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내 절교를 받아라 - 최종화
무더웠지만 하늘이 너무나 맑은 그날. 저마다 휴가며 바캉스며 왁자하게 들뜨는 황금 같은 성수기에서 조금 비껴난 그 8월 중순.
나는 내 일상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는 그 말이 야속할 정도로 아프고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정수현을 내 인생에서 끊어내는 것이 꼭 장기라도 끊어내는 기분이라 화가 날 정도였다. 어째서 이런 생각을, 그것도 절교를 한 이후에도 해야 하는지 억울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오직 '지금'을 살아가는 것 밖에 없었다. 나는 해야만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들을 나누었고, 모두 다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토익을 공부했고, 좋아하는 소설들을 읽기 시작했다. 조금도 생각들이 다른 쪽으로 틈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일주일 전에 읽은 단편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다이어리에 적으며 나는 정수현이 떠오르려 할 때마다 그냥 눈을 질끈 감고 명상을 하려고 노력했다.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그 문장에 담긴 삶의 애환과 엄청난 무게를, 나의 얄팍한 우정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그래도 좀 위안이 되었다.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했다.
다시 정수현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절교를 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애초에 정수현이라는 사람이 내 인생에 없었던 것처럼 될 때까지.
새삼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해서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국화 포장 해주세요."
"어떤 국화로 드릴까요?"
"조화... 할 건데요. 하얀 국화로 주세요."
"몇 송이로 해드릴까요."
어제부로 단 대별 하계 졸업식이 끝나고 꽃집에서의 마지막 알바를 하는 그날이었다. 오후 한 시. 일요일. 보름간 포장지에 꽃 다듬기에 지쳐서 어깨가 아팠다. 토익책을 펼쳐두고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보고 있는데 미닫이문을 열리는 소리와 함께 딸랑- 거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앳된 여자의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
주인아주머니가 꽃 시장을 늦게 다녀와 정리하지 못한 장미 다발 때문에 나는 미처 손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주문만 받았다. 제법 한산해진 꽃집은 가끔씩 화분을 사가는 사람이 있을 뿐, 꽃을 주문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그 손님의 주문에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여름에 조화는 기분을 묘하게 했다. 꼭 향내라도 나는 느낌에 나는 괜히 숙연해졌다. 온실에 조화용 하얀 국화가 몇 송이나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온실 유리에 비췬 인영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상대도 유리창을 통해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조금 울렁거렸다. 마치 어떤 신호를 보내오듯, 상대방의 눈빛에 마음에 커다란 파장이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수정아..."
"잘 지냈어요, 언니?"
정수현의 동생 수정이었다. 오다가다 마주칠 때마다 제 언니와는 달리 지극히 정상적이고 귀여운 미소를 짓던. 전혀 생각지 못한 수정이의 방문에 나는 잠시 얼음이 되었다. 당황스러운 만남이었다.
"수정아, 네가 여기 웬일이야?"
"국화 사러요. 스물네 송이로 한 다발 해주세요."
"어?"
손이 떨렸다. 떨리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다시금 주먹을 꽉 지었다. 왜 이렇게 불안한 느낌이 드는 걸까. 조화, 하얀 국화, 스물 네 송이, 정수현의 동생 수정이. 게다가 하얀 셔츠에 검은 재킷을 걸친 수정이는 지금까지 교복 입고 마주쳤던 꼬마 애가 아니라 조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슬쩍 카운터에서 몸을 빼내어 온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유리문을 열다 말고 다시금 유리문에 비췬 내 얼굴과, 나를 뒤에서 바라보는 수정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화를 사러 오는 이들의 표정이 유쾌할리는 없지만, 수정이의 얼굴은 입꼬리가 묘해서 슬픈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무의식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평소엔 귀엽기만 한 동글동글한 눈매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정수현처럼 묘한 표정을 닮은 건지 몰랐다.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서 나는 새삼 에어컨을 꺼둔 지 오래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 누가... 돌아가셨어?"
한 번도 잠수를 해본 적은 없지만 심해에 잠수부가 산소통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숨이 갑갑해져서 그렇게 물어버리고 말았다. 온실 유리를 여는 손등을 바라보니 손톱들이 모두 하얗게 질려있었다. 숨이 가빠지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언니..."
