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쫑] 이런 건 나랑만 해

[가비지타임/규쫑] 이런 건 나랑만 해 - 2

규쫑 by 썬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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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 선수! 여기 좀 봐주세요!”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계기가 뭡니까?”

“한국에서는 어떤 팀에 들어가실지 이미 마음을 정하셨나요?”

“최종수 선수!”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간간이 플래시가 터지고 셔터 소리가 빠르게 울리기도 했다. 종수는 그 모든 걸 간단한 묵례로 무마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우뚝 솟아있을 사람을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그는 눈에 바로 띄었다. 큰 키와 덩치는 이럴 때는 참 편하고 좋았다. 목적지를 확인한 종수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시선이 끝에 있는 이가 활짝 웃었다.

“종수.”

이규가 종수를 불렀다. 종수가 빠르게 이규에게 다가가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단박에 그를 껴안았다. 품에 가득 찬 상대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지만, 종수는 팔을 푸는 대신 힘을 더 주는 걸 택했다. 이규가 결국 웃으며 종수를 마주 안았다. 잠시 멈춘 것 같던 셔터 소리가 다시 빠르게 이어졌다.

“어서 와.”

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종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이규의 향을 가득 담고는 몸을 떼냈다. 그사이 이규를 알아봤는지 기자들의 질문이 방향을 바꾸어 날아들었다.

“이규 선수! 최종수 선수와 중, 고등학교 동창이셨는데, 직접 마중까지 나오신 건가요?”

“지금 이규 선수가 여기 와 있다는 건, 최종수 선수의 입단이 내정되어 있다고 봐도 되는 건가요?”

“두 분, 최종수 선수가 미국에 간 사이에도 계속 연락을 이어오셨나요?!”

종수를 껴안은 채로도 기자들에게 간단하게 눈인사나 묵례를 건네는 것 같던 이규가 종수에게 속삭였다.

“너 이렇게 아무런 대답 안 해도 돼?”

“흠…….”

사실 안 하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알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찾아왔는지도 의문이었다. 조용한 재회의 순간을 방해받은 것 같아 기분도 별로였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뜬 소문을 만드느니 답할 수 있는 건 해서 관심을 분산시키는 게 나았다. 결국 종수가 이규를 한 번 더 꽈악 안고는 뒤돌아서 기자들을 마주했다. 이규는 장시간 비행으로 살짝 눌린 종수의 뒤통수를 보고 웃음을 삼켰다. 종수는 이쪽을 봐달라는 기자들을 고루 한 번씩 봐준 후, 입을 열었다.

“원래 서른쯤 되면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었습니다. 들어갈 팀은 아직 미정이고, 이규랑은 동창 맞고, 그동안에도 연락했습니다. 저 마중 나온 것도 맞습니다.”

내정된 구단은요? 이규 선수랑 같은 곳으로 가십니까? 같은 질문이 또다시 이어졌지만, 종수는 거기에는 말을 아꼈다. 부모님을 뵙기로 해서 빨리 가봐야 한다는, 한국인이라면 보내줄 수밖에 없는 답도 함께였다. 이규는 그간 더 단단해진 종수의 뒷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그가 팔을 잡고 끌고 가자 자연스레 딸려 갔다.

둘의 걸음으로 출구는 금방이었다. 자동문을 통과해 나왔더니 후덥지근한 공기가 금세 둘을 덮쳤다. 종수가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 습하고 더웠다. 눈도 부셨다. 종수는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뒤를 돌았다. 이규는 끌려오는 내내 연신 인사를 해대는가 싶더니, 이제는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하고 있었다. 어느새 제가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도 들고 있는 건 덤이었다.

종수가 가방을 봤다, 이규를 봤다, 기자들을 봤다. 기자들은 이제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다들 금세 풀어진 낯이 되어서는 이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종수는 생각했다. 역시 이규를 혼자 두는 건 좀 위험했다. 남자 친구가 인기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심지어 성별 불문이었다. 이걸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결국 종수가 이규를 불렀다. 질문도 나름대로 생각해서 던졌다.

“차 어디 대 놨어?”

“아. 이쪽.”

반사적으로 종수의 말에 대답한 이규가 아차, 하고는 돌아서 기자에게 들어가세요~ 하고 서글서글 웃으면서 인사했다. 종수도 대충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기자들이 퇴장을 어느 정도 확인한 후 종수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너 기자들 오는 거 알았어?”

“아니.”

“하긴. 알았으면 이렇게 짧게 대답하지는 않았겠다.”

“그랬겠지.”

“종수. 근데 거기서 나 막 안고 그랬어도 돼?”

잘 걷던 종수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규는 진짜 제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물론 이런 데 신경을 잔뜩 쓰는 모습을 보여준 건 자신이었지만, 그래도 이규가 다른 놈들이랑 더 친하다느니, 누구랑 사귀는 것 같다느니 하는 기사가 나는 것보다는 자기랑 제일 친하다는 기사가 나는 게 나았다. 종수가 뚱하게 답했다.

