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스리크 산맥 (4)

주안은 거기에 잎살이나무의 잎을 여러 장 깔았다. 그 위에는 주박나무 열매를 갈아서 뿌렸다. 주안은 이것이 짭짤하면서 시큼한 맛이 난다고 했는데 히엘리는 먹어본 적 없는 것이라 상상하기 어려웠다.

또 그 위에는 늑대의 가슴살을 얇게 저며서 필레니케가 따온 여름배추를 포함한 갖가지 야채들과 번갈아가며 쌓았다. 향이 알싸한 풀도 몇 잎 구해 가장 위에 올렸다.

“스라하르에서는 잡초로 취급하는 풀인데. 이름이 있어요?”

“고수다. 제국 남부에서는 향신료로 종종 쓰이지.”

히엘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솥을 내려다보았다.

나뭇잎 솥 아래에 불을 피우고 끓이자 잎살이나무에서 물이 나오면서 국물이 생겼다. 쌓아뒀던 재료들은 알맞게 수면 아래로 꺼졌다. 주박나무 열매에서 우러나온 액으로 국물의 색이 발그스름하게 맞춰졌다.

“매콤하면서도 새콤한 향이 나요.”

처음 맡아보는 이국적인 종류의 것이었지만 절로 침이 고였다. 분명히 맛있는 요리일 것이다. 국물요리라고는 바닷물을 퍼서 생선이나 고깃덩이를 되는 대로 썰어 넣어 끓인 음식밖에 모르던 두 아이는 주안의 요리를 한 입 먹어보고 그야말로 입을 떡 벌렸다.

“음식에서 이런 맛이 날 수도 있었다니!”

주안은 고기와 야채를 함께 집어서 국물과 함께 먹으라고 했다. 늑대 가슴살을 씹던 필레니케의 눈가가 반짝거렸다. 히엘리는 좀 놀려줄까 싶었지만 결국 모르는 척 해줬다. 참 어른스러운 태도가 아닌가 하고 히엘리는 스스로 감탄했다.

“이제 뭐 하나요?”

“잠을 자야지.”

식사를 끝내자 잘 시간이 됐다. 나뭇잎을 깔고 자느냐 그냥 맨바닥에서 자냐로 필레니케와 토론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주안이 묵묵히 로브를 바닥에 펼쳤다. 그러자 로브가 이상하게 커지고 모양도 변해서 세 사람이 거뜬히 누울 정도의 네모반듯한 깔개가 됐다.

또 주안은 어딘가에서 제 키 반만한 나뭇가지를 구해오더니 로브 깔개의 네 모서리에 능숙한 듯이 팍팍 꽂았다. 그리고 또 어디서 났는지 모를 방수 재질의 천을 그 위에 덮어 간이 천막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덮고 잘 것으로 모포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주안에게는 출처 미상의 물건을 구해오는 재주가 있었다.

“도대체 이게 다 어디서 난 거예요?”

그리 물으니 주안은 묵묵히 가죽 가방을 들어 보였다. 끈이 길고 갈색인, 옆으로 매는 가방이었다.

아니, 대체 언제부터 저런 가방이 있었지? 로브에 가려져서 몰랐나?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그러자 주안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냈다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면 아공간 주머니 안에 아공간 가방이 있고……하다가 히엘리는 대충 받아들였다.

그렇게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지만, 히엘리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살던 곳을 떠나 처음으로 야숙을 하는 탓인지도 몰랐다.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공간이 낯설었다. 소금기 대신 서늘한 이슬 냄새가 섞인 공기도 생경했다. 히엘리는 모포를 덮고 이리저리 뒤척이다 답답함에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날이 맑아 달이 밝았으므로 사위가 어슴푸레하게나마 보였다. 히엘리는 주안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여전히 정자세로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잠을 자는지 마는지 분간이 안 됐다.

히엘리는 필레니케도 보았다. 한참을 뒤척이다 이제 막 피로에 굴복한 참인지 필레니케의 가슴팍이 색색거리며 오르락내리락 했다.

히엘리는 파도 소리를 듣고도 잠들지 못했던 수많은 밤에 그랬던 것처럼 하늘을 보며 기도하기 위해 천막을 빠져나왔다.

스라하르 마을이 위치한 티우브니아 대륙. 이 대륙의 신은 언제나 머리 위에 빛나는 다섯 개의 별의 형상으로 존재하며 인간들을 굽어살핀다고 했다.

스라하르 사람들이 마을을 지키는 이유도 신의 뜻이었다. 신께서는 스라하르에 머무는 자들에게 대륙을 위해 한 번의 생을 바칠 영광을 내려주셨다고 전해지는데,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며 몰려드는 마물들에 맞서 싸우고 대륙을 지키라고 했다.