"어?!"
"보고 싶지 않아요?"
".... 무슨 말하는 거야, 수정아...."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불안함이라는 것도 노래처럼 고조될 수 있구나 싶었다. 홱 고개를 돌려 수정이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내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몰랐다.
정수현과 절교한지 한 달.
집안 곳곳에 있는 정수현과 관련 된 물건을 내다 버린지 한 달.
칫솔, 로션, 속옷과 향수, 칠칠맞게 흘리고 간 스카프와 양말, 헤어 핀과 귀걸이, 그리고 정수현의 흔적이 너무나 많아서 혼란스러웠던 내 일기장까지 버린지 한 달이었다.
[개수현]이라는 저장 번호는 스팸 등록, 게다가 마음이 너무 복잡해져서 꼭 필요한 번호만 놔두고 휴대폰을 초기화 시켜버렸다. 노트북 이곳저곳에 저장되어있던 정수현의 셀카며 억지로 같이 찍었던 사진들도 지웠다.
절교, 라는 과정이 무슨 이혼하는 부부나 헤어지는 연인들이 서로의 흔적을 지우는 것처럼 복잡한 일이었던가. 게다가, 왜 나는 이렇게 답답하고 짜증 나는 걸까. 차라리 집중할 수 있는 바쁜 알바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지난 한 달간 나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나는 기억을 비워내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일 줄 미처 몰랐다. 당분간은 비슷한 이름도, 같은 나이도, 닮은 분위기의 사람조차도 만나고 싶지 않은 생각에 새삼 정수현의 덫이 얼마나 컸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미웠고, 또 미웠다. 그러다가 번호로 뜨는 부재중 전화를 보면, 익숙하게 외우는 그 뒷자리 번호와 대조하며 연락을 기다리는 나를 발견했다. 그런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하고 한심해서 초기화된 폰을 집어던지고 아예 휴대폰을 바꿨다.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그런데... 너무나 힘들다.
실연한 여자들이 머리를 자르고, 헤어진 연인들이 다른 변화로 기억을 지울 때, 나는 친구 하나 때문에 처음으로 휴대전화를 바꾸고 머리를 잘랐다. 싹둑, 하는 소리와 함께 지금까지 질질 끌려다니며 호구짓을 해왔던 내 기억이 같이 사라지길 바랐고, 학점과 등록금, 알바와 자취로 인해 정신없이 치여살았던 서러움도 같이 잘라지길 바랐다.
그리고 정신없이 일이 쏟아지는 꽃집에서의 알바가 고마웠다. 일은 여자를 구한다, 라는 말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연애도, 우정도, 가족도, 그 아무것도 사실은 나를 구하진 못할 것이었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 보면 그나마 잡생각이 사라졌다. 몸은 힘들었지만 정신은 힘들지 않았다. 졸업을 하면 바로 취업을 해야겠다고, 그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다짐했다.
"나 여기 찾느라 진짜 힘들었어요, 언니."
"저기....."
"우리 언니가 아연 언니를 많이 보고 싶어 해요."
"...... 수.... 현이 무슨 일 있어?"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금만 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틈이 있으면, 그 틈으로 사정없이 어떤 한 사람의 생각이 밀려온 다는걸. 그래서, 사실은, 이 괴로움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언니 죽었어요."
고칠 수 없다면, 견디기도 힘들다.
내 절교를 받아라 최종화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몸에 어떤 구멍이 뚫려서 거기로 모든 피가 다 빠져나가버린 느낌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어지러움, 단내, 토기가 한꺼번에 밀려와서 나는 내게 달려오는 수정이를 제대로 보지 못 했다. "언니 괜찮아요?"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니...!"
".....으으..."
뜬금없는 생각이었지만, 격한 감정이 밀려오면서 내 머릿속에 어떤 장면들이 연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 언젠가의 첫 만남, 교복을 입고 쓰러진 여자애. 그리고 파리한 혈색으로 무미건조하게 나를 보면서 중얼거리던 그 말들.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며 내게 소리쳤던 여자애. 그리고 겨울이랑 무척 잘 어울리는 얼굴을 하고,
품 안에서 하얀 목도리를 꺼내주던 여자애.
