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스리크 산맥 (3)

그는 오른쪽 옆구리에 꼿꼿하게 검을 틀어쥔 채 늑대를 향해 직선으로 돌진했다. 늑대가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두 아이는 침을 꼴딱 삼켰다. 저렇게 달려들어도 괜찮은 거야?

히엘리는 은빛늑대와 싸우는 법을 이론으로만 배웠다. 몸이 날쌘 한 명이 늑대의 표적이 되고, 늑대가 방향을 틀어 속도를 늦추도록 유도한 뒤 다른 한 명이 등에 올라타서 목에 밧줄을 감는다. 은빛늑대의 피부는 매우 두껍고 단단해서 검으로 뚫을 수 없으니 질식시킬 때에는 두 사람 이상이 힘을 합쳐야 한다. 부득이하게 혼자 늑대와 맞서야 할 경우에는…….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늑대와 주안이 너무 가까웠다. 맹수가 마법사를 향해 커다란 아가리를 벌렸다. 꼼짝없이 물어뜯길 위치였다.

그때 주안이 왼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에 늑대의 아가리가 닫히며 텁 소리가 울렸다.

주안은 곧장 쥐고 있던 검을 늑대의 옆구리에 수직으로 박아넣었다. 그가 멈춰서서 버티자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한 늑대의 옆구리가 드드득 하고 갈라졌다. 웬만한 검은 통하지 않을 늑대의 가죽에 주안의 검은 물을 베듯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어떻게 저 단단한 늑대의 피부를 가느다란 장검으로 뚫는단 말인가? 부러지지 않는 검도 신기했지만 주안의 팔다리 힘도 경이로울 정도였다. 주안은 키는 컸지만 옷 입은 것만 봐도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늑대의 무게를 버티며 검을 쥐고 서 있을 정도의 힘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지?

옆구리를 베인 늑대는 그대로 몇 발자국을 전진하다 몸을 휙 틀어 다시 주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늑대의 피가 곡선을 그리며 주변의 나무에 가 튀었다. 주안은 피 묻은 검을 고쳐쥐었다.

늑대가 주안을 향해 사나운 이빨을 들이밀자 주안은 도리어 늑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고 허리를 뒤로 젖혔다. 바닥에 눕다시피 몸을 낮추고, 검을 세워 늑대의 가슴팍에 찔러넣었다. 일련의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늑대의 뒷발이 주안을 할퀴려 하자 그는 검을 버리고 몸을 굴려 늑대의 아래에서 미끄러지다시피 빠져나왔다.

검이 꽤 깊게 들어갔는지 늑대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주춤했다. 어느새 거리를 벌린 주안이 늑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늑대의 가슴팍에 있던 검이 저절로 뽑혀나와 손아귀로 들어갔다. 히엘리는 주안의 검을 감싼 희미한 금빛을 보았다.

늑대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도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주안은 늑대가 코앞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틀어 털을 움켜쥐고 그 높은 등에 가뿐하게 올라탔다. 그리고는 그를 떨어트리려는 거친 움직임에도 두 다리로 단단히 중심을 잡은 채, 검을 높이 들었다.

은빛 날이 늑대의 뒷목에 정확히 꽂혀들었다. 늑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짐승의 육신이 바닥으로 꺼지며 묵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다시 풀벌레가 찌르르 울기 시작했다. 두 아이의 앞에 생겨났던 마법의 방패도 거두어졌다.

“…….”

“……."

히엘리와 필레니케는 쓰러진 늑대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주안이 ‘이제 괜찮다.’라고 말하고 나서야 두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향해 뛰어갔다.

“진짜로 대단해요 주안! 어떻게 한 거예요? 주안은 엄청난 마법사일 뿐만 아니라 굉장한 전사이기까지 하셨군요!”

“저 마법사님이 죽는 줄, 아니, 늑대를 검만으로, 그…… 정말…… 멋있었습니다.”

주안은 두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이런 꼴을 봐도 괜찮으냐?”

“뭐가 문젠데요?”