쉽게 말해 ‘수호자의 사명’. 그것에 히엘리는 불만이 많았다. 단지 스라하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평생을 외줄 타듯 사는 것은 억울했다. 마물들을 없애 주시지는 못하실망정, 이런 곳에서 싸울 운명을 지시하고 자기는 구경이나 하다니. 악랄해보이기까지 하는 신의 사명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어른들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도, 어른들도, 스라하르도 싫었다. 차라리 마법이 좋았다. 마법은 유용한 도구를 주니까. 히엘리는 신의 장난감으로 사느니 차라리 마법을 보러 제국으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스라하르에서 이런 태도는 불경죄였다.

‘저는 신이 싫어요, 여기서 살기 싫어요, 이 마을 나갈래요.’

몇 번 그 말을 했더니 정말로 마을 사람들이 히엘리를 죽이려 들었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경험이었다. 그 뒤부터 히엘리는 마음을 완전히 고쳐먹은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이렇게 평생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한다고? 속이 뒤틀리다 못해 썩어드는 기분이었다. 마을 지리가 바다와 장벽과 산으로 둘러싸여 어린아이의 말랑한 신체로는 쉽사리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히엘리는 매일 밤, 믿음직스럽지는 못하지만 유일한 동앗줄인 별을 향해 기도하곤 했다. 어느 한 동화의 거지처럼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해 달라고.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나도 좋으니 이 마을만 떠나게 해 달라고.

그리고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매일매일 깊게 기도한 보람이 있었는지. 대단해 보이는 마법사의 제자까지 될 운명이었다. 그러니 이제 신께 감사하다고 빌 차례였다.

히엘리는 고개를 들었다. 다섯별의 자손들이라는 수많은 별들 앞으로 다섯 별이 빛나고 있었다. 사실 다른 별들에 비하면 신의 형상이라는 다섯 별들은 연기를 뭉쳐놓은 것에 가까운 형태였다. 모양은 좀 달라도 하늘에서 빛을 내기 때문에 별인 걸까, 별들 중에서 저들만 색깔과 모양이 유독 다르기 때문에 신인 걸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히엘리가 소리를 냈다.

“어?”

다섯별들 중 하나가 모자라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북쪽별, 서쪽별, 남쪽별, 동쪽별, 중앙별. 이렇게 이름붙여진 다섯별들 중 북쪽의 검푸른 별이 눈에 안 들어왔다. 원래도 색이 그렇게 생겨먹은지라 눈에 잘 안 띄기는 했는데, 눈을 찡그리고 크게 뜨고 감았다 다시 뜨고 눈꺼풀을 비빈 다음에 보아도 북쪽별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뭐야 이게? 신이라며? 왜 사라져? 이제 좀 신실하게 믿어보려고 했는데. 역시 어른들이 거짓말한 거 아냐?

그때 천막 쪽에서 주안이 걸어나왔다. 히엘리는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가 물었다.

“어, 주안. 안 주무셨어요?”

“기척이 들리기에 일어나 봤다.”

“제가 깨웠다면 죄송해요.”

주안은 히엘리의 동그란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다. 잠이 오지 않니?”

“그냥요……. 저기 주안. 하늘 좀 보세요.”

주안은 히엘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히엘리는 머리 위,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다섯 개의 별을 가리켰다.

“북쪽별이 없어요. 주안의 눈으로도 안 보이시나요?”

“……그래.”

히엘리는 주안의 눈에 미묘하게 그늘이 졌다고 느꼈지만 다시 보니 그냥 무덤덤하게 하늘을 보고 있었다. 어두워서 잠시 착각한 건가 싶었다.

“저희 마을에서는 저 별들이 신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사라져버렸어요. 주안, 신께서 도망간 걸까요?”

“신께서는 도망가지 않는다.”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다섯별 신화가 제국에도 있어요?”

“물론이다. 엘노아 제국의 마탑은 서쪽의 하얀 별, 사루페님을 믿고 따르지.”

“그러면 북쪽별이 사라지면 어떻게 해요?”

“……글쎄. 이상한 일이구나.”

주안은 그렇게 답하고는 입술을 다물었다. 히엘리는 침묵 속에서 고개만 갸우뚱하다가, 주안이 ‘그만 자러 가 보거라.’하고 등을 떠미는 바람에 네에 하며 천막으로 돌아가 몸을 뉘었다.

 

***

 

같은 날 밤, 주안은 두 아이가 모두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금빛 마력을 일으켜 히엘리의 몸을 감쌌다. 앞으로 수십 번은 있어야 할 작업들의 첫 번째였다.

마력을 거둔 주안은 천막 밖으로 나가서 몇 걸음을 걸어갔다. 그리고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제 둘레에 마력으로 결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허공에 말했다.

“아이는 확보했다. ‘힘’을 얻은 것 치고는 아주 안정적이야.”

그러자 결계 안으로 어떤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중성적이고 낮은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다행이군. 꽤 순조롭게 작업이 진행되겠어. 앞으로도 예의주시하길 부탁해.]