".... 아...안돼...."
"언니!"
"......"
"언니? 언니!"
만약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종종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존재가 내 앞에 있다면 나는 늘 묻고 싶었다.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있다면, 왜 우리는 그걸 몰라야 하는 거죠? 아니, 왜 우리는 그대로 살아야 하는 걸까요? 왜...
"... 왜...?"
왜 내게 이러는 걸까요... 왜...
암전, 이 될 리가 없는 대낮의 꽃집. 처음으로 의식을 잃는 그 찰나에, 신의 대답이 아닌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아연아,
김아연,
김아연,
찹쌀떡.
엥엥 거리는 그 목소리가 웅웅 울려서 의식을 잃는 그 순간이 마치 영원으로 향하는 느낌이었다.
아연아,
하고 부르면
네가 이렇게 나타날 줄 알았지.
왜?
왜 넌 네가 부르기만 하면
내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
왜냐고?
왜인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걸.
네가
언제는
생각이란 걸 해본 적은 있어?
생각?
내가 하는 생각.
가장 많이 하는 생각.
있어, 있어, 찹쌀떡.
나 찹쌀떡 생각을 가장 많이 해.
네가 하는 생각이란 건
그저
나를 놀라게 하고 힘들게 하는 생각들이잖아.
미안해, 찹쌀떡.
그치만,
나,
이번엔,
정말로 너를 많이,
정말로 많이,
정말로,
많이 불렀어.
이번엔
아무리,
찹쌀떡,
김아연, 하고 불러도
나타나질 않잖아.
내가,
정수현, 네가 부르면 나타나는
그런 호구등신으로 알아?
미안해, 찹쌀떡.
미안해, 찹쌀떡.
정수현,
너는,
많이 나빠.
응,
수현이가,
많이 나빴어.
그런데, 찹쌀떡.
나 안 보고 싶었어?
몰라.
정말?
몰라.
정말? 정말?
몰라...
몰라...
그런 건 모르겠고
너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도대체.
".... 어디...에 있는 거야..."
아, 숨이 막혀요. 숨이 막힌다구요 부처님, 하느님... 숨이 막....
"으아!"
갑자기 내 몸속의 모든 스위치가 한꺼번에 켜진 느낌이 들었다. 숨이 막혀서, 몸속의 생존본능이 나를 깨운 느낌이었다. 그것도 아주 강제로. 지금 숨을 쉬지 않으면 압사당할지도 모른다는 감각. 눈을 확 뜨고 나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내 뼈와 살에 붙은 모든 근육이 모두 반응하고 있었다. 온몸이 당겼다. 뜨거운 뭔가가 눈, 코, 입, 그리고 가슴과 배 안에서 벅차올랐다.
"....으어...... 뭐야...."
그런데 몸이 확 일으켜지다가 이내 턱, 걸린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목에 뭔가 걸린 듯 몸이 아래로 아래로 쳐진다.
"......?"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게슴츠레 밀려오는 빛에 눈을 꿈뻑꿈뻑하는데 갑자기 내 인기척보다 더 큰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바로 앞에서. 호들갑스럽고 격한 느낌이었다.
"... 찹쌀떡!"
"......?"
찹...쌀떡, 이라고 부르는 이 하이톤의 엥엥거리는 목소리. 나잇값 못하는 목소리. 들으면 들을수록 잔상이 남아 오랜 세월 듣지 않으면 적응하기 힘든 이 목소리.
찹쌀떡, 찹쌀떡, 찹쌀떡... 된소리에 애교가 한껏 묻어나서 쳐다보면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보이는 그 말. 그 말을 세상에서 제일 뻔뻔하고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입술. 6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나를 불러대던-
".... 야... 너...."
"으아아!"
".....너 이게 뭐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수... 숨 막혀..."
정수현,
이라 쓰고 또라이라고 읽는 여자애가 와락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제 품으로 내 머리를 당겼다.