“안 될 건 뭐야.”

“그래도…….”

종수는 미국으로 간 이후에 제법 무뎌졌다. 나이가 드니 내면이 좀 단단해졌는지 이전만큼은 그 말들이 크게 날아와 꽂히지 않기도 했고, 미국에서는 적응하느라 그 반응을 살필 정신조차 없기도 했었다. 가끔 검색창을 켜면 제 이름 대신 보고픈 이의 이름을 검색했다. 이규에게서도 들었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의 흔적을 통해 다시 접했다. 기사를 읽고, 영상을 보고, 사람들의 댓글을 봤다. 날 선 말들은 저만을 향한 게 아니라, 이규에게도 똑같이 퍼부어졌다. 종수는 거기에도 똑같이 신경이 쓰였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규는 무던해도 너무 무던했다. 이규는 그런 사람들은 상관이 없다고 했다. 자신을 아는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최종수가 이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자신을 모르는 이들이 멋대로 넘겨짚는 것까지 어쩔 수는 없으니, 스스로 신경을 쓸 바운더리를 만들면 되는 거라고, 그렇게 얘기했다.

종수는 그게 가능하다는 걸 이규를 통해 처음 알았다. 진짜 신경을 안 쓸 수 있구나. 그 우선순위를 내가 정할 수 있구나.

이규가 가장 신경 쓰는 건 저라고 해줬으니, 종수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규를 더 이상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고등학교 때부터, 어쩌면 그 이전부터도 이리저리 휘둘리는 저를 보며 안타까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저 때문에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제가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과는 별개인 일이었다.

결심이 서니 실행은 쉬웠다. 마인드 컨트롤은 코트 위에서 늘 하던 것이었다. 그걸 침대 위에서, 식탁 앞에서 잠시 보던 핸드폰을 내려두고 시도하면 됐다. 처음부터 잘 됐던 건 아니지만, 몇 년을 시달린 것 치고는 꽤 빨리 적응했다. 종수는 이 모든 게 이규가 있어서 가능했다는 걸 알았다. 이규가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깨닫거나 시도하지 못했을 일들이었다.

물리적으로는 먼 곳에 있었지만, 이규는 언제 어디서든 제 편이 돼주었다. 그는 저를 알게 된 이래로 단 한 번도 불신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견고하게, 올곧게, 또 상냥하고 다정하게. 그 자리에서 자신을 믿어주고 있었다.

미국에서 떨어져 지낼 때도 의지를 했는데, 지금은 바로 곁에 이규가 있었다. 그러니 종수는 눈앞의 이규에게 집중하면 됐다. 실체가 있으니 마인드 컨트롤은 더 편하고 쉬웠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밀도가 높았으니, 다른 데 신경 쓸 여력 같은 건 없을 게 분명했다.

거기다 미국에서 지내며 깨달았다. 이규와 자신이 미국에서 살았다면 스캔들의 가능성이라도 있었겠지만……. 한국은 아니었다. 편견이 지켜주는 나라. 남자와 남자는 사귈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바로 여기였다. 종수는 어릴 적 수많은 편견과 선입견에 휘둘린 만큼, 이번에는 그것들을 모조리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긴 남자 둘이 사귈 수 있다는 상상조차 못 하는 나라라 괜찮을걸.”

“그런가?”

“응. 그러니까 빨리 가.”

종수가 이규를 다시 잡아끌었다. 종수가 멈춰서는 바람에 조금 앞에 있던 이규가 순순히 끌려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주차장까지는 멀지 않았다. 둘은 금세 익숙한 이규의 검은 SUV 앞에 섰다. 이규가 차 뒷문을 열고 종수의 짐을 실었다.

“종수. 근데 진짜 이 가방 하나 들고 왔어?”

“어.”

“캐리어도 없이?”

“짐 나오는 거 기다리기 싫어.”

사실은 이규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서였지만, 종수는 이걸 그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제가 생각해도 유난이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규는 짐을 내려놓고 차 뒤를 정리하느라 제 표정을 못 본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그 잠시의 표정을 들켰다면 분명 추궁당했을 게 분명했다. 종수는 허리를 펴고 차 뒷문을 닫은 이규의 앞에서 또 금세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해 보였다.

“남은 건 다 택배로 보냈댔지.”

“어차피 너랑 엄마가 다 준비해 놨을 것 같아서.”

“잘했어.”

이규가 종수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이고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종수가 열린 문 안으로 자연스레 몸을 실었다. 얌전히 차에 오른 종수에게 웃어준 이규가 문을 닫고, 운전석 쪽으로 가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종수에게 끌려갔다.