“알겠다. 아레디야는 어떻게 되었지?”

[아직 시에라칸에 있다. 작업에 끼고 싶지 않은 눈치더군.]

“설득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아무래도 꼬장꼬장한 노인네니까 말이야…….]

주안 마거릿은 그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고는 눈을 한 번 굴리곤 되물었다.

“아뮈에의 행방은?”

[아직 미궁이다. 완전히 꼭꼭 숨어 버렸어.]

그 말에 주안 마거릿은 혀를 찼다. 골치아프게 됐는걸.

주안은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다가 답했다.

“우선 사루페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쪽이 낫겠지.”

[그래준다면야 나는 고맙지. 너도 일하기가 한결 편해지지 않겠어?]

“알겠다. 라크라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하지. 보내 줄 인간이 있나?”

[추리는 중이야.]

“라크라에 도착하는 대로 만나게 해 줘.”

[그래. ……작업은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적게 잡아도 삼 년이다. 안정적이라고는 해도, 몸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커서 조절하기 어렵더군. 잠시 방심한 사이에 그것이 마안을 띄워 버렸어. 그리고 마력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이 아이는 완전히 백지다. 선악의 구분이 범인과는 완전히 달라. 세상의 규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더군. 오히려 작업의 속도를 늦춰야 할 판이다.”

[그런가. 하필이면 스라하르에서 태어난 인간이 후계자로 선정될 줄이야. 골치 아프겠군. 여러모로 수고하라고.]

“그래. 아뮈에의 행방이 밝혀지는 대로 연락 바란다.”

[알았어.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주안은 다시금 눈을 떴다. 결계도 제거했다. 다시 천막으로 돌아오는 주안의 눈동자에 네 개의 별이 담겼다.

아이들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주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그들의 옆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

 

다음날 아침.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히엘리가 눈을 떴다.

“모두 일어나요! 가야죠!”

그렇게 외치며 히엘리는 필레니케를 흔들어 깨웠다. 아침잠 많은 필레니케는 스라하르에서도 잠을 잘 깨지 못해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그 사실을 히엘리가 주안에게 조잘조잘 설명해주며 필레니케의 볼을 짝짝 때렸다.

“으으…….”

필레니케는 잔뜩 흐트러진 단발을 손가락 틈으로 빗어내리면서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축 처진 눈에 수심이 가득했다. 

“하여간 레니 너는 잠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깐.”

히엘리가 핀잔하며 필레니케의 양 볼을 꼬집어 늘렸다. 통 하고 떨어져나온 볼살을 문지르며 필레니케가 도톰한 입술을 비죽였다.

“너까지 자꾸 제라트 아저씨 같은 말 하지 마, 히엘리…….”

눈썹을 씰룩거리며 필레니케가 노려보자 히엘리는 ‘그래도 잠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라며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고, 그 뒤로는 걷고 또 걷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주안은 너무도 강해서 늑대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았으며, 신기한 아공간 주머니를 가지고 있어서 짐이 될 물건은 그곳에서 계속해서 나왔고, 두 아이는 생전 먹어보지 못했던 희한하고 신기하고 맛까지 있는 음식들을 맛보며 한없이 즐거워했다.

그러면서 이레는 금방 흘렀다. 약 여드레 째의 낮이 저물어갈 무렵, 주안은 숲의 한 길목에서 표지판을 발견했다.

 

[메세티 마을]

 

그렇게 적혀 있는 표지판은 엉성하게 만들어진 계단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여기로 내려가자.”

“헉, 드디어 라크라 마을인가 봐! 필레니케, 나 너무 기대돼!”

히엘리가 신이 나서 계단을 뽈뽈 내려가며 발을 굴렀다. 사실 라크라는 스라하르 옆의 넓은 지방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주안은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스라하르에서 태어난 자들이라면 메세티 마을이 접해본 라크라의 전부일 테니까.

계단은 끝이 없을 것만 같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히엘리는 앞장서서 걷다가 주안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밖에 가면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럼 저 친구도 사귈 수 있어요? 필레니케랑 마야 말고도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겠지.”

“와! 레니, 들었어? 새 친구를 사귈 수 있대!”

히엘리는 즐거워하며 계단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주안이 조심하라며 꾸짖었지만 뉘우치는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괜찮아요, 저 안 넘어져요! 당당하게 외치는 말은 사실이 되긴 했다. 히엘리는 그 긴 계단에서 온갖 곡예를 부리듯 뛰어다니면서도 결코 발 한 번 헛디디지 않고서 메세티 마을에 도착했다.

나무를 엮어 만들어진 대문에 메세티라는 단어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대문 뒤로는 푸른 하늘이 빛났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음이 멀찍이서 들려왔다. 히엘리는 드디어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어서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거라는,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그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기대가 깨어진 것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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