그리고 한참을 꼬오옥 압사라도 시켜버릴 듯 힘을 준다. 얼굴이 눌려서 툭툭 정수현의 옆구리를 찌르니까 그제야 정수현이 우는 건지 비명을 지르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그치고는 나를 껴안았던 팔을 풀고 나를 내려다본다.
눈이 마주친다. 평소엔 그토록 새침하고 의뭉스럽던 여우 같은 눈매가 오늘따라 여우가 아니라 새끼 강아지 같다.
"으아아아 사랑해 김아연!"
"미쳤어?!"
"그치만 사랑하니까..."
"... 조용해!"
"응."
헐, 미친.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고 나를 꽉 안고 있는 정수현의 팔을 낑낑대며 풀었다. 팔자 눈썹에 삐죽 튀어나온 입술. 평소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 새끼 같더니 지금은 자취방 앞 가정집에서 키우는 배고픈 똥개처럼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라니.
세상에... 제발 이러지 마. 사람이 너무 갑자기 바뀌어도 죽을 징조라는데, 죽을...
어?
그제서야 머리가 좀 맑아지는 느낌이다. 정수현의 표정과 갑작스러운 생존본능으로 정신이 없었는데, 가만 보니 여기 병원이다. 정수현의 휑한 가슴께가 훤히 보이는 헐렁한 환자복. 'ㅇㅇ여성병원'이라는 글자가 세로줄로 빼곡히 수놓아져있는 환자복을 보니 새삼 다시금 물음표가 피어오른다.
.....언니 죽었어요.
갑자기 최면에 걸리는 키워드처럼 머릿속을 웅웅대는 수정이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내 앞에 정수현의 볼을 꼬집어버렸다.
".....?"
정수현은 볼이 꽉 잡혀도 ㅇ_ㅇ 이 표정으로 그냥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잡은 볼을 흔들었다. 쭈우욱- 늘리기도 했다. 그래도 정수현은 ㅇ_ㅇ 하는 표정으로 내가 흔들리는 대로 고개를 흔들흔들 할 뿐이었다. 잡힌 볼 때문에 벌어진 입가에서 침이 주르륵 흘렀다.
"아, 더러워 진짜."
"왜으애?"
"너 살아있잖아?"
"으엄. 우혀이가 왜 쥬거?"
"..... 뭐야?!"
손가락의 흥건한 정수현의 침을 정수현의 환자복에 닦으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꿈을 꿨나? 꿈치고는 너무 생생한 수정이와의 만남, 그리고 목소리에 나는 하나도 정리되지 않은 이 상황에 답답했다. 문득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정리하려는데 내가 입고 있는 옷에도 온통 'ㅇㅇ여성병원'이라는 글자가 새로로 수놓아져있다. 엥? 내가 옷을 쳐다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정수현이 내 팔을 톡톡 건드린다.
"찹쌀떡."
"이게 뭐야?"
"너 영양실조랑 과로래."
"어?"
"그리고...."
정수현이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는 두 무릎을 끌어모아 얼굴을 살짝 묻으며 말했다. 곱게 휘어지는 정수현의 눈이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아이의 그것 같았다. 그래서 난 좀 적응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 눈과 표정이 새삼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정수현 쪽으로 바투 앉았다.
"으흐흐.... 너 쇼크 받았대."
"... 어?"
"그렇게 충격이었어? 응?"
"무슨 말이야?"
정수현이 묻었던 얼굴을 슬쩍 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좀 민망하고 부끄러워졌다. 불현듯 링거를 맞은 팔뚝이 간지러우면서도 아릿하게 아파졌다. 아야, 하고 눈을 찌푸리는데 슬쩍 정수현이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팔뚝을 걷어 노랗게 멍이든 부분을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가 시켰어."
"응?"
"도저히 이렇게 살다간 죽겠다 싶어서 그랬어."
"무슨 말이야? 좀 알아듣게 설명해 봐."
정수현은 내가 짜증스럽게 말하는 이 순간에도 내 목소리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이며 나와 눈을 진득하게 맞춘다. 어이가 없다. 꼭 떼를 쓰는 아이를 보며 어르는 엄마라도 되는 양, 나를 쳐다보며 빙긋 웃는다.