서로의 입술이 포개지고, 사이가 벌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종수의 혀가 이규의 입안을 거칠게 탐했다. 혀를 얽는 걸로 모자라 입천장을 긁고, 이규의 치아 하나하나를 맛보기라도 하듯 굴었다. 혀를 깊숙이 쑤셔 넣는 바람에 이규가 잠시 쿨럭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종수는 입술을 떼 주지 않았다.

이규가 종수의 팔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저돌적인 종수도 좋았지만, 이러다 차 안에서 이것저것 다 하게 될까 봐 걱정이 좀 됐다. 열세 시간을 날아온 애인에게 그런 못 할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종수는 키스 두 번 정도로 해후를 끝내주었다. 조금 달아오른 얼굴을 한 종수를 보고 이규가 쪽쪽 입을 맞췄다.

“종수.”

“응.”

“잘 왔어.”

종수가 팔을 뻗어 이규를 안았다. 이규도 종수를 마주 안았다. 종수가 깊은숨으로 이규를 한껏 들이켰다. 공항에서 한 걸로는 부족했다. 목덜미에 얼굴을 부볐다. 내내 고팠던 이규의 냄새를 한껏 들이켰다. 이규의 향수 냄새. 살냄새. 더운 날이라 조금 배어 나오는 땀 냄새까지. 종수는 비로소 이규의 곁이라는 걸 실감했다.

이규가 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이규의 손가락 사이에서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오는데 안 힘들었어?”

“힘들어.”

이규가 한 손으로 시동을 걸고, 에어컨도 켰다. 안고 있는 종수의 체온이 뜨거웠던 탓이었다. 차 안에서는 금세 시원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이규가 종수의 등을 도닥이며 말했다.

“빨리 집에 가자.”

종수가 이규의 목덜미에 고개를 또다시 부비고는 웅얼댔다.

“싫어.”

“이건 또 싫어?”

조금 더 안고 있을까? 이규가 웃으면서 종수를 더 끌어안았다. 종수는 한참을 더 그렇게 있다가 슬그머니 떨어졌다. 그러고는 또 이규를 한참 바라봤다. 이규가 그런 종수를 가만히 마주했다. 종수가 이규의 손을 가져와 깍지를 꼈다.

“규.”

“응. 종수.”

“다녀왔어.”

종수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매년 한 번씩은 한국에 오면서도 오늘을 위해 아껴둔 말이기도 했다. 이규가 그 말을 듣고는 종수의 손을 더 힘주어 맞잡았다.

“응. 수고 많았어.”

“응…….”

종수는 울컥한 마음을 겨우 참아내며 답했다. 이규에게 환영 인사를 듣고, 그를 마주하고 나니 계속 한국에 있을 수 있으리라는 게 진짜 현실 같았다. 미국을 떠나며 느꼈던 시원섭섭함이 자리를 비우고, 안정감이나 안도감, 기대나 설렘 같은 게 빈 곳을 꼼꼼히 메웠다. 앞으로는 매일매일 잡고 싶을 때마다 이 손을 잡고, 체온이 그리울 때마다 그 몸을 안고, 목소리가 듣고플 때마다 시차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그를 부를 수 있었다. 이규가 여전히 따뜻한 눈빛을 가득 담은 채로 종수에게 물었다.

“넓은 세상은 잘 보고 왔어?”

“응.”

“어땠어?”

그 물음에 종수가 지난 세월을 짧게 떠올렸다.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했을 때. 첫 자취 집. 첫 훈련. 드래프트. 벤치에 앉기까지, 또 실제로 코트 위에서 뛰기까지의 여정. 패배. 좌절. 극복. 승리.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서 자신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준, 이규.

이규가 없었어도 어떻게든 됐을 거였다. 자신은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하면 무조건 넘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규가 없었다면, 그 산을 넘은 후 이렇게 홀가분할 수 있었을까? 종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나만의 산을 넘을 때 옆에서 함께 묵묵히 따라와 줄 사람. 산 너머의 생활을 함께 해줄 사람. 새로 발견할 산 앞에 또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서 줄 사람. 종수가 생각하기에, 제 인생에서 그 모든 걸 함께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규만이 유일했다. 그리고 그 확신이 문득문득 정수리 위로 꽂혀들 때마다, 종수는 이규가 참 많이 고팠다.

목소리나 영상만으로는 안됐다. 이규 몰래 찍어 온 그의 사진들을 모조리 다시 봐도 부족했다. 이규의 온도, 냄새, 부피감. 그 모든 게 제 손이 닿는 곳에 있었으면 했다. 종수가 제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따끈따끈한 이규의 손을 느끼며, 느릿느릿 입술을 뗐다.

“그냥…….”

그 모든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아마 이것일 터였다.

“너가 보고 싶었던 것 같아.”

이규가 종수와 잡고 있는 손을 끌어당겼다. 가까워진 종수를 꽈악 껴안았다. 종수도 이규를 다시 마주 안았다. 이규의 목덜미에 종수가 턱을 걸쳤다. 얼굴을 안 보니 조금 더 부끄러움이 사라진 종수가, 이규의 귓가에 나지막이 덧붙였다.

