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스리크 산맥 (2)
“저는 필레니케가 살았으면 좋겠어요. 제 둘 뿐인 친구 중에 하나였고…… 돌아갈 곳이 없어졌으니까. 필레니케를 살려주세요, 주안.”
단순하고도 명료한 요청이었다. 주안의 눈동자가 필레니케를 향했다.
“허하마.”
필레니케가 멈칫했다. 허한다고.
“예상 밖의 일이지만…… 히엘리의 뜻이 그러하다면 동행을 허하겠다. 이름이, 필레니케라고 했나?”
부산스러운 금발 속의 연보라 눈동자가 희망을 담고 긍정했다.
“예, 예! 필레니케입니다. 성은 따로 없습니다.”
“식사는 하였나?”
“아니오. ……점심, 이라면 아직입니다.”
“잘됐구나.”
주안은 두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꾀죄죄한 행색에 야윈 팔다리, 잘 빗어지지 않은 머리카락. 한 쪽은 이상할 정도로 겁없이 당당하고, 한 쪽은 불쌍하리만치 겁이 많다.
“식사를 하도록 하지.”
주안은 공중에 띄워 두었던 음식을 일부만 남겨두고 다시 로브 안으로 갈무리했다. 그리고 로브 안에서 널따란 천을 꺼내더니 바닥에 펼쳤다. 양옆으로 풀이 무성한 오솔길이었는데, 천이 놓이자 그 자리만 단단한 평지가 되었다.
주안은 윤이 반질반질해 손끝으로 만져볼 엄두도 나지 않는 고급스러운 돗자리 위에 흙 묻은 신발로 척척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더니 또 어디선가 나이프를 꺼내 고깃덩어리를 썰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주안이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옆에 앉거라.”
주안이 그들을 보고 떫은 듯 명령하자 두 아이가 와서 무릎을 꿇었다.
“편하게 앉아도 된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히엘리는 눈을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도르르 굴리고는 엉덩이를 바닥에 털썩 앉혔다. 필레니케는 히엘리와 주안의 눈치를 보았지만 자세를 바꾸지는 않았다.
주안은 둥그런 흰 빵을 가르고 그 사이에 저민 고깃덩어리와 야채를 끼워 넣으면서 그 고기가 염장한 양고기라고 알려 주었다. 두 아이는 주안이 만들어낸 샌드위치를 양손으로 받았다.
히엘리가 물었다.
“양…… 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귀한 거겠죠?”
“……제국에서는 흔한 가축이다만.”
“그렇지만 스라하르에서는 가축을 못 기르는걸요. 가축을 기르면 괴물들이 더 자주 쳐들어와서.”
히엘리가 자그마한 앞니로 빵을 뜯어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거 엄청 부드럽고 맛있다! 그렇게 말하며 한 입 크게 베어무는 히엘리를 보며 주안이 물었다.
“스라하르에서는 무엇을 먹고 살았지?”
“음…… 제일 먹기 쉬운 게 산맥 근처에서 자라는 견과열매구요. 생선을 잡기도 하고. 고기라고 한다면…… 역시 와이번이나 박쥐를 자주 잡죠?”
“……그렇지만 고기는 보통 전사들, 그러니까 괴물들이랑 싸우는 사람들이 먹어야 해서. 저희는 박쥐 내장을 끓여 먹었습니다.”
히엘리와 필레니케의 답에 주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걸 먹으니 이렇게 야위었지, 라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두 아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필레니케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박쥐 내장도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태어나서 먹어 본 식사 중에 오늘이 제일 맛있어.”
두 아이의 뺨이 발그레해진 모습을 보며 주안은 얕게 한숨을 뱉었다. 먹일 입이 하나 더 늘어나기는 했지만 먹이는 보람은 있을 듯하니 다행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두 아이는 한동안 정신없이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그러다가 히엘리가 말했다.
“저기요 주안. 그러면 마을 밖에는 이렇게 맛있는 것들이 더 많다는 거죠?”
주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끓인 박쥐 내장보다는 맛있을 거다. 그 말에 히엘리의 눈이 무지개처럼 반짝였다.
“그러면 다른 음식들도 먹어볼 수 있나요?”
“어떤 음식 말이냐?”
“음, 우선 소고기요! 드셔보셨나요? 전 박쥐나 토끼는 종종 먹어봤어도 소라는 동물은 처음 들어봤거든요. 닭은 털 달린 박쥐 비슷하게 생겼다던데 진짜인가요? 주안은 닭 먹어보셨어요?”
“그래. 닭은 박쥐보다 통통해서 먹을 것도 많을 거다.”
“우와!”
“그보다 네가 말한 것들은 요리라기보다는 식재료에 가깝구나.”
“그치만 저는 박쥐내장탕이나 견과류 어죽 같은 것밖에 모르는데요. 동화책에서는 꿀을 탄 우유? 그런 걸 먹기도 하던데. 정말 궁금해요.”