"너 없이는 죽는 편이 낫겠다고 했더니..."
"......"
"우리 수정인 똑똑해.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우쳐."
갑자기 어지러운 퍼즐들이 한순간에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언니 죽었어요, 하던 수정이의 말이 그럼... 다.... 이 여우 같은 또라이의 계책....
제발 환자인 내게 절대안정을 시켜달란 말이야. 익숙하게 끓어오르는 분노에 내가 뭐라고 소리치려고 하자 정수현이 엉덩이도 가볍게 내 품에 안겼다. 그 언젠가 새벽처럼 어깨에 이마를 살짝 기울이며.
"너.... 진짜 죽..."
"김아연. 결혼하자."
항상 느꼈던 거지만 정수현은 곱게 미쳤다. 저런 얄쌍하고 새침한 얼굴로 또 짖어댄다.
"그전에 상황 설명이 먼저 아니야?"
"응. 다 설명할게."
수현이가 임신한 건 거짓말. 임신 테스트기도 거짓말.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했어. 미안해 잘못했어.
"그러니까 왜! 도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으응. 그건-"
아빠가 이렇게 개망나니로 살 거면 차라리 시집을 가라고 했어. 그래서 아빠한테 그랬지. 아빠, 나 좋아하는 사람 있긴 한데 그 사람은 나랑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랬더니 아빠가 그러는 거야. 그럼 임신이라도 했다고 하고 잡아두래. 물론 아빠는 그 말을 하자마자 엄마한테 맞았어. 여기 어깨를 손바닥으로 쫙! 맞았어. 근데 나 왠지 그 방법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사실 그때 좀 불안하기도 했거든.
"... 너 진짜 또라이 맞지?"
정수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샐쭉 웃었다.
퍽. 나도 모르게 링거를 맞지 않은 손을 들어 정수현의 등을 때렸다. 꺅, 하고 비명을 지르던 정수현은 이내, "아직도 화났나, 찹쌀떡?"하고 또 팔자 눈썹을 하고 나를 올려다봤다. "장난칠게 있고 안칠게 있지! 그리고 임신 테스트기! 그거 어떻게 한 거야?!"하는 말에 정수현이 씨익 웃더니 내 옷자락을 꾸욱 늘린다.
"여기는 수현이 아빠 병원이야. ㅇㅇ여성병원."
"응?"
"그런 테스트기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여기 너네 병원이야?"
"응."
헐. 6년 동안 정수현과 친구를 하면서 미처 몰랐던 사실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새삼 정수현의 가정환경과 배경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의사선생님이나 되시면서 큰 딸이 또라이여서 아버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 그런 거짓말은 아주 나쁜 거야."
"응, 죽을 만큼 혼났어. 미안해. 잘못했어어.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
"살이 천오백 그램 빠졌어. 근데 찹쌀떡도 살이 많이 빠졌네."
갑자기 정수현이 환자복 단추를 꼬물꼬물 만지더니 밑단으로 슬쩍 배를 만져왔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정수현의 손을 탁, 쳐냈다. 아직 화가 풀린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게다가... 수정이의 그 말. 언니 죽었어요, 하는 그 말. 그것도 잘못이라면 큰 잘못이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말... 그거... 사람이 죽었다는 거...그런 것도 나쁜 거야. 넌 어쩜..."
"그건 거짓말이 아니야."
"거짓말이지."
"죽을 뻔했는데 정말?"
"......"
벌떡, 억울한 듯이 가만히 어깨에 기대 있던 정수현이 몸을 일으키고 제법 화가 난 얼굴을 했다. 왜 네가 화를 내는 건데?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는 죽을 뻔했어, 찹쌀떡."
네가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해서 죽을 뻔했단 말이야. 이것 봐, 이거.
정수현이 내 멍보다 훨씬 심각해 보이는 푸르스름한 멍을 보여주었다. 장기간 링거를 투약해서라고 설명을 덧붙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얗고 야윈 팔뚝이 좀 안돼 보여서 나는 그 멍을 보는 게 괴로웠다. 괜히 눈을 돌렸다.