“……지금 생각하면 좀 많이.”

그 말을 들은 이규는 종수를 더 꽉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보고 싶다’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 진짜 너무 보고 싶을 것만 같아서, 꾹꾹 눌러 참기만 했던 시간이 이규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하거나 들을 수밖에 없어서, 종수 몰래 잠을 뒤척이던 순간들도 떠올랐다. 불면증이라는 게 종수를 지독하게도 괴롭혔겠구나 싶어 속상했던 마음도 모두 생생했다. 목에서는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도, 나도 너가 그리웠어. 종수.”

그립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이규는 그 말을 내뱉자마자 그간의 그리움이 모두 자신을 덮쳐오는 것만 같았다. 품에 안고 있는데도 종수가 고팠다. 조금 전까지 마주하고 있던 종수가 보고 싶었다.

그 욕망을 이겨내지 못한 이규가 종수와의 거리를 잠시 벌리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종수도 이규와 눈을 맞췄다. 이규의 눈에는 여전히 저를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한국을 떠날 때와 똑같은 눈빛이었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때도 이규는 늘 그런 눈으로 자신을 봐줬던 것 같았다. 어린 저희는 그 감정이 뭔지 몰라 제법 헤맸었지만, 지금은 그게 뭔지 확실히 알았다.

‘내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한 사람’이라던 이규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그 뒤를 이은 말은 분명 앞으로도 함께할 거라는 말이었다. 종수는 새삼 벅차올랐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 감정이 감당이 안 되어, 종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이규가 기다렸다는 듯이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맞춤은 나른하고 다정했다. 종수의 입 안을 파고든 두툼한 혀는 입천장을 느리게 문지르고, 다른 혀와 서로를 맞대어 비비며 얽고, 타액을 조심스레 주고받았다. 사이사이 숨을 쉴 수 있게 입을 떼기도 했고, 감았던 눈을 가물가물하게 떠서 뿌연 시야를 맞추기도 했다.

그사이 후덥지근하던 차 안은 시원해져 있었다. 이규는 촉촉해진 종수의 입가를 엄지로 부드럽게 한번 쓸어주고, 제 입술은 혀로 대충 핥았다. 마지막으로 종수와 코를 한 번 맞대고 다시 거리를 벌렸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진짜 끝도 없이 종수와 접 붙을 것만 같았다. 이규는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았다.

“집에 갈까.”

느리게 눈을 끔뻑이던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가 종수의 볼에 다시 입을 맞추고,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종수가 자연스레 차 시트에 등을 기댔다. 이규가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채워줬다. 그러고는 멀뚱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종수에게 다시 쪽 입을 맞췄다.

“귀엽긴.”

종수가 그 말에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가, 손을 들어 떨어지려는 이규의 머리를 다시 끌고 와 입술을 꾸욱 눌렀다. 맞닿은 이규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게 느껴졌다.

“왜. 귀엽다는 말 좋아?”

이규가 능글맞게 중얼거렸다. 종수가 이규의 까슬한 머리통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이규가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찡그렸다.

“까분다.”

“까분 거 아니고 진심인데.”

종수도 알았다. 그리고 이규에게서 듣는 귀엽다는 소리는 사실 썩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이건 그냥, 지금 뭔가를 더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의 표시일 뿐이었다.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분명 차에서 뭐라도 더 할 것 같았는데, 제가 아는 이규는 귀국 날 절대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을 남자였다. 그건 곧 결국 몸이 달아 애가 탈 건 자신이라는 게 확실할 거란 말이기도 했다.

끝까지 우긴다면 이규가 제 말을 들어준다는 것도 종수는 알고 있었지만, 동거 첫날에 그런 억지를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종수가 결국 이규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이규가 눈꼬리가 완전히 접힐 정도로 웃었다. 그러고는 종수의 얼굴 여기저기에 또 입술을 마구 부벼댔다. 종수는 그 입맞춤 세례를 잠시 받아주다 뚱하게 말을 꺼냈다.

“집에 간다며.”

“응응.”

“출발해.”

“네에~”

이규가 마무리로 쪼옥―!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는 몸을 물렸다. 종수는 괜히 손이 허전해진 기분에 팔짱을 꼈다. 이규는 빠르게 안전벨트를 매고, 핸들을 돌렸다.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도로를 달리게 된 이규는 자연스레 노래를 틀었다. 적막하던 차 안을 리드미컬한 선율이 채웠다. 공항을 빠져나온 지 어느 정도 지나자, 차는 첫 대기 신호에 걸렸다. 꽤 긴 신호인지 이규는 오른손을 잠시 핸들에서 내린 후, 허벅지 위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종수는 그 움직임을 지켜보다 손을 뻗어 이규와 깍지를 꼈다. 이규가 그런 종수를 보고 또 실없이 웃어 보였다.