히엘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안을 쳐다봤다. 로브가 흙투성이가 된 것이 문제일까? 아니면 피를 뒤집어써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주안은 늑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늑대의 옆구리는 크게 벌어져 젖은 털과 근육 사이로 뼈가 드문드문 보였다. 자칫하면 내장도 드러나보일 위치였다. 늑대의 가슴팍에서도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나왔다.

어린이들이 보기에 좋은 광경은 아니라 혹여 충격을 받았을까 우려한 주안의 마음을 히엘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맹수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에 신날 뿐이었다. 히엘리는 그런 늑대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털을 들여다보고 이빨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갓 죽은 은빛늑대는 처음이지만 종종 사냥꾼 분들이 잡아오신 건 봤어요. 얼마 전에는 직접 손질도 해봤는걸요! 저는 늑대 부위 중에서는 간이 제일 맛있더라고요.”

“히엘리는 손재주가 별로여서 꾸중을 들었지만 말입니다.”

필레니케가 뚱한 소리를 하자 히엘리가 입을 삐죽였다.

“넌 뭐 그런 것까지 이야기를 해? 주안,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아직 몇 번 안 해봐서 그렇지 연습하면 잘 할 수 있거든요? 마을에서는 여럿이서 같이 봐야 한다고 자세히 살필 틈도 없었단 말이에요. 오호, 이빨을 보니까 이 늑대는 나이가 좀 있네요.”

“……그래, 그렇구나…….”

주안의 얼굴이 묘하게 참담했지만 알아챈 아이들은 없었다. 히엘리는 호기심을 해소하기에 바빴고 필레니케는 원래 사람 얼굴을 잘 마주치지 않았다.

필레니케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혹, 무언가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 궁금하지?”

“왜 마법은 안 쓰셨는지…… 전 마법사들은 멀리서 불덩어리를 날린다거나, 그런 식으로만 싸울 줄 알았습니다. 저, 이건 따지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필레니케가 눈치를 보자 주안은 태연하게 답했다.

“늑대 한 마리 정도는 검으로 직접 싸우는 게 더 효율적이니까.”

별 것 아니라는 듯한 태도에 필레니케의 말문이 막혔다. 아뇨, 보통은 검 하나로 늑대와 싸우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그런 말을 애써 삼킨 듯 보였다. 히엘리도 마찬가지였다가 불쑥 의문을 제기했다.

“어라, 근데 주안. 마법 쓰지 않았어요? 검이 금색으로 빛났잖아요. 우리 앞에 막 같은 것도 쳐 주셨고.”

“금색? 막?”

필레니케는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못 봤어? 검 저절로 뽑히던 때 말이야. 주안 손이 반짝거렸다고.”

“안 그랬는데.”

두 아이의 반응이 갈리자 주안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히엘리. 그 빛을 보았단 말이냐?”

“네. ……보면 안 되는 거였나요?”

“아니, 안 될 이유는 없으나…….”

그렇게 말한 주안이 금빛을 일으켰다. 활엽수가 드리운 그늘 아래에서 주안의 주변이 환하게 일렁였다. 공기에 햇빛을 풀어놓은 듯한 모습에 히엘리는 ‘그래요, 바로 이거요!’하며 손가락질했다. 필레니케는 ‘그 이거가 대체 뭔데’라며 답답해했다.

주안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마력이었다. 마력은 주안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고 내려갔다. 그러자 옷과 머리에 붙어 있던 흙먼지와 핏덩이들이 감쪽같이 떨어져나갔다. 필레니케는 주안의 행색이 정돈되자 입을 떡 벌리며 감탄했지만 여전히 히엘리가 본다는 금빛 뭐시기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주안이 옷을 툭툭 털어 매무새를 다듬었다.

“히엘리에게 마안이 있는 모양이다.”

“마안이요?”

“마력을 보는 눈이라고도 하지. 지금은 인위적으로 조작한 마력을 보는 데에 그치는 모양이지만 분명히 띄였구나.”