"하루 하루가 지옥 같아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나 사실 여기서 알바하고 있었단 말이야. 네 집에 있을 때. 근데 내가 일하던 곳에서 이렇게 누워있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어. 찹쌀떡 나빠..."
정수현은 자기가 말하고도 스스로 참 말을 잘하고 있다고 대견하게 생각했는지 스스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서러운 표정을 지어주었다. 아주 여우와 강아지를 넘나드는 모습이 웃기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조곤조곤, 그러나 막힘없이 말하는 폼이 제법 진지해서 나는 끼어들지 못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병원이라는 곳이 이렇게 편안한 곳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수현이 있어서일까? 여느 때처럼 헛소리를 하는 또라이가 있어서 인지도 모른다. 뭔가 정수현이 굉장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나는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그 언젠가....
애 아빠가 누구야? 하고 물었을 때, 조곤조곤 말해오던 정수현의 말들이 갑자기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냥 그 말들이 지금 내게 쏟아내는 정수현의 말과 묘하게 겹쳐지면서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 임신했다고 하면..."
정수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나한테 신경 써줄 테니까. 옆에 있어줄 거니까."
병원의 이불깃을 꼼지락꼼지락 구겨대며 그렇게 말을 이었다.
"네게 다른 사람이 생길 거 같아서 불안했어. 특히 최근엔 너무... 너무 불안했어."
정수현이 마른침을 한 번 삼키더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찹쌀떡은 내 건데... 찹쌀떡이... 자꾸만... 뽀얘지고 예뻐지고... 그래서 남자친구가 생겨서... 나한테 남자친구 생겼다고 자랑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단 말이야아아."
임의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내 안의 상처는 어느 정도일까. 내가 모른 척 밟고 있었던 그 자리는 사실, 엄청난 크기로 뻥 뚫려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메워주던 존재를, 사실은 내가 더 많이 갈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정수현의 헛소리를 들으며 깨달았다. 저 눈, 저 목소리, 저 표정, 저 앉아있는 모양.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스물넷, 생계형 여대생 김아연에게 그 순간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이란?
"..... 바보 같네."
"그치."
"응."
"있잖아, 찹쌀떡..."
어떤 겨울, 어떤 여름, 어떤 크리스마스, 어떤 학창시절, 어떤 생일, 어떤 기분 좋은 날, 어떤 기분 나쁜 날, 어떤 음악, 어떤 영화, 어떤 여행, 어떤 풍경, 어떤 사진, 어떤 목소리, 어떤 향기, 어떤 음료, 어떤...
그 모든 것들의 곳곳에서 어떤 위화감도 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 게 아닐까, 아마?
고칠 수 없으면 버텨야 한다.
하지만, 그게 꼭 혼자일 필요는 없는지도 모른다.
다시금 생각해본다. 만약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종종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존재가 내 앞에 있다면 늘 묻고 싶었던 그것을 물을 참이었다.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있다면, 왜 우리는 그걸 몰라야 하는 거죠?
아니, 왜 우리는 그대로 살아야 하는 걸까요? 왜...
왜 나는...
"나는 막 남자가 더 좋고 여자가 더 좋고 그런 거 잘 모르겠어."
왜 하필 나는....
"그치만 나, 나, 찹쌀떡이 좋아. 김아연이 좋아."
정수현을 사랑하게 된 걸까.
"옛날부터 그랬어. 그래서 짜증 났었어. 그런데, 그런데..."
푸스스, 정수현이 웃는다. 손을 뻗고, 분명 손을 뻗은 건 나인 것 같고, 그 손을 정수현이 잡은 것 같고, 그리고 또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눈을 마주치고, 그리고 또 웃고, 또 웃으면서, 계속 말없이 웃으면서, 나는 울었다. 기뻐서, 슬퍼서, 반가워서, 서러워서, 그리고...
"나는 찹쌀떡이랑 있었을 때가 항상 제일 행복했어."
정수현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절교해야겠다.
친구는 그만해야겠다.
내 절교를 받아라, 정수현.
그리고 이젠 내 사랑을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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