“나 왼손으로 운전해?”

“응.”

“가끔은 놓아야 돼.”

“그럼 대부분은 잡고 있어.”

이규가 웃더니 마주 잡은 손을 꾹 잡았다. 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차는 시원하게 앞을 향해 나아갔다. 공항 주변의 길은 모두 쭉쭉 뻗어 있었기에 종수는 꽤 오래 이규의 손을 맞잡고 있을 수 있었다. 차창 밖으로는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종수는 간만에 마주하는 한국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방금 지나간 표지판이 가리키는 목적지가 서울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이규.”

“응?”

“우리 지금 어디로 가?”

이규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너 부모님 만나러.”

“우리 집은?”

종수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 집’이라는 단어가 좋아서 이규는 웃음을 터뜨렸다. 기대를 하고 있었구나 싶어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이규는 제 욕심일지라도 종수를 꼭 부모님께 먼저 데려다주고 싶었다. 두 분이 얼마나 종수를 아끼는지도 알고, 종수가 두 분을 얼마나 의지하고 사랑하는지도 알았으니까. 실제로 이때까지 한국에 오던 종수의 첫 목적지는 언제나 부모님 댁이었다.

특히 공항에서 부모님이 기다리셔서 가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이상 더 그랬다. 그 말은 분명 상황을 빠져나오기 위해 둘러댄 말이기도 했겠지만……. 종수는 매번 진심이 조금이라도 담기지 않은 말은 하지 못했으니, 어느 정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게 분명했다. 종수는 진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 그냥 말을 않는 타입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이건 곧 근 10년간 매번 하던 일정을 바꿀 정도로 ‘우리 집’이 보고 싶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역시 종수는 귀여웠다. 이규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담뿍 묻어나는 것도 당연했다.

“부모님부터 봐야지.”

“집에 간댔잖아.”

종수가 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규가 다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여기서 또 웃으면 안 됐다. 자신도 종수를 데리고 경공법이라도 펼쳐 순식간에 신혼집에 당도하고 싶었으나, 이규가 생각하기에 이건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였다. 그러니 종수를 잘 달래고 졸라서 부모님 댁에 먼저 들리게 해야 했다.

“부모님 집도 집이지.”

그 말을 들은 종수는 조금 생각을 하나 싶더니 이내 다시 꿍얼거렸다.

“……엄마한테 내일 간댔는데.”

“아. 그랬어?”

“응.”

이규가 내비게이션을 봤다. 다행히 핸들을 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경로였다. 종수는 모르겠지만, 이규는 이미 어제 오후쯤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었다. 종수가 내일로 이 방문을 미뤘다는 건 그때 알게 됐다. 하지만 부득불 오늘 찾아뵙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보통이라면 종수의 말을 들어 무리하게 일정을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규는 종수를 내내 끼고돌고 싶었다. 적어도 한 며칠 동안은 집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고 싶었다. 열심히 꾸며둔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내내 제 손을 타게 해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사랑을 퍼붓고 싶었다. 이규는 그사이에 시간을 내서 종수네 부모님께 그를 보내줄 자신이 없었다. 조금 이기적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봐도 오늘만큼은 이 욕심을 참기가 조금 힘들었다.

“그래도 뵙고 가자. 일 년 만에 보는 거잖아.”

최고의 사윗감. 종수의 머릿속으로 그 단어가 또 스쳤다.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제가 다 감당해야만 하는 일 같았다. 이규가 종수를 다시 흘끗 쳐다봤다. 뚱한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별말이 더 없는 것 보면, 어울려 주려나 보다 짐작할 뿐이었다.

 

 

* * *

 

 

종수네 집에서는 저녁까지 먹고 왔다. 이규가 내일 데리러 올까? 오늘은 여기서 잘래? 라고 물었지만, 종수가 고개를 저었다. 종수네 어머니도 새집 기대될 텐데 거기에 가봐야지. 하고 등을 떠밀어 주셨기에, 둘은 함께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이규는 내내 종수에게 손을 내줬다. 종수는 그 손을 가만히 잡고 있다가, 또 만지작댔다가, 이규의 핸드폰을 가지고 와 이것저것 다른 노래를 틀어보기도 하고, 가끔 긴 신호가 걸릴 땐 먼저 뽀뽀를 하기도 했다. 이규는 그렇게 되면 꼭 다음 신호 때는 몸을 기울여 뽀뽀를 되돌려줬다. 종수는 노곤노곤하게 풀어진 마음으로 그 시간을 즐겼다.

대로를 달리던 이규의 차가 드디어 골목으로 들어갔다. 종수가 몸을 세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두워진 바깥 풍경으로 노란 가로등 불빛이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종수가 그제야 이규에게 물었다.

“우리 주택 살아?”

“응.”

이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수도 이내 수긍했다. 이규가 단독 주택도 괜찮아? 하고 물었던 것에 너가 마음에 드는 데로 해. 하고 답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너 안 그래도 잘 못 자는데, 아파트 들어갔다가 층간 소음에라도 시달리면 어떡해.”

