물을 참고 자신을 스스로 다그치며 가기 싫다고 버티는 해주의 손을 끌었다.

안방에서 나온 그가 향한 곳은 안채와 하인방이 맞닿는 창고 방이었다. 공간이 남아 지은 자투리 방으로 안채의 물건이지만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것들을 넣어둔 곳이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벽 앞에 쌓여있던 물건을 전부 치우고 벽에 달린 황동 촛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단단하게 막혀있던 벽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며 마치 문처럼 열렸다. 밀실의 바닥은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곧바로 밑이 뻥 뚫려있었다. 아래는 암흑 그 자체였다. 해주는 불안감에 옥영의 옷소매를 답싹 잡으며 말했다.

“어머니, 우리 다시 돌아가요. 아버지께 가요. 네? 아버지를 살려야죠. 어머니!”

“해주야. 엄마가 하는 말 잘 들으렴.”

“안 돼요. 싫어요, 어머니!”

아직 제 어머니가 무슨 말도 하지 않았건만 아이는 이미 그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안다는 듯 간절하게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작고 하얀 손을 옥영은 애써 떼어놓곤 말했다.

“우리 딸, 똑똑하니까 긴 말 안 할게. 이 길은 비밀통로야. 아무도 몰라. 이 아래로 내려가면 길은 하나밖에 없으니 곧장 앞으로 쭉 가.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

“그럼 어머니라도 같이 가요. 제발요!”

아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칼부림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옥영은 새카만, 그리고 도망친다면 살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길로 아이를 밀쳐 넣었다.

“해주야!”

통로 아래로 떨어지기 전, 옥영은 미소 짓고 있었다. 옥영은 차마 목이 메는지 소리는 내지 못했으나, 아이는 그 입 모양을 똑똑히 보았다. 사랑해! 그것이 옥영이 아이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옥영은 해주가 달리는 소리가 들리자 미련 없이 촛대를 꾹 밀었다. 그러자 밀실은 사라지고 다시 평범하게 생긴 벽이 나타났다. 앞에 쌓여있던 물건들을 집어 던지듯 바닥에 흩트려놓은 그는 실성한 듯 웃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아이는 달렸다. 제 어머니가 저에게 준 기회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아이는 달렸다. 화마가 잔혹한 혀를 날름거리며 모든 것을 불태워가도, 온 사방에서 날카로운 칼날 소리가 귓가로 부딪혀와도, 아이는 달렸다. 그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

 

십 년 후, 태송泰松 한성漢成.

앞으로는 송하松河를 두고 뒤로는 송영산松影山을 두른 한성은 태송의 수도로 언제나 사람이 붐비는 곳이었다. 한성주 안에서도 중심에 있는 한성은 임금님께서 계시는 궁궐을 비롯하여 춘조春曹, 추조秋曹, 하조夏曹, 동조冬曹 네 곳의 외각사 거리, 태송 제일의 유학 교육 기관인 청송관, 아홉 개 주에서 가장 재색이 뛰어난 기생들이 있다는 기방 홍화정, 그리고 조정을 휘어잡고 있는 대신들의 가문이 자리 잡은 집성촌처럼 중요한 건물이 모여있었다.

거기에 책을 필사하고 빌려주거나 파는 책방이 모인 책방 거리, 화공들이 연 화방이 모인 화방 거리, 주막이 즐비한 주막거리,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개천 등 볼거리 놀 거리 즐길 거리 많은 곳이 바로 한성이라. 시전은 활기가 넘쳤고, 상인 손님 할 것 없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향리에서 며칠마다 열리는 삼일장이나 오일장, 뭐 그런 소박한 장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번화하였다.

한 선비가 성문을 지나 느긋한 걸음으로 저잣거리에 들어섰다. 허리춤에 찬 전낭에 그림 화畵 자가 수 놓인 걸 보면 아마 화공인 모양이었다.

“한성 땅을 밟는 것도 오랜만이네. 육 년만인가? 여기도 많이 변했네.”

흠―. 스승님이 알려주신 곳이, 어디 보자. 그는 기분 좋은 듯 웃으며 품에서 작게 접힌 지도를 펼쳐 들었다. 지도를 보던 선비는 두리번거리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어떤 사내와 이제 갓 성년을 넘긴 듯한 낭자 하나를 둘러싸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글쎄, 낭자. 오해라니까. 내가 낭자의 미모가 너무 눈이 부셔서, 낭자가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를 저지른 거요. 그러니 그만 화 푸시오. 응?”

“오해? 그래요. 내가 오해했다고 치자고요. 하면 내가 누구인지 몰랐더라면, 아니 내가 이런 신분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나를 그렇게 희롱했겠네요?”

“희롱이라니? 너무 말이 심하지 않소? 무슨, 낭자 손은 금이라도 발랐소? 손 한번 잡았다고 닳기라도 하느냔 말이오. 내 낭자가 아름다워 저지른 실수라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찌 그렇게 야박하게 구시오?“

“야박하다고요? 무례한 데다가 뻔뻔하기까지! 정말 상종 못 할 분이네요. 반성할 기미는 보이지도 않고, 되려 이렇게 큰소리를 내시니, 누가 공자의 사과를 진심이라 느끼겠어요?”

“진심이라?”

하하, 계집들이란 이래서……. 사내가 혼자 중얼거렸다. 곧바로 짝! 차진 소리가 났다. 낭자가 사내의 뺨을 친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곧 그의 하인으로 보이는 이가 사내를 끌고 갔다. 사내의 처절한 절규가 거리에 퍼졌다. 낭자가 떠나고 선비는 제 앞에서 이 모든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이를 불렀다.