“네에에에?!”

히엘리의 눈이 보름달만하게 커졌다. 히엘리와 만난 지는 만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주안은 직감했다. 지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가는 끊임없는 질문 공세에 맞닥뜨릴 것이라고.

“그 얘기는 차차 해줄 터이니, 지금은 이 늑대를 좀 처리하자꾸나. 다음 마을까지 식량도 필요하던 차이니.”

“아, 네, 그렇죠."

히엘리가 입을 다물었다. 주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너무 커서 다 해체하려면 좀 오래 걸리겠는데요?”

“이레 정도 먹을 분량만 있으면 된다. 적당히 취하고 나머지는 두고 가자.”

말릴 틈도 없이 히엘리가 제 보따리에서 주섬주섬 칼을 꺼냈다.

“그러면 갈빗살이랑 가슴살만 뗄게요. 아, 근데 간이 맛있는데. 간은 어떻게 꺼내지? 여길 베어내야 하나?”

히엘리가 죽은 늑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필레니케는 뒤에서 훈수를 뒀다.

“아냐, 거기 말고 조금 더 밑에. 아니 위에. 좀 오른쪽. 아니 왼쪽. 야, 이리 줘 봐. 내가 아무리 못해도 너보단 많이 해 봤겠다.”

어느샌가 무술 연습용 검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어디를 어떻게 가를지 실랑이 중인 아이들 뒤에서 주안은 이마를 짚었다. 적극적이어서 좋다고 해야 할지, 너무 일찍 세상의 풍파를 맞았다고 해야 할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보조만 해 다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안의 도축 실력은 보조가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히엘리가 옆에서 연신 감탄을 흘렸다. 우와 엄청나요, 순식간에 한 덩어리가 나왔네요, 칼솜씨가 예술이세요, 주안 멋져요, 굉장해요, 천재 같아요, 우리 마을 제라트 아저씨보다 잘 하시네요, 어디서 배우셨어요, 저도 나중에 가르쳐주세요…….

필레니케는 도울 일을 찾는 눈치로 주변만 서성거렸다. 도와줄 일이 어디 없나 싶었지만 정말로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얼쩡거리는 것도 방해될까 가만히 구경만 했다. 그러다 해체가 마무리되기가 무섭게 손을 내밀었다.

“그, 주십시오. 고기는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예에…….”

오기를 부리기에 주안은 너무도 단호하고 합리적이었다. 주안은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가 있으니 너희들이 힘들이지 않아도 된다느니 하는 설명을 하면서 손질한 고기를 눈앞에서 감쪽같이 치워버렸다.

 

***

 

뒷정리까지 마친 후, 주안은 히엘리에게 바로 서 보라고 지시했다. 히엘리의 마안이 뜨인 이유가 독액 때문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히엘리가 똑바로 서 있는 동안 주안은 히엘리의 머리와 어깨, 손이나 다리 근처에 손을 짚었다. 마력을 유동하며 몸을 살피는 것이라고 해서 히엘리는 조금 긴장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통증도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한 조짐은 없구나. 독액은 그저 네 몸 속에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이다. 내가 너를 처음 보았을 때와 마력의 조성 자체는 흡사해. 허나.”

“왜 그러세요?”

“……스라하르에서 마도구를 쓰느냐.”

“네. 음성 확성 뿔고둥 같은 거 말이죠?”

“그래. 그 마도구들에서도 마력을 본 적이 있느냐? 작동시킬 때 특이한 빛을 보았다거나, 이상한 점을 느낀 적 말이다.”

히엘리는 기억을 되짚었다. 지금까지 마을에서는 엘노아 제국에서 수입해온 망원경이나 확성 뿔고둥, 마석을 박은 무기 등을 썼었다. 하지만 그것들로부터는 주안의 마법을 쓸 때와 같은 빛을 보지 못했다.

“아니요, 그런 적 없어요.”

그러자 주안은 앓는 소리를 냈다.

“독액이 너의 마안을 깨운 것 같구나.”