“그런가.”

물론 종수는 어차피 집에서 가장 많이 움직이고 생활할 건 이규라서 그런 소리를 한 거였지만, 이규가 제 생각을 해주는 건 또 좋아서 순순히 대답했다. 이규만 있으면 제 불면증은 어느 정도 나아질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한강 뷰도 알아봤는데, 거기는 강에 반사된 햇빛이 너무 세서 힘들다더라.”

아침에 많이 깨고, 여름에 너무 덥대. 덧붙이기도 했다. 확실히 더운 건 이규에게는 쥐약이지 싶었다. 종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랑 한강 농구 코트도 같이 가고 싶어서, 거기는 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로 구했어.”

“좋네.”

그건 진짜 좋았다. 종수도 가끔 그냥 재밌기만 한 농구를 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농구를 많이 좋아했으니까. 그리고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 건 정말 좋았으니까. 이규도 그전까지는 그냥저냥이던 종수가 이 대목에서는 제법 반색하는 걸 느꼈다. 이규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를 냈다.

“잘했지.”

“응.”

“잘했으면 뽀뽀.”

종수는 조금 망설이다가 이규의 볼에 꾹 입술을 눌렀다 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규가 몇 개월이나 집을 구하러 다니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고, 인테리어 공사며 뭐며 바쁜 와중에도 이리저리 챙겨준 걸 알기 때문이었다. 뽀뽀 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 있었다. 이규는 거기에도 뭐가 좋은지 쾌활한 웃음을 터뜨렸다.

“종수.”

“응.”

“좋아해.”

“……응. 나도.”

운전 때문에 자신과 오래 마주하지 못하는 이규를 보고, 종수는 제법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손을 잡는 걸로도 어리광을 부렸다는 자각이 있어 애써 욕심을 눌렀다. 너무 어리광쟁이가 된 게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으나, 종수는 그 감각도 외면했다. 나잇값을 못 한대도 이규 앞이라면 괜찮았다. 집에 가면 안 떨어져야지. 종수는 자아 성찰 대신 이규라면 받아줄 게 분명한 행동을 속으로 다짐했다.

그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차는 차고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규가 능숙하게 핸들을 돌렸다.

“여기야?”

“응. 여기.”

이규가 시동을 끄고 정리를 하는 동안 종수는 단숨에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규가 차 뒷좌석에 있던 종수의 짐을 챙겨 그를 따라갔다.

“마당도 있다?”

종수가 담장 너머로 아직 어두컴컴한 집을 바라봤다. 뭔가 마음이 이상했다. 울렁거리는 속을 하고 종수가 옆에 있는 이규를 바라봤다. 켜진 대문의 센서 등 아래로 그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순간 이규가 종수의 눈앞에서 손을 쫙 펼쳤다. 그의 손가락에는 열쇠고리가 끼워져 있었다. 종수가 다시 대문을 봤다가, 이규를 보고 물었다.

“……우리 도어락 아냐?”

“맞아.”

“근데 웬 열쇠?”

“로망이지.”

“뭐?”

이규가 종수의 손을 끌고 와 손에 열쇠를 쥐여 줬다. 종수는 손바닥 위로 느껴지는 가볍고 미지근한 쇳덩어리를 느꼈다.

“나는 나중에 사귀는 사람이 생기면, 꼭 집 열쇠를 주고 싶었어.”

이규가 조곤조곤 말했다. 종수가 픽 웃었다. 그는 매번 현실적으로 굴다가도, 이상한 데서 혼자만의 로맨틱함을 추구하는 데가 있었다. 종수는 그게 좋았다.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괜히 이규에게 틱틱대고 싶어졌다.

“근데 왜 너 예전 집에선 안 줬어.”

“거기는 들어갈 때 여쭤봤는데 열쇠가 없다고 하시더라.”

“이번엔 있었어?”

“응. 안 그래도 나 그거부터 물어봤잖아.”

이규가 그사이 꺼진 센서 등을 다시 팔을 휘저어 켰다. 종수는 제 손에 쥐어진 열쇠 빤히 바라봤다. 열쇠고리에는 이규의 이니셜이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종수가 짧게 감상을 남겼다.

“누가 보면 나 LG 좋아하는 줄 알겠다.”

“연막이고 좋지 뭐.”

그러더니 대문을 터치해서는 비밀번호를 눌렀다. 역시 열쇠는 쓰지도 않았다……. 종수는 어이가 없었다.

“열쇠는 진짜 그냥 주는 거야?”

“응. 안 그래도 하나밖에 없대서 복사도 했어.”

“너 거도 있어?”

“당연하지. 내 거엔 너 이름 있어.”

그건 좀 만족스러웠다. 이규는 저의 것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놓은 느낌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이규의 뒤를 쫓으며 종수가 물었다.

