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팁 전력

호두나무 숲의 요정

뜰팁 전력 '요정' | 뜨리미널 인형 공방

"아, 또 저 소리..."

눈이 내리는 호두나무 숲의 한쪽에 있는 작은 나무 오두막. 그곳엔 호두까기 인형 덕개와, 언제부터 이 숲에 산건지 알 수 없는 요정 필립이 차와 함께 호두를 즐기고 있었다. 조용한 그들의 휴식을 방해한 건 누가 들어도 홀릴 만한 감미로운 노랫소리였다. 공방주인이 항상 찬향하듯, 신의 목소리와 같이 아름다운 노랫소리지만, 호두까기 인형에겐 조금 다르게 느껴졌나 보다.

"하루도 빠짐없이 저 노래를 듣고 있자니 미칠 것 같아."

"덕개님은 저 노랫소리가 싫은가요?"

"싫다 뿐이야? 아주 증오스러워. 저거 때문에 밤에도 잠을 못 자겠다고. 같은 주인님을 모시고 있으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니야?"

덕개는 차를 입 안에 단숨에 털어넣으며 분노를 삼켰다. 매일 따지러 가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라더는 주인님이 가장 아끼는 인형인데. 자신 같은게 말을 꺼내봤자 무시만 당할텐데.

"그럼 저 노랫소리가 영원히 안들리길 바라나요?"

"당연하지. 거기다 앞으로 영영 볼 일 없으면 더 좋겠네."

"그 바람, 제가 이루어 드릴까요?"

"...뭐?"

덕개는 필립을 돌아보았다. 필립은 그저 미소짓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 미소가 덕개에겐 섬뜩하게 느껴졌다.

"덕개는 항상 제게 맛있는 호두를 주었으니까요. 그 보답이에요."

필립은 접시에서 호두를 한 알 골라 입에 넣었다. 까득, 호두가 부서지는 소리가 순간 소름끼쳤던 건 어째서였을까. 


덕개는 자신이 준비한 차 두 잔을 내려다 보았다. 한 잔은 주인님께서 드실 차, 그리고 한 잔은 그 녀석이 마실 차다.

'왜 내가 그 재수없는 녀석의 차까지 준비해야 하는 거지?'

덕개는 한참 동안 찻잔을 노려보다, 찬장에서 하얀 가루가 담긴 봉지를 꺼냈다. 약간의 시간동안 망설이더니, 이내 덕개는 그 가루를 남김없이 찻잔에 쏟아 부었다.

"수면제를 타려고요?"

"!!!"

덕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문가에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필립 요정이 서 있었다.

"너, 너 언제부터...!"

"덕개님이 수면제를 넣을 때 부터라고 대답하면, 어쩌시겠어요?"

"!! 너, 너 이거 주인님께 말하지 마!"

"으음...전 요정이라 거짓말을 못하니까, 공방 주인께서 물어보시면 솔직하게 답해야 할텐데요."

"안 돼!! 말하면...! 말하면, 날... 더 미워하실 거란 말야..."

"그걸 아시는 분이 왜 그러셨어요?"

"...."

덕개는 답을 하지 못했다. 필립은 낮게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마요. 당신이 수면제를 넣었다는 걸 탓할려는게 아니에요. 단지,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이죠."

"...무슨 소리야?"

"오늘 무슨 일이 터질 거거든요. 괜히 덕개님이 수면제를 탄 것 때문에 오해 받지 않길 바라야 겠네요."

"대체 무슨 말을..."

순간 덕개의 머리 속에 며칠 전 필립과의 다과 시간이 떠올랐다. 그 때 받았던 불길한 느낌도.

"너,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필립은, 그 날처럼, 미소 지으며 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그저 요정의 작은 장난이죠."


늦은 밤. 인형 공방엔 오르골의 노랫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인형 공방 1층에 서 있는 시계 토끼는 그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아니면 그보다 더한, 그만이 알고 있는 고민이 있는 것일까. 

'아니, 그만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지.'

필립은 시계 토끼의 고민을 알고 있다. 시계 토끼는 얼마 전 인형에게 수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본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사라지지 않기 위해 절박할 것이다.

절박한 자 일수록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강해지고

이성보다 감정에 충실해지며

판단력은 흐릿해지기에....

"수현님."

"필립 씨?"

그만큼, 이용하기에 쉬워진다.

"덕개님이 칠칠맞게 망치를 두고 가셨더라고요. 저 대신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 절박함에 등을 살짝 떠밀어주기만 한다면,

그 뒤론 뻔한 이야기다.


오르골은 더 이상 노래하지 못한다.

오르골을 부순 시계 토끼도 더 이상 종을 치지 못한다.

덕개가 원하는 대로, 조용한 밤이 찾아왔다.


"너지?"

"뭐가요?"

잔뜩 흥분한 상태로 달려온 덕개를 필립은 태연하게 맞이했다. 요정의 입가에 자리하고 있는 미소가, 덕개의 눈엔 가증스러워 보였다.

"라더를 죽인 범인 말야."

"무슨 소리에요, 공방 주인분의 명추리로 범인은 시계 토끼로 판명났잖아요? 자백도 했다면서요."

"말 돌리지 마! 네가 수현 형을 부추긴거지? 수현 형은 이런 짓을 할 만한 성품이 아니었어! 대체, 대체 라더를 왜 죽인거야!"

소리치는 덕개의 목소리는 떨렸고, 조금은 젖어 있었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부수긴 했지만, 수현은 믿고 의지했던 형이었다.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덕개 님은 참 솔직하지 못하시네요."

"뭐?"

"그래요, 내가 부추겼어요. 덕개님의 망치를 그에게 주었죠. 그런데,"

필립은 덕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다.

"그가 죽길 바란 건, 덕개님이잖아요?"

"!!!!"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정적만이 그곳에 존재했다.

필립은 평소와 같은 웃음을 띠며 마저 말을 이었다.

"바라는 대로 되었는데, 덕개님은 기쁘지 않으세요?"

"아냐, 아냐.... 난 그가 죽길 바란 적은 없어! 단지, 단지...!"

"부정하지 마세요. 수현님이 아니었다면 일을 쳤을 사람은 덕개님 본인이란 걸 가장 잘 알고 있잖아요."

"...아니야...난..."

"당신이 사라지면 호두를 까줄 사람이 없으니까, 제가 나선 것 뿐이에요. 요정이 이런 일을 꾸밀 거라곤 아무도 상상 안 할거잖아요?"

호두까기 인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필립은 웃으며 덕개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덕개님, 조금 흥분한 것 같네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낫겠어요."

"...."

"그리고 이 일은 우리만의 비밀로 하는게 좋겠죠?"

덕개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나가려다, 덕개는 필립을 바라보며 한 마디 내뱉었다.

"당신은 악마야."

그 말에 필립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설마요, 그냥 요정일 뿐이랍니다."

덕개는 한동안 그를 노려보다 자리를 떠났다.

호두나무 숲의 요정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한동안 소리내어 웃었다.

오르골 소리도, 시계 토끼의 종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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