“……나쁜 일인가요?”

“아직 판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네 몸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그것이 좋은 방향일지 위협이 되는 방향일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네에.”

어쨌거나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조사가 전부였다. 주안은 당분간 상시로 몸을 살펴보겠다고 했고 히엘리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기에 그러라고 했다.

그들은 마저 걸음을 재촉했다. 배부르게 먹었고, 기력이 채워졌으니 또 열심히 걸어서 다음 마을에 가는 것만이 당장의 목표였다.

평지라 걷기도 편하고 주변을 살필 여유도 많아서 두 아이는 산을 오를 때보다 신나서 뛰어다녔다.

필레니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저녁에 먹을 나물과 과일, 약초도 잔뜩 쟁였다. 히엘리는 그의 옆을 따라다니며 처음 보는 나무와 열매와 풀과 벌레마다 이름을 물었다.

“이 열매는 이름이 뭔가요?”

그렇게 물을 적마다 필레니케가 선수를 쳤다. 히엘리보다 두 살이 많은 덕분에, 열매 채집에도 경험이 쌓인 덕분이었다. 그래서 필레니케는 종종 우쭐거리며 대답해 주었는데, 그러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머쓱해하며 주안에게 물으러 왔다.

“이건 트리푸카피 열매다.”

그런 식으로 주안은 모든 열매의 이름과 모든 나무의 명칭을 막힘없이 대답해 주어서 두 아이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샀다.

주안은 동선을 줄이고 체력을 아끼라고 한소리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신이 나 있으니 그만두었다. 대신 이런저런 열매들의 생김새를 알려주고 찾아보라 일렀다.

아이들은 재밌는 놀잇거리를 찾은 것처럼 신나게 길을 갔다.

한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걷기에 경쟁을 붙이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에는 세 사람이 걷는 소리만 타박타박 숲 속 외길에 울렸다.

“덕분에 저녁은 좀 더 맛있어지겠구나.”

주안은 그렇게 말했다. 둘이 쏘다니며 모아온 재료를 쓸 것이라 했다. 히엘리와 필레니케는 기대에 부풀어 주안이 하는 모습을 열심히 구경했다.

“먹지도 못할 열매들을 구해오라기에 그냥 저희한테 적당히 장단 맞춰주시는 줄 알았는데 주안은 다 생각이 있었네요.”

주안은 나뭇잎 몇 장을 둥그스름하게 겹쳐서 그릇 모양을 만들더니 또 무슨 마법을 썼다. 겹쳐진 나뭇잎은 그 모양 그대로 고정되어서는 물이 새지도 않고 불에 타지도 않아 그릇처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주안이 어딘가에서 나뭇잎을 그득 꺾어왔다. 동그란 모양에 크기는 손바닥만큼 넓적하고 두께가 통통한 연둣빛의 잎이었다. 필레니케가 그것을 알아보고 답했다.

“잎살이나무가 아직 있었습니까?”

잎살이나무의 잎은 강이 없는 곳에서 매우 귀중한 수분 공급원이었다. 겨울이 끝나고 막 돋아난 연두색 잎을 씹으면 톡 터지듯 수액이 흘러나오는데, 달고 시원한 맛이 나서 좋았다. 다른 나무 진액처럼 끈적이는 느낌도 없이 깔끔하게 넘어가고, 잎 하나만 먹어도 하루치 갈증이 씻은듯이 사라지는 신기한 식물이었다.

단점이라면 나무 자체도 흔하지 않은 데다, 여름이 되어 녹색으로 변한 잎에는 독성이 있기에 어린 잎을 구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초여름이 아니던가.

“꼭대기에는 여린잎이 남아 있더구나.”

“그럼 거기까지 올라갔다가 오신……?”

“뭐. 비슷하지.”

잎살이나무 높이가 어느 정도더라, 어른들 세 명 키를 합한 정도니까 삼 바핫……. 혹시 마법사는 날기도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 아이들에게 주안은 나뭇잎을 너댓 장씩 나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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