“비번은 뭐야?”

“우리 사귀기 시작한 날.”

종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다운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말없이 이규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계단 아래에는 은은한 간접 조명이 있어 썩 어둡지는 않았다.

계단을 오르면 바로 현관문이 보였다. 왼쪽으로는 마당이 보였다. 마당에도 군데군데 조명이 박혀있었고, 제법 큰 소나무와 작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심겨 있었다. 뭔가 이름 모를 풀들도 좀 있는 것 같았는데……. 종수가 알아볼 수 있는 나무는 소나무 하나뿐이었다.

현관문 옆으로는 통창이 보였다. 통창 위로는 천막 같은 게 쳐져 있었고, 아래에는 간이 의자나 작은 테이블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천막 같은 걸 뭐라고 했더라. 어느새 멈춰 짐을 둘러보고 있는 종수를 보고, 그 옆에 선 이규가 입을 열었다.

“남향이라 빛도 잘 들어.”

“저 천막 같은 거 뭐라고 했지?”

“어닝?”

“아. 맞다.”

종수가 짧게 대답하고는 발을 내디뎌 잔디를 밟았다. 폭신한 땅의 감촉이 신발 너머로도 느껴졌다. 이규가 뒤따르듯 함께 서서 말했다.

“나 잔디도 열심히 물 줬어.”

“앞으로도 너가 줄 거야?”

“너가 주게?”

이규가 장난스레 물었다. 종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잔디 가꾸기에 대한 악명은 미국에서 지겹게 들었었다.

“잔디 스트레스 심하댔어.”

“내가 돌보라고 할까 봐 걱정돼?”

“나는 못 해도 너는 잘하겠지.”

당연한 거절을 한 번 더 내뱉은 종수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마당의 끝에 가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규가 종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함께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가 제일 높아서, 주변에선 안 보일 거야.”

“응. 그렇겠다.”

종수가 다시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봤다. 빽빽하게 불을 밝힌 도시는 부산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이규와 함께 있는 이곳만큼은 시간이 참 고요하고 더디게 가는 것만 같았다. 종수가 집에 오는 내내 잡고 있던 이규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규가 당연한 듯 깍지를 끼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종수를 확 끌어당겼다. 종수가 몇 발짝 끌려가서는 이규와 몸을 맞대고, 그가 건네는 입맞춤을 받아냈다. 이제는 제 몸을 껴안은 이규를 보고, 종수가 눈썹을 까닥였다.

“……너 이러려고 마당 잘 안 보이는 데 골랐어?”

“당연하지.”

“밝히기는.”

“좋아하면서.”

그 말에는 종수도 별다른 반박을 못 했다.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조금의 짜증을 담아 이규의 엉덩이를 꽉 쥐었다. 이규가 종수를 더 힘주어 끌어안고, 키득대며 덧붙였다. 이마가 맞닿았다.

“여기 가을에 돗자리 하나 펴놓고, 같이 누워서 하늘 보면 너무 좋겠지.”

“……응.”

“마당에 불도 다 끌 수 있거든? 별도 보일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종수가 고개를 꺾어 하늘을 바라봤다. 지금은 달 정도밖에 보이는 게 없었다. 이규도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다, 종수의 턱 끝에 다시 입을 맞췄다.

“안 보이면 종수 너나 보지, 뭐.”

“나도 안 보일 것 같은데.”

“그럼 뭐 어두운 데서 야한 짓이나 좀 할까.”

능글거리는 말에 종수가 이규를 퍽 밀쳤다. 이규가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레 손을 뻗어 종수의 손을 다시 맞잡았다. 이규가 현관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어두우니까 마당은 내일 마저 보자.”

“그래.”

“밝으면 더 예뻐. 봄엔 꽃도 핀대.”

“너가 심은 건 아니고?”

“응. 이건 이 집 살 때부터 있었던 거.”

이규는 종수가 아쉬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좀 더 단단히 잡고 덧붙였다.

“내년엔 같이 심자.”

식물 같은 건 키울 생각도 없었지만, 이규의 옆에서 능숙한 손길을 보는 건 제법 즐거울 것 같아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문 앞에 선 이규가 다시 비밀번호를 눌렀다.

“비밀번호 똑같아?”

“응. 똑같아.”

이규가 현관문을 연 후, 종수 보고 먼저 들어가라는 듯 비켜섰다. 종수가 아직은 컴컴한 현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반짝. 센서 등에 불이 들어왔다. 종수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따라온 이규가 성큼성큼 걸어가 스위치를 눌렀다. 종수는 갑자기 확 밝아진 실내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가 주변을 찬찬히 둘러봤다.