“라크라에서 제국 쪽으로 조금만 더 가도 먹을 수 있으니 염려 말거라. 얼마든지 먹게 해 주마.”
“정말이죠!”
지금까지 동화집을 읽으면서 궁금해하기만 했던 신기한 음식들을 주안과 함께하면 먹을 수 있다니. 주안이 자신을 제자로 삼겠다고 결정한 것도, 이렇게 스라하르를 떠나오게 된 것도 굉장한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며 히엘리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러고 보니 주안은 어디로 가는 거예요? 저를 얼마나 데리고 있을 예정인가요? 만약에 제가 마법을 다 배우면 주안을 떠나야 하나요?”
히엘리가 우다다 쏟아붙이자 필레니케가 의아해하며 끼어들었다.
“마법을 배운다고?”
“응. 주안이 나를 데려가는 이유가 제자로 삼기 위해서래.”
“……?”
필레니케가 처진 눈을 꿈벅거리며 히엘리를 쳐다보았다. 주안을 향해서는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눈으로 흘끔거렸지만, 주안의 무심한 눈길을 마주하자마자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음식에 집중했다.
그런 필레니케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주안이 한결 너그러운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어제 스라하르를 습격한 괴생명체에 대해서는 알고 있니?”
스라하르를 습격한 검은 물체. 필레니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나타나기 전, 바다에 먹물을 푼 듯 검게 물드는 파도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검고 둥근 공 모양의 액체가 솟아나서 사람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고도 덧붙였다.
“운트랄르 수장님마저도 그것을 살면서 처음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스라하르에 전해 내려오는 모든 괴물들의 생김새 중에서도 그런 것은 처음이었다고……. 그래서 그것을 ‘저주’라고 이름붙이기로 했어요. 어제 히엘리가 쓰러져 있을 때에요.”
히엘리는 그것에게 덮쳐진 다음 깨어나기까지의 일을 몰랐으므로 흥미로운 눈치로 들었다.
샌드위치를 다 먹은 주안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으며 말했다.
“엘노아 제국에서는 그 괴물질을 ‘독액’이라고 부르며, 한창 관심을 가지고 조사 중이다. 내가 엘노아 중앙 마탑에서 괴물 연구를 도맡아 하고 있어서 독액에 관해서는 잘 알지.”
두 아이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독액의 가장 치명적인 지점이 있는데…… 라는 말을 하며 주안은 히엘리를 쳐다보았다.
“독액은 자신과 닿는 모든 생명체를 흡수해버린다. 즉, 독액과 닿으면 곧장 죽는다는 것이다.”
“……저는 살아있는데요?”
“그래. 그게 바로 내가 히엘리를 제자로 삼으려 한 이유란다. 독액에 닿고 살아남은 인간은 지금껏 발견된 적이 없어. 그리고 내가 살펴본 결과 독액은 지금, 히엘리의 몸 안에 잠들어 있다.”
“제 안에요?”
히엘리는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한 손에 움켜쥐고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내 몸 어디에 독액이 있다는 거지, 하는 눈으로 튜닉 속을 살펴보기도 했다. 주안은 히엘리가 동그란 새싹빛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볼 때에야 다시금 말을 이었다.
“히엘리, 네가 스스로 독액을 잠재웠다는 의미다.”
“제가요?”
“독액은 사실 생명체가 아니야. 오히려 순수한 힘에 가깝지. 그렇기 때문에 독액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강대한 마법이 필요해. 웬만한 마법사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마력이.”
“…….”
“그리고 히엘리 너는, 마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 일을 해냈다. 한 마디로 히엘리에게 마법사의 자질이 있다는 뜻이란다.”
히엘리는 멀뚱멀뚱 눈을 굴렸고, 필레니케는 씹고 있던 샌드위치를 삼키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럼 저 금방 굉장한 마법사가 될 수 있나요?”
“……그건 아직 무리겠구나. 네 몸 속의 독액은 지금도 위험하게 날뛰고 있고, 그걸 내가 마력으로 눌러놓고 있는 것뿐. 독액을 완전히 몸에서 제거하기 전까지는 마법을 배울 수 없겠지만, 그러고 나면 금세 성장할 수 있을 거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장담할 수 없지만 최소한 몇 해는 걸리겠지. 지금으로서는 독액을 네 몸 속에 봉인해두는 수밖에 없어. 독액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아직 연구 중이다.”
몇 해라는 말에 히엘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몇 해씩이나! 히엘리는 생각했다. 그럼 앞으로 몇 년 간은 죽을 걱정 없이 주안을 따라다니기만 하면 된다는 건가?
“그럼 저는…… 주안을 따라다니면서 맛있는 걸 잔뜩 먹을래요!”
“……?”
히엘리의 말에 주안과 필레니케 모두가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는 눈빛을 했다. 히엘리는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밀어넣었다가 둘의 표정을 보고는 급하게 씹어삼켰다.