“저, 혹시 무슨 일입니까?”

선비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보던 이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그에게서 말을 들은 선비는 그렇군요, 하고는 어느 골목으로 들어섰다. 젊은 선비의 뒤를 한 쌍의 눈동자가 좇았다. 그의 얼굴은 황홀경을 맛본 듯이 나른해 보였다.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쩜, 사내가 저리 아름다운지.

저잣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푸르게 뻗은 기와 담장. 아직 기방에 손이 들어서기엔 이른 것 같았으나 소란스러운 소리가 높은 담장을 넘었다.

“저는 분명히 그리는 못 하겠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이 년이!”

기생의 말에 기어코 최 참봉의 손이 하늘을 향해 뻗을 때였다.

“아이고오! 최 참봉 나리 아니십니까. 여기서 다 뵙는군요.”

어디선가 들린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갑자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최 참봉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자세를 바로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 한성 여자들에게 필시 마가 낀 것이 틀림없음이라. 게다가 부자가 쌍으로……. 선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 나를 아나?”

“아유, 알다마다요. 지방 작은 마을에서 근 사아십 년을 과거에 매달리시다 재작년에서야 겨어우겨우 궁의 주우우우웅요한 일을 맡은 종구품! 최 참봉 나리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손가락까지 펼쳐가며 목소리를 높이는 앳된 선비의 말에 종 하나가 발끈하여 말했다.

“선비님, 그거 우리 영감님을 놀리려는 말 아니요?”

“아니, 이 종놈이 뭘 모르는구나. 근 사십 년을 과거에 매달리시다 재작년에서야 겨우겨우! 궁의 중요한 일을 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느냐?”

“보자 보자 하니까 이 도령이! 우리 영감마님이 우스우쇼?”

“내가 언제 우습다 했나? 근 사십 년을……!”

“됐네, 그만하게!”

최 참봉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벌겋다. 최 참봉은 씩씩거리며 종을 밀치고는 젊은 선비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래도 체면은 있겠다, 애써 선비의 앞에 서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뭣 때문에 날 불렀나?”

“별것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영감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안부나 여쭐까 하여 들어왔습니다.”

당연한 거짓이다. 젊은 서생께서는 단지 기생을 구하려 앞뒤 재지 않고 뛰쳐 들었을 뿐이었다.

“우리가 구면이던가?”

선비는 빙긋 웃었다. 그 미소가 햇살처럼 눈 부셔서 다들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

“영감님은 아닐지 모르나 저는 몇 번 뵌 적이 있지요. 저 어렸을 적, 제 스승님을 찾아오지 않으셨습니까. 꽤 자주 들르셨지요. 저의 스승님은 훌륭한 선비이시니 영감님도 훌륭한 선비시겠지 한 겁니다.”

“큼, 흠.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최 참봉은 젊은 선비의 말에 그의 스승이 누구인지는 묻지도 않고 금세 우쭐해져서는 기분이 좋아진 듯 입가에 비실비실 웃음기를 띠었다.

“무슨 일입니까? 담장 너머까지 큰 소리가 나던데.”

“아, 별것 아니네. 여기 기생년이 글 좀 쓴다고 아주 유세를 떨기에 이 기회에 이 나라의 법도를 가르치려 했을 뿐이야.”

젊은 선비의 눈이 기생을 향한다. 헝클어진 머리, 빨갛게 부은 볼과 터진 입술,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저고리 앞섶. 기생의 눈 속에 분노의 물결이 차올랐다. 요즘 들어 뭣 모르는 치들이 기생을 창부로 여겨 희롱하는 일이 종종 있다 들었는데, 설마하니 관직까지 있는 양반이……. 젊은 선비의 눈에 잠시 형형한 빛이 감돈다. 최 참봉은 흠칫하였으나 이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눈매에 ‘잘못 봤겠지.’ 하였다.

“그러시군요. 한데 말입니다, 영감.”

“음?”

“여기에 오는 길에 영감님 댁 아드님이 어떤 낭자……, 하……. 이걸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제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최 참봉의 얼굴이 굳는다.

‘설마 이놈 자식이 또?’

“뭐, 뭔데 그러나? 뜸 들이지 말고 말해보게.”

“참봉 나리 댁 아드님이 글쎄 어떤 낭자에게 뺨을 맞는 걸 봤지 뭡니까! 아드님이 술에 취해 그 낭자를 희롱했다고 하던데요. 그 낭자 이름이 뭐였더라, 그, 정 수연이었지……, 아마?”

이름을 들은 최 참봉의 낯에 흙빛이 돌았다.

“이야, 아드님이 영감을 아주 많이 닮았더이다. 뺨을 맞자마자 바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더군요. 그렇지요. 참된 사내란 무릇, 여인의 위에 군림하여 위엄 넘치고! 품위 있게……! 어, 어디 가십니까? 영감, 영감! 최 참봉 영감!”

최 참봉과 종이 황급히 자리를 뜨고 선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표정을 싹 굳히고는 냉소했다. 역겨운 사람 같으니.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상황이 마무리된 듯하자 주변에 있던 기생들은 남겨진 기생과 선비에게 모여들었다. 기생들의 눈이 젊은 선비를 훑었다. 백자 같은 피부에 선명한 눈매, 오뚝한 콧날에 날카로운 턱선. 달빛 아래 흑백이 어우러진 도포 자락을 걸친 그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고고한 선학이었다. 탄성을 내지르는 무리 중 하나가 선비에게 말했다.

“도령은 누구세요?”

그러자 그는 예의 그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저, 지나가던 서생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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