전반적인 화이트 톤에, 우드톤이 적절하게 섞인 따뜻한 인테리어였다. 곳곳에 이규의 집에서 보던 큰 식물들이 섞여 있기도 했다. 익숙한 가구들도 좀 보였다. 이규는 종수의 짐가방을 대충 소파 옆에 두고는 에어컨부터 켰다. 그러고는 거실과 주방을 소개한 뒤, 손님방, 드레스룸, 그리고 침실과 욕실까지 차례로 선보였다. 방을 돌아다니는 내내 잡은 손을 놓지 않은 건 덤이었다.

“집 어때? 마음에 들어?”

“되게…….”

“응.”

종수는 전에 이야기 나눴던 대로 방 중앙에 놓인 킹사이즈의 침대를 보고, 또 이규의 어깨 너머로 누가 봐도 190cm 이상의 남성 둘이 들어가기에도 넉넉한 욕조가 있던 욕실을 흘끗 보고, 기대감 어린 눈을 하고 있는 이규를 다시 마주했다. 이규가 사진으로 가구나 욕실 타일이나, 공사 중인 사진 등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딜 가나 이규가 보이는 듯했다. 그동안 나눴던 이야기들이 집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먼저 들어와 살며 여기저기 손을 대서 그런지 그가 살던 집 특유의 느낌이 나는 것도 좋았다. 지금은 밤이라 잘 모르겠지만, 포근하고 따스하고, 또 해가 들이치면 화사할 집인 게 확실했다. 종수는 이 모든 마음을 담을 말이 뭐가 있나 고민하다가, 결국 짧게 답했다.

“너 같다.”

이규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되물었다.

“좋다는 뜻이지?”

“응. 좋아. 마음에 들어.”

종수로서는 드문 세 번의 긍정에 이규가 활짝 웃으며 종수를 끌어안았다. 종수가 이규의 목에 팔을 감고 체중을 실었다. 이규가 단단하게 버티고 서 종수의 무게를 견뎠다. 이규는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종수는 이런 데 무디다는 것도 알고 있고, 중간중간 그와 의견을 나누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종수도 이 공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다……. 작게 읊조린 이규의 말에 종수가 이규의 귀를 깨물었다. 그러고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욕실이랑 침대 개시하자.”

이규가 종수를 따라 속삭였다.

“어떻게 개시해.”

“같이 씻어.”

“그리고?”

“하자.”

이규가 키득거렸다. 물고 빠는 건 내일부터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하고 싶어?”

종수가 다시 이규의 귀를 깨물었다. 이규가 아! 항복! 하고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연신 질문을 퍼부었다.

“언제부터 하고 싶었는데?”

종수는 답 없이 이규의 귀를 계속 씹어대기만 했다. 이규가 질척한 소리를 들으면서 종수를 계속 채근했다. 종수가 끈질긴 재촉에 이규의 등을 퍽 때리고는 결국 답을 내놓았다.

“……너 봤을 때부터.”

이규는 온몸에 털이 쭈삣 서는 것만 같았다. 제 품에 안긴 종수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랬다. 이규가 종수의 귓가에 연신 입을 맞추며, 그를 더 힘주어 껴안았다.

“너 오늘 도착했는데 안 피곤해?”

“너랑 뒹굴 체력 정도는 남아 있어.”

하하. 경쾌하게 웃은 이규가 종수를 번쩍 들어 한 바퀴 돌렸다. 원래 자리로 와 다시 사뿐히 바닥을 밟은 종수가 어이없다는 듯 상체를 뒤로 물리고, 헤실대는 이규를 보며 핀잔을 줬다.

“너, 이 힘 침대 위에서나 써.”

“왜. 내가 원하는 만큼 못 해 줄까 봐 걱정돼?”

“그건 아닌데.”

“그럼. 응?”

이규가 종수를 안은 채로 몸을 잘게 흔들었다. 종수가 진정하라는 듯 이규의 등을 가볍게 팍 때렸다. 이규는 그 정도 타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냥 엄한 데 힘 빼지 말라고. 나 가볍지도 않은데.”

“애인의 무게 정도는 감당해야 남자지.”

허.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은 종수에게 이규가 다시 입을 맞췄다. 종수는 입맞춤으로 이 대화를 얼버무리려는 이규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규는 혀가 깨물리면서도 뭐가 좋은지 연신 웃기만 했다. 거기에 또 이상하게 열이 받은 종수가 이규의 머리를 꾹 누르고, 고개를 비틀어 그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쪽쪽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하던 침실에 이내 질척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기]

드디어 다음부터는 ^ㅡ^

근심 걱정 없는 저의 자신있는 김.찌.를 선보여드릴 수 있게 됩니다!

(다음편 부터 완결까지 한...?편 제외하고는 모두 성인본일 거라는 소리ㅎ...)

이번 편도 쓰는 내내 너무 염병천병 같아서 이게 과연 맞는 건지... 하루에도 골백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이마를 쳤습니다만... 맞는 것 같아가지고요...

그냥 규쫑에 지독한 패배감 느끼는 후죠시 됨.......

다음편도 열심히 써올게요! !! 아좌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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