“그치만 주안이 독액을 없애주신댔고, 저한테 세 가지 규칙으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맛있는 걸 잔뜩 먹고 싶어요.”
“……틀린 말은 아니구나.”
“그쵸? 저는 정말 행운아인 것 같아요.”
히엘리의 볼은 발갛게 물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히엘리는 손가락에 묻은 빵가루와 물기를 남김없이 쪽쪽 빨아먹다가 별안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주안이 죽으면 어쩌죠?”
“뭐?”
히엘리가 하는 행동을 지그시 지켜보고 있던 주안은 느닷없는 질문에 미간을 좁혔다.
“주안이 죽으면 저도 죽겠죠?”
“…….”
“그리고 허락 없이 주변을 떠나지 말라고 했잖아요.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지 않았는데 갑자기 주안이 죽으면 어떡해요. 저는 마법도 배울 줄 모르고, 독액이 날뛸지도 모르는데, 주안의 시체 옆을 지켜야 하나요?”
“그럴 일은 없다.”
주안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히엘리의 얼굴에 깔린 수심은 지워질 줄 몰랐다.
“하지만 사람은 모두 죽는데도요.”
“…….”
주안의 얼굴 근육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주안은 쯧,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숙인 채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상태로 몇 초간 손가락을 까딱거리다가, 다시금 팔짱을 끼며 히엘리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만약 죽는다면 그때는 나를 떠나도 좋아. 하지만 최소한 네가 마법을 어느 수준까지 배우기 전까지, 내가 죽는 일은 없을 거다.”
“어떻게 믿어요?”
필레니케는 그런 히엘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야 이 멍청아, 하면서 꿀밤을 먹였다.
“뭐야, 왜 시비야!”
히엘리가 항의하자 필레니케는 조용히 하라며 입술 위에 검지손가락을 갖다대고는 히엘리의 머리를 푹 수그러뜨렸다.
“죄, 죄송합니다! 히엘리가 가끔, 무례한 말을 합니다. 아직 배, 배움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부디 양해를……!”
“아니, 그게 왜 무례한 건데?”
순수하게 묻는 히엘리더러 필레니케는 제발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다가 주안이 입을 열었다.
“왜인지 알고 싶으냐.”
“……네.”
그러자 주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툭툭 털었다. 고급스러운 돗자리 위로 먼지가 일렁이며 떨어졌다. 주안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자기가 강하다고 했던 사람들도 절반은 죽었는데.”
히엘리가 꾸물꾸물 딴지를 걸었다. 아랫입술이 묘하게 비죽 튀어나온 모습이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주안은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만, 가죽 허리띠를 만지작거리더니 로브 안쪽에서 검을 들어 꺼냈을 따름이었다.
“히익-!”
필레니케가 헛숨을 삼키며 어깨를 잔뜩 움츠러뜨렸다.
‘너무 무례했어, 감히 제국 귀족 나으리의 능력에 의심을 해버렸잖아. 그러니까 조용히 있으라고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필레니케는 잔뜩 몸을 움츠렸다. 자칫하면 배가 꿰뚫리거나,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조용히, 이 위치에 가만히 있거라.”
그러나 주안은 두 아이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주안이 덧붙인 말은 확실히 아이들을 향한 것이었으나, 주안은 오솔길의 반대편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을 옆으로 뻗은 채로.
심상찮은 분위기에 두 아이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언제부터인지 풀벌레가 울지 않고 있었다.
“은빛늑대다.”
주안이 읊조렸다. 검을 빼어들면서 스릉, 하는 울림이 퍼져나갔다.
은빛늑대라는 말에 두 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언제 다투었는지 모르게 서로 한쪽 손을 붙잡았다.
은빛늑대는 스라하르 근방의 맹수 중 덩치가 크고 사납기로 유명했다. 다 자란 은빛늑대는 눈높이가 성인과 거의 비슷하고, 머리 크기만 해도 덩치 좋은 남성의 한아름에 꽉 찰 정도다. 은빛늑대 한 마리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그것도 아주 힘이 세고 육탄전에 능한 사냥꾼이 최소한 두 명은 필요했다.
‘필레니케, 우리가 어른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을까?’
‘되겠냐.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 아냐?’
히엘리와 필레니케가 주안의 뒤에서 눈짓손짓을 교환했다. 그래, 주안이 가만히 있으라고 했으니까 조용히 있자.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히엘리는 주안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살폈다. 나무와 바위, 수풀만이 우거진 오솔길 너머로 주안은 무엇을 알아차린 걸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저 멀리, 키 높은 풀들 사이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든 오후의 햇살이 늑대의 털에 반사되고 있었다.
“수컷 한 마리가 전부구나. 여기에 가만히 있거라.”
그렇게 말하곤 주안이 아이들의 앞쪽에 반투명한 금빛 막을 만들어냈다. 마법? 방패인가? 히엘리가 추측하는 사이 주안